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경연 설치미술가 (61ㆍ홍익대학교 미술대 섬유미술ㆍ패션디자인과 교수)

정경연 교수는…1955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2학년 때 미국으로 유학했다. 메사추세츠 컬리지 오브 아트에서 학사를 마쳤고, 로드아일랜드 스쿨 오브 디자인에서 섬유 전공으로 대학원을 마쳤다. 1981년 백상 기념관에 첫 개인전을 열었으며, 2016년 현대갤러리 ‘정경연전’까지 30여 차례의 개인전을 열었다. 2006년 대한민국 디자인 대상 근정포장과 2008년 이중섭미술상 등을 다수 수상했다. 1980년부터 현재까지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섬유미술ㆍ패션디자인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Contemporary Fiber Art Korea> <Silk Painting-패션과 미술기법-수잔 로이스 모이어 저, 정경연 역>의 저서가 있다.

40년 장갑 작품, ‘장갑작가’
유학시절 모친이 보내준 장갑
평생 ‘오브제’로, ‘화두’로
“제 명제의 ‘無’는 무한대,
‘색즉시공 공즉시색’서 왔죠”
작품마다 불교 세계관 배어

외조부 독경 들으며 유년 보내
‘참나’ 찾기 위해 불교공부
25년간 홍대 불교동아리 지도
불교여성개발원장 소임은 ‘회향’
“어머니가 주신 장갑화두로 정진”

손을 모아 기도를 하고, 함께 하고픈 이의 손을 잡고, 어려운 이에게 손을 내밀고…. 인간의 ‘손’은 인간이 지닌 또 하나의 마음이자 표정이다. 손짓은 언어 이전의 언어로, 학습이 필요 없는 인간 본연의 언어인 것이다. 그 어떤 언어보다 진한 설득력을 가졌다. 미소와 눈물 같은 것이다. 40년 동안 장갑을 오브제로 하여 작품을 해온 미술가가 있다. 아울러 그 오래된 오브제가 만들어낸 작품에는 부처님의 생각이 진하게 배어 있다는 것이 특별하다. 설치미술가이며 섬유회화작가인 정경연 교수(홍익대 미술대학)이다.

수행이 된 예술
서울 삼청동 현대갤러리. 장갑천지다. 울긋불긋한 장갑들이 캔버스에 빼곡하게 붙어있는가 하면, 캔버스에 모인 장갑들이 블랙홀을 만들기도 하고, 쌓아올린 장갑과 장갑 사이에선 다양한 인류의 모습이 동영상을 통해 지나간다. 지난 11월 2일부터 열린 ‘정경연전’의 정경연 교수 작품들이다.

그랬다. 그녀의 오래된 오브제인 ‘손’의 실체는 장갑이었다. 정경연 교수는 40여 년 동안 장갑을 오브제로 한 작품을 해왔다. 물론 다른 오브제의 작품도 있지만 오늘의 정경연을 있게 한 것은 장갑이다. ‘정경연=장갑’이다. 그녀는 ‘장갑작가’로 불린다.

전시장에 걸린 그녀의 작품들은 모두 장갑을 오브제로 하고 있다. 한 개의 면장갑을 4개 혹은 5개의 영역으로 나누어 각각 염색을 하거나 일일이 물감으로 채색을 한 후, 다시 말리고 찌고 다림질해 캔버스에 붙이거나 설치물에 고정시키는 작업을 반복하여 완성한 작품들이다. 장갑을 한 올 한 올 풀어내 다시 핀셋으로 캔버스에 붙이기도 하고, 기둥에 붙여 쌓아 올리기도 한다. 그리고 그 기둥들을 이어 또 다른 작품을 만들기도 하며, 쌓아 올린 장갑들 사이에 동영상을 담기도 한다. 정 교수는 이러한 작업의 과정을 수행의 하나라고 했다. ‘무제’ㆍ‘블랙홀’ㆍ‘어울림’ㆍ‘하모니’ 등 그 수행이라 불리는 그녀의 미술은 어떻게 시작된 것일까.

예술이 된 어머니의 장갑
정 교수와 장갑의 인연은 1976년에 시작된다. 정 교수는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2학년 재학 중이던 1974년에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다. 두 해가 지난 어느 날, 어린 딸을 먼 이국으로 보낸 정 교수의 어머니는 고된 작업을 해야 하는 딸의 손이 걱정스러웠다. 정 교수의 어머니는 정 교수에게 작업할 때 끼라며 면장갑 한 상자를 보낸다.

면장갑을 받아본 정 교수는 가슴이 먹먹했다. 먼 타국 땅에서 새삼 알게 된 엄마의 따뜻한 마음은 정 교수로 하여금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따뜻한 모정에 대한 고마움이 일었고, 그 고마움이라는 것에서 많은 것들이 피어올랐다. 따뜻한 모정의 정표는 딸 정경연의 마음뿐만 아니라 미술가 정경연의 마음에도 물결을 일으켰다. ‘따뜻함’이라는 감동이 침잠되어 있던 작가의 예술적 모티브를 깨우기 시작했다. 수십 개의 면장갑은 수십 개의 ‘손’으로 다가왔다. 삶의 고난이 담긴 노동자의 손, 인생의 희로애락이 담긴 노인의 손, 기도하는 손, 위로하는 손, 안아주는 손 등 작품의 주제가 될 수 있는 많은 이미지로 확장됐다.

정 교수는 우선 장갑으로 어머니에게 드릴 작은 작품 하나를 만들었다. 정 교수는 어머니가 작업할 때 끼라고 보내준 장갑에 자신의 손 대신 미술가의 영감이 불러낸 손들을 넣었다. 장갑에 여러 가지 색을 주고 맞잡은 장갑들을 캔버스로 옮겼다. 장갑은 작품이 되었다. 이를 본 미국인 지도교수는 처음 보는 독특한 정 교수의 작품에 놀라며 극찬했다. 장갑은 미술이 되었다. 어머니의 장갑은 딸의 예술이 되었다. 정경연의 장갑은 이렇게 시작됐다.

블랙홀08-45 어울림2016-06 어울림2016-07
정경연의 ‘무제’는 ‘무(無)’ 아닌 ‘무한대’
유학을 마친 정 교수는 1981년, 자신의 첫 개인전을 연다. 그때, 정 교수는 장갑을 오브제로 한 작품 두 점을 선보인다. 그 작품 중 하나에는 정 교수가 어머니에게 드리기 위해 만들었던 소품도 한 부분에 들어가 있었다. 반응은 뜨거웠다. 한 마디로 ‘센세이션’이었다. 정경연의 장갑을 오브제로 한 작품은 회화와 공예라는 장르의 벽을 허물고 넘나들었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이로 인해 장갑은 정경연의 확실한 오브제로 기억된다.

정 교수는 본격적으로 장갑을 오브제로 한 작품을 시작한다. 작품의 내연과 외연 모두 확장되고 다양해지기 시작했다. 그녀의 작품 제목은 주로 ‘무제’가 많다. 그리고 ‘어울림’, ‘하모니’, ‘블랙홀’ 등도 그 연장선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저의 작품 ‘무제(Untitle)’는 ‘Nontitle’이 아니라 ‘무한한 제목’이라는 뜻입니다. 저의 ‘무’는 아무 것도 없다는 뜻이 아니라 그 무엇도 해당된다는 뜻입니다. <반야심경>에서 설하는 ‘색즉시공 공즉시색’에서 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색과 공이 하나이듯 저의 ‘무’는 ‘유’를 품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작품으로 확장시키면, 한 작품 안에서 관객들은 다양한 각자의 해석을 품을 수 있다는 것이죠. 어떤 이는 힘들었던 지난날을 떠올릴 수도 있고, 사랑했던 연인과 헤어지던 날에 가슴을 아프게 했던 손을 떠올릴 수도 있고, 따뜻한 어머니의 손을 생각할 수도 있는 것이죠. 그 모든 가능성의 모색을 위해 작품의 제목을 열어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술가 정경연의 ‘무(無)’는 어디에서 어떻게 시작된 것일까.

어울림2016-06, 162.3x130.3cm, Mixed media, cotton gloves and acrylic, on canvas, 2016
오래된 미래, 외조부의 <금강경>
‘정경연의 무(無)’의 출처를 찾기 위해선 그녀의 어린 시절을 보아야 한다. 또 그녀의 오래된 미래를 먼저 보아야 한다.

“무상심심미묘법 백천만겁난조우…개법장진언 옴 아라남 아라다.”

그리고 이어지는 <금강경>. 독경의 주인공은 독립운동가이자 초대 사회부장관이었던 전진한(1901~1972) 선생. 정 교수의 외조부이다.

정 교수는 여섯 살부터 아홉 살까지 외가에서 컸다. 정 교수의 본가는 물론이고 외가 역시 불심이 깊은 집안이다. 특히 외조부의 신심이 깊었다. 경봉 스님, 성철 스님 등 많은 선지식과도 깊은 인연을 가지고 있었다. 정 교수의 법명인 관음행은 성철 스님으로부터 받은 이름이다. 새벽이면 어김없이 외조부의 독경소리가 들려왔다. 어린 정경연은 독경소리에 새벽잠을 깨곤 했다. 할아버지의 독경 소리에 단잠을 빼앗긴 손주는 잠이 묻은 눈을 비비며 뜻 모를 <금강경>을 듣는다. 그리고 외조부의 어머니이신 외증조할머니한테 얼굴을 묻으며 칭얼댄다.

“할머니, 할아버지 염불 안하면 안 돼요?”

어린 정경연에게 새벽마다 들려오는 뜻 모를 독경 소리는 그저 단잠을 깨우는 낯선 언어이고 소리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 뜻 모를 낯선 언어는 자라나는 정경연의 나이테와 나이테 사이의 또 다른 나이테가 되어갔다. 어린 정경연은 뜻 모를 독경소리에 새벽잠을 깨고 멀어지는 독경소리에 다시 잠을 이루며 하루하루 커간다. 어린 정경연에게 그 독경소리는 뜻이 없는 문장이었지만 그 문장의 곡조가 어디 간단한 곡조인가. 뜻은 다음 일이다. 비가 오면 우선 산이고 들이고 모두 젖는 수밖에 없는 법이다.

‘참나’를 찾아서…정경연의 ‘무(無)’
1980년, 정경연은 26세라는 나이에 홍익대 미술대 교수로 임용된다. 미술가로서, 교수로서 정경연은 좀 더 자신의 세계에 대한 견고한 책임감과 완성도의 실현을 모색해야 했다. 하지만 그 길은 쉽지 않았다. 예술이란 확실한 자신의 세계를 가지고 있을 때 구현되는 것이다. 특히나 후학을 책임져야 하는 자리라면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정 교수는 그 길을 불교에서 찾는다.

“‘참나’를 볼 수 있을 때 진정한 예술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정 교수는 예술가로서 풀어야 하는 삶의 궁극적 의문들이 있었다. 자기 자신의 근원에 대한 의문은 당연한 것이었다. 어느 날, 정 교수는 문득 늘 가까이에 있었던 불교가 떠올랐다. 너무나 가까이 있었기에 찾아보려 하지 못했던 것이다. 새벽마다 <금강경>을 독송하시던 외할아버지, 방마다 좌선에 들어계신 외할아버지 형제와 이모들, 비에 젖은 땅바닥에서도 삼배를 망설이지 않던 어머니의 신심, 불명을 주신 스님. ‘왜 그들이 그토록 불교를 가까이했을까’ 생각하니 답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랬다. 정 교수는 정작 불교를 가까이 두고도 불교를 잘 모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정 교수는 불교학생동아리 지도교수를 맡게 된다. 자신의 종교가 불교라고 밝히자 불교반 학생들이 정 교수를 찾아온 것이다. 정 교수는 학생들과 함께 불교를 공부하기 시작한다. 이후 정 교수는 25년 간 홍익대 불교동아리 지도교수를 맡았다.

“경전을 읽고 절수행을 시작했어요. 그리고 방학이 되면 불교동아리 지도법사 스님을 집으로 모셔 개인교습을 받았어요.”

정 교수의 본격적인 불교 공부는 그렇게 시작됐다. <초발심자경문>을 배우고, 그 옛날 뜻 모르던 외조부의 <금강경>을 다시 만난다. 그렇게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나’를 찾아가는 길은 정경연에게 새로운 길이었다. 아니 인간으로서, 미술을 하는 예술가로서 당연히 모색해야 하는 길이었다. 아무리 바쁘고 힘들어도 절을 찾는 일과 법문을 구하는 일을 미루지 않았다. 그녀의 의문은 하나하나 부서지기 시작한다. 정경연의 ‘무제’는 ‘Nontitle’이 아닌 확실한 정체를 가지게 된다. 정경연의 ‘무(無)’의 출처는 불법(佛法)이었다.

어울림2016-07, Mixed media and various Techniques on canvas 162.2x130.3cm, 2016
정경연의 불가적 시선
정경연을 가리켜 ‘장갑작가’라고 부른다. 이는 그가 무려 40여 년 동안 장갑만을 오브제로 작품을 해왔기 때문이다. 그렇게 정 교수가 한 가지 오브제로 오랜 세월 작품을 해올 수 있었던 것은 정 교수가 자신의 작업을 ‘수행’의 하나로 인식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따라서 그녀의 작품세계를 단순히 장갑이라는 오브제의 축적에 의한 아상블라주 정도로 단정한다면, 정경연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이다. 그녀의 작품세계에 대한 보다 여법한 가치부여는 그녀가 오랫동안 추구해온 독특한 회화적 세계와 그 속에 녹아 있는 불교적 세계관을 함께 볼 수 있을 때 가능해진다. 정경연이 말하는 ‘무제’의 ‘무’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하고, ‘어울림’ 속에 들어 있는 상생의 출발점이 어디인지 알아야 하고, 먼 우주의 ‘블랙홀’이 갤러리에 있어야 하는 이유를 알아야 하고, ‘하모니’ 속에 들어있는 ‘너’와 ‘나’를 허물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녀는 언어 이전의 언어인 손의 또 다른 얼굴, 장갑을 통해 역시 언어 이전의 세계를 구현하고 있는 것이다.

최소한의 색채로 표현된 모노톤의 장갑은 버리고 버려서 얻어진 진리로 세상을 바라보려는 정경연의 시선으로, 그녀의 켜켜이 쌓인 나이테 끝에서 뻗어 나온 불가적 시선의 다름 아니다. 검정과 흰색, 그리고 그 사이에 존재하는 미세한 중간색들이 보여주는 스펙트럼은 원융무애(圓融無?)의 사상을 도상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며, 반복되고 겹쳐지는 개체의 이미지는 개체가 모여 전체를 이루고, 전체는 다시 하나하나로 돌아간다는 불가적 시각의 상징화이다. 이는 하나의 형태 안에서나 반복된 형태에서 창조의 시작과 끝을 함께 담고 있는 것으로 역시 ‘시종일여’의 불가적 시선이라 할 수 있겠다.

화두 된 어머니의 장갑…아름다운 회향

“작업은 나의 화두이며 도반입니다.”
정 교수는 지금까지 해온 자신의 작업을 ‘화두’라고 했다. 그리고 도반이라고 했다. 예술가의 궁극은 예술을 통해 진리의 구경(究竟)을 찾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유학시절에 고국에서 보내온 어머니의 장갑이 정 교수에게 화두가 된 셈이고, 그녀는 그 화두를 치열하게 참구해온 것이다.

정 교수는 2013년부터 2년 간 불교여성개발원장을 지냈다. 처음 원장직을 제안 받았을 때 그녀는 선뜻 수락하지 못했다. 대중을 아울러야 하는 자리였다. 자신보다 자리가 너무 크다고 생각했다. 오랜 고민 끝에 그녀는 원장직을 받아들였다. 그녀는 자신이 그 동안 살아온 삶을 생각해 보았다. ‘미술가 정경연’이라는 이름이 있을 수 있었던 것은 99%의 주변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99%의 주변은 부처님의 가피에서 온 것이었다. 그녀는 자신에게 온 인연, 즉 불교여성개발원장 소임의 이유를 가피의 회향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원장직을 받아들였고, 소임을 수행하는 동안 여성 역량강화 교육프로그램 개발, 불교여성개발원 합창단 창립, 다문화가족법회 시행, 불교기관과 업무 협약 등 불자로서 많은 일을 했다. 일이 많아졌지만 ‘정경연’은 오히려 힘들지 않았다. 미술가 정경연으로서의 삶도 더욱 넓어지고 깊어졌다. 주변을 좀 더 많이 본다는 것이 그녀에게 많은 것을 가져다주었다. 40년 전 어머니의 선물이 평생 화두가 되어 오늘의 정경연을 만들었듯이, 그녀는 주변이 곧 ‘나’라는 생각을 했다. 아름다운 회향이다. 오늘도 정경연의 손엔 장갑이 들려있다. 그리고 그 장갑 안에는 수많은 사람의 손이 들어있다. 오늘도 정경연은 그 아름다운 화두 앞에 앉는다. 그 옛날 어머니가 주신 화두를 안고 또 다시 정진을 이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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