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에 가까워지는 현장법사

외나무다리는 깨달음 의미
강물의 시체는 육신 초탈
목숨 건 도전이 곧 수행

부처님 땅에 도달해서 만나는 갈림길…. 낡은 통나무로 된 아득한 외나무다리, 밑바닥 없는 배. 이것들이 과연 어떤 의미일까요? 그렇게 고생스럽게 도달한 현장법사 일행을 끝까지 괴롭히기 위한 시험? 그것은 아닐 것 같습니다. 시험이라면 다시 요괴를 등장시킨다던가 하겠지요. 그렇다면 이 갈림길은 상징적인 의미를 가진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우선 아득한 외나무다리는 깨달음에 이르는 마지막 외길을 이야기하는 것이겠네요. 수만 갈래의 길이 있지만 결국 마지막은 외길일 뿐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수천 수만 가지 방편을 통해 깨달음을 지향하지만 결국은 궁극적인 깨달음을 향한 외길 하나뿐이라는 것이지요. 수만 갈래의 길, 그 길이 겉으로는 다른 길일 것 같지만 근본적으로는 “곧바로 사람의 마음을 가리켜 그 본성을 깨달아 부처가 되게 하는” 하나의 방편일 뿐이겠지요. 또 수만 갈래의 길을 통해서 오지만 결국 하나의 부처되는 길로 합해질 뿐이라는 말이라고 할 수도 있겠네요. 지극한 마음으로 목숨을 바쳐 박차고 뛰어오르지 않으면 어찌 그 지고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까요. 그저 일상적인 삶에서 누릴 거 다 누리면서 슬슬 해도 부처를 이룰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부처님이 보리수 아래에서 다지셨던 각오만큼은 아닐지 몰라도, 혜가 스님이 팔 한쪽을 잘라서 바치던 그 마음만큼은 아닐지 몰라도, 일상의 안일함을 떨치는 분심이 있어야 진리를 추구하는 삶으로 나가게 되는 것이요, 그런 길의 마지막 고비는 역시 여기 나오는 아득한 외나무다리처럼 힘든 외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목숨을 아깝게 생각지 않고 그 외길을 걸을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자신을 채찍질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신심 하나만은 누구에게도 빠지지 않는 현장법사도 태생적인 두려움만은 어쩔 수 없는지 “죽어도 못해!”가 되니 어쩐다지요? 현장법사도 죽어도 못 건넌다는 다리가 되면 우리 같은 평범한 중생은 어쩌라구요! 죽고 죽고 몇 번을 죽는대도 못해가 되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그 외나무다리 건널 중생은 몇이나 될까요? 부처님 처소에는 결국 아무도 못가고 마는 것 아닐까 걱정되네요.

그래서 삼쾌선생은 과감하게 다른 해석을 내어 놓게 되었습니다. 제가 불교계에서는 무식한 도깨비라는 말씀 드렸지요? 무식한 도깨비는 부적을 몰라본다고 했지요? 그러니까 부적 몰라보는 무식한 도깨비인 삼쾌선생, 불교계에 알려지지 않은 과감한 주장을 해 보는 것입니다. 이 아득하고 아찔한 외나무다리는 부처님 나오시기 이전, 친절한 안내 없던 시절에 건너던 옛길이라는 해석이지요. 그렇게 아찔하고도 아득한 외나무다리를 건넌 마지막 분은 바로 석가모니 부처님이라는 거지요. 그리고 그 길은 너무 어려워서 이제는 건너는 사람 없는 길이고, 이제는 이미 그 길을 건너 목적지에 도착하신 부처님께서 닦아주신 편안한 새 길이 있다는 거지요. 하하, 어떻습니까?

삼쾌선생의 참신하고도 발랄한 생각이……. 에구구, 참신한지 발랄한지 모르겠다구요? 특히 발랄이라는 말을 어디다 붙이냐구요? 죄송합니다. 제가 제멋에 혼자 취해버렸군요. 생각해보니 참신한 생각 전혀 아닙니다. 이미 부처님이 말씀하시고 수많은 조사께서 말씀하신 이야기입니다. 부처님이 깨달으시고 수많은 방편을 마련해 주셨으니 우리는 그 방편을 취하기만 하면 아주 쉽게 부처되는 길로 나갈 수 있다는 말씀, 이미 널리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부처님이야 홀로 그 길을 여시노라 참으로 고생을 하셨지요.

그렇게 고생을 해서 깨달음에 이르신 부처님께서, “내가 이렇게 고생했으니 너희들도 마찬가지로 고생 좀 해 보거라”하는 마음이셨겠습니까? 그렇다면 ‘자비로우신 부처님’이라는 칭호에 어울리지 않지요. 당연히 자비로우신 부처님께서는 당신께서 하신 고생을 중생들이 거듭 겪지 않도록 수많은 탈것을 마련해 놓으셨습니다. 대승이다 소승이다 할 때의 승(乘)이 무슨 뜻입니까? 험하고 먼 길 쉽고 빨리 갈 수 있게 하는 탈것이라는 의미 아닙니까? 크게 대승 소승 하지만 그 속에 얼마나 많은 다양한 탈것이 있습니까? 자신의 근기와 취향에 맞는 탈것을 잘 골라 타기만 하면 우리는 편하게 부처되는 길을 갈 수가 있는 거지요. 그것이 바로 부처님 오신 의미이고, 그래서 우리가 부처님을 기리고 높이는 이유 아니겠어요?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삼쾌선생이 이렇게 뻔한 이야기를 하면서 참신하다느니 발랄하다느니 하는 생각을 한 게 이유가 있는 것 같아요. 오늘의 우리 불교계가 부처님이 마련해주신 그 많은 좋은 방편들을 제대로 쓰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한 것 같거든요. 부처님이 만들어 놓으신 그 많은 탈것을 팽개치고, “나는 부처님처럼 고생 고생해서 깨달을 거야!”라고 외치는 분들이 꽤 많은 것 같아요. 양 극단을 다 겪으시고 그것을 지양한 중도의 길을 보여 주셨는데, 그러시느라고 엄청 고생하셨는데, 중도의 길을 걸으려 하지 않고 부처님 하셨듯이 양 극단 다 겪어보고 스스로 중도의 소중함을 깨닫고야 말겠다는 분들도 꽤 있지 않은가 싶구요. 그렇게 스스로 사서 고생을 하시고, 그러다가 아득하고 아찔한 외나무다리에 목숨 걸고 도전했다가 비극적인 추락을 겪으시는 분들도 있을 것 같네요.

그렇게 어려운 길 걷는 분들은 그래도 용기가 참으로 장한 분들이지요. 그런 분들은 열정 자체만은 참으로 고귀하다 할 수 있고, 그 열정이 방향만 제대로 잡으면 큰 성취를 이룰 것 같기도 하네요. 그런데 그런 열정도 없이 명색이 부처님 문중에 있다고 하면서 부처님이 마련해 주신 탈 것 아예 쳐다도 안보고, 그저 일상적인 안락에 탐닉하고, 오욕락의 삶에 몰입하면서 부처님의 가피만을 바라는 수많은 불자들이 또 있지 않은가요? 이런 불자들은 아찔한 다리고 편한 다리고 아예 찾으려 하지 않지요.

오늘의 불교에는 이런 두 부류의 불자들이 너무도 많지 않은가 하는 것이 삼쾌선생의 걱정입니다. 그런 걱정이 늘 있다 보니 부처님과 조사님들이 자상하게도 말씀해주셨던 것을 마치 참신하고도 발랄한 생각이라고 내세웠던 것이지요. 그러니까요…. 삼쾌선생 헛소리 하지 말라고 나무라셨던 분들도 오늘의 불교를 걱정하는 삼쾌선생의 충정을 이해하시고 너그럽게 용서해주셔유. 그리고 모든 중생들이 부처님이 마련해 놓으신 수많은 탈것들에 올라타서 부처되는 길을 질주하는 신명나는 불교를 이룩하는데 힘을 보태주셔유!

다시 서유기로 돌아가 볼까요? 삼쾌선생의 무식한 도깨비 해석을 밑받침해 주듯이 서유기에 바로 쉬운 탈것이 등장하는군요. 밑바닥 없는 배입니다. 밑바닥이 없다는 점에서는 황당하지만, 그래도 아득, 아찔한 외나무다리처럼 어렵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참으로 상징적으로 이 배를 모는 사공의 정체가 바로 접인조사(接引祖師)입니다. 중생을 부처님 나라로 맞아들이는 조사님이지요. 부처의 화신입니다. 사공으로 화신하여 중생을 고해로부터 부처 땅으로 건네주는 부처님이 바로 접인조사지요. 그러니 그러한 부처님의 가피를 힘입어 마지막 강을 건너는 것입니다. 아득하고 아찔한 다리를 건너지 않고도 부처님 땅에 도달하게 해주는 탈것, 그것이 바로 무저선이라는 방편이지요.

그러니 무저선이야말로 반야선입니다. 지혜의 배입니다. 우리들이 늘 읽는 천수경이 생각나네요. “대자대비하신 관세음보살님께 귀의하오니, 제가 빨리 지혜의 배에 타게 하소서. 대자대비하신 관세음보살님께 귀의하오니, 제가 빨리 고해를 건너게 하소서.” 이걸 서유기 버전으로 바꾸면 “이 마음 그대로 무사히 부처님 나라에 도달하여, 접인조사님 띄우시는 밑바닥 없는 배 타고 거센 흐름 건너게 하소서….” 이렇게 되지 않을까 싶네요. 하하.

그런데 여기서 좀 풀어봐야 할 것이 생겼네요. ‘밑바닥 없는 배’가 과연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하는 문제지요. 여기서 삼쾌선생이 유식함을 자랑한다면…. 어험, ‘손오공이 기가 막혀’ 연재가 언제 끝날지 모릅니다요. 그래서 그 유식함을 최대한 절제하여 말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들 ‘구멍 없는 피리’, ‘줄 없는 거문고’, ‘바닥없는 바릿대’ 같은 말 들어보셨지요? 밑바닥 없는 배라는 것은 바로 그와 비슷한 계열의 비유입니다. 근원적인 진리에 바탕하여 모든 현상이 나타나겠지요? 그렇지만 그 근원적인 진리는 말로 표현되기 힘듭니다. 말로 표현되는 순간 말의 제한성 때문에 가려지게 마련이지요. 모든 것이 그것에 의존한다는 측면과 그것이 언어나 기타 방편으로 표현되기 어렵다는 측면 두 측면을 나타내주는 것이 바로 위와 같은 비유들입니다. 피리로부터 소리가 나오는데, 정해진 구멍이 있으면 한정된 소리밖에 나올 수가 없습니다. 거문고도 마찬가지지요. 한정된 줄이 있으면 한정된 소리밖에 나오지 못하지요. 중생을 이익되게 해주는 밥을 담는 밥그릇, 그것에 바닥이 있으면 그 이익됨도 한정됩니다.

구멍 없고, 줄 없고, 바닥없음…. 그것은 언어적 표현을 뛰어넘는 궁극적 진리를 비유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이라고 보면 됩니다. 그러한 비유적 표현이 상황과 맥락에 따라 적절하게 쓰이는 것이지요. 지금 이 대목은 부처님의 땅으로 건너가는 방편을 말하는 대목입니다. 그래서 배라는 상징을 택한 것이지요. 바닥이 없다는 것은 한정된 방편의 제약을 넘어서는 자재로운 방편을 통해 모든 중생을 모두 건네줄 수 있는 궁극적 방편을 상징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네요. 우리 모두가 부처님 땅에 가기 위해서 타는 마지막 배, 그것이 바로 무저선입니다. 지혜의 배입니다. ‘손오공이 기가 막혀’ 읽으시는 모든 분들, 함께 무저선 타고 부처님 나라 유람체험 해 보실까요? 예약 받습니다. 일찍 하시는 분 할인 혜택도 있습니다!

이크, 헤매니즘 중지! 빨리 제자리 찾기입니다. 빨리 현장법사 일행 배로 건너드려야지요. 그런데 건너는 중간에 조금 이야기거리가 생겼네요. 강물에 시체가 떠내려오네요. 자세히 살펴보니 이목구비 뚜렷한 현장법사 시체로군요. 그런데 “에구, 끔찍해라!”가 아닙니다. 요즘 말투, 아니 조금 시대 지난 말투로 “감축 드리옵니다!”입니다. 손오공 표현으로는 “스승님 축하드립니다. 드디어 육체를 벗어나셨군요!”입니다. 현장법사가 육체적 구속을 완전히 벗어던졌다는 것을 강물에 시체가 떠내려 온다는 것으로 보여준 것이지요. 불교에서도 육체적 구속을 벗어나는 것을 말하지만, 특히 도교적인 관점에서는 육체를 벗어난다는 것이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지요. 거짓된 이 몸을 벗고 영생하는 참된 몸, 신선의 몸으로 전환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제 현장법사가 드디어 그런 경지에 도달한 것이지요. 지금까지 현장법사는 속된 몸을 벗지 못해 구름도 못 타거든요. 이제 구름도 탈 수 있습니다. 구름 부르는 도술은 못 익혔지만 탈수는 있다는 것, 얼마나 중요합니까. 이제 바로 코앞이지만 뇌음사까지는 구름타고 쌩~ 달려볼까요? 다음 시간에는 뇌음사에 도착해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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