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해가 부쩍 짧아졌다. 남은 달력 한 장에서 원효 스님의 말씀이 들려온다. “년년이이하여 잠도사문(年年移移 暫到死門)이니라

(1)와 해가 옮기고 옮겨서 잠깐 죽음의 문에 다다름이니 급하지 아니한가. 요지는 공부하라는 말씀이다. 발심수행장에서 나는 이 대목을 좋아했다. 그동안은 원거리에 있는 죽음이니 여유롭게 운위할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바로 코앞이다. 눈앞에 대상은 흐릿하고 귀와 눈도 멀어진 요즘, 내 몸은 저물녘 벌판에 앉은 눈사람처럼 적막하다. 적막 속에서 아무도 모르게 해체되고 싶다. 누워 지내는 시간이 많아진 지금, 어떤 날은 들판에서 시신이 풍화되는 과정을 내 몸에 옮겨보곤 한다. 한줌 흙으로 동화(同化)되는 과정을 따라가며 아무것도 아닌 나 없음의 해방감을 슬쩍 맛보기도 한다.

끌어 모아서 얽어매면 한 칸의 초가집. 풀어헤치면 본래의 들판인 것을!” 누구의 시구(詩句)였더라, 눈사람 또한 머잖아 본래의 들판으로 돌아가리라.

한나절 독서마저도 자주 끊겨, 그럴 때면 TV의 리모컨을 찾게 된다. 연일 터져 나오는 함성, 100만 촛불의 행진. 실망스럽게도 박근혜 대통령의 민낯이 드러나고 있다. 국민에게서 위임 받은 권력을 그는 최순실 일가의 사적 이익을 위해 사용했다. 여러 차례 사태를 바로잡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그때마다 변명 뿐, 진정한 사과는 없었다. 시간을 끌며 벗어날 수 있는 꼼수를 계산하는 것 같이 보인다. 촛불은 횃불이 되었고 232만 명에 달하는 시민들이 광장으로 달려 나왔다. 그들은 퇴진을 외치더니 하야에서 이제는 구속을 외치고 있다. 관저에서 덩그러니 혼자 이 노릇을 어떻게 하나. 국회는 대통령에 대한 탄핵 소추안을 가결시켰다. 129일이었다. 그 전날 밤은 밤새 비가 내렸다. 구슬프게 내렸다. 피눈물이 무엇인지 알았다는 외로운 대통령. 자존심 때문에 사과할 수 없었나? 어린 생명이 수장(水葬)될 때 왜 맨발로 달려 갈 수 없었나? 무엇이 그를 가로 막았나?

대통령은 당선한 지 얼마 안 되어 중국을 방문했는데 청화대학교 강당에서 중국 고전을 읽으면서 마음을 다스렸고 직접 에세이를 쓰면서 마음을 다스렸노라고 말했다. 그의 수필에는 이런 대목도 나온다.

인생의 어려운 시기를 헤쳐가면서 제가 깨우친 게 있다면 인생이란 살고 가면 결국 한 줌의 흙이 되고, 백년을 살다 가도 긴 역사의 흐름 속에서 보면 결국 한 점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한 줌 흙한 점()’에 지나지 않는 존재. 존재란 과연 무엇인가. 비실체적인 몇 가지 요소들이 모여 일시적인 나를 이루고 있지만 무아적(無我的) 존재이다. 어디에 내가 있는가? 자만과 나르시스 그것은 신기루와도 같은 환()일 뿐이다.

TV화면에서 대통령 얼굴의 멍 자국을 보며 30여 년 전, 정수직업훈련원 수료식에서 격려사를 하던 젊고 가녀린 퍼스트레이디의 모습이 눈앞을 스쳐갔다. 무상한 세월이 고약하다. 무상(無常)은 공()이다.

만물의 본질은 공()이며 형상으로 나타난 는 연기의 법칙에 의존한다. 우리는 모두 연기적 존재다. 따라서 주변의 인간관계나 내 앞에 마주선 상대방이 더없이 중요해지는 이유이다. 나이를 더해서 깨달은 건 인류의 문제는 물질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점이다. 그동안 나는 왜 사람들을 많이 사랑해 주지 못했을까. 마음뿐 사랑하는 방법에 서툴렀다. 작별 앞에 남겨진 후회가 많다. 내 한 몸 떠나면 한 물건도 소용없다. 물질이 아니라 사랑이다. 사랑하는 마음만 가득 안고 팽목항에 달려만 갔어도. 시간을 놓치지만 않았어도. 자비는 생명에 대한 헌신이다.

생명을 사랑하는 자비의 실천, 일심의 정화(淨化)가 이 눈사람에게도 남겨진 숙제다. 판결 앞에 선 또 한 분의 눈사람도 그런 점을 깨달았으면 한다. 찬바람 속에 날이 저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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