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결사를 말하다

▲ 2007년 10월 19일 봉암사에서 열린 ‘봉암사 결사 60주년 법회’의 모습. 결사는 ‘부처님 법대로 살자’는 변화의 원력이 담긴 몸부림이다. 현대불교자료사진
보조·성철 스님 등이 결사한 이유는
“이대로 안 되겠다”는 문제의식 때문
결사 근본은 “부처님 法은 무엇인가”
佛法대로 수행·운력했던 봉암사 결사
‘부처님 법대로 살자’ 보인 실천 도량

2017년은 원효 스님 탄신 1400주년이 되는 해이면서, 동시에 봉암사 결사 7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원효 스님 탄신 1400주년을 맞이하는 움직임은 이미 여러 곳에서 감지되고 있다. 우리 불교 학술 단체들이 제일 앞을 달리고 있다. 그런데, 봉암사 결사 70주년에 대해서는? 나는 아직 크게 이야기를 들은 바 없다.

2016년 9월, 그동안(‘그동안’은 사반세기, 즉 25년이었다) 붙들고 있었던 결사 주제의 논문 7편을 묶어서 책을 펴냈다. 그 결과물이 <결사, 근현대 한국불교의 몸부림>이다.

책 속에 이미 봉암사 결사에 대한 긴 글이 포함되어 있다. 그것은 ‘봉암사 결사의 윤리적 성격과 그 정신’이라는 제목으로 10년 전 2007년 조계종 교육원 불학연구소 주최의 60주년 기념세미나에서 발표한 것이었다.
그 글은 무엇보다 결사의 청규(淸規)라고 할 수 있는 ‘공주규약’을 윤리적인 측면에서 고찰한 것이었다. 나는 봉암사 결사에서 참으로 중요한 것은 윤리적 측면이라고 보았다. 결사의 주창자인 퇴옹(退翁, 성철) 스님이 하신 말씀, “부처님 법대로 살아보자”라는 것은 윤리적인 측면에서 부처님 가르침대로 살아보자는 제안과 다짐에 다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제안 중에서 의미 깊은 것은 노동의 문제였다. 노동은 중국 선종에서부터 총림의 일상생활의 핵심으로 중시되었다. 백장(百丈) 스님의 말씀처럼,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말라”는 것은 오랫동안 수행자들 삶의 원칙이 되었다. 그러한 전통은 봉암사 결사 이전에도 맥맥히 이어져 왔다.

보조지눌의 정혜결사도 그랬고, 학명(鶴鳴)의 내장사 결사나 용성(龍城)의 망월사 결사에서도 그랬다. 모두 노동을 했다. 선을 하면서 노동을 했고, 노동을 통해 선을 닦았다. 노동을 한다는 것은 다른 말이 아니다. 수행자 스스로를 낮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봉사하겠다는 다짐이다.

부처님 법에 따르면서 노동을 하고, 스스로를 낮추면서 선을 닦았다. 그런 봉암사 결사도 이제 70년이 되었다. 60주년 당시에 우리는 한번 돌아볼 수 있었다. 그로부터 다시 10년이 지났다. 과연, 우리는 지금 부처님 법대로 살고 있을까? 기억하기 위해서는 되돌아보고 의미를 찾아야 한다. 

결사는, 결사를 묻는 것이다
그런데 봉암사 결사는 옛날의 결사일 수 만은 없다. 결사는 현재도 행한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자성과 쇄신 결사’다. 내 책 <결사, 근현대 한국불교의 몸부림> 서평회 자리에서도 그랬다. “‘자성과 쇄신 결사’이야기를 좀 더 해야 하지 않는가”하는 문제제기가 있었다. 그랬다. 지금 행해지는 결사를 외면하고, 옛날에 있었던 결사만 말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다시 이 문제를 생각해 보게 되는 계기가 또 있었다. 지난 11월 19일의 일이었다. 보조사상연구원 이사회를 마치고 점심 공양을 하는 자리에서다. 우리 불교사 연구의 권위자인 C교수님께서 내 책 이야기를 끄집어 냈다.

“김호성 교수, 이번에 나온 책을 보니까, ‘자성과 쇄신 결사’에 대해서도 있던데, ‘자성과 쇄신 결사’는 결사가 아닌데 왜 그것까지 이야기했어요?”

의문형으로 끝나도 질문이 아니다. 비판이다. 사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 책임이 내게 있는 것은 아니다. 물론, 나로서도 대답을 하긴 해야겠지만 말이다. ‘자성과 쇄신 결사’ 자체가 대답해야 한다. 실제로 아마도 ‘자성과 쇄신 결사’만큼 이러한 질문에 시달려온 결사는 없을 것이다. 왜 C교수는 ‘자성과 쇄신 결사’가 결사가 아니라고 말한 것일까?

나 역시도 내 책 제3부, ‘도전 받는 결사’ 속에서 ‘자성과 쇄신 결사’를 다루고 있었다. 아마도 지금까지 ‘자성과 쇄신 결사’를 다룬 유일한 논문이 아닐까 싶다. 만약 ‘자성과 쇄신 결사’가 C교수가 생각하는 것처럼 결사가 아니라고 한다면 왜 그것이 결사가 아닌가라는 점을 다루기는 했어야 할 것이다. 어떤 점에서도 제외될 수 없다. 왜? 바로 ‘결사’를 표방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사를 ‘표방’한다는 사실은 나름 중요하다. 반드시 ‘표방’하지 않는다고 해서 결사가 아닌 것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표방’하는 것은 중요하다.

바로 계승의식 때문이다. 표방은 역사를 의식하고 자각하는 정신활동이다. ‘자성과 쇄신 결사’는 올해 70주년이 되는 봉암사 결사의 계승도 표방했고, 800년도 더 넘은 보조 스님의 정혜결사 역시 계승한다고 표방했다. 잘 계승하고 있을까? 우리는 이렇게 물어야 한다. 옛날을 물어야 하겠지만, ‘지금’도 역시 물어야 한다.

‘자성과 쇄신 결사’에서 ‘지금’은 무엇인가? 언제인가? 조금 더 시간을 줄여보면, ‘자성과 쇄신 결사’를 선언했을 때이다. 그것을 우리는 어디서 찾아볼 수 있을까? 나는 ‘담화문’이 바로 그것이라 보았다. 담화문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그러나 지금은 고되고 힘들지라도 더 근본적인 해결을 모색해야 할 때입니다. 2년, 3년이면 완성할 불사(佛事)를 10년이 걸리더라도 오로지 우리의 힘으로 이루어내야 합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혹 우리 내부에 남아 있을지 모르는 권력과 외부를 향한 의존을 과감히 없애야 합니다. 자주권을 볼모로 순간의 편안함에 길들여져 있던 우리의 몸과 마음을 깨끗이 정화해내야 합니다.”
 
비록 형태적으로 보면, ‘종단 전체=결사체’라고 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말이 안 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형식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따로 있다. 바로 정신이다. 비록 결사가 아니라 한들, 이런 정신을 ‘표방’하고 있다면 그 역시 중요하지 않겠는가? 이 ‘담화문’의 존재만으로도, ‘자성과 쇄신 결사’는 <결사, 근현대 한국불교의 몸부림> 속에서 자리할 만하다고 나는 판단하였다.

하지만 문제는 그것이 아니다. C교수가 제기한 것처럼, 그것이 결사냐 아니냐가 중요한 것이 아닐지 모른다. 그것보다는, 과연 지금도 ‘자성과 쇄신 결사’를 하는 사원(社員)들이 모두 이 정신을 잊지 않고, 그대로 잘 실천하고 있는가 하는 점에 있는 것 아닐까. 달리 말하면, 결사의 사원이기도 한 조계종단의 모든 종도들이 ‘담화문’에 나타난 정신을 잘 지키고 있을까? 이것이 문제가 아니겠는가.
 
정신은 왜 차려야 하는 것일까
보조 스님은 왜 정혜결사를 했으며, 퇴옹 스님은 왜 봉암사 결사를 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그냥 이대로는 불교가 안 되겠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지금 2017년을 맞이하면서 “우리 불교는 이대로만 쭉 가도 좋다”, “괜찮다”,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결사는 무용(無用)하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결사가 필요하다. 결사를 해야 한다. 불법의 생명선을 늘리기 위한 몸부림, 그것이 바로 결사다. 내 책의 제목은, 결사를 몸부림이라고 정의했다. 시적이면서 동시에 운동적인 제목이다. 비관적인 미래 전망 속에서, 그래도 한 번 이렇게라도 몸부림쳐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이런 생각에서, 결사는 일어났다.

그러므로 결사운동은 호법(護法)운동이다. 어떻게 하면 법을 지킬 수 있을까? 나름으로 예리하게 현실을 진단하고 미래에 처방을 제시하였다. 그 처방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모였다. 그것이 결사다. 그런데 내가 살펴본 많은 결사에서, 그 중심에는 하나의 고갱이(식물 등의 속심)가 있었다. 중심 중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있었다.

▲ 김호성 동국대 교수
무엇일까? 중요한 것은 프로그램보다 정신이다. 그 정신, 결사의 정신은 윤리적으로 살겠다는 정신에 다름 아니다. 이때의 윤리는 청규(淸規)로도 나타나지만, 그보다 더욱 더 깊이 하나의 질문으로 나타난다. 부처님 법이란 무엇인가? 부처님은 어떻게 살았던가? 그것을 챙기고, 그에 따라서 살아가려는 선각자들의 몸부림이 결사다.

2017년은 봉암사 결사 70주년이면서, ‘자성과 쇄신 결사’에게는 거대한 도전이 밀려올 해라고 보인다. 과연, 조계종은 진정으로 ‘자성과 쇄신 결사’를 결사로서 살려갈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총무원장 자승 스님 시대의 아젠다에 지나지 않았던 것일까? 아니면, 진정한 결사였던가? 이 질문에 대답할 순간이 2017년에는 다가올 것이다. 물론, 단순한 아젠다가 아니라 결사이기를, 결사 이야기의 샘터가 되기를, 나는 염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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