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유와 마음

명법 지음|불광 펴냄|1만 4천원
[현대불교=김주일 기자] 이 책은 ‘은유와 마음’ 프로그램의 밑바탕이 된 철학, 심리학, 불교, 인류학 이론을 쉽고 체계적으로 정리해 소개한다. 더불어 12편의 실제 사례 이야기를 함께 담았는데, 독자는 이 이야기들 속에서 자신의 한 조각을 발견하고 이야기 속 주인공들과 함께 치유되는 경험을 하게 될 것으로 기대된다. 세상은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이야기를 없애는 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이야기를 바꾸는 것은 가능하다.

은유 속에서 밝혀진 ‘내가 모르던 나’
우리는 이해하고 해석하면서 살아갈 뿐만 아니라 이해하고 해석한 대로 존재한다. 스스로 자기 자신이라고 믿는 바, 다시 말해 ‘나’라는 이야기에 따라 삶은 펼쳐진다. 그런데 그 이야기는 때로 우리를 억압하고 삶에 그늘을 드리운다. 은유 이야기는 무의식 속에 억압된 절박한 목소리를 드러내고, 문제에 물들지 않은 우리 안의 힘을 회복시켜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도록 독려한다. “나는 나를 넘어서 있다” 마음의 전체성을 회복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에게 주어진 권리이자 의무다.

‘은유와 마음’ 첫 번째 수업 시간, 명법 스님〈사진 오른쪽〉이 참가자들에게 묻는다. “당신을 생각하면 무엇이 떠오르나요?” 참가자들은 마음에 떠오르는 대로 아무것이나 이야기한다. “음… 앉아 있는 새요” “가시가 돋은 선인장이 떠오릅니다” “저는 열매가 안 열리는 은행나무입니다” “내 인생은 잔고가 0원인 저금통장이에요”

이제부터 본격적인 이야기가 펼쳐진다. 새는 왜 앉아 있는지, 선인장에 돋은 가시가 싫은지 좋은지, 열매가 안 열리는 은행나무 마음은 어떤지, 잔고가 0원이어서 불행한지 홀가분한지… 등등. 스님이 묻고 참가자들이 답하면서 이야기가 구체적으로 확장되고 문제의 윤곽이 점점 뚜렷해진다. 문득 떠오른 이미지서 촉발된 이야기가 자기를 숨김없이 보여주고 있음을 참가자들이 뭉클하게 실감하는 사이 이야기는 계속된다. 참가자가 왜 그렇게 아픈지, 자기가 몰랐던 것들이 왜 지금 이야기로 나오는지, 어떻게 해야 문제가 해결되는지 밝혀질 때까지. 인생은 끝없는 이야기지만, 한 사건에는 시작과 결말이 있다. 문제에 관한 이야기는 반드시 끝이 난다. 그리고 이야기가 끝남과 동시에 문제는 해결된다. “놀랍게도 이야기에는 끝이 있다. 우리의 일상은 끝이 없지만 마음의 이야기는 어느 시점에서 끝이 난다. 이렇게 종결된 사건들은 심리적으로 더 이상 그 사람에게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한다. 그야말로 지나간 과거가 된다.”

‘생의 감각’이 되살아나다
부분으로 쪼개진 마음을 불교에서는 ‘번뇌’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우리의 많은 생각들은 번뇌다. 생각과 일치하는 한 가지 관점에서만 삶을 경험하도록 우리 마음을 쪼개기 때문이다. 생각에 사로잡혀 살다 보면 1평짜리 독방에 갇힌 듯 세상과 단절된다. 실제로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감각하지 못해 삶의 풍요로움이 사라진다. 그렇게 삶은 회색빛으로 물들고 우리에게선 생기가 메말라간다.

은유와 마음 수업에 참가한 사람들 가운데 그런 사람들이 적지 않다. 세상을 경계하느라 잔뜩 움츠리고, 시야가 좁아져 있다. 때론 자신감과 긍정성이 과도한 사람들도 있는데, 그들 역시 생각의 감옥에 갇혀 있기는 매한가지다. 그런 그들이, 6회에 걸친 수업에서 은유를 통해 자기를 말과 글로 표현하면서 생각의 감옥에서 조금씩 빠져나온다. “감각의 주체로 거듭나는 여정”인 수업을 모두 마치고 나면 거의 모두가 ‘차분한 긍정’ 상태를 보인다. 확 넓어진 눈으로 말하고, 듣고, 글을 쓰고, 세상을 느낀다. 한마디로 ‘생의 감각’이 뚜렷하게 되살아난다.

자신을 멈춰버린 시계에 비유한 어느 워커홀릭이었던 사람은, 탈진되어 일을 할 수 없는 현재 상태에서 얼른 벗어나고 싶은데 그럴 수 없다며 절망했다. 스님이 그에게 말했다. “시계는 멈춰 있어도 하루에 두 번 시간을 맞힙니다. 그러니까 두 번은 살아 있는 거지요.” 이 말에 번쩍 인식이 확장된 그는, 이후 수업에서 은유의 전환이 일어나 강물이 되었다. 강물이 되어 흘러가는 대로 주어지는 걸 받아들였다. 수업이 끝나고 7개월 후, 다시 수업에 참가한 그는 이제 쉴 줄 아는 느티나무가 되어 있었다. 나무는 행복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찾아와 그늘 아래에서 놀다가 돌아간다. 그들이 떠나도 이젠 섭섭하지 않다. 밤이 되면 홀로 남아 휴식을 즐긴다. 방해받지 않고 잠을 푹 자려고 안내판을 세워두었다. “오늘은 늦었으니 내일 오세요.”

나는 나를 넘어서 있다
삶에서 우리를 가로막는 어느 사건을 만났을 때 우리는 그 사건을 넘을 수 없는 장벽이라 여기고 인생이 거기서 끝날 것처럼 미리 무릎을 꿇기도 한다. 하지만 사실 그건 장벽이 아니라 조금 조심만 하면 되는 낮은 문턱이기 쉽다. 당장엔 모든 것이 끝날 것만 같을지라도,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것과의 연결 속에서 삶은 생각 너머로 흘러가게 되어 있다.

그건 우리 자신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누구’라고 정의하고 그 정의대로 살아가곤 한다. 나는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며, 무슨 일을 하며 어떤 꿈이 있고, 이상형은 어떤 사람이고… 등등 ‘나’를 여러 가지 항목으로 규정하고 산다. 그런데 이런 것들을 통해서 ‘나’를 알 수 있을까? 그렇게 정의된 ‘내’가 나의 ‘전부’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아니다. ‘나’는 내가 파악하고 있는 것 너머의 무수한 것들과 연결되어 있는 무한한 가능성의 존재다. “요컨대 나는 나를 넘어서 있다. 그것은 복잡하고 미묘해서 뭐라 말할 수도 없고 일상적 삶의 차원을 넘어서지만 동시에 일상 속에서 만나는 것이다. ‘나’는 어떤 특정한 ‘나’로 정의되기에는 부족하거나 넘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를 어떤 것으로 정의하는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닐까? 그것을 어떤 고정된 것, 다시 말해 정체성으로 정의하는 관점을 바꾸어 본다면 ‘나’에 대한 전혀 다른 시각을 가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인생은 다시 쓸 수 있는 이야기
우리가 ‘나’라고 믿고 있는 것은 사실 습관과 관계의 패턴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 패턴은 우리가 삶에 부여하는 의미, 다시 말해 우리가 써나가고 있는 ‘삶이라는 이야기’에 의해 상당 부분 결정된다. 따라서 그 이야기가 달라지면 ‘내’가 바뀌고 ‘삶’이 달라진다. 삶은 다시 쓸 수 있는 이야기다.

은유는 삶이라는 이야기를 다시 쓸 수 있게 해주는 유용한 수단이다. 물고기가 물을 볼 수 없듯이 우리는 삶이 이야기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는데, 은유를 이용해 자기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순간 우리는 자기가 곧 이야기라는 사실을 직감하게 된다. 이는 먼저, 이야기를 쓰는 행위가 자기와의 거리를 두는 시도이기 때문이며, 다음으로, 은유가 우리의 의식과 무의식을 두루 드러내는 기능을 하기 때문이다.

은유를 통해 내 이야기를 쓰면 ‘나’는 은유 뒤로 숨을 수 있는데, 여기에서 오는 안전감 덕분에 역설적으로 우리는 자기를 숨김없이 드러내게 된다. 더군다나 은유는 우리의 무의식과 맞닿아 있어서 의식 수준의 것들뿐 아니라 무의식 수준에 존재하는 것들까지 모조리 드러난다. 이를 통해 우리는 미처 몰랐던 절반의 진실, 억눌려 있던 무의식의 목소리, 숨겨져 있던 반쪽의 자기 이야기를 만나게 된다. 만나는 데서 끝나는 게 아니다. 은유를 읽고 말한다는 것은 이전과 다른 관점으로 자신의 세계에 참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은유는 우리에게 세계를 보는 새로운 눈을 제공한다. 은유를 통해 개념과 사고가 재배열되고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가 바뀐다.” 접근할 수 없었던 것, 즉 무의식에 접근하여 그 이야기를 쓰고 새롭게 창조해내는 은유의 힘. 바로 이 힘의 도움을 받아 우리는 삶을 확장하고 새롭게 쓰게 된다. ‘은유와 마음’ 수업은 은유의 바로 이런 기능에 주목해 고안된 이야기치료 프로그램이다.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