禪과 현대미술- 케네스 놀란드 (Kenneth Noland)

Untitled〉는 마음을 관조하는 방식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원형작품 중 하나이다.
기하학적인 형태들은 어디에서 오는가? 인위적인 의도에 의하여 만들어진 도형들은 색채와 함께 새로운 변화와 이미지를 보여주며 마음을 움직인다.

도형과 색채 통해 이미지 표현
명상 통해 새로운 정신성 관심
“집중해서 작품을 봐주십시오
지금 보이는 게 자신의 마음”


케네스 놀란드(Kenneth Noland, 1924~2010, 미국)는 초기 추상표현주의에서 사용하던 방식들에서 새로운 기하학적인 도형들을 등장시킨다. 잭슨 폴록, 드 쿠닝 등 초기 추상표현주의 작가들이 주로 표현방식으로 사용했던 행위적인 액션들에서 벗어나 명상적인 방법들을 도입하는 것이다.

미국 추상표현의 대표주자 중 한 사람인 놀란드는 기하하적인 도형과 색채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게 되는데 그 이유는 명상을 통하여 새로운 정신성에 관심을 가지면서부터다. 당시 미국 화단에 붐을 이루던 선불교에 많은 관심을 가진 그는 마음의 움직임을 포착하는 것에 관심을 기울이며 마음의 변화와 도형, 색채의 관계성에 주목한다.

“시각적인 자극에 의하여 대상이나 색채를 인식하는가? 아니면 인식하기 때문에 그러한 대상이나 색채가 인식되는가”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며 작품에 도형을 도입하기 시작한다. 그가 명상을 통하여 체험한 것은 마음이 움직이기 때문에 시각적인 자극들을 인식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일상의 삶의 과정 속에서 마주하게 되는 다양한 도형, 기호, 색채는 모두가 마음의 움직임을 포착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자신의 마음이 움직이지 않으면 주변에 있는 다양한 도형이나 기호들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도형이나 기호, 색채는 현재의 자신의 마음 상태를 보여주는 아주 좋은 도구가 되는 것이다.

빠르게 변화하는 마음을 인지하거나 표현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내면에 움직이고 있는 마음의 본질을 알아차리는 것이 중요하게 작용한다. 그 알아차림은 곧 사라지고 다시 찾아가는 과정을 계속하며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르면 무의식속에서 자신만의 기호, 도형, 색채를 만들어 간다고 생각한 것이다.

놀란드는 이러한 인식들을 표현하기 시작한다. 마치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가듯이 자신만의 도형, 색채를 통하여 마음을 관하는 방법들을 관객들에게 제시하게 된다.

〈Untitled, 1960〉은 마치 화살의 과녁과 비슷해 보이지만 사실은 마음을 관조하는 방식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원형작품 중 하나이다. 서양에 선불교가 확산이 되며 많은 사람들이 명상을 하게 되는데 초기에는 이 작품처럼 벽에 작은 원, 점 등을 붙여놓고 마음을 한곳으로 모으는 훈련을 하였다고 한다. 망상에서 벗어나 마음을 집중하기 위한 방편으로 사용된 도구들을 그는 자신의 작품으로 확대하여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집중해서 이 작품을 관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무엇이 보이는가? 보이는 것은 바로 자신의 현재의 마음”이라고 그는 말한다.

마음의 상태에 따라서 중앙에 있는 빨간색의 작은 원형이 강하게 느껴질 때도 있고 어느 순간에는 가장 큰 원을 형성하고 있는 파란색의 비정형적인 원형이 강하게 느껴질 때도 있을 것이다. 이는 모두가 자신의 현재 마음 상태를 나타내는 것이다. 무엇이 옳고 그른가의 관점이 아닌 현재 자신이 어디에 강하게 집착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집착한다는 것은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는데 하나는 본능적인 강한 욕구나 욕망 등을 나타내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무의식중에 내면에 감추어져있는 성품을 나타내는 것으로 둘이 복합적으로 현재의 결핍이나 치유를 심리적으로 나타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색채심리학에서 색은 마음의 상처와 치유를 동시에 나타낸다고 한다. 즉, 다시 말해 현재 내가 빨간색에 강한 느낌을 받는다면 이 색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는 동시에 그 트라우마에서 벗어나고자하는 강한 의지가 동시에 일어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의 흐름을 관조하는 명상을 통하여 치유와 함께 결핍과 공포에서 벗어나게 된다는 것이다.

유럽의 예술가들 역시 이러한 경향이 나타나는데 처음 명상을 시작할 때에는 벽에 작은 원형을 걸어놓고 자신의 마음을 관하는 훈련을 하였다고 한다. 필자가 독일에 유학할 당시 독일 스님이 운영하는 선방에서 수행을 하였던 적이 있는데 수행자 모두가 벽을 보고 자신의 눈으로 보기에 편한 곳에 작은 점을 찍어 놓고 관조하는 훈련을 하였던 기억이 난다. 시작하면 이렇게 2시간을 하고 30분정도 선방을 걸으며 보행 선을 하였다. 이후 모두가 차를 마시며 자신이 점을 보며 체험한 마음의 변화를 대화하는 시간을 가지며 서로의 체험을 공유하는 방식이다.

케네스 놀란드의 작품 〈Via Blues〉는 마음을 관조하여 나타나는 현상을 표현한 작품이다.
〈Via Blues, 1967〉은 마음을 관조하여 나타나는 현상을 표현한 작품이다. 각각의 색면들은 수평선을 그으며 끝없이 이어진다. 결코 만날 수 없는 평행선들은 스스로의 가치를 추구하며 서로 간섭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가는 것처럼 보인다.

수행자와 예술가가 가야 하는 길을 제시하고 있는 것처럼 볼 수 있다. 한번 길에 들어서면 앞으로 가면 된다. 하지만 자신이 가고자 하는 길을 설정하였다고 하여 바로 그 길만을 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 길에는 무수히 많은 변수들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 변수들은 그 길을 가는데 중요한 도반처럼 보이지만 때로는 그 길에서 벗어나게 하는 유혹을 하기도 한다. 때문에 자신이 선택한 길을 묵묵히 간다는 것은 무엇인가 확신이 있어서 인 것이다. 그 확신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 답은 자신만이 알고 있다.

세상의 모든 일들은 인연과 인과에 의하여 일어나고 사라진다. 자신의 인연과 인과를 알고 싶다면 지금 현재의 자신을 보면 된다. 모두가 자신이 선택한 것이고 자신이 행한 것이다. 때문에 지금 현재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이를 수용하든 하지 않든 자연의 이치는 그 굴레에 따라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놀란드는 이러한 자연의 이치와 변화의 관점을 잘 이해하였다고 보인다. 때문에 이러한 작품이 표현될 수 있었다고 보이는 것이다. 수평선은 만날 수 없다. 만날 인연이 없는 것이고 만날 인과를 만들어 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고 오직 자신이 선택한 길이기 때문이다.

서양에 선불교가 전해지면서 나타났던 특이한 현상 중의 하나가 자기중심적 사고를 하게 되는 것이었다. 즉, 질서에서 벗어나는 무질서, 욕구나 욕망을 억제하고 자제하던 것에서 벗어나 자유방종을 하는 행위들과 현상들이 나타나는데 이는 불교의 연기론과 무(無), 공(空)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서 비롯되었다. 모든 것은 정해져 있는 것이며, 모든 것은 사라진다는 허무주의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당시에 커다란 표피적 문화 흐름이었다. 자기중심적 사고를 중심으로 모든 기존의 가치들을 부정하는 이러한 현상은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사라지게 된다.

스스로가 자신의 존재가치를 깊이 있게 성찰하기 시작하면서이다. 명상을 통하여 얻게 되는 정신적 자유로움이 외형적인 자유로움보다 더욱 가치가 있다는 것을 인지하기 시작하면서부터이다.

놀란드의 작품에 나타나는 특성들이 바로 이러한 서양의 시대적 상황을 잘 드러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무질서와 방종에서는 결코 본질적인 삶의 가치를 찾을 수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작품들을 통하여 관객들에게 자신의 본래의 마음을 관조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시각적으로 보이는 색채나 도형들이 가지고 있는 특성들은 마음의 움직임을 감지하는 센서와 같은 역할을 한다. 센서가 작동을 해야 마음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감지할 수 있는 것이다. 마음의 변화는 다양한 자극과 스스로의 정화작용에 의하여 일어나며 청정한 상태에서 외부 변화에 반응하여 나타나는 것이다.

청정하다는 것은 무엇인가? 공이나 무의 상태가 아닌 적적성성(寂寂惺惺)한 상태를 말하며 비어있다고 하는 것도 아니며 없다는 것도 아니고 오직 마음을 떠나지 않는 상태이다. 이러한 상태에서 대상을 보거나 색채를 보면 어떻게 되겠는가?

본다는 것이 아닌 느끼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즉, 센서가 작동을 하여 있는 그대로를 인지하게 하는 것이며 이는 다시 사라진다.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날 때에는 다시 그 마음 그대로의 상태이다.

놀란드가 어느 정도의 깨달음을 얻었는지는 알 수 가 없다. 하지만 많은 시간 스스로 명상을 하며 청정한 상태를 찾아가고자 한 것은 그의 작품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추상미술을 감상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하나는 자신이 인지하는 만큼 보이는 것이다. 즉,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다. 여기서 안다는 것은 색채나 도형의 친숙도가 아닌 인식의 친밀함, 학습된 것을 말한다. 또 하나는 순간 번쩍이는 스파크가 일어나듯 자신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강하게 반응을 하는 경우이다. 이 경우가 본래의 청정한 상태에서 보는 것이다. 말하지 않고 도형이나 색채의 특성이 아닌 본성에서 감지하는 것이다.

서양미술에서 선과 불교가 많은 영향을 미치며 다양한 추상미술을 발전시켜 나아가는 데는 이처럼 그러한 작품을 알아보는 선지적인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현재의 현대미술은 지역적, 문화적, 정치적, 종교적 관점들을 넘어선 청정한 상태의 예술을 추구하는 커다란 흐름으로 가고 있는데 여기에 놀란드의 역할도 커다란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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