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별적인 주인공이 아니라 포괄적인 주인공이에요!

내 탓으로 돌리고 나로 인해서 생긴 거라고 믿을 때에
그 사람 마음도 아주 자비한 마음으로서,
사랑하는 마음으로서 나를 대하게 됩니다.

오늘은 아주 허심탄회하게 자기 생활 속에서 거북한 점, 또 생활 속에서 걸리는 점…. 모두 여러분이 없으면 생활도 없고 생활이 없으면 불법이 없어요. 여러분이 있기 때문에 세상이 벌어졌고 생활이 있는 거지, 그렇기 때문에 생활 속에서 우리가 공부를 하는 데는 내 마음 그 자체가 바로 이 내면의 세계의 그 많은 생명들을 이끌어 가지고 가는 지배인이에요. 하하하, 내면의 세계부터 끌고 갈 줄 알아야 또 외부의 모든 것을 한마음으로 이끌어 갈 수 있는 그런 여건이 생기죠.

오늘은요, 같이 앉아서 서로 토론하는 날입니다. 서로 질문들 하세요. 또 어떻게 돼서 걸린다는 점, 답답하거나 어떤 문제가 있다는 거….

그런데 질문을 할 때에 양쪽 말이 다 들어가려면 이 마이크가 필요하거든. 그래, 이렇게 토론을 하시고요, 요다음 토요일 날 다시 한번 들어 보세요. 두어 번 더 다시 들어 보면요, ‘아! 이런 점에는 내가 잘못 생각했구나. 이런 점에는 좀 요렇게 할 걸….’ 이런 게 인제 되죠. 그림을 그려도 처음에 그린 거하고 그 다음에 그린 거하고 다르니까요. ‘요걸 좀 요렇게 축소했으면 좋겠다. 요건 더 늘렸으면 좋겠다. 요런 것이 인제 잘못되어 나오면 고칠 수 있는 그런 계기를 갖자.’ 이런 문제죠. 누가 말소리가 안 들려서 이걸로 하는 게 아니죠.

질문자1(여) 저기 마음공부 하는데요, 승복 입는 것과 안 입는 것이 어떻게 다른지요.

큰스님 간단하게요, 입산을 해서 이 승복을 입은 사람하고 안 입은 사람이 공부했는데 사람들이 모르기 때문에 그 안 입은 사람을 따르질 않아요. 아시겠어요? 우리가 이런 공부를 유년 같이 이렇게 해 오던 사람 같으면 승복을 안 입고 머리를 안 깎아도 따르지만 모르는 처지에서 막상 보고선 “으응.” 하고 그냥 따르지 않거든요. 그런 점이 있는가 하면, 또 한 가지는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서 승복을 입는 겁니다. 이 승복을 입은 사람은 여러 모르는 사람들이 따르기 때문에 건져 줄 수가 있고 그렇지만 승복을 안 입으면 자기 공부만 했지 남을 이렇게 반 이상을 건질 수가 없는 거죠, 따르질 않기 때문에. 그런 점이 있고, 세 번째는 이것은 여러분이 보시다시피 순색입니다. 이것이 중도를 말하죠. 그래서 안 보이는 세상과 보이는 세상이 혼합된, 희지도 않고 검지도 않다, 이건 중도도 되지마는 중도가 되기 때문에 중심이 되고 중용이 되죠. 그렇기 때문에 이거 하나만 봐도 그 뜻을 안다 이런 문제입니다. 또 질문하실 분요.

질문자2(남) 질문을 하나 드리겠습니다. 다름이 아니고 건강에 대해서…. 선을 하면 몸의 병도 고친다고 스님께서 설법하실 때마다 말씀하시는데요, 병도 세균에 의해서 생기는 병이 있고 또는 정신적으로 오는 병도 있고 여러 가지가 있지 않겠습니까? 근데 제 경우는 작년부터 당뇨병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선으로써 고칠 수 있는지 좀 말씀해 주십시오.

큰스님 이 병 문제라는 것은 여러분이 잘 모르시는 게 많아요. 병뿐만 아니라 전체 살림살이가 다 그렇습니다. 일체 만법이 다 그렇죠. 그런데 그게 원인이 어디서 오느냐는 얘깁니다. 이 원인은 지금 여러분 몸속에, 예를 들어서 간단히 방편으로 따져도 11억이라는 숫자가 나와요. 숫자가 아니라 숫자 없는 11억이라고 가정합시다. 그러면 11억이라는 게 어디서 왔나? 자기가 과거에 살던 인연들입니다. 악으로 했으면 악으로 지은 인연, 선으로 했으면 선으로 지은 인연들, 형제의 인연들 뭐, 모든 인연들이 착을 가지고 이렇게 살기 때문에 그대로 인연이 돼서 여기 여러분의 몸 하나가 된 겁니다.

그것은 왜냐하면 엄마나 아버지의 정자 난자가 있어서 뼈와 살을 빌려서 몸뚱이 하나를 부모한테 받았는데 그 몸속에 있는 생명체, 그 의식들은 전부 자기의 인연으로 인해서 만난 뭉침이거든. 그러니까 내가 살다가 망하게 되는 것도 과거의 인연이 그렇게 하게 만들고, 악도 거기서 나오게 하고 선도 거기서 나오게 하고, 모든 게 한군데서 그냥 바깥으로 나고 들고 나고 드는 겁니다. 체가 없으니까. 마음에 정말 입자가 돼 가지곤 그냥 분자로 화해 가지고는 자꾸 나와서 나한테 귀인이 되게 만들지 않고 그냥 악인이 돼서 나를 망하게 만들고 있고 또 잘돼 나가는 거는 전자에 살다가 인연을 잘 지어서 선으로 이렇게 됐기 때문에 그런 인연이 있다면 또 그런 인연은 귀인을 만들어서 끌어오기도 하고요. 그러니까 병이 나게 하는 것도 공장마다 병이 나게 하는 수도 있고 간장 공장만 병나게 하는 수도 있고 방광 공장만 병나게 하는 수도 있고 그냥 전부, 대장 소장이니 식도니 뭐, 심장이니 콩팥이니 이런 것도 전부 공장과 같다 이겁니다, 오장육부가.
우리가 지금 마음공부 하는 사람이니까 마음을 잘 내면 꿈을 잘못 꾸고도 ‘아, 이거는 잘될 꿈이다.’ 생각을 하면, 한생각 주인공한테 맡겨서 ‘아, 이거 잘되게 할 수 있다. 주인공만이 할 수 있다.’ 하고 맡길 수 있는 그 믿음 그런 것이 들어가면 그것이 바로 이 속의 모든 의식들을 지배하거든, 전부! 마음이 그러면 두뇌로 올라가서 두뇌로 인해서 사대에 다 통신이 되는 거라. 의학적으로도 그렇고 인체적으로도 그러니까. 그러니까 그 모든 걸 다루는, 병 다루는 그 지배인이 자기지만 다루지 않게끔 말을 하는 것도, 생각하는 것도 자기 자유다 이거야.

그러니까 그렇게 자유스럽게 할 놈의 거를, 자기가 자기 몸 다루는 것도 자유스럽게 생각을 못해. 자길 믿질 않아. 지금도 “놔라! 놔라! 응? 아니, 당신은 거기에 자꾸 말리지 말고 거기에 모든 것을 놓고 거기에 부드럽게 생각하고 부드럽게 말하고 그렇게 살아라!” 이러는데도 자기가 부드럽게 생각을 못하는 것은 자기가 자길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거야. 그러니까 신경질이 나고 부아가 치미는데 그게 화탕지옥이다 이거야. 왜냐하면 딴 데서 화탕지옥을 갖다 주는 게 아니라 내 마음에서 일어나는 게 화탕지옥이야. 근데 왜 내가 거기에 끄달리느냐 이거지. 상구보리 하화중생이라고 그런 원인도 거기에 있다 이거야.

내 지배인의 이 마음은, 그대로 마음내기 이전은 부처지만 이 속에서 수없이 일어나는 마음 분별은 바로 중생들의 마음이다 이거야. 그러니 중생들의 마음이 그렇게 이끌어서 분별심이 막 동할 때는 ‘어, 이것도 거기서 나오는 거니깐 거기서 해결할 수 있다.’ 하고 믿고 놔야 될 텐데, 하늘이 무너진들 어떻고 땅이 꺼진들 어때! 어차피 한 번 죽을 거. 죽기가 그렇게 원통해? “놔라! 놔라!” 해도 그걸 놓지 못하기 때문에 살지 못한다 이거지.

그거를 비유해서 한마디 하겠는데, 만약에 집안사람들이 심부름꾼을 두었다고 합시다. 여기 가게들 많이 하죠? 그러면 가게에서 심부름꾼을 두었는데 심부름을 시키려면 “이거 가지고 어디 가서 뭐뭐 뭐뭐 해 가지고 와!” 이렇게 해야만이 심부름꾼이 심부름을 해 올 텐데 그냥 “너 알아서 해!” 이렇게 한단 말이야. “알아서 해!” 그러면 뭐를 알아서 하라는지, 심부름을 영악하게 못한다 이 소리지. 그러니까 운전수가 잘 끌고 다니고 잘 이끌어 갈 수 있는 생활이 필요하다 이거지.

옛날에 그런 점이 있었어요. 노자는 영계를 다룰 때에 아주 영원한 친구로서 영계를 다뤘어. 죽은 세상의 사람들이나 산 세상의 마음들이나 모두 아주 그 영원한 친구로서 다루었으니까 둥글고 모가 나지 않고 못할 일이 없이 했다 이거야. 그러나 강태공은 명령해서 영계를 다뤘다 이거야. 그런데 명령해서 다루는 거는 언젠가는 적이 될 수도 있고 언젠가는 나한테서 떨어질 수도 있고 붙을 수도 있고 이렇게 되니까, 명령해서 다루는 거는 영원치 못하다 이 소리야. 둥글지 못하다. 제갈공명은 촛불을 켜 놓고 영계를 다뤘다 이거야. 그러니까 꼭 바람을 청해도 올라가 빌어야만 되는 이치야. 그건 한계가 있지 않아? 그래서 촛불이 꺼지면 자기가 그냥 죽어 버리게끔 되는 거지. 어쩔 수가 없잖아. 그것도 사람의 마음이다 이거야.

사람이 촛불을 가지고 정해 놨으면 자기 인생이 그냥 촛불로다가 막 돌아가고, 아까도 얘기했듯이 노자처럼 그렇게 둥글게 악도 내가 부릴 수 있었다면, 아주 악한 강도라도 내가 잘해 주고 둘이 아니게 참 잘해 준다면, 또 강도가 가다가 나를 살려 줬다면 그 강도는 나한테 은인이라. 남들이 강도라고 하지만, 그리고 강도 행을 했지만 나한테는 바로 생명의 은인이라. 그러니까 남이 강도란다고 나도 강도라고 할 수는 없지. 그렇죠? 그러니까 그 강도의 마음이 그래도 인간이기 때문에 잘못되고 잘된 거를 알아. 은인을 알고 의리를 알아.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나온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둘 아니게 항상, 저쪽에서 악하게 나오더라도 부드럽게 말을 해 주고 주인공에다 맡겨 놓으면…. 주인공의 그 마음은 어떤 거냐? 이 전력과 같다 이거야, 광력과 같고. 그래 가지고 통신이 되게끔 돼 있어. 자력이라고 그랬거든. 자석은 한계가 있지만 자력은 한계가 없어. 그렇기 때문에 남의 마음을 좋게 이끌어 줄 수도 있고 아주 나쁘게 이끌어 줄 수도 있는 건 자기 마음대로 그 자력을 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한생각을 잘 내서 자력을 쓰면 아주 귀인이 되고 한생각을 잘못 내서 쓰면 악인이 된다 이거야. 그래서 그 악인의 인과로서, 또 선인의 인과로서, 그 인과가 돼서 업이 된 뭉치다 이거야, 이 몸뚱이가.
그러니까 여러분이 병을 낫게 하는 데는 그저 무조건 자기 지배인, 즉 말하자면 주인공 그 자체를 믿고 맡겨 놓는다. 주인공이라는 것은 뭐냐? 영원한 생명의 근본과 마음을 낼 수 있는 분별과, 마음을 내면 육신이 움죽거리는 그 모든 그, 사람들이 서로가 독불장군이 없이 돌아가는 거. 공생·공용·공체·공식화 할 수 있는 이 세상, 이런 거를 더불어 같이 이익하게 할 수 있는 마음을 낸다. 꿈을 꿔도 꿈을 잘못 꿨다 잘 꿨다 이런 거를 논의하지 말고, 이게 잘못될까 잘될까 생각을 하면 벌써 이게 잘못되게 나가는 수가 있어. 그리고 잘못됐다고 생각하면 잘못되는 거야. 그렇게 여기에 벌써 통신이 됐기 때문에.

그러니 여러분이 그 마음 하나를, 남이 또 나쁘게 망하게 했다 해도 모든 거를 남의 탓으로 돌리지 말라 이거지. 내 탓으로 돌려라. 내 탓으로 돌리고 나로 인해서 생긴 거라고 믿을 때에 그 사람 마음도 아주 자비한 마음으로서, 사랑하는 마음으로서 나를 대하게 된다. 남의 탓을 하고 남을 끝끝내 망하게 생각을 한다면 끝끝내 내 앞으로 돌아온다 이거야, 그게. 연관성이 되는 거지.

그러니까 여기 내가 없더라도, 우리 꼬마 스님네들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나와 둘이 아니기 때문에, 여러분의 마음, 이 일체제불의 마음과 둘이 아니기 때문에 이 자리에 오게 되면 여러분 눈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지만 엄연히 부처님은 계시거든. 왜냐하면 그 마음이기 때문이야. 한 찰나에 들고 난단 말이야. 여러분이 생각하면 그 생각하는 대로 한 찰나에 여러분 그 주인, 마음 가운데 항상 같이 해 준다 이거야. 그러니 내가 있음으로써 모든 게 부딪치는 거지 내가 없는데 뭐가 부딪쳐? 그러니까 내 탓이지. 잘못했든 잘했든 내 탓이라. 모든 게 나의 탓이니까 남의 탓으로 돌리지 말고 원망하지 말고 가정에서도 모든 것을, 병 얘기를 하셨으니까, 병이 나으려면 내 탓으로 돌리면서 주인공에다 ‘주인공밖에 내 병을 고칠 수 없다!’ 하고 맡겨 놓고 또 잘됐으면, 나았으면 ‘감사하다!’ 하는 것도 거기에 감사해라 이거야. 모든 생활하는 것이 딴 사람이 생활합니까?

이거 한 가지 얘기해 드리죠. 여러분 몸뚱이 하나가 때로는 아내 노릇도 하고 때로는 남편 노릇도 하고, 금방 엄마 노릇 하고 아버지 노릇 하고, 금방금방이에요. 한 찰나에 그냥 엄마가 됐다가 금방 “여보!” 하면 부인이 됐다가 “아무개야!” 하면 며느리가 됐다가 “아무개야!” 하면 딸도 되고 “아무개 있어?” 하고 들어오면 친구가 되고…. 아니, 여러분의 이름이 엄마의 이름이 되고 또 형제의 이름이 되고 딸의 이름이 되고, 남녀를 막론해 놓고, 그렇다면 그 한 몸이, 한 사람이 이름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 거와 같이 부처님께서 한생각을 내서 문수도 해 놓고 보현도 해 놓고, 때에 따라선 동방에 아촉을 해 놓고 서방에는 아미타를 해 놓고 이 세상만사의 살아나가는 그 도리는 관세음이라고 이름을 해 놓고 또 지천국에 지장을 해 놓고, 이렇게 마음으로 이름을 지어 놓은 겁니다. 그러면 때에 따라서 자기가 살림살이하는 거와 똑같아. 때에 따라서는 어머니가 됐다 때에 따라서는 또 며느리가 됐다가 아내가 됐다가 이렇게 상황에 따라서, 용도에 따라서 그냥 자꾸 돌아가는데, 여러분이 종교를 믿을 때 불교 믿는데 칠성에 갖다 놓고 빌고 그러면 여러분이 엄마 됐을 때에 갖다가 빌고 또 아내가 됐을 때 갖다 놓고 빌고, 따로따로 해 놓고, 그렇게 하는 거와 똑같습니다.

이해가 갑니까? 이해가 모두 갑니까? 여러분의 이름이 그렇게 많은데 이름을 요기 써 붙이고 저기 써 붙이고 저기 써 붙이고 그러곤, 요기 갖다 빌고 저기 갖다 빌고 저기 갖다 빌면 그거, 부처가 있으면 웃을 겁니다, 기가 막혀서. 그러니 그렇게 찾지 말고 그걸 한데 합쳐서, 내 이름이 그렇게 많지만 나는 하나다 이거야. 그 하나도 그렇게 이름이 많이 화해서 돌아가기 때문에, 고정됨이 없기 때문에 바로 나조차도 없구나. 이 도리를 알아야지! 어떤 거 할 때 나라고 할 수 없는 게 부처니까 말이야.

그러니 오늘 병이 어떡하면 낫느냐고 그러는데 아니, 자기네들 속에서 나오는 거 자기네들이 해결하라고 딱 맡기면, 자기네들이 ‘아, 이거 맡기는 놈이나 나 지금 하는 놈이나 다 같은 나구나. 내가 만약에 이렇게 맡기는 놈 죽인다면…. 바로 이 맡기는 놈이 바로 내 몸뚱이로구나. 나구나.’ 이렇게 생각하고, 자기 죽이는 법은 없거든. 여러분이 자기 죽이려고 하는 분 없죠? 자기를 망하게 하려고 하는 분도 없고.

그러니 여러분이 진짜, 자기 주인공이라는 것은 삼합이 한데 합쳐서 돌아가고 우주의 모든 것이 근본은 바로 같이 직결돼 있으며 이 세상의 모든 살림살이가 이 전기 가설돼 있듯이 모두가 가설이 돼 있다 이거야. 그러니 아들이 나쁘든 며느리가 나쁘든, 또 손자가 나쁘든 남편이 나쁘든 부인이 나쁘든 간에 주인공에 맡기고 부드럽게 말해 줘라 이거야. 그래야 이탈이 안 되는 거다 이거지. 모두가 부드럽지 못하고 쪼금만 잘못했다 하면 그냥 이를 악물고 “이놈의 새끼, 어디 갔다 들어왔어? 너 어디서 자고 왔어?” 뭐 어쩌고 어쩌고…. 아이, 그러면 따뜻한 보금자리에 들어가고 싶지 아니, 그런 데로 들어가고 싶어요? 여기는 특히 한국보다도 더해요. 아침에 나간 사람이 저녁에 들어오고 저녁에 나간 사람이 아침에 들어오니까. 자식들하고 많이 떨어져 있거든요.

그러니 저 냉장고에다가요, 메모지를 해서 딱 붙이고 요 입술을 일부러라도 발라서 거기다가 키스를 해 놓고 “아무개야! 난 너 사랑해! 너희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같이 이렇게 살기 위해서 나가지 않으면 안 되지 않니? 너희들도 이해해 줘야지?” 하면서 “이렇게 이렇게 넣어 놨으니 꺼내 먹어, 엄마 올 때까지.” 아, 요렇게 해 놓고, 또 남편한테도 하는 게 있잖아요? 또 남편은 부인한테 하는 게 있고 자식들한테 하는 게 있다 이거야. 메모지에 몇 자만 쓰면 모든 게 이탈이 되지 않고 사랑할 수 있고 마음의 고독이 없어지고 그럴 텐데 아, 이거는 그냥, 너 떼먹고 나 떼먹었느니 하곤 그저 자기 할 거 하곤 너 언제 봤더냐 하고 그냥 달아나가고 그러니 아니, 이탈이 안 돼? 마약이나 또는 이탈이 돼 가지고 무슨 도둑, 깡패 이런 걸로 번진다 이거야. 왜? 고독하니까. 배고프니까. 내 말이 거짓말이 아니에요. 둑에 요만한 구멍이 뚫어졌는데 그거 아무것도 아닌 거 같죠? 그렇지만 그게 쪼끔쪼끔 나가다 보면 둑이 그냥 다 무너져 버려. 그 뜻을 아시라 이겁니다.
불교란 ‘불’은 영원한 생명의 근본이요, 애고 어른이고 이렇게 서로 말을 하는 것이 바로 ‘교’예요. 그래서 기독교니 가톨릭교니 믿는 사람들도 다, 풀 한 포기도 불교 아닌 게 없어요. 케네디 대통령 묘지에도 가 보니까 봉화가 올라가고 있더군요. 그 불은 영원한 생명이다 이거야. 그런데 모두 꼬리표들 하나씩 붙여 놓고 ‘내 거 네 거’ 하고 싸우거든, 요만한 항아리 속에서. 지구 속인데 항아리라고 합시다. 요만한 항아리 속에서 내 자리 네 자리 하고 싸워. 허 참! 아니, 그게 될 법이나 한 얘기야? 그뿐인가, 또? 우리 몸속에서도 지배인이 잘 리드해서 이끌어 가면 될 텐데, 그리고 자기 마음이, 지배인 마음이 이끌어 갈 수 있는 마음을 가지고 자제해서 이끌어 가야 할 텐데 그러지 못하니까 자꾸 거기서 분란이 일어난단 말이야. 거기도 네 공장 내 공장, 너 나 하고 싸우니까 병이 안 나? 울그락불그락하고. 지금 살아나가면서 마음이 그렇게 둘 셋으로 나누어지는데, 그 지배인 마음이 그런데 아니, 그게 잘될 것 같아요, 회사가? 허허허….

이 체가 없는 마음은 아주 작을 수도 있고 클 수도 있거든. 그리고 또 그런가 하면 만 개도 되고 10억도 되고, 한생각이. 10억이라고 한다면 10억 속에 그 하나가, 하나의 생각이 천만도 되고 만만도 되니까 말이야. 그래서 여러분이 그 마음을, 진짜로 정말 그 고정됨이 없이 찰나찰나 돌아가는 거를…, 보고 듣고 가고 오고 생각하고 이러는 것도 고정됨이 없기 때문에, 먹는 것까지도 고정됨이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한꺼번에 합해서 주인공이라고 그러는 거예요. 그러니까 개별적인 주인공이 아니라 포괄적인 주인공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무시하지 마세요. 여러분 그 주인공을 무시하지 말고 그것이 바로 자부처의 근본이라고 생각하세요. 그렇게 진짜 믿고 거기에 맡겨 놓으면 그 주인공 자체가 그대로 그냥 마음에서 누진으로 해서 그냥 다 사대로 통신이 돼 가지고 그 공장에 ‘이러이러하고 잘못된 게 있으니까 고쳐!’ 이렇게 되거든.

내가 틀리면 항의들 하세요. 토론하는 날이니까요. 뭐 나도 잘못하는 게 있지만 지금 내가 말하는 건 잘못된 게 하나도 없어요. 이 오장육부가 있는 내 몸뚱이가 있음으로써 바로 이 세상이 있는 거죠. 내가 없으면 아무것도 없습니다. 나로부터예요. 나부터 믿고 나부터 발견하고, 발견을 했으면 바로 운전을 해서 생활을 자재로이 해 나갈 수 있는 둘 아닌 도리를 또 배워야 하고, 둘 아니게 나툼을 또 배워야 하고, 이렇게 해서 전진해 나간다면 우리는 전부 앉아서 구만 리, 아니 앉아서 우주 탐험을 다 하고도 남음이 있으니 그 또한 어디냐 이거야. 또 보기만 해도 도가 아니랬으니, 가고 옴이 없이 갈 수 있는 그런 위치라면 전부 그게 어디냐 이거죠. 또 남의 마음을 전체 아니 그게 어디냐. 과거에 살던 내 모습이나 과거에 살던 사람들의 그 과거를 모두 알고 있으니 얼마나 좋으냐. 현실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또 통신을 할 수가 있으니, 새 한 마리도 풀 한 포기도 같이 말을 할 수가 있으니, 말을 하지 않으면서 말을 할 수가 있으니 그게 무심 법계의 도리다 이거야.
(다음 호에 계속)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