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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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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용헌 이원〈끝〉불교 혁파에도 끊이지 않은 인간애

조선건국 공헌하며 승승장구
반대파 참언에 말년 유배생활
평양·강원도 사찰 유람하며
신분 떠나 승려들과 정 나눠
 

조선전기 관료 문인 이원(李原, 1368~1429)은 건국 초기 국가의 기틀을 다지고 제도를 정비하는 데 공헌한 인물이다. 그는 다수의 승려들과 교유하였으며 수행승의 시축에 화답시를 남겼으니 이는 척불(斥佛)이 소명처럼 인식된 시기에 유불교유가 이어진 정황을 드러낸 것이라 하겠다. 그의 자()는 차산(次山)이며, ()는 용헌(容軒)이다. 저서로는 용헌집철성연방집(鐵城聯芳集)을 남겼다.

이원의 집안은 3대에 걸쳐 번영을 누린 가문이다. 특히 조부 이암(, 1297~1364)은 재상을 역임한 인물로 동국의 조자앙(趙子昻)이라 칭송될 만큼 예서와 초서에 능했으며 묵죽을 잘 그렸다. 그의 부친 또한 밀직제학을 역임하는 등 공민왕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는 점에서 그의 가풍(家風)을 짐작하게 한다. 그러나 이원이 태어난 지 석 달 만에 아비를 여이고 매부 권근(權近)의 문하에서 공부했는데, 날로 진취함을 드러내자 우리 장인이 죽지 않으셨다고 하였다.

국조인물고에 의하면 그가 진사과에 합격한 것은 15세이며, 1385년 문과에 급제했다. 당시 주시관(主試官)이었던 정몽주가 그를 보고 문경공(이원의 아버지)의 재주와 덕이 크게 시행되지 못하였는데 이제 이런 아들이 있으니 하늘이 보답하여 베풀어 주심이 참으로 징험 있구나라고 한 점을 보아 그의 부친 또한 범상한 인물이 아니었던 듯하다.

그는 1388년 사복시승(司僕侍承)에 제수된 이후 공조(工曹), 예조(禮曹)의 좌랑(佐郞)과 병조 정랑(兵曹正郞)에 임명되었다. 조선이 건국된 후에도 능력을 인정받아 사헌부 지평(持平)과 시사(侍史)를 맡았다. 이뿐 아니라 정종(定宗) 때 우부승지(右副承旨)에 올랐다가 태종이 즉위한 후에는 그에게 공신녹권(功臣錄券)이 하사되는 등 순탄한 환로(宦路)를 달렸고, 세종 때에는 우의정에 발탁되는 은택을 입었다. 특히 그가 중국에 사신으로 갔을 때 그의 아름다운 수염을 본 황제가 황염(黃髥: 황금색 구레나룻)의 재상은 뒤에 다시 와야 한다고 한 사실은 국조인물고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그의 삶에도 기복이 있었다. 조선 건국 초 2차 왕자의 난에서 방원을 도와 좌명공신(佐命功臣) 4등에 책록(策錄)되었고, 철성군(鐵城君)에 봉해졌던 그였지만 많은 노비를 불법으로 차지했다는 사헌부의 탄핵은 그의 몰락을 예고했다. 결국 공신녹권이 박탈되고 여산(礪山)으로 유배되어 생을 마쳤으니 당시 신·구파의 정치적 갈등뿐 아니라 말년이 순탄치 않았던 그의 삶의 일단을 드러낸 일이었다.

무엇보다 정무에 관대하여 경장(更張)을 좋아하지 않고 대체(大體)를 지켰던 그를 상대적으로 시기하는 무리들이 많았다. 그에게 누명을 씌우려는 무리들이 있을 때마다 태종은 친히 그의 누명을 벗겨 주었지만 시기하는 무리들의 참언은 계속되었다. 결국 그가 참언을 견디지 못하고 여산으로 귀양 가는 정도에 그친 것은 세종의 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세종은 큰일이 있을 때마다 철성(鐵城: 이원)이 있으면 반드시 잘 처리할 것이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종은 그를 해배시켜 정승에 임명하고자 했지만 시기하는 자들에 의해 번번이 저지되었다. 따라서 그가 유배지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은 그의 숙명인지도 모른다.

한편 도량이 넓고 충직했던 그의 성품은 국조인물고에 자세한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공은 도량이 넓고 성품이 충직한데다 바른 학문을 더하였으므로, 그 논의에서 나타내고 사업에서 조처하는 것이 대단히 볼만하였다. 평생 남과 말할 때에 속이고 꾸민 적이 없고 또 모가 나서 스스로 남과 다른 체하지 않았으나, 큰일에 임하여 결단하게 되면 확고하여 동요하지 않는 것이 산악(山岳)처럼 우뚝하였다. 전주(銓注)를 맡은 10여 년 동안에 현명하고 재능이 있는 자를 선발하되 사심으로 관직을 주거나 빼앗지 않았으므로 원망하는 말을 하는 사람이 없었으니, 참으로 태평재상(太平宰相)이었다.

   
▲ 원주 법천사지 전경. 임진왜란 당시 전소돼 폐사지로 남아있지만 탑비와 부도전이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 건물터 등이 법천사의 옛 규모를 짐작하게 한다. 이곳에서 이원은 일운 스님과 차(茶)를 중심으로 교유했다. <현대불교 자료사진>

그는 강직했고 원칙을 준수했다. 평생 남을 속이지 않았으니 선비의 기상이 준절하고, 평탄한 인물이었던 셈이다. 그를 따르던 사람들은 참으로 태평성대를 구가할 시절의 재상이었지만 세종의 유신 정치를 돕지 못한 것을 못내 아쉬워했다.

한편 그가 승려들과 교유한 자취는 용헌집에서 확인된다. 그가 교유했거나 유람했던 사찰은 평양의 망일사와 보흥사, 강원도의 법천사, 흥천사(興天寺), 장단 영통사, 회암사(檜巖寺), 인왕사 등이다. 또한 그와 교유했던 승려들의 이름도 일운 스님과 인왕사의 장로, 염 스님 등 다수의 인물이 거론된다. 특히 깊이 교유했던 일운 스님과의 우정은 <기일운상인(寄一雲上人)>에서 드러난다. 

법천사는 앙암 동쪽에 있는데(法泉寺在仰巖東)
치악산은 드높이 반쯤 허공에 걸렸네(雉岳山高倚半空)
어느 날 한가로이 시골집에 돌아가서(何日閒尋田舍去)
분향하고 마주하여 솔바람 소리를 들을까(焚香相對聽松風)

법천사는 강원도 원주지역에 있는 사찰이다. 신라 성덕왕 때에 창건, 고려 문종 때 지광국사(智光國師)가 머물며 큰 가람을 형성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에 전소되어 절터만 남았다. 지금도 지광국사현묘탑비와 당간지주가 남아 있어 이 절의 위용을 짐작게 한다.

바로 이원이 법천사의 일운 스님과 사귀었던 것이다. 일운 스님은 흥천사(興天寺)의 사리탑 중창을 기념하는 경찬법회를 주관했던 고승이다. 이원이 어느 날 한가로이 시골집에 돌아가서/ 분향하고 마주하여 솔바람 소리를 들을까라고 하였으니 솔바람 소리는 바로 찻물이 끓는 소리를 의미한다. 따라서 이들의 교유는 차로 더욱 돈독해졌음을 드러낸다. 한편 인왕사 장로 스님의 시권에 써준 그의 시 <제인왕장로시권(題仁王長老詩卷)>에는 이런 내용이 보인다.

봄이 되니 한가한 날 많아서(乘春多暇日)
앞길 물어 절간을 찾아 가네(尋寺問前程)
소나무 그림자에 누대가 고요하고(松影樓臺靜)
강물 소리에 절간이 맑구나(江聲院落淸)
이제부터 결사를 함께하여(從今同結社)
여기에서 불법을 배우리라(坐此學無生)
관직을 가벼이 여겨서가 아니라(不是輕軒冕)
물외의 정을 금할 수 없기 때문이네(難禁物外情)

그가 인왕사의 장로 스님의 시권에 이 시를 쓸 무렵에는 척불(斥佛)의 거센 물결이 일기 전인 듯하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결사를 함께하여/ 여기에서 불법을 배우리라고 했던 것이다. 불법을 배우고 용맹 정진하겠다는 그의 의지를 결사(結社)로 드러낸 것이다. 그러므로 스님과의 교유를 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뿐 아니라 결사만 할 수 있다면 벼슬길의 부침을 다 버릴 수 있다는 의지도 드러냈다. 이는 바로 <장단 영통사의 시에 차운하여(次長湍靈通寺韻)>란 시에서이다.

한가로이 절을 향해 도림을 찾아가니(閒向招提訪道林)
시내 따라 오솔길이 솔숲으로 나 있네(緣溪小逕出松陰)
오관산은 바람과 안개 띤 채 예스럽고(五冠山擁風烟古)
대각국사비 기울었으니 세월이 오래됐구나(大覺碑橫歲月深)
삼보(三寶)의 마음은 불경 계율 교화이고(寶字念心經律化)
노승의 설법은 과거 미래 현재라네(老僧讀法古來今)
만약에 결사하여 이곳에 눕는다면(若爲結社亭中臥)
벼슬길의 부침도 다 버릴 수 있다네(一任名塗昇與沈)

그가 찾아간 장단의 영통사는 오관산에 위치한 절이다. 이 절에 대각국사비가 있었다는 것으로 보아 대각국사가 수행했던 절인 듯하다. 그러나 그가 영통사를 찾아갔을 무렵에는 이미 대각국사비가 기울어져 있었던 듯하니 세월은 이처럼 무상한 법이다.

한편 노승의 설법은 삼세일여(三世一如)의 법도가 명백하니 그가 영통사를 찾은 이치도 이를 깨치기 위함이었던가. 그러기에 만약에 결사하여 이곳에 눕는다면/ 벼슬길의 부침(浮沈)도 다 버릴 수 있다는 결의를 보인 것이리라. 아무튼 이런 결연한 의지가 있었던 그도 왕조의 변화를 거역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더구나 고려의 유신으로 건국의 기틀을 만드는데 기여했던 그였으니 말이다. 왕자의 난에 방원의 정치적 노선을 따랐던 그였고 세종 때에는 높은 벼슬에 있었기 때문에 그의 불교 혁파 상소는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의 정치적 명분은 분명했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그의 유불교유는 이어졌으니 이는 <기백운산염상인(寄白雲山焰上人)>에서 확인된다.

몇 자 편지, 아득히 속세에 전해져서(隻字遙傳落塵)
스님께서 백운산에 계신 것을 알았네(知師住錫白雲山)
눈 깊은 계곡 길에 지나는 이 없어서(雪深溪路無人過)
솔 아래 바위 문은 항상 닫혀 있겠지(松下巖扉盡日關)

염 스님은 백운산에서 수행한 고승이다. 이들의 교류가 얼마간 뜸했던지 염 스님이 백운산에서 수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스님이 보낸 편지에서 알았다는 것이다. 백운산은 깊은 산중이다. 한겨울 눈까지 덮였으니 더욱 인적이 드물었을 터다. 그러므로 솔 아래 사립문이 닫혔을 것이란 말에서 염 스님이 선승임을 짐작할 수 있다. 아무튼 고려 말에서 조선 전기의 격동기를 살았던 이원은 승려들과의 교유에서 무엇을 위안 받았으며 무엇을 소통했던 것일까. 바로 학문적 성향이나 정치, 이념, 가문, 신분은 다르다 할지라도 따뜻한 인간애는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실로 이들이 나눈 소통과 배려의 따뜻한 온기는 이 글을 연재하는 내내 가슴을 따뜻하게 한 빛이었다. 그동안 거친 글을 읽어 주신 독자 제위들의 인내심에 경의를 표한다.

윤호섭 기자  sonic02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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