이 세상에 난 것만 해도 고맙게 생각을 하세요, 모두.

눈 뜨고 여여하게 그대로 참선이 돼야 하고
눈 뜨고 일하면서 행선이 돼야 하고
그냥 앉았을 때는 좌선이 돼야 합니다

(지난 호에 이어서)
그래서 여러분이 오면 나는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아파서 오는 사람은 아픈 걸로 재료를 삼아서 공부하고, 가난해서 오는 사람은 가난을 재료로 공부하고, 또 배신을 당하고 서로 이렇게 엇각이 나는 사람은 그걸로 재료를 삼아서 공부하고…. 그러니까 천차만별로 여러분은 갖은 각색의 재료를 다 가지고 오시는데 그 재료를 가지고 오시는 대로 공부하시면서 또 집안에서 용도에 따라서 생기는 재료들을 고맙게 생각하고 그 재료 가지고 공부하세요. 그러면 그것이 실험이 되고 체험이 되고 그럴 때 바로, 하나하나 탑이 쌓아 올라져 갈 때 나중에는 물리가 탁 터지면 봉우리 하나 척 올려놓는 격이라. 봉우리 하나 척 올려놓는 게 돈오라 한다면 쌓아 올라가는 게 점수야.

그러니 모두 여러분이 공부하는 데 착오가 없이 건강하게, 거기다가 맡겨 놓고 거기서만이 할 수 있다고 생각을 하고 감사했을 때 벌써 마음이 편안해져. 왜냐하면 한마음으로 돌아가니까 마음이 편안하지. 공장에 데모가 나고 이런다면 그거 편안하겠소? 그런데 아주 잔잔히 일을 잘하고 자기 마음대로 돌아가니까 얼마나 편안하겠소. 몸 건강해지니 좋지, 가정이 화목하게 돌아가니 좋지, 돈이 달아나가지 않으니 좋지.

항상 우리가 웃고 울고 이런 게 없이 스스로서 그 마음을 당당하게 둘 수 있는, 여여하게 둘 수 있는 그런 삶을 살아나갈 때 그게 바로 자유인이라. 말로만 자유인이 되는 길이라고 해 놓고 실천이 안된다면 그것은 허망한 거다 이거야. 내일 천당에 가려고 믿고 그렇게 하지 마시고 과거의 부처를 따라가려고 애를 쓰지도 말고, 현실의 여러분 부처들이 생각을 해서 법신이 되고 화신이 되고, 여러분이 갖은 각색으로 다 되는 거니까. 아플 때는 의사가 되고, 좋은 데로 못 갈 때는 바로 지장이 되고 명이 짧을 때는 칠성이 되고, 물에 가서 고생을 할 때는 용신이 되고 길을 걸어갈 때 잘못되는 일이 있으면 지신이 되고, 모두 여러분 한 분이 천차만별로 화할 수가 있는데 그 도리를 모른다면 여기 갖다 놓고 빌고 저기 갖다 놓고 빌고 귀신 단지, 귀신 집이 되는 거죠.

그러니 그렇게들 해서 몸 건강하게 고치고 자기가 자력으로서 고쳐 나가면서 가정을 튼튼하게 해 나가면서, 또는 남도 한생각을 내서 건져 줄 수도 있고…. 내가 건져 줬다고 으시대는 그런 마음 없이 말이야. 그리고 한번 지켜보면 그것이 바로 실험이 되고 체험이 되는 거니까. 무당이 굿하는 것도 한번 실험하기 위해서 ‘안 돼! 너흰 그렇게 해선 안 돼.’ 하면 하다가도 다 헤어져 버려. 그렇게 무서운 도리야, 이 도리가. 자비한 도리요, 법이야, 아주.

마음이 편안하고 마음이 고상하고 마음이 당당하면 어딜 가서도 당당한 거고 겁이 나질 않아요. 어느 점쟁이가, 무꾸리쟁이가 아주 용하다고 그래서 우리 신도 하나가 공부하기 위해서 거길 갔대요. 그랬더니 말을 영 못하고 “아후, 선생님! 선생님이 날 좀 가르쳐 줘요.” 오히려 그러더라는 거야, 가만히 앉아 있으니까. 아, 그래서 그냥 깜짝 놀라 가지고선 아, 뭘 가르쳐 달라느냐고, 내 점 보러 왔으니까 봐 달라고 그러니까 못 봐 주겠다는 거지. 여기에서 말이 안 나온다 이거야, 지레 눌려서. 그러니까 그런 타의에서 오는 영계성이나 유전성이나 세균성이나 이런 문제 등등 모든 것들도, 바깥에서 오는 것도 커버할 수 있는 우리의 마음, 한마음의 도리다 이거야.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 믿으면서 불상에다 뭐를 해 달라고 비는 게 우리 불교가 아니다 이거야. 이 불교라는 것은 끝 간 데 없는 진리예요. 이거는 너무나 광대무변한 법이다 이거야. 그러니 그렇게 빌러 다니는 것만이 불교인 줄 알지 말라 이거지. 어느 한군데 치우쳐진 국한된 종교가 아니다 이거야, 불교는. 그래서 예수교인이나 가톨릭교 교인들한테 이런 말을 했죠. “당신, 영원한 생명의 근본이 있소?” 그러니까 있대. “그럼 지금 말하고 있죠?” 그렇대. 그게 불교다 이거야. 그러니 당신네들도 불교 아닌 사람이 없는데 당신네들 종교의 이름을 가지고서 당신네 전부라고 그러지 말라 이거야. “당신도 불교고 당신도 불교고 풀 한 포기도 전부 불교 아닌 게 없다. 그게 잘못된 거라면 항의해라!” 그랬어. 그랬더니 항의 하나도 안 하데요.

우리가 지금 지수화풍으로 바탕이 돼 있기 때문에 모두 지수화풍을 먹고 살죠? 지수화풍 아니었더라면 우리가 지금 이렇게 말도 할 수 없죠. 지수화풍 아니었더라면 이렇게 붙어서 딛고 다니지도 못해요. 만약에 떨어진다 하면 날아서 돌아가기 때문에. 안 그런가요? 그렇기 때문에 감사히 생각해라. 내가 이 세상에 난 것도 감사히 생각해라 이거야, 허망하게 생각하지 말고. 이 세상에 났으니까 고생도 하고 아파도 보고 별짓 다 해 보고 별것 다 보고 별생각 다 해 보고, 그러기 때문에 내 차원이 높아져요, 그걸 전부 경험을 하기 때문에. 그래서 요다음 세상에 다시금 내가 나올 때는 정말이지 자기가 자유스럽게 나올 수 있는 그 만물의 영장이 될 수 있다 이거야.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과정을 높이기 위하고 우리의 과정을 익히기 위해서, 무르익혀서 맛이 나게 하기 위해서 사람으로 태어났다는 걸 생각할 때 얼마나 감사하냐 이거야. 고생하는 거를 갖다가 허물치 말라 이거야. 왜냐하면 고생하는 것도 그것이 외려 덕이다 이거야. 모든 것을 생각하게 되고 어려운 사람을 알게 되고, 죽어 가는 사람을 알게 되고 아픈 사람의 괴로움을 알게 되고, 가난한 사람의 경험을 알게 되고, 모든 경험을 하기 때문에 지극한 그 마음속에서 용솟음치는 그 용광로는 모든 것을 생산해 낼 수 있는 그런 의욕과 그런 능력과 그런 것이 부여된다 이거예요. 잠시 잠깐, 이래도 한세상 저래도 한세상 살 거를 그런 것이 언짢다고, 그런 것이 괴롭다고 그렇게 살 필요가 없죠. 몸뚱이는 가을 잎과 같아요. 가을이 되면 이파리가 낙엽이 져서 떨어지죠. 떨어졌다고 해서 뿌리마저 죽나요? 그렇듯이 인간의 뿌리는 영원한 것이니까 말이에요.

그러니 내 몸이 없었더라면 어떻게 그런 경험을 하면서 어떻게 차원을 올리고 내릴 수 있으며 그 만사만생의 경험을 어떻게 다 할 수 있으리까. 죽어 가는 사람을 볼 수 있으리까, 살아나는 사람을 볼 수 있으리까, 굶는 사람을 볼 수 있으리까. 자기가 그런 경험을 안 해 보고야 어찌 이 세상의 모든 삼라만상의 뜻을 알겠습니까? 오히려 복된 사람이 가난한 생활을 하게 되고 고생을 하게 되는 거예요. 고생을 하고 사는 사람도 한세상, 부자로 사는 사람도 한세상이다 이거야. 그런데 자기 몸뚱이도 버리고 가는 거를, 무엇을 바라겠소? 이렇게 살고 한 세상 가는 거나 저렇게 살고 가는 사람이나 똑같지만 그 고생하고 괴로움을 겪고, 그 모든 것을 보고 그렇게 한 사람은 경험을 많이 얻어서 남을 지배할 수 있고 남을 리드할 수 있고 고생하는 사람에게 밥을 줄 수가 있고, 고생하는 사람 불쌍하게 생각할 수 있고 병고에 휘달리는 사람을 마음으로라도 뜨겁게 생각하고 눈물 흘려 줄 수 있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이다음에 대통령으로도 태어날 수 있어. 대통령도 아무나 되는 게 아니거든. 그런 경험을 다 쌓아 본 사람들이나 이 세상에 나와서 대통령 노릇을 할 수 있어요.

석존이 이 세상에 나오기 이전에 ‘너는 석가가 돼라! 그런 재목이 되는구나.’ 이런 거 가지고 이 세상에 나왔거든. 오늘 없는 내일은 없거든. 그러니 누구한테 따귀를 맞는다 하더라도 남의 탓을 하지 말라 이거지. 만약에 언덕이 없더라면 소가 가다가 그 언덕에 비빌 수가 없거든. 내가 만약에 그 언덕이라면, 언덕이 있으니까 소가 비볐지 언덕이 없고 평전인데 어떻게 소가 비비고 갈 수 있나.

그렇듯이 내가 있기 때문에 그런 참 어려운 고비를, 어려운 아픔을 당하게 되는 이런 문제도 많이 있죠. 배신을 당할 수도 있고. 그럴 때에 그 상대방 탓이 아니라 내 탓이라고. 그렇게 하는 사람은 자기 탓으로 또 그렇게 받을 거고 그건 상관할 필요가 없다 이거야. 나한테 잘못한 것도 그 사람 탓을 하지 말고 그걸 상관할 필요가 없다 이거야. 그건 그것대로 자기가 한 대로 하는 거니까. 아주 영원한 컴퓨터에 탁탁 입력이 돼 들어가니까 말이야. 그러니까 나는 거기에 상관할 거 없다 이거야.

그러니 내가 있는 탓이다 이거야.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탓으로 돌려라 이거야. 그래야 모든 게 풍족해지고 물리가 터지고 세상만사를 다 리드해 나갈 수 있는 포용력이, 두 팔을 벌리면 이 우주 천하가 다 들어올 수 있는 그런 포용력이 생기게 돼. 사람은 눈 깜짝할 사이에 늙어 죽어요. 그러면 얼마 안 가서 이 세상에 다시 나오게 돼. 그래서 그런 사람이 다시 나오게 되면 그때 대통령으로서 출마한다고. 그러니 있고 없는 거, 이런 거? 그 쓰라림을 당하는 거, 잠시 잠깐이야. 눈 깜짝할 새야. 그런데 왜 괜히…, 골이 비었나? 걱정 근심하고 괴롭게 살게. 골 비지 않은 사람은 그런 거 걱정할 필요가 없어. 허허허, 얘기해 드렸으니까 인제 아시겠죠?

질문자2(남) 예, 감사합니다.

큰스님 그 말 한마디 때문에 그냥 뱃속까지 다 얘기가 나왔잖아! 하하하.

지금 우리 여러 가지, 알라신교나 남묘호랑개교나 티베트 불교나 보통 한국에서 믿는 불교나 가톨릭교, 기독교나 막론해 놓고, 부처님께선 그렇게 가르치지 않으셨거든. 역대 조사들도 그렇게 가르치지 않으셨고. 왜냐하면 깨달음에 통달을 하면 바로 부처님의 골수라, 모습은 다를지언정.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한자리라. 그래서 모두 똑바로 가르쳐 주셨는데 근래는 도대체 중들이나 기독교인 가톨릭교인 그런 사람들이 전부 돈 중독이 들렸어. 아니, 그렇게 해 가지고 가리지 않아. 신도 몇몇 이렇게 세어 가지고 팔아먹는 세상이야. 또 불교도 봐! 그냥 무슨 일이 하나 있으면 주욱 놓고, 거기 전부 놓고 빌게끔 만들어 놨거든.

어느 스님은 벽에다가 그냥 위패를 쫘악 해 놓고 불을 켜 놓고, 벽에다가 하는 그것도 모자라서 집도 그냥 무지하게 크게 하고 벽마다 쭉 붙여 놨단 말입니다. 그저 큰스님이라고 하는 분들이 그러거든. 있을 수가 없지, 그거. 아까 얘기했듯 우리가 물질을 가지고 하나하나 다투면서 그걸 잘하려고 해 놔도 그 물질이 얼마나 가겠소? 내 몸뚱이도 얼마 안 가는데 그거 해서 붙여 놓은 게 얼마나 가겠느냐고. 그런데 오히려 위패를 해서 붙여 놓았지. 한 찰나에 미국을 오고 한 찰나에 한국을 나가고 한 찰나에 우주 바깥을 벗어나서 돌아야 하는데 그렇게 매달아 놓으면 그게 되겠어? 뭐가 돼, 그게? 항아리 속에 넣고서 그냥 뚜껑 딱 덮어 놓으면 구더기밖에 더 슬어? 안 그럴까요? 이치로 따진다면. 내가 잘못된 말 했으면 누구라도 오라고 그래요.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그 절에 사람이 있으면 부처가 있고 그 절에 사람이 없으면 부처가 없느니라. 그 절에 가서 꼬락서니를 보면 부처가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있느니라.” 그래서 사람이나 모든 식물이나 이런 것도 떡잎부터 알아본다잖아. 또 질문할 사람 없어요?

질문자3(남) 자력 신앙으로서 주인공을 믿고 물러서지 말라는 큰스님의 말씀, 대단히 감사합니다. 제가 하나 궁금한 거는요, 오신통에 대해서 말씀하시는데요, 그 오신통에 또 하나, 누진통을 말씀하시거든요. 그러면 오신통에다가 누진통을 합하면 육신통이 되는 건지, 아니면 전체를 또 하나로 보는 건지요. 그다음에 그 오신통에서 무엇을 먼저 발견하게 되는지 한번 말씀을 해 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이상입니다.

큰스님 예. 그럼 그렇게 해 봅시다. 지금 우리가 이 몸뚱이 육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 말씀하신 거와 마찬가지로 오신통을 하면 육신통이 아주 제법 맞춰진 거죠. 구미다데(組立)가 딱 된 거죠. 이런 소리밖에는 할 수 없네. 하하. 그래서 우리가 ‘오신통’ 하면 벌써 이 심안으로 보는 걸 말합니다. 그러니 전체 탐험할 수 있는 겁니다. 어떤 때는 “스님, 여기 여기 구경 좀 갑시다.” 그래서 내가 그걸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 “전 보고 왔는데요.” 그러니까 “그럼 보고 왔으면 스님네들도 다 보고 오셨어요?” “다 보고 왔지.” “아이, 그럼 스님, 그 어디 어디 말씀 좀 해 주세요, 보고 온 대로.” 그러면 얘길 주욱 해 준단 말이야. 그러면 다녀온 줄 알죠. 다녀왔죠. 한 찰나에 다녀왔단 말입니다, 그 사람이 말하는 순간에. 그러나 그것도 도가 아니라고 그랬어요. 그러니 보는 것도 도가 아니니라. 그러니까 만약에 지구가 어떻게 어떻게 돌아다니는지 아는 것도 보는 건데, 이것도 한쪽만 보는 게 아닙니다. 달나라에 갔다 하면 전체를 보죠. 그러나 보는 것도 도가 아니라 했어요.

요거 인제 천안통을 말했고, 또 한 가지, 신족통이 있다 이럽니다. 신족통. 이 몸, 모습 없는 그 마음의 모습, 즉 말하자면 “가고 옴이 없이 가고 온다 하더라도 도가 아니니라.” 또 얼른 쉽게 말해서 타심통. “남의 속을 뻔히 다 알아도 그건 도가 아니니라.” 요 세 가지 했죠? 그리고 숙명통, “과거를 전부 안다 하더라도 도가 아니니라.” “이 세상을 두루 듣는다 하더라도 도가 아니니라.” 이 다섯 가질 다 도가 아니라고 그랬습니다. 왜 그러냐. 만약에 지금 이게 통이라고 합시다. 이 인간의 혹성, 혹성이에요, 이게. 그 혹성에서 바깥으로 벗어나야 혹성을 굴릴 수가 있거든. 이게 도예요.

(산회가가 끝나고)

모든 불은 하얀 눈으로 온 누리를 덮고
골짝마다 물 녹아 흘러내리는데
높은 산봉우리에는 칡뿌리 두루 뻗어 나고
눈 위에 칡꽃이 만발했네
칡꽃에 오고 가는 말이 없이
사랑의 씨를 서로서로 뿌리며 거두네
우리 모두가 한마음에 전달되니
우리는 앞으로 여여하게 떳떳하게 살리라

감사합니다.

사회자 그러면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 스님께 삼배….

큰스님 아니, 삼배 필요 없어. 그냥 앉아서 해. 감사합니다. 이 절하는 건요, 이 손을 한데 모으는 거는 마음을 한데 모으자는 뜻이요, 절하는 거는 자기를 겸손하게 만드는 절입니다. 자기 주인공에, 주처에 자기가 절해서 자기의 마음을 겸손하게 만들고 자기를 익혀서 고개가 숙게 만드는 그런 방편입니다. 그러니 나한테 절하는 게 아니요, 저 형상한테 절하는 게 아닙니다. 그것을 잘 아셔야 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러면 귤들 잡수시죠.

신도(여) 스님, 노래 잘하신다 소리 들었는데. (대중 웃음)

큰스님 지금 노래했잖아. 지금 내가 노래하고 끝마쳤잖아. 여기 잘하는 분들이 많은데 예전에 가수로 유명하던 분들이 이렇게 나와 앉으셨거든요. (대중 웃음)

여러분이 공부해서, 현실의 의식은 자(子)요, 무심의 의식은 바로 영원한 자기의 그 부(父)라. 그래서 부와 자가 상봉을 하면 여여하게 우리가 이 세상을, 무의 세계 유의 세계를 합류화시켜서 중도로서 중용을 할 수 있는 그런 여여한 자유인의 생활을 그대로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승천이라고 할까 부활이라고 할까. 살아서 못하면 죽어도 없어. 허허허.

그래서 옛날에 선지식들이 말씀하시기를 “눈 뜨고 푹 3년만 자거라.” 이랬어. 그리고 또 “눈 뜨고 바로 성불을 해야지 눈 감고 어디를 본다 어디를 본다 하는 건 전부 허깨비들이다.” 이런 말씀을 하셨거든. 그러니까 눈 뜨고 여여하게 그대로 참선이 돼야 하고, 눈 뜨고 일하면서 행선이 돼야 하고, 그냥 앉았을 때는 좌선이 돼야 한다. 마음이 편안해야 좌선인 거지, 마음이 편안치 못하고 어떻게 좌선이 될 수 있겠나? 그러니까 마음이 편안하면 서서도 좌선이요, 일하면서도 좌선이요, 모두가 좌선이라. 망상은 망상이 아니라 성장시키는 과정이다 이런 거지. 그러니까 망상을 끊으려고 하지 말고 용광로에 넣듯 다 한꺼번에 한데 한군데다 넣으면 그것이 바로 용광로에 넣는 과정, 즉 말하자면 이 공부를 하는 데 과정, 무심 속으로 들어가는 과정이야. 그래서 살아서 열반을 하는 거지, 죽는 게 열반이 아니다 이거죠.

그러니까 여러분이 될 수 있으면 공부 열심히 하셔야 합니다. 지난번에 L.A.에 가서 개원식을 하는데 한 200명 300명, 전부 치면 그렇겠죠. 공부하는 사람들과 안 하는 사람들이 전부 모였으니까. 그랬는데 지금 그 사람네들이 공부를 어떻게 잘하고 가는지 그건 뭐 말도 못하겠어요. 그래서 마음으로 그렇게 만날 싸우고 그러던 집이 화목해지고 그렇게 착해질 수가 없었어. 이탈을 하고 그러던 아들들이 공부 잘하고 속 안 썩이니까 그렇게 좋아서 눈물들을 흘리는 거야.

그래서 값비싼 눈물을 흘려야지 값싼 눈물을 흘리지 말라. 인생으로 태어나서 그냥 갈 수는 없다. 이 도리를 알고 가야 한다. 이거는 어떠한 종교를 막론해 놓고, 다 제치고 진리야. 우리는 진리를 공부하는 거야, 지금. 이름이 소용없어. 말이 무슨 소용 있나. 우리가 지금 이론과 지식과 학식, 상식 이런 거 가지고서 이 공부 하는 게 아니에요. 그런 걸 다 놔 버리고 난 후에 이 나를, 부와 자가 상봉을 한 그 반면에 우리는 둘이 아닌 도리를 배우면서 그 상식과 지식을 거기에 부합해서 쓰는 거지. 이 도리, 알을 낳고도 병아리 못 까는 건 소용없다고. 안 그래요?

그러니까 우리 잘 생각해 봅시다. 허허허, 내가 말해 놓고도, 허허 참…. 어서 잡수세요, 잡숫고 이젠 늦었으니까 가셔야 돼요. 가는 것도 없이 가고 오는 것도 없이 오셔야 참 좋습니다, 세상 살기. 천국이라고 생각하면 천국이고 지옥이라고 생각하면 지옥이야. 이 세상에 난 것만 해도 고맙게 생각을 하세요, 모두. (시자 스님에게) 나 혼자만 심심하게 앉아 있으라는 말 마라. (대중 웃음) 얼른얼른들 모두 잡숫고들 가세요. 늦었으니까 이제, 주무셔야 또 내일….

신도(여) 저희들이 항상 금요 정진 12시까지 했어요. 그러니까 아직 멀었어요.

큰스님 아이, 오늘 가, 어서. (대중 웃음) 댁들이 앉아 있으면 그냥…. 이거 봐! 일분일초라도 올바로 앉아 있으면 그게 참선이지만, 괜히 시간 보내고 몇 시간씩 좌선하는 건 좌선이 아니야. 옛날에 그런 예가 있잖아. 좌선을 앉아서 꾸부러뜨리고 하고 있으니까 스승이 참 답답해 죽겠거든. 그래서 너 앉아 있걸랑은 아주 앉아 있어야지 이 진리가 끊어지지 않지, 만약에 밥을 먹으려고 일어나거나 똥을 누려고, 오줌을 누려고 일어나면 진리는 끊어진다 이랬거든. 그런 거와 마찬가지로 앉고 서고 먹고 싸고, 웃고 즐기고 울고 하는 게 전부 참선이야. 생활 떠나서 무슨 종교가 있어?

난 그래서 항상, 불교에서 기독교로 시집을 가든 장가를 가든 거기 강당에서도 바로 네 주처를 먼저 알아라 이거야. 그럼으로써 상봉의 길이 나오지 그렇지 않으면, 상봉의 길이 나오지 않는다면 자기 영혼도 못 건져. 어려워. 그냥 뭐 말로만 왔다 갔다 그러면 그게 어디 제자라고 할 수 있으며 불제자라고 할 수 있나. 종교인이라고 할 수가 없지.

그러니까 잘 알아서들 하세요. 자유야. 다 안 와도 그만이고, 다 와도 그만이고. 그것은 자기네들 위해서 자기네가 하라는 거지, 내가 뭐 하러 춤추고 다니겠어.

어서들 잡숴요. 어서들 잡숫고 잡숫지 못한 게 있으면 들고 가요. 주머니 넣고 가요. 그래. 댁도 주머니에 넣고, 자! (대중 웃음)

사회자 스님께서 일어나셔야 신도들도 일어나겠는데요.
큰스님 그래, 나 일어날게. 여러분, 안녕히 가십시오.

※위 법문은 대행 스님께서 1990년 12월 7일 뉴욕지원 법회에서 설법하신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한마음선원 홈페이지(www.hanmaum.org)에서도 같은 내용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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