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승택 경북대학교 철학과 교수

K MOOC초기불교 의의와 붓다 진리관

최근 베스트셀러작 <사피엔스(2015, 유발 하라리 지음)>서 작가는 현대인들의 병리현상에 대한 최고의 처방 중 하나로 불교를 제시했다. 심리치료학자들이 종종 불교명상을 가장 효과적인 치료법으로 꼽는 현상도 늘어가고 있다. 이렇듯 부처님이 현대인들에게 건네는 치료제의 정체를 알기 위해 우리가 파악해야 할 점은 무엇일까. 임승택 경북대 철학과 교수는 K-MOOC ‘초기불교의 의의’ 강좌를 통해 “초기불교와 붓다의 진리관에 대해 간략한 이해를 지니면 불교 전반의 이해에 도움이 된다”며 사성제에 기반한 독특한 불교관을 설명했다.  정리=이승희  
 

임승택 교수는… 동국대학교 인도철학과 인도불교 전공으로 석사과정을 졸업, 초기불교 수행론으로 2001년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한국요가연수원서 10여년 동안 하타요가를 수련 지도했고 미얀마 참매센터·세우민센터 등서 여러 차례 수행 안거했다. 현재 경북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사진제공=금강신문

초기불교는 해소에 집중
독특한 방법론인 사성제 제시
현대인 우울·피로감 해소에도
불교식 심리치료 효과성 입증

현대인은 억지 행복에 지쳐
초기불교란 붓다와 그 직제자들에 의해서 주도된 불교를 일컫습니다. 초기불교가 형성된지 약 2,500년이 됐습니다. 장구한 세월이 흐른 만큼 초기불교의 유효성에 관한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과연 초기불교는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 현대인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저는 이 의문에 대한 해답은 우리가 직면해 있는 사회적 현실과 개개인 실존적 상황들을 고려하면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독일에서 활동 중인 한국인 철학자 한병철 씨는 저서 피로사회(2012)서 현대사회의 성과주의에 대해 날카롭게 비판했습니다. 한 씨에 따르면 현대사회의 특징 중 하나인 긍정성이란 덕목은 거의 모든 우리 삶의 지평에서 급속도로 부정성을 해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얼핏 긍정성이 금지와 강제를 철폐하고, 억압을 해체하며, 타자를 향한 관용을 더 많이 이끌어 내는 것처럼 보입니다. 또한 개개인에게 무한한 자유를 제공해 주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긍정의 힘이 지나쳐서 초래된 과잉 긍정성입니다. 한 씨는 과잉 부정성이 부정의 힘을 상실한 수동적 존재만을 양상할 뿐이라고 지적했습니다. 따라서 이로부터 21세기 현대인의 피곤에 지친 자화상이 탄생했다고 언급했습니다.

이어 한 씨는 인간 정신의 특별한 능력은 부정성이나 부정성의 고통을 감내해내는 것에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런 정신은 타자를 대면할 때 깨어나며, 타자의 부정성과 마주함으로써 스스로 생명력을 발()하게 됩니다. 그런데 정신이 긍정의 힘에 매몰된 상태에선 무언가를 멈출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게 되고, 현대사회의 병리적 특징인 과잉 가동·과잉 생산·과잉 커뮤니케이션이 초래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과잉 긍정성 속에서 개개인 삶은 치명적 활동 과잉과 피로, 소진 상태로 내몰리면서 자발적 동의 형식으로 긍정성을 강요당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긍정성 조류에 편승하지 못했을 경우 닥치게 될 좌절과 포기란 공포에 휘둘리고 있습니다.

21세기 초 병리적 상황을 지배하고 있는 우울증·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경계성성격장애·소진증후군 등이 모두 긍정성 과잉으로 인한 질병입니다.

부정을 긍정하는 능력
이에 한 씨는 불교전통인 참선(參禪)에 주목합니다. 참선을 자신에게 닥쳐오는 것들로부터 스스로를 해방하려는 시도로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참선을 통해 무위(無爲)를 실천한다는 것을 하지 않음이란 부정성으로 공()에 도달하려는 시도라고 파악하고 있습니다.

참선은 긍정성에 순응하는 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능동적 과정입니다. 또한 자기 안에서 어떤 주권적 지점에 도달하기 위한 연습, 혹은 자기 중심이 되고자 하는 연습이 될 수 있습니다.

붓다 가르침의 현대적 의의에 관해선 최근 화제가 된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2015)도 참고할 만 합니다. 여기서 유발 하라리는 현생 인류의 성공 배경을 다양한 각도에서 분석합니다. 그 중에서 특히 불교를 다루는 대목은 매우 주목할 가치가 있습니다.

유발 하라리에 따르면 불교 외 대다수 종교와 철학에서도 내면의 행복에 대해 언급합니다. 내면의 행복은 서구 뉴에이지 문화나 현대 생물학자들의 일치된 슬로건이기도 합니다. 책에서 작가는 많은 사람들이 불교 역시 내면의 행복을 추구하는 종교라고 생각하며 여타 단체들의 주장과 마찬가지일 거라고 짐작하는 경향이 있음을 짚어냅니다.

그러나 유발 하라리가 생각한 붓다의 심원한 통찰은 따로 있으며, 이 때문에 대다수 다른 견해들은 붓다 가르침과 거의 반대 위치에 있다고 언급합니다. 붓다가 권한 것은 외적 성취 추구 뿐만 아니라 내면의 행복과 느낌에 대한 추구 역시 중단하는 것이며, 진정한 행복은 주관적 느낌이나 감정과는 무관하다는 가르침을 설파했습니다.

작가는 쾌락의 총량을 확대시키는 방향으로 진행되어 온 인류 행복의 역사 전체가 오도된 것일 수 있다고 비판합니다. 쾌락이란 주관적 느낌을 중요하게 여기면 여길수록 우리는 더 많은 집착을 하게 됩니다. 이런 집착과 더불어 내면의 괴로움은 더욱 증폭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유발 하라리는 진정한 행복이란 특정한 감각에 대한 집착을 멈추고 어떠한 감각이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에서 얻어져야 한다고 주장한 겁니다. 그대로 받아들이는 순간에만 진정한 평화가 주어질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한병철·유발 하라리 저서와 같은 사례는 현대사회의 문제점에 대한 지적과 함께 우리에게 이를 대처하는 과정에서 불교의 역할과 기여를 생각해보게 한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불교적 대안이 21세기 사회 문제 해결 방안의 하나로 거론된다는 사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불교적 가르침이 유효하다는 증거입니다.

특히 오늘날 붓다의 가르침은 현대사회의 병리적 현상을 해소하기 위한 치유책으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서구권에 전달된 불교명상이 다양한 심리치료 프로그램으로 포장돼 한국이나 일본 등 동양권에 역수입 되고 있는 상황까지 도래했습니다.

2009년에 방한한 크리스토퍼 거머(Christopher K. Germer) 하버드대학교 심리치료학자에 따르면 불교명상은 그 어떤 치료 방법보다도 불안·우울증·공황장애 등에 탁월한 효과를 보이고 있으며, 가장 현대적이고 두드러진 형태의 행동치료로 주목을 받고 있다고 합니다.

실제로 미국에서 저명한 심리치료학잡지 사이코테라피네트웍(Psychotherapy Network)(2007. 3, 4월호)은 미국서 활동하는 심리치료사 중 40%가 넘는 이들이 불교명상을 자신들이 선호하는 치료경향으로 뽑았습니다.

초기불교의 가르침은 간단명료하면서도 구체적입니다. 이후 어떤 시기 불교에서보다도 유연하고 탄력적으로 괴로움의 대처방안을 제시합니다. 초기불교 가르침은 각 그릇의 특징에 맞게 설법을 펼치는 대기설법(對機說法)이나 그릇에 따라 즉각 변화하는 결정을 내리는 임기응변(臨機應變) 방식으로 드러납니다.

이런 방식은 시대적·지리적으로 각기 다르게 나타난 여러 지역 불교의 원형이 됩니다. 또한 불교인 뿐 아니라 일반적인 현대인에 대해서도 붓다의 가르침이 지닐 수 있는 의의는 오로지 괴로움으로부터 구제에 있습니다. 위와 같은 현상들로부터 현대인들이 다시 초기불교에 주목해야 할 충분한 이유가 생겼다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사성제, 거룩한 진리
그렇다면 이제 붓다만의 고유한 관점이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이를 알면 초기불교의 독자적 의미를 파악할 수 있을 겁니다.

붓다는 인류 역사상 무수한 종교와 사상가들이 출현해 제각기 진리를 역설했단 사실을 첨예하게 의식했던 인물입니다. 붓다는 당시까지 전해져 온 다양한 유형의 형이상학적 세계관에 정통해 있었습니다. 최초로 결집된 경전 범망경(梵網經, Brahmajala-Suttra)에서는 당시 존재한 사상을 62가지로 분류하고 이들 하나하나를 고찰했습니다. 붓다는 영혼 불멸을 주장하는 상주론(常主論죽음은 모든 것의 소멸이라는 단멸론(斷滅論조물주 창조론인 일분상주론(一分常主論) 등 형이상학적 논의에 대해 치우침 없이 반성적 태도로 일관합니다.

붓다는 이들 가운데 어느 하나를 지지하거나 새로운 견해를 제시하는 것에 목적을 두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형이상학적 추구가 내면의 탐욕·집착과 연결될 수 있음을 경고하고 경험세계를 벗어난 문제들이 심리적 요인에서 기인한 것일 수 있다고 환기했습니다. 예를 들면 불멸론은 자기 영속화를 위한 집착의 산물이며, 단멸론은 자포자기적 심리를 반영하고 조물주도 불안을 해소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다른 종류의 주장들을 타인에게 강요하려고 든다는 점이 핍박과 박해를 탄생시킵니다. 특정한 견해에 대한 요지부동한 확신과 강요가 전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초기불교 경전에서는 소박한 문구로 그대는 그릇된 길을 가는 자이고 나는 바른 길을 가는 자이다. 나의 주장은 옳고 그대의 주장은 그릇되었다고 표현할 뿐입니다.

다시 말해 붓다는 누구보다 교조적 신념체계가 가져올 수 있는 위험성을 간파했습니다. 형이상학적 견해는 증명될 수 있는 성격이 아니므로 결국 힘의 논리로써 정당화되기 마련입니다. 따라서 붓다는 경험 영역을 벗어난 문제들에 대해서는 의도적으로 침묵합니다. 붓다는 삶이 황폐해지는 주요 원인이 스스로 한계를 망각하고 독단이라는 함정에 빠지는 데 있다고 봤습니다. 이 때문에 붓다는 내면에 도사린 편견과 집착부터 가라앉힐 것을 권합니다.

45년에 이르는 붓다 설법 여정에는 깨달음에 관련된 여러 내용이 포함됩니다. 그리고 그의 모든 가르침은 사성제로 집약될 수 있습니다. 괴로움이라는 현실()과 그것의 원인인 갈애(), 괴로움이 소멸된 경지()와 그 경지에 도달하는 길()이라는 4가지 거룩한 진리가 사성제입니다. 붓다는 사성제에 대해서만 거룩한 진리라는 표현을 제한적으로 사용했습니다. 붓다는 괴로움 해소라는 현실의 문제에 주력하고 여타 사변적 견해들에 대해 차가운 태도를 유지했습니다. 바로 이 점이 다른 종교·사상가들과 구분되는 붓다만의 독특한 진리관이 드러나는 대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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