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유기 연재를 마치며

불교 수행 바로잡고,
평화·공존세상 만들기
욕망 돌이켜 서원 세워
지혜·자비길에서 봅시다!

애초에 말씀드린 대로 이 ‘손오공이 기가 막혀’는 서유기에 담긴 의미를 자유분방하게 이야기하듯 써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마치 이야기를 듣는 느낌으로…. 제가 이야기꾼이라고 했던 것 기억하시죠? 어릴 적부터 동생들 모아 놓고 이야기로 울리고 웃기고 하던 것부터 시작하여, 대학 강단에 서서 ‘헤매니즘’으로 학생들을 좀 헷갈리게 하는데 이르기까지…. 가만 생각해보면 모두 이야기꾼 체질이 그 바탕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한 이야기꾼으로서, 너무 무게 잡지 않고, 그냥 쉽고 즐겁게 들으면서 서유기에 담긴 의미를 새겨보는 시간이 되고자 했던 것이 바로 ‘손오공이 기가 막혀’였습니다.

쭉 읽어 오신 분들은 알겠지만 ‘손오공이 기가 막혀’에서 주된 내용을 이루고 있는 것은 세 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뭐니 뭐니 해도 불교수행의 방법과 의미에 관한 이야기지요. 서유기 자체가 수행기라는 말씀 계속 드렸지요?

그 수행기를 재미있는 이야기로 쓰다 보니 수박 겉핥기로 읽으면 그냥 손오공이 여의봉 휘두르고 근두운 타고 나르는 이야기밖에 남지 않지요. 그렇게 서유기를 읽지 않고 불교 및 도교 수행의 이야기로 읽게 하는 것이 기본 목표라고 할까요? 그렇게 읽으면 서유기의 주된 배역들의 역할과 의미가 분명 드러나지요. 탐진치(貪嗔痴)의 삼독(三毒心)과 그것을 돌이켜 이루어내는 계정혜(戒定慧) 삼학(三學), 불도를 이루어가는 다섯 가지 힘(五力)의 관계 속에서 서유기를 읽어 나가는 것이지요. 그리고 수행과정 상의 장애로 요괴가 등장하는 경우, 그것이 과연 어떤 의미이며 또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를 풀어내는 것…. 그런 일들이 가장 기본적인 일이었습니다. 그런 중에 잘못된 수행, 불교의 허울을 쓴 비불교적 수행에 대한 비판이 상당히 많았지요. 지금의 불교가 이런 문제점들을 지니고 있고, 이것을 바로잡는 것이야말로 불교의 근본을 세우는 것이라 생각해서입니다. 좀 주제넘은 비판이 있었다 하더라도 다 불교에 대한 애정에서 나온 것이라 이해해주시기 부탁드립니다요.

다음으로 많이 나온 이야기는 수행을 넘어서 현실의 불교 자체에 대한 비판, 그것을 넘어 종교계의 부정적인 모습들에 대한 비판입니다. 아직도 피가 뜨거운 삼쾌선생의 생각에는 우리 지금의 불자들은 부처님에게 정말 부끄러운 모습을 많이 보이고 있다 생각합니다. 기복 일변도의 양상은 말할 것도 없고, 사회적 역할도 아직 매우 미흡합니다.

불국토를 건설한다는 구호는 거창하지만, 참으로 이 현실을 바꾸어 불국토를 지향하는 구체적인 움직임은 없습니다. 수행 따로 삶 따로 라서 삶의 현장이 수행의 장이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일부는 “수행! 수행!” 하면서, 깨닫기 전에는 전혀 아무 일도 안할 것처럼 구는 수행병 환자들인 것 같습니다.

또 일부는 그저 부처님 다리 잡고 늘어져 “이것 해주세요. 저것 해주세요”하며 부처님을 만능의 종처럼 부리려는 군상들입니다. 부처님의 모습을 닮아가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부처님이 오시면 제일 먼저 힘쓸 일은 무엇인가를 살펴 그러한 일들을 찾아 하는 불자들이 드뭅니다. 이런 현실 불교의 모습에 대한 안타까움이 글에 많이 드러났고, 가끔은 가장 전형적인 비불교, 사이비불교에 대한 희롱적인 이야기까지 있었습니다. 그런 종교로서 잘못된 양상은 꼭 불교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이 시대 종교가 갖는 전반적인 문제점인 경우가 많았지요. 그러다 보니 타종교를 겨냥한 듯한 좀 거친 비판도 있었습니다.

그것 또한 애정입니다. 모든 종교가 올바르게, 그러면서 평화롭게 공존하는 세상…. 그것이 삼쾌선생이 바라는 세상이지요. 그러니까 다른 종교라고 해서 “나 몰라라” 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우리가 해 줄 수 있는 건강한 비판은 해 줘야 되고, 또 반대로 비판도 받아야지요. 그런 애정과 관심의 결과이니 또한 너그럽게 이해해 주시기 또한 부탁드립니다.

마지막으로 앞 이야기들의 바탕에 놓여있는 근본적인 시각이면서 또 많은 지면을 할애한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불교를 세상을 건설하는 적극적인 가르침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소극적이고 퇴영적인 모습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지요. 삼쾌선생이 이런 이야기를 힘주어 할 수 밖에 없는 까닭이 있지요. 삼쾌선생은 줄곧 재가불자운동에 힘을 기울여 온 전력이 있습니다. 재가불자운동이 뭐냐구요? 올바른 재가불자가 되자는 것이지요. 불교는 사부대중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그것을 더 크게 나누면 출가자와 재가자로 나눌 수 있지요. 그런데 불교가 오랫 동안 출가자 중심으로 이어져 오다 보니, 재가자가 재가자로서의 자각을 하지 못하고, 그저 출가자 흉내만 내 온 것이 천년이 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의 가르침은 근본적으로 대기설(對機說), 즉 어떤 조건에 맞게 주어진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출가와 재가의 조건이 얼마나 다른가요? 그런 다른 조건을 생각하지 않고, 중심이 되고 존경을 받는 출가자의 방식을 그대로 흉내내면 어찌될까요? 망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재가라는 조건에 맞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이 삶의 세계를 건설하는 주체인 재가자에 맞는 불교를 펼쳐 나가자는 것이 바로 재가불교 운동입니다. 그리고 그 가장 근본적인 원칙이랄까? 그게 바로 “삶의 현장이 수행의 장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삶 전체를 수행을 위한 시간으로 쓸 수 있는 출가자와 달리, 현실의 삶을 영위해야 하는 재가불자는 수행 자체만을 위한 시간을 내기가 힘듭니다. 그렇다고 재가불자들이 “역시 우리는 안돼! 이번 생에서는 복을 많이 짓고 다음 생에 출가하여 수행하자!”라고 한다면? 그건 바로 부처 종자를 끊는 것일 수 있다고 제가 힘주어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미루면 안되죠. 바로 여기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고, 부처되는 길을 걷기로 다짐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미루면 그 미룬 것이 업이 되어 계속 미루게 됩니다.

그러니 우리 삶의 현장을 수행의 장으로 삼는 방편을 개발하고, 이 세계에 불국토를 건설하는 것을 우리의 수행으로 삼는 힘찬 움직임을 일으켜야 합니다. 삼쾌선생은 늘 이런 생각을 지니고 있답니다. 그러나 보니 불교 수행을 말하는 대목에서도, 현실의 불교나 종교 일반을 비판하는 대목에서도 이런 관점이 중심이 될 수밖에 없었지요.

서유기는 출가자인 현장법사를 중심으로 하고 있고,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 모두 출가자입니다. 당연히 출가자 중심으로 진행되는 이야기를 재가자의 눈으로 해석하다 보니 좀 무리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중간 중간에는 서유기 원래의 이야기를 비판하고 다른 관점을 제시하기도 했습니다.

그 점에 대해서 비판하신다면 달게 받겠습니다만, 삼쾌선생은 입장이 분명합니다. 오승은이라는 작가의 눈에 너무 매달릴 필요가 없다는 것이지요. 작가로서의 역량이야 삼쾌선생이 감히 명함을 내밀 수 없겠지만, 불교에 대한 이해, 종교 전반에 대한 이해, 수행에 대한 이해까지 무조건 따를 이유가 없지요. 그런 점에서는 삼쾌선생이 부적을 몰라보는 무식한 도깨비 역할을 했지요. 가끔은 이 눈치 저 눈치 안보고 무식하게 질러대는 것이 효과가 있거든요. 그렇게 질러놓고 혹 오승은이라는 뛰어난 작가의 역량이 작동하면 어떻게 표현될 수 있을까를 생각해보는 재미도 있지 않습니까?

에고…. 마지막 이야기가 좀 재미없게 흐르는 군요. 너무 심각하군요. 그래서야 지금까지 애써왔던 것이 아깝지요. 그러니 서유기의 주인공들 이야기 듣는 것으로 편한 마무리를 해 보기로 하지요.

현장법사 : 독자 여러분! 가끔은 너무 고지식하기만 한 저 때문에 갑갑한 적도 많으셨지요? 그렇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저의 믿음이야말로 모든 것을 이겨내는 원동력이라는 것에도 동의하시지요? 저는 그것 빼면 시체입니다만, 마지막 제 시체 떠내려 오던 대목 기억하시죠? 그 시체마저 버렸으니 이제는 좀 화통하고 융통성 있는 현장법사가 되지 않았을까요? 그렇지만 영원히 여러분의 벗이라는 점에서는 융통성 없고 완고하고 싶은 저 현장법사! 언제나 수행의 길에서 함께 해요!

손오공 : 저는 서유기를 원숭이 사람 되는 이야기라고 생각하는데요. 여러분이 부처되는 것이나 원숭이 손오공이 사람 되는 것이나 같은 이야기! 사람이라고 해서 다 사람 아니거든요. 참사람이 되어야지요. 그런데 ‘원숭이 사람 되기’, 서유기를 통해 성공했지요. 아니 원숭이가 부처 되었잖아요? 그러니 여러분도 ‘참사람 되기’, 꼭 성공하세요!

저팔계 : 저의 미욱하고 욕심많은 모습에서 여러분들 많이 위안 받으셨지유? 그렇지만 제가 사오정보다 형님이고, 힘도 더 쎄다는 것은 아시지유? 올바르게 작동만하면 누구보다 큰 힘을 낼 수 있을게 저랍니다. 마지막에 삼쾌선생이 저에게도 부처자리를 주고 싶다 하셔서 정말 힘나네유. 그렇지만 역시 정단사자 겸직으로 해서 늘 배불리 먹는 부처 되고 싶은 저팔계~ 히히. 여러분 사랑해요!

사오정 : 저 말귀 어둡지 않다는 것은 삼쾌선생이 밝혀 주셔서 모두 아실 거구요. 그렇지만 가장 말없는 사내가 저라는 것도 새롭게 밝혀진 것 같네요. 침잠된 마음, 가라앉은 마음에는 말이 필요 없어요. 그저 묵묵한 가운데 서로 통할 뿐이지요. 말없는 사나이 사오정을 성원해주신 여러분께 조용히 감사!

용마 : 저 잊지는 않으셨지요? 딱 한번 요괴한테 덤벼들었던 기억이 있지만, 역시 저의 역할은 불퇴전의 정진! 오로지 앞을 보고 묵묵히 나가는 저, 모든 짐 지고 가는 저, 그런 제가 없으면 아무 것도 안 되지요. 정진, 정진! 올바른 정진만이 모든 것의 원동력입니다. 여러분도 향상일로(向上一路)! 언제나 그 길 위에 있으셔야 돼요.

마지막으로 삼쾌선생도 한마디 해야 하겠지요? 여기서 어쭙잖게 유마일묵(維摩一默) 흉내를 냈다가는 돌팔매 날아오겠지요? 그래서 피치 못하게 한마디 합니다.

삼쾌선생 : 이야기꾼 삼쾌선생이 말이 막히네요. 여러분과 함께 했던 시간이 새삼스럽네요. 모두 부처님 계신 땅, 우리가 그리는 그 땅으로 함께 나가는 시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모두 도반되어 지혜와 자비의 길로 나가는 여정, 서유기의 길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언제나 여러분과 그 길 위에 함께 하기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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