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신년 마지막 달. 한해를 보내는 길목에서 회한과 분노, 그리고 희망의 뒤엉킴 속에서 큰 어지러움을 느낀다. 새해로 가는 우리의 걸음걸음이 휘청거린다. 제행무상이라고 하니 우리는 어디로 흘러가는가? 새삼 시간이란 무엇이고, 도대체 어떻게 존재하는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든다.

일찍이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고백록에서 시간에 대해 묻는 자가 없을 때는 아는 것 같다가도, 막상 묻는 자가 있어 대답하려니 알 수가 없다고 고백하고 있다. 수많은 과학자와 철학자 등이 시간의 정체를 알기 위해 덤벼들었지만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뇌는 지금도 지속되고 있다. 불교 경전에서도 시간의 문제는 큰 화두로 등장하고 있다. 나가르주나는 <중론에서 궁극적으로 시간 자체도 부인하고 있지 않은가.

현대 과학에서 시간은 대폭발(Big Bang)에 의해 공간과 함께 생겨났고, 언젠가는 다시 대폭발로 파괴되어 블랙홀에 빠져 사라진다고 본다. 이렇게 시간도 생성 소멸하는 존재인데, 이 시간 속에 찰나를 사는 인간이 영원을 희구하고 있으니 참으로 신기하고 괴이한 존재다. 시간과 인간은 어떤 관계일까? 바로 연기적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본다.

인간 삶의 터전은 자연과 역사에 있다. 이러한 두 터전에서 전개되는 인간 삶의 방식에 따라 시간에 대한 인식과 태도가 달라진다. 인간은 태양계에서 살아가는 존재이다. 그래서 태양의 운행에 따라 시간 단위를 만들고 이에 따라 삶의 양식과 역사를 만든다. 또 여기에 종교도 등장한다. 자연과 역사의 조건, 그리고 종교에 따라 인간은 다양하게 시간을 표상시킨다. 농경문화에서는 시간을 순환적으로 보지만 사막문화에서는 직선으로 보고, 기독교는 시간을 유일신이 만든 것으로 보기도 하는 등.

시간에 대해 깊이 사유할수록 좌절을 느낄 수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은 엄연히 존재한다. 우리가 태어나고 죽는 것, 사랑하는 사람과 만나 행복을 함께 하고, 가까운 사람과 이별하는 것 등 인간 삶의 여러 모습은 모두가 시간의 레일 위에서 이루어진다.

인간 삶의 의미와 가치는 바로 시간과의 관계에서 나오는 것이리라. 18세기에 기계로 만든 시계가 확대되면서 인간 삶의 양식에 엄청난 변화를 초래하였다. 기계 시계의 침에 이끌려 시간의 덫에 걸려 허둥대고 버둥대고 있는 현실이 오늘날의 인간 삶의 모습이다.

시간과 인간은 연기적 관계에 있기에 시간은 인간이 만든 연기적 조건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난다. 달걀이 연기적 조건에 따라 생명체의 수정란으로, 슈퍼마켓에서 파는 식재료로, 또는 약의 원료로 되듯이.

그런데 오늘날 현대인의 삶의 모습은 시간의 노예선에 납치되어 강제 노역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어쩌랴, 시간은 결코 노예선의 선장이 아니다. 인간이 스스로 시간의 노예가 된 것이다. 시간은 우리의 주인이 아니다. 시간은 우리가 사는 광장을 제공해 줄 뿐이다.

우리는 시간과 함께 산다. 그래서 시간과 함께 어떻게 사느냐가 바로 삶의 제일 중요한 열쇠이다. 그 최고의 방법은 시간과 함께 춤을 추고 사는 것이리라. 그런데 시간과 함께 춤을 어떻게 추어야 하는가? 인간과 함께 하는 시간은 체험된 시간시계의 시간으로 나눌 수 있다.

체험된 시간은 마음의 시간이고, 시계의 시간은 몸의 시간이다. 이 두 종류의 시간이 만나는 지점이 중도의 시간일 것이다. 비약해 보자. 시간과 함께 춤을 추는 것은 깨달음자비의 양 날개를 펄럭이는 율동이 아닌가.

시간에서 무상을 깨닫고, 무상에서 자비가 나오는 것 아닌가. 늙어가는 아내에게 큰 연민이 생기듯이. 새해가 다가온다. 이제 시간과 함께 멋진 춤을 춰보자. 그런데 어떻게, 어떤 춤을?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