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걸 닥치는 대로 한데 흡수할 수 있어야 집어먹는다

이 마음공부 하는 사람들은 팔자 운명이 없어요.
나오는 대로 거기다가 되입력을 하니까
앞서 입력된 것이 없어지니 팔자 운명이 붙을 자리가 없어요!

성공한 인생을 살고 싶습니다
질문 누구나 그러겠지만 저도 역시 성공한 인생을 살고 싶습니다. 남들이 저를 성공한 사람으로 보기를 원하고 성공해서 여유롭고 행복하게 살고 싶습니다. 그런 생각도 버리라고 하시겠지만 자꾸 생각하고 지향해야 그쪽으로 나아가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성공하고 싶으면 그 생각조차 버려야 하나요, 아니면 날마다 목표를 생각하며 집중해야 하나요? 잠재의식의 힘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후자를 옳다고 합니다. 그래야 이루어진다고요. 뭐가 옳은 걸까요? 진심으로 성공을 바란다면요. 아니면 이 모든 저의 생각이 부질없는 것에 집착하는 허망한 건가요? 그래도 저는 성공하고 싶은데요.

답변 이런 걸 한번 생각해 보세요. 전력을 용도에 따라서 만 가지로 쓰지 않습니까? 그와 같이 자기 그릇대로 씀씀이를 쓰고 있는 겁니다. 가정집에서는 전기를 얼마 쓰고, 또 공장에서는 모터를 돌려야 되니까 얼마를 쓰고, 용량을 아주 자유스럽게, 여러분도 마찬가지로 다 쓰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그걸 쓸 줄을 모른다는 얘깁니다. 왜냐하면 무명 때문에 이 색(色)을 보고 너무도 취하는 겁니다. 사랑, 성취, 욕심, 착 이런 걸로 인해 하나서부터 열까지 끄달리는 겁니다. 그러니 그걸 알 수가 있나요? 그래서 모든 것은 바로 그것을 포함해서 “거기서 나오는 거 거기다 놔라.” 하는 것입니다.

이런 말을 하면 여러분은 이렇게 묻겠죠. “어떻게 놓습니까? 아니, 사람이 사는 데 놓고 어떻게 삽니까? 사랑도 할 수 없고 돈도 가질 수 없고, 다 버리게 되면 뭘 가지고 삽니까?” 이러거든요. 누가 사랑을 하지 말랬나요, 돈을 갖지 말랬나요? 다만 사람이 누구나가 다 육신이 자기 실참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자기 육신을 이끌고 다니는 자기 주인 자체가 바로 실참이요, 실상이라는 것을 우리가 분명코 안다면 그 용량을 필요한 대로 아주 멋지게 쓸 수 있다는 거죠.

예를 들어서 회사를 하든지 장사를 하든지, 가정에서나 무엇이든지 그렇습니다. 어떤 걸 해냈어도 내가 이걸 다 했다, 내가 해냈다는 생각도 없이 그냥 놓고 또 딴 거를 합니다. 이 용량의 기계를 썼으면 그 스위치는 자동적으로 꺼야 합니다. 꺼집니다. 쉬니까. 딴 일을 하려면 그거를 또 돌립니다. 안방에서 불을 켜고 쓰다가 거기 사람이 있지 않으면 불을 끕니다. 끄고 이쪽으로 또 와서 불을 켜고서 또 씁니다. 이해가 가십니까?

이것이 우리들의 생활, 하나하나 놓고 가는 방법 그대로입니다. 그대로 놓고 갔는데도 불구해 놓고 놓을 수가 없다고 그러는 겁니다. 왜 여러분이 놓을 수가 없다고 그러는지 난 모르겠습니다. 하나 하고 나면 돌아서서는 딴 거 하고, 그것은 놓고 벌써 또 딴 거 하면서도 놓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여러분들은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다 걸려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놓고 가야 하느냐. 그 용도에 따라서 아까 씀씀이를 쓴다고 했는데 거기는 얼마든지 내 그릇대로의 용량을 쓸 수가 있지 않겠습니까? 전기를 지금 쓰고 있듯이. 자기의 살림대로, 차원대로, 생활 수준대로 씀씀이가 크면 큰 대로 작으면 작은 대로 우리는 그대로 놓고 지금 돌아가는 겁니다.

하여튼 공부하는 과정에서는 자기가 성공을 꼭 해야겠다 하고 생각하는 것도 주인공을 믿고 나갈 수 있는 재료가 되기도 하는 거니까, 일체를 모두 놓는다는 생각 없이 그냥 놓고 ‘너만이 할 수 있어.’ 하고 주인공에 맡겨 놓고 몸은 부지런히 뛰어 보세요. 그것을 할 수 있어야 이런 생각 저런 생각에 걸리지 않고 진정 자재로이 사방이 탁 터지게끔 되는 것입니다.

상대가 저를 많이 힘들게 합니다
질문 사람이 싫다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또 나쁜 사람은 과연 얼마만큼 용납이 될 수 있을까요. 인간이 인간을 용서하는 기준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어떤 사람의 비상식적인 행동이 저를 많이 힘들게 합니다. 그 사람의 마음이 뻔히 보이기에 더욱 괴롭습니다. 차라리 마주치지 않았으면 좋으련만 부딪치고 나면 나름대로 안정되었던 마음이 다시 미움으로 가득 찹니다. 아직도 멀었다 생각하면서 무시해도 마음이 쓰이기는 별반 다를 것이 없습니다. 이것도 내 업보다 하면서 내내 다스려 보려 하지만 이내 가슴이 답답해집니다. 용서나 이해 이런 것에도 기준이 있지 않을까요?

답변 우리가 생활 속에서 모든 일을 할 때 자기 몸뚱이가 하는 게 아니라 자기 주인공이 하는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어떠한 거든지 자기 내면의 주인공이 하지 않는 게 하나도 없어요. 그거와 같이 지금 차가 놓여 있는데 모든 차들은 운전수가 하지, 이 차가 운전수를 몰고 다니는 법은 없어요. 그와 똑같습니다. 이 몸뚱이를 끌고 다니는 주인공이, 자기 몸뚱이를 끌고 다닌다면 운전수가 차 끌고 다니는 거와 같기 때문에, 그 차가 고장이 나면 운전수가 고쳐서 끌고 다닙니다. 딴 사람이 해 주지 않습니다. 꼭 운전수가 차 고치는 데를 가든지 손수 고치든지 그렇게 해서 끌고 다닙니다.

그와 같이 내 몸뚱이를 내가 끌고 다니는 거와 같은데, 그 주인공이란 수억겁 광년으로부터 진화되면서 끌고 온 장본인입니다. 운전수가 지금 현재만 운전수가 아니라, 과거도 운전수였고 지금 현재도 운전수고 미래도 운전수요 영원히 변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운전수를 믿고 일을 하면서도 어떠한 생각이 나면은 거기다가 맡기세요. 일하면서 불화증이 일어나도 ‘그것도 당신밖에 해결할 수 없어.’ 하고 거기 놓고요. ‘해 주세요’ 가 아닙니다, ‘할 수 있다’지. 여유가 있으면 앉아서도 생각나면 거기다 놓고, 물통을 가지고 가면서도 거기다 놓고, 일상생활에 어느 시간을 정해 놓지 않고 시시때때로 나오는 대로, 용도에 따라서 닥치는 대로 거기다 놓고 ‘거기서만이 이끌어 주고, 거기서만이 해결해 주고, 거기서만이 낫게 해 주고, 거기서만이 화목하게 한다’고 생각을 하셔야 합니다. 사실이 그러니까요. 그 생각이라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그리고 또 이런 거 보셨죠. 큰 얼음덩어리가 있는데 끓는 물 한 바가지를 갖다 부어 보십시오. 잠깐 그 거죽만 녹는 듯했다가 다시 끓는 물 한 바가지 부은 것이 되얼어서 같이 두더기가 돼 버려요. 안 그럴까요? 그러니까 모든 것을 몰락 그냥 놔 버리면, 봄이 오면 끓는 물 한 바가지 떠 가지고 다니지 않아도 그 딴딴한 얼음은 스스로 녹을 거라 이겁니다. 그래서 금방 속상하고 힘들어도 주인공에 넣어 한번 돌려놔라 이거예요. 그러면 찔러 죽이리만큼 속이 상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스르르르 봄이 와서 얼음장 같은 그 딴딴한 마음이 다 녹아 버리는 겁니다. 이걸 말로만 듣고 가서 ‘그냥 그러더라’ 이렇게 이해만 하고 돌아가지 말고 실천에 옮겨 보시라 이겁니다.

내가 실천을 한번 해 본다면 벌써 스스로서 알게 되고 절대로 부처님은 거짓말을 안 한다는 걸 실감하실 거다 이겁니다. 그렇게 해 감으로써 내 안의 주인공에 대한 믿음이 조금씩 조금씩 생겨나서 일상생활 속에서 다가오는 모든 문제를 주인공에 믿고 맡겨 놓을 수 있을 때, 이제는 어떤 어려운 일이 발생하더라도 모든 것이 주인공 안에서 나를 공부시켜서 반석에 올려놓기 위해서 이끌어 주는 것임을 알게 될 겁니다.

주인공의 의미를 알고 싶어요
질문 안녕하십니까. 제가 여쭤 보고 싶은 것은 큰스님 책에 써 있기를 생명의 근본을 주인공이라 한다는 것이 있었고, 다른 곳에서는 몸과 업식과 생명의 근본이 합친 것이라고 돼 있었는데 어느 것이 맞는 것인지요.

답변 주인공은 움죽거림과 마음 내는 거와 근본과 그렇게 세 가지가 한데 합쳐서 여러분 개개인이 돌아가는 거를 주인공이라고 합니다. 그럼 여러분 모두가 다 주인공이죠. 여러분이 다 부처님이시듯이 말입니다. 주인공은 시공을 초월해서, 안에도 시공을 초월해서 돌아가거니와 밖으로도 더불어 같이 돌아가고 있습니다. 여러분 육신 속에 천차만별로 모습이 돼 있고, 천차만별의 의식에다 생명들이 헤아릴 수 없죠. 그런데 그 개체 하나가 세계와 같다 이겁니다. 몸속에도 세계가 지금 돌아가고 있습니다. 공장이 돌아가고 세계가 돌아가요. 그런데 그 한 공장이 만약에 침체되고 부도가 났다 이런다면은 사람의 몸, 집 자체가 쓰러지게 되죠.

그러니까 그런 거를 한번 냉정하게 판단을 해 보세요. 몸뚱이 자체가 나만이 사는 내 것인가. 더불어 같이 살죠. 그러고도 쉬지 않고 돌아가고 고정됨이 없기 때문에 이름을 주인공이라고 하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수억겁 전부터 진화돼서 온 그 모습을 자기 육신 속을 들여다보면은 다 알 수 있을 겁니다. 인과로 인해서 바로 자기한테 인연이 돼서 자기 영혼 근본과 더불어 부모의 정자 난자를 빌려서 태어날 때 바로 같이 해야만이 한 개체의 덩어리가 되니까요.

그리고 거기 또 한 가지를 빼놓을 수 없는 게 뭐냐 하면 그렇게 작으냐 크냐, 많으냐 적으냐에 따라서, 자기가 과거에 살아나온 그 차원에 따라서 이 몸속에 인과성이 더 많으냐, 영계성이 더 많으냐, 유전성이 더 많으냐, 세균성이 더 많으냐, 업보성이 더 많으냐 이 다섯 가지의 문제가 거론되고 있습니다. 작으냐 크냐에 따라서 다를 뿐이지 누구나가 다 있습니다. 왜냐. 과거에도 이렇게 살았으니까요. 알고 살고 모르고 살고 하는 그런 것은, 그 자체가 바로 컴퓨터와 같이 자동적으로 입력이 되고 입력된 것이 자동적으로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팔자 운명이라고 하죠. 그런데 이 마음공부 하는 사람들은 팔자 운명이 없어요. 나오는 대로 거기다가 되입력을 하니까 앞서 입력된 것이 없어지니까 팔자 운명이 붙을 자리가 없다 이 소립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진짜 이런 공부 하는 인연을 한번 만나기가 어렵다는 것을 생각하고 열심히 하십시오

행복이란 무엇인지요
질문 저는 직장 생활을 20년 넘게 하고 있는 여자 법우입니다. 매일매일 똑같은 나날들이 계속되는 것 같아 문득 인생이 허무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더욱이 아직 결혼을 하지 않고 혼자 살다 보니 매일매일이 너무 단조롭기도 하고 과연 내가 제대로 살고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너무 타성에 젖어 있어서 그렇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렇다고 어떻게 변화를 시도해야 좋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남들은 너무 편하다 보니 배부른 소리 한다고 할지 모르지만 저는 저대로 심각하답니다. 남들처럼 가정을 갖고 싶기도 하지만 그것도 마음대로 잘 안되는군요. 조개껍질에 갇혀 있는 것처럼 답답하기도 하고 외롭기도 합니다.

궁극적으로 모든 인간이 바라는 행복이란 과연 어떠한 상태인가요. 현실에 만족하고 항상 즐거운 마음으로 사는 것, 자비로 모든 사람을 대하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닌 것 같으면서도 잘 안되는 것 같아요.
답변 생활을 할 때에 어떻게 해야만이 우리가 늠름하고 좀 여유 있게 살 수 있는가. 여러분이 자랄 때 빼고 늙은 후를 빼고 살면서 얼마나 행복을 느꼈습니까? 이것저것 잘못되고 이것저것 걱정하는 것 빼고 이것저것 다 빼고 나면 행복이란 그저 소수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늘이 무너진다 하더라도 놀라지 않고 겁내지 않고 밀고 나갈 수 있는 그 패기가 자기를 즐겁고 행복하게 해 줍니다.

마음이란 너무나 광대하고 무변해서 마음이란 이름을 하나 가져 보지만 마음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얼마나 많은 마음을 씁니까. 그래서 마음은 없는 게 마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 너무 많이 있어서, 그리고 돈도 안 내고 쓰는 마음이라 그저 아무렇게나 그냥 있는 대로, 생각나는 대로 막 해 버립니다.
그러나 그게 아닙니다. 부부지간도 자식지간도 모두 누구나가 대신 살아 주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파 주고 깨달아 주고 잠자 주고 똥 눠 주고 또는 밥 먹는 거 대신해 주는 거 보셨습니까? 그러니까 항상 제각기 모두 마음을 연구해 봐야 되는 겁니다.

예전에 어떤 시인이 봄을 찾아 밖으로 헤매다가 찾지 못하고 집에 돌아와 보니 집에는 복숭아꽃이 만발해 있었다고 합니다. 저 산 너머에는 행복이 있다고 미루어 짐작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내일에는, 내달에는, 내년에는…’ 이렇게 내일과 저곳에다 희망을 걸고 사람들은 고된 현실을 살아나가기도 합니다만 그것은 거짓 희망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늘이 바로 어저께에는 내일로 불리었으며, 그때 오늘은 얼마나 아름답게 보였던 것입니까. 그러나 그 아름다워 보였던 그날이 오늘로 된 지금 사람들은 오늘 속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지 못하고 또다시 내일을 기다립니다.

내일과 저곳만을 바라고 사는 사람들, 그들은 행복해질 수가 없습니다. 진리를 저 먼 어느 곳에 있다고 믿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도 결코 진리를 만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진리는 선지식들에게만 있다고 믿고, 진리는 먼먼 훗날에야 있으며, 저 우주 끄트머리의 어떤 신비스런 나라에만 있다고 믿는 이들은 진리를 기다리기만 하는 사람이지 진리를 자기 것으로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지 못합니다.

밖에서 봄을 찾던 시인은 자기 집에서 그것을 만났습니다. 그와 같습니다. 먼 내일이 아닙니다. 바로 지금입니다. 어떤 위대한 스승이 아닙니다. 바로 나 자신입니다. 그 위대한 스승이 위대해질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스승 자신의 마음을 통해서였습니다. 그러니 내가 그처럼 되기 위해서는 나 또한 나의 마음을 되돌려야만 합니다. 선은 매우 쉬운 것 같으면서도 매우 어려운 것 같습니다.

내일이 있는 자유스러움을 얻으려면
질문 한 해가 저물고 새해가 밝아옵니다. 그런데 저희들 앞에 펼쳐진 삶은 암울하기만 합니다. 위정자의 잘못된 처신 때문에 수없이 많은 국민들이 촛불을 들고 주말이면 광화문 앞을 가득 메우고 있으니 말입니다. 새해에는 마음공부를 하는 저희들이 어떻게 마음을 내야 암울한 어둠을 거둬 버리고 내일이 있는 자유스러움을 얻어서 이 나라가 부강해지고 국민 모두가 힘들어하지 않고 하루하루를 희망차게 살아갈 수 있을까요?

답변 본래 우리는 어저께도 없고 내일도 없이 살고 있습니다. 금방 무슨 말을 했는데 금방 없어졌으니 벌써 과거가 됐습니다. 그래서 일 초 전도 과거인 것이죠. 어떤 분들은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기에 팔자 운명이 이럴까.’ 하고 한탄하는 분들이 계시는데 그건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일 초 전도 과거라는 거를 알고 내가 천차만별로 공했다고 돌린다면 자유스럽게 마음을 쓸 수 있거든요. 움죽거리지 않는 데를 뚫고 깨뜨리려면, 그리고 내일이 있게 살려면 그렇게 해야 된다는 얘기입니다.

우리 마음에 움죽거리지 않는 주장자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까지도 깨트리고, 또 나와서 이 우주의 움죽거리지 않는 데까지 결과적으로 뚫으면 그냥 자유인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이란 말입니다. 이름은 많습니다. ‘그 선을 넘어야 한다. 깨트려야 한다. 증득해야 한다. 깨달아야 한다.’ 근데 말이 무슨 소용 있습니까. 말이 무슨 소용 있느냐고요. 지금 내가 묵묵히 실천하는 게 문제인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내일이 있는 자유스러움을 맛보려면 그 움죽거리지 않는 것까지 치고 넘어가야 된다는 얘기입니다.

옛날에 덕산 스님이라는 고승이 계셨는데, 대선사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뛰어넘게 하려고 바리때 들고 척 나갔더니 대중들이 시간도 안 됐는데 왜 왔느냐고, 종도 안 쳤는데 왜 왔느냐 이겁니다. 그러니 말 다 했죠, 뭐. 말이 뭐 이어지기나 해요, 어디? 시간도 안 되고 종도 안 울렸는데 왜 나왔느냐, 어청거리느냐 이 소리인데. 그러니 바리때를 들고 나갔다가 ‘이거를 어떻게 무마를 해야 하느냐?’ 하는 생각에 돌아서서, 그 다음에 한판 웃는 걸로 그걸 무마를 시켰지만,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지도 못한 그 사람들이 어떻게 말후구를 알겠습니까. 자기네들이 모르는 줄 모르고 저 스님이 말후구를 모른다 이거예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도리를 모르는, 자기 앞도 채 못 가리는 사람이 어떻게 말후구를 아느냐는 얘기죠.

참, 예전에 선사들께서는 그렇게 마음 도리를 가르치기 위해서, 뛰어넘어 가게 하기 위해서 기왓장을 갈아서 면경을 만든다고 하기도 하고 별짓 다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해서 드물기는 하지만 그거를 정말 알아듣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둥그렇게 그려 놓고 “여기 들어오면 넌 죽는다.” 이러니까 스르르 발로 지우고선 그냥 들어가더라는 거죠. 그러니까 그렇게 묘미가 있고 그렇게 허공 길을 아는 사람이라야 허공 길을 묻지 않고 들어갈 수가 있지 어떻게 묻지 않고 들어갈 수가 있나요? 그러니까 그건 물어서 될 일도 아니고 또 안 물어서 될 일도 아니죠.

그러니까 차츰차츰 점수 행을 하면서 생활 속에서 모두 공식한다면 공생으로서 공심이 되고 공체로서 공용을 할 겁니다. 즉 말하자면 공생을 알면 공심을 알고 공심을 알면 공체도 알고 공체를 알면 바로 공용도 알고 공용을 알면 공식을 안다는 거죠. 안이비설신의 자체가 한데 합치면 원식이 됩니다. 이게 공식이죠. 먹는 것만 공식이 아닙니다. 먹는 것만 가지고 공식이라는 게 아니라 모든 걸 닥치는 대로 내가 한데로 흡수할 수 있어야 집어먹는 게 되겠지요. 체가 없는 거를 만 개를 집어넣으면 어떻고 수만 개를 집어넣으면 어떻습니까. 그게 두드러집니까? 그래서 마음에다가 수만 개를 집어넣어도 두드러지지 않고 꺼내도 줄지 않는다고 했던 거죠. 마음은 그렇게 무궁무진한 겁니다.

여러분이 지구라고 말하지만 그게 우리 생명들이 살 수 있는 주머니인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스님이 “병 속에 새를 한 마리 길렀는데 병은 그대로 있고 새는 커졌으니 어떻게 그걸 꺼낼 수 있겠느냐?” 하셨다지 않습니까. 공부하는 수좌들이 그걸 꺼내지 못해서 애를 쓰고 다니다가 끝을 못 보고 그러는 사람들이 많죠. 왜 끝을 못 보겠습니까. 글쎄 자기 몸이 병 속인 줄 모르고 말입니다. 자기 마음이 새인 줄도 모르고 말입니다. 마음대로 하라고 선언을 해 놨는데, ‘고등 동물인 사람은 그와 같이 마음대로 마음을 쓸 수 있다, 자유스럽게 마음을 쓸 수 있으니 나가려면 나가고 들어오려면 들어오고 맘대로 하라’고 선언을 해 놨는데 그것을 못하는 겁니다. 아, 병이야 고대로 있죠. 어떻게 병이 커지나요? 새가 커지면 자연적으로 나올 줄도 알아야죠. 이렇게 오글랑노글랑이 없고 지혜가 없으면 그 병에서 새 한 마리도 못 꺼내죠.

그리고 이 공부를 하는 사람들은 전자에 선지식들이 방편으로 말씀해 놓으신 거, 남전 스님이 고양이를 죽였다든가 하는 이유를 ‘이것이 무슨 뜻으로 이렇겠구나!’ 하는 걸 알아야 해요. 또 조주 스님은 짚신짝 하나를 머리에 이고 나갔다는데 그건 어떤 이치로 그랬나 하는 것도 알아야 될 거 아닙니까.

마음공부 하는 사람들은 좀 자기가 튀어나와서 자유자재할 줄을 알아야 내일도 알고 내일도 있는 거지, 그걸 자유자재 못하면 과거도 없고 현재도 없고 미래도 없는 암흑 속에서 그냥 사는 겁니다. 그걸 바꿔서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고 현재도 없다.” 이렇게 말하면 그게 아주 특별한 말인 줄 알지만 원래 그렇게 돼 있어요. 그렇게 돼 있는 그 가운데서 우리가 모두 복작거린단 말입니다. 그러니 그렇게 내일도 없고 어저께도 없고 오늘도 없는 그 가운데 주장자도 박차야 내일이 있는 세상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아주 잘 살고 있는 줄로 알지 마세요. ‘우린 주머니 안에서 꼼짝 못하고 죽으라면 죽고 살라면 살고, 그저 닥쳐오는 대로 살고 있으니 자유는 영 없구나.’ 이런 생각을 하시고 내일이 있는 자유를 한번 맛보시게끔 꼭 공부하셔야 합니다. 우리는 내일이 없고 어저께도 없는 오늘, 이 주머니 속에서 허덕이고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내일이 없고 어저께가 없는 그런 속에서 내일이 있는 세계로 벗어날 수 있다면 그게 바로 자유인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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