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 대장정 마친 현장법사 일행

부처님께 〈무자지경〉 받아
하계에 찢어 뿌림은 가르침이
세상 곳곳에 있음을 의미

알고 보니 타고 갈 것도 없습니다. 영취산의 뛰어난 경치 감상하며 조금 오르니 바로 정상이요, 거기 꿈에도 그리던 뇌음사가 있습니다. 우리 모두 현장법사 따라 들어가 부처님 뵈옵는 거지요? 첫번째 두번째 세번째 산문을 지날 때마다 “당나라 성승이 경전을 구하러 이곳에 왔습니다”라는 사대금강의 알림이 부처님 앞에 전해지고, 드디어 일행 모두 부처님 앞에 오체투지 예를 표합니다. 지극한 공경과 찬탄의 마음을 담아 아룁니다.

“제자 현장 왔습니다. 동쪽나라 황제의 뜻을 받들어 경전을 구하러 왔습니다. 중생을 구제하려는 뜻 어여삐 여기시어, 큰 은혜를 베푸소서!”

부처님 만면에 웃음을 띠시고 이르십니다.

“참으로 큰 고생을 하였구나. 그리하여 여기까지 왔구나…내 그대들의 노고를 찬탄하며 오묘한 가르침을 담은 경전을 내리노니 그것을 가지고 가서 중생을 구하는 큰일을 펼치도록 하거라. 다만 그 땅의 중생들이 어리석고 고집이 세어 이 위대한 가르침을 쉽게 알아보지 못할까 걱정이로다.”

그리곤 아난 가섭에게 경전을 주라 이르시니 두 존자, 일행을 경전이 보관된 전각으로 안내합니다. 그런데 결정적인 순간 두 존자가 손을 내미네요.

“설마 맨손으로 오신 것은 아니지요? 저희들에게 줄 선물을 좀 내놓아 보십시오. 그래야 경전을 드리지요.”
참으로 당황스런 순간입니다. 그 고생하며 오는 여정에 무슨 선물준비까지 했겠습니까? 그런데 두 존자는 정말 집요하게 선물을 요구하며 이죽거립니다.

“오호? 그렇게 빈손으로 경전을 전한다면 후인(後人)들은 굶어 죽을 겁니다”.

이런 작태에 손오공 분기가 치밀어 바로 석가여래한테 가서 직접 받아가자고 하니 그제야 마지못해 경전을 내어 주네요. 그래서 말에 싣고 봇짐으로 짊어지고 나와, 석가여래께 감사의 인사 여쭙고, 돌아가는 길을 힘차게 출발합니다.

그런데 정말 큰일이군요. 두 존자가 내어준 경전은 글자 없는 경전[無字之經]이었네요. 선물을 안 주어서 심통을 부린 것인지는 몰라도…. 연등고불(燃燈古佛)께서 이 사태를 알아채시고 웃으며 말씀하십니다.

“동녘 땅의 중생들이 우매하여 글자 없는 경전을 알아보지 못하면, 성승이 헛걸음하는 것이 되고 마는 것 아닌가?”

그래서 백웅존자라는 분을 시켜 글자 없는 경전을 회수하게 합니다. 백웅존자 잽싸게 구름타고 달려가 경전을 탈취하여 달아나니,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 기겁을 하여 추격하지요. 급해진 백웅존자 경전을 쌌던 보자기를 찢어버리고 경전을 티끌세상으로 던져버렸지요. 떨어져 내린 경전 주워들고 보니 글자 없는 경전이네요. 그래서 아난 가섭 두 존자를 욕하며 석가모니 부처님께 돌아와 하소연을 하면서 새롭게 경전을 내려 주십사 청합니다. 그 때 석가모니 부처님의 말씀에 많은 뜻이 담겨 있습니다.

“경전은 가벼이 전할 수도 없고 또 공짜로 얻을 수도 없는 것이니라… 너희들이 빈손으로 와서 가져가려 하니 빈 책을 준 것이다. 빈 책이란 ‘글자 없는 참된 경전’이니 도리어 참으로 훌륭한 것이다. 그렇지만 너희 동토 중생들이 우매하여 깨닫지 못할 터이니, 이제 이것(글자 있는 경전)으로 전할 따름이니라.”

그렇습니다. 글자 없는 경전은 단순히 가짜 경전이 아닙니다. 연등고불이 말씀하셨고 석가모니 부처님이 다시 말씀하셨듯이, 단지 우리 중생들이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 문제일 뿐 본디 참된 경전이 바로 글자 없는 경전입니다. 최상의 진리가 어디 글자로 표현될 수 있는 것이던가요. 모든 가르침은 달은 가리키는 손가락이라는 말은 많이 들어보셨지요? 경전의 문자들은 단지 손가락일 뿐입니다. 달은 손가락을 넘어서 있지요. 마찬 가지로 진리는 문자를 넘어서 있습니다. 그 문자를 넘어서 있는 최상의 진리를 바로 글자 없는 경전으로 상징화한 것이지요. 그렇지만 우리들은 손가락이라는 매개를 통해서만 달을 볼 수 있고, 글자라는 매개를 통해서만 진리를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근기가 문제이지요. 그런 점에서 아난 가섭 두 존자에게는 책임이 없다? 그런 말은 아닙니다. 우리 중생들이 우매해서 글자 없는 경전을 알아보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준 데는 역시 심통이 좀 끼어 있다고 보아야 할 듯 하네요. 하하.

다행이 연등고불께서 알아채시고 사단을 벌이셔서 다시 경전을 바꾸어가게 되지만, 서유기의 이 대목은 삼쾌선생이 보기엔 좀 밋밋합니다. 삼쾌선생이 서유기를 쓴다면 이 대목을 좀 극적으로 바꾸어 보고 싶네요. 백웅존자가 글자 없는 경전을 탈취하니 손오공 삼형제가 추격한다. 백웅존자 보란 듯이 구름 위해서 글자 없는 경전을 산산이 부수어서 하계로 뿌려버린다. 그리고 유유히 사라지신다. 손오공 삼형제 떨어지는 경전 조각을 보니 글자 없는 것을 알아채곤 다시 돌아와 경전을 바꾸어 간다. 이렇게 쓸 것 같아요. 뭐가 다르냐구요? 글자 없는 경전을 부수어 하계로 뿌린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은 것입니다. 지금 제가 가지고 있는 서유기 판본에는 단지 “보자기를 찢어 경전들을 티끌 속으로 던져버렸다”고 간단히 묘사하고 있거든요.

삼쾌선생 식으로 고쳐 쓰면 어찌되느냐…. 글자 없는 참된 경전이 우리 이 세상 속으로 부서져 들어와 있다는 의미가 두드러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단지 오탁악세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글자를 넘어선 참된 가르침이 담겨져 있는 세상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 속에 담겨진 글자를 넘어선 진리를 찾는 마음, 이 마음으로 세상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실은 제가 대학 재학시절에 읽었던 서유기는 이런 묘사가 있었다고 기억하는데, 지금은 그러한 묘사가 되어있는 판본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이제는 정말 정말 끝났습니다. 글자 있는 경전으로 바꿔가지고, 예정된 재난의 숫자를 채우기 위한 마지막 재난도 가볍게 넘기고, 팔대금강의 인도로 바람타고 구름타고 당나라로 돌아옵니다. 정말 금의환향인 셈인가요. 당태종의 융숭한 환대 속에 경전을 안탑사라는 절에 봉안하고, 필사본도 만들어 널리 배포하게 되지요. 이런 큰 공덕을 읊은 서유기의 시구를 한번 직접 음미해볼까요?

서쪽 끝 인도에서 자비의 구름 끌어와
동쪽 끝 중화대국에 불법의 비를 내려 주었네.
성스러운 가르침 빠진 부분 있던 것 온전해 지고 중생들 죄업을 지었으나 다시 복을 받게 되었구나.
……
이 경전 널리 유포되어, 해와 달과 같이 다함없고 큰 복 멀리 전해져, 하늘땅과 같이 크고 영원하기를!

그 큰 복이 멀리 전해져 지금 우리들이 그 복을 누리고 있다는 감동, 저와 여러분 함께 느끼고 있는 것 맞죠? 나칠계님까지도 느끼고 있는 거 맞죠? 맞죠? 우리 모두 만세를 부르고 싶은 마음이죠? 현장법사 만세! 손오공 만세! 저팔계 만세! 사오정 만세! 용마도 만세!

역사적 사실로 말하면 이야기가 여기서 끝나야 되겠지만, 서유기는 단순한 사실을 말하는 이야기가 아니지요. 한 편의 수행기지요. 수많은 요괴들은 수행과정의 장애일 경우가 많았구요. 그런 모든 장애 물리치고, 육체마저 넘어서는 그 험한 과정을 모두 겪었죠. 그리고 마지막 경을 전하는 임무까지 마쳤다 함은? 수행의 궁극에 도달했다는 의미겠지요? 그렇다면 그 궁극은 무엇일까요? 답은 다 알고 계시는 것! 바로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야 서유기의 이야기는 조금 더 이어집니다. 중국에서 황제에게 경을 강설하려던 현장법사를 팔대금강이 영취산 뇌음사의 부처님 앞으로 다시 모셔 갑니다. 부처님 다시 현장법사 일행을 공로를 치하하시곤 모두 그에 걸맞는 정보(正報)를 내려주십니다. 우선 현장법사.

“그대는 원래 전생에 내 제자였는데 나의 큰 가르침을 소홀히 하여 그 죄로 동녘 땅에 태어났는데…. 내 가르침을 잘 지키고 불경을 전하는 큰 공덕을 세웠으니…. 그대를 전단공덕불(?檀功德佛)로 삼노라!”

다음은 손오공. “……늘 변함없이 요괴들을 물리쳐 공을 세웠으니…… 그 정과를 인정하고 투전승불(鬪戰勝佛)로 삼노라!”

다음 저팔계는 “……기특하게 불교에 귀의하고 삼장법사를 잘 보호하였다. 그렇지만 아직 어리석은 마음이 남아 있고 욕정도 끊지 못하였다. .…… 너를 정단사자(淨壇使者)로 삼노라!”

사오정은, “……네 정과를 인정하고 금신나한(金身羅漢)으로 삼노라!” 마지막으로 용마! “너의 직책을 올려 정과를 인정하고 너를 팔부천룡(八部天龍)으로 삼노라!”

이리하야, 이리하야…. 현장 일행이 모두 공적을 인정받고 부처님 가문의 중요한 자리에 오르는군요. 그 가운데 저팔계가 “왜 저만 격이 낮은 사자(使者)입니까?” 하고 불만을 표하지만, 부처님 한 말씀에 헤벌쭉하지요. “네가 입만 살고 몸은 게으른데다 밥통만 크지 않으냐? 정단사자는 불사기 있을 때마다 제단을 정돈하니 마음껏 먹을 수 있는 관직 아니냐?” 하하…. 저팔계의 약점을 그대로 찔러 버리시는 부처님!

아무튼 다시 이리하야, 사람 마음의 삼독심(三毒心)이 모두 부처되는 길을 돕는 삼학(三學)으로 완성되었습니다. 모두 부처님 가문의 일꾼으로 등록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대목은 단순히 현장법사 일행이 정과를 받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우리들 마음의 모든 요소들이 성불의 도우미로 인정받는 대목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 번 크게 외쳐야 됩니다. 탐심(貪心)보살 마하살! 진심(嗔心)보살 마하살! 치심(癡心)보살 마하살! 나무 계행(戒行)불! 나무 정행(定行)불! 나무 혜행(慧行)불! 삼독심 돌이켜 삼학을 이루는 그 길, 그 길이 바로 머나먼 서유기의 여정이라는 것을 여기서 다시 확인합니다. 그리고 이 전환을 이루는 큰 과정을 내내 이끌고 가는 것이 현장법사로 상징되는 믿음의 힘과 용마로 상징되는 정진의 힘인 것이지요. 그러니 이제 여러분도 여러분 마음속의 여러 요소들을 부처되는 도우미로 삼아 큰 길을 나아갈 준비를 이루신 셈이지요. 그리고 그 시작에 이미 원만한 성취를 보여주시는 부처님의 가피 아래 원만히 불도를 성취하실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 서유기의 큰 여정의 성취에 우리 모두 함께 만만세를 외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동안 함께 해주신 모든 분들에게 그 “만만세!”를 회향하면서, 삼쾌선생 여기서 스윽~ 물러납니다. 아주 품위 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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