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영색(英) 스님

1620~1640년대 불상 제작 주도
조각승 청헌 스님과 사형사제
현진 스님과 청헌 스님과 불상 제작
파주 보광사 봉안 불상에 흔적 남아

파주 보광사 대웅전의 목조석가오존불상 전체모습이다. 사진제공=동북아불교미술연구소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두 번의 전쟁이 끝나고 사찰의 중창과 중수로 명산대찰(名山大刹)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후, 1640년대부터 지역을 대표하는 사찰의 복원이 이루어진다. 이 시기는 17세기 전반을 대표하는 조각승인 현진 스님, 수연(守衍) 스님, 인균 스님 등에게 불교조각을 배운 스님들이 수화승이 되어 불상 제작을 주도하게 된다.

1630~1650년대 전국적으로 사찰의 정비가 이루어지면서 100여명의 조각승들이 불상을 만든다. 대형 불상을 제작할 시에는 공동 작업이 행해진다. 이 가운데 근래 수화승으로 제작한 불상이 발견된 조각승 영색 스님이 있다.

영색 스님의 생애와 조각승이 된 배경에 대해 구체적인 자료가 발견되지 않았지만, 불상에서 발견된 조성발원문과 사찰의 연혁을 적은 사적기(寺蹟記)를 통해 활동 시기와 내용, 조각승 계보 등을 추정할 수 있다.
영색 스님은 수화승으로 활동하기 이전인 1626년에 충남 보은 법주사 소조비로자나삼신불좌상 제작에 보조화승으로 참여하였다. 스님은 현진(玄眞) 스님, 청헌(淸憲) 스님, 연묵(衍默) 스님, 회묵(懷默) 스님, 옥정(玉淨) 스님, 도형(道) 스님 다음에 7번째로 언급된다.

1633년 양주 회암사서 조성된 목조보살좌상(사진 좌, 우)은 현재 파주 보광사에 봉안돼 있다. 사진제공=동북아불교미술연구소
이 소조삼신불좌상의 본존은 전체 높이가 509㎝로, 조선후기 제작된 초대형 불상으로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불상의 규모가 커서 여러 명의 조각승이 참여하였는데, 이러한 대형불상을 제작할 때는 여러 계보의 조각승들이 공동으로 참여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법주사 소조불상 제작에 참여한 조각승들이 동일 계보에 속하는 조각승이라고 단정할 수 없는데, 서울 지장암 목조비로자나불좌상은 왕실에서 발원한 불사(佛事)라서 17세기 전반을 대표하는 조각승들이 모두 참여하였다.

영색은 1633년에 경기 양주 회암사 목조보살입상(현재 파주 보광사 소장)을 수화승으로 제작하였다. 이 보살상은 조성 사찰과 봉안 사찰이 다르지만, 조선후기 사찰의 폐사(廢寺)로 인하여 불상의 이운(移運)이 이루어진 사실을 여러 사적기를 통하여 알 수 있다. 그 후 1636년경에 영색 스님은 전남 구례 화엄사 대웅전 비로자나삼신불좌상을 청헌, 인균, 응원 등과 함께 제작하였다. 이 삼신불은 얼굴의 인상이나 대의 처리 등이 달라서 계보가 다른 여러 조각승이 각각의 불상을 제작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영색 스님은 부화승(副畵僧)으로 수화승 청헌 스님과 1639년에 경남 하동 쌍계사 목조삼세불좌상과 사보살상(四菩薩像)을, 1645년에 경북 상주 남장사 목조아미타삼존불좌상을 제작하였다.

이제까지 밝혀진 영색 스님의 활동 시기는 1626년부터 1645년까지로 보은 법주사, 양주 회암사, 구례 화엄사, 하동 쌍계사, 상주 남장사 등에 불상을 제작한 것으로 보아 전국을 무대로 활동한 작가임을 알 수 있다. 조각승 영색 스님은 현진 스님, 청헌 스님이 주도한 불상 제작에 참여하였지만, 대부분 청헌 스님과 같이 불상을 제작한 것으로 보아 같은 계보에 속하는 조각승으로 여겨진다.

지금까지 알려진 문헌기록을 바탕으로 영색 스님의 생애를 살펴보면, 스님은 임진왜란 이전에 태어났다. 1626년에 현진 스님과 보은 법주사 대웅보전 소조삼신불좌상을 조성할 때, 조각승 17명 가운데 7번째 언급된 것을 보면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한 30대 중반의 나이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1633년에 수화승으로 양주 회암사 목조보살입상(파주 보광사 봉안)을 만든 후, 1636년경 수화승 청헌 스님과 전남 구례 화엄사 대웅전 삼신불상을 제작하였다. 그리고 청헌 스님과 1639년에 하동 쌍계사 목조삼세불좌상과 사보살상을 만든 후, 1645년에 상주 남장사 목조아미타삼존불좌상을 제작하였다. 현재까지 밝혀진 영색 스님의 활동 시기는 1626년부터 1645년까지이다.

영색 스님이 어느 스님 밑에서 불상 제작을 배웠는지 알 수 없고, 스님의 계보는 청헌 스님(-1626~1643-) → 영색 스님(-1626~1645-) → 성근 스님(-1633~1657-), 영축 스님(-1633~1641-)으로 상호관계를 형성한 사실을 밝힐 수 있다. 또한 영색 스님과 청헌 스님의 활동 시기가 비슷하여 사제(師弟) 사이가 아닌 선후배 사이일 것으로 추정된다. 청헌 스님과 그 계보에 속하는 조각승들은 17세기 전반부터 중반까지 불교 조각계를 주도하던 작가들이다.

영색 스님이 수화승으로 만든 유일한 불상은 파주 보광사 대웅보전에 봉안되어 있다.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고령산(高靈山)에 위치한 보광사는 대웅보전, 지장전, 영산전 등의 전각을 갖춘 사찰로 대한불교조계종 봉선사의 말사(末寺)이다. 보광사는 임진왜란 기간에 소실되어 1602년에 설미(雪眉) 스님과 덕인(德仁) 스님이 법당과 승당(僧堂)을 건립하였고, 1631년에 덕인 스님은 도원(道元) 스님이 3년간 모은 80근의 청동으로 학잠(學岑) 스님과 제자인 지십(智什) 스님 등이 1633년에 범종을 제작하기 시작해서 1634년에 300여근의 보종(寶鐘)을 완성하였다. 1667년에 지간(智侃, 支干) 스님과 석련(石蓮, 釋蓮) 스님이 대웅보전, 관음전, 만세루 등을 재건·단청하고, 1740년(또는 1730년)에 숙종(肅宗)의 후궁으로 영조를 낳은 숙빈(淑嬪) 최씨(崔氏)의 능(陵)인 소녕원(昭寧園)의 원찰(願刹)로 삼아 대웅보전, 광응전(光膺殿), 만세루 등을 중수하였다.

보광사 대웅보전 내에 봉안된 목조석가오존상은 삼세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협시보살이 서 있다. 삼세불과 협시보살은 크기와 조각기법 등이 같지 않아 제작 시기와 작가가 다르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목조미륵보살입상은 높이가 117㎝로, 조선후기에 제작된 전형적인 중형 보살상의 형태를 따르고 있다. 얼굴은 앞으로 약간 내밀고, 신체와 머리(보관 포함)의 비중이 10:3 정도로 신체에 비하여 머리가 크게 강조되었다. 이러한 보살의 신체비례는 조선전기 보살입상을 계승한 안성 칠장사 대웅전 목조보살입상(1603년)이나 익산 관음사 목조보살입상(1605년, 완주 위봉사 북암 조성)과 비교해 보면 머리를 강조하다보니 신체비례가 깨졌다. 머리에 쓴 보관은 화염(火焰)과 보주(寶珠)가 빽빽이 장식되고, 좌우에 커다란 관대가 밑으로 늘어져 있다. 보관 아래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은 귀를 따라 두 갈래로 자연스럽게 내려오다가 어깨 위에서 둥글게 틀어 묶고, 세 가닥으로 나뉘어 길게 늘어져 있다. 방형의 얼굴에 반쯤 뜬 눈은 눈 꼬리가 약간 위로 올라갔고, 코는 원통형으로 짧으며, 인중이 다른 불상에 비하여 넓은 편이다.

목조보살좌상 발견 조성발원문 일부. 사진제공=동북아불교미술연구소
따로 제작된 손은 엄지와 중지를 둥글게 맞대고 어깨 높이까지 올리고 있다. 몸에 걸친 대의는 변형우견편단(變形右肩偏袒)으로 오른쪽 어깨에 사선으로 접힌 옷깃 한 가닥의 끝자락이 가슴까지 늘어져 있고, 나머지 자락은 복부를 지나 왼쪽 어깨로 넘어가고 있다. 대의자락이 양 손목에 길게 늘어지고, 나머지 자락이 복부에서 U자형으로 무릎까지 늘어져 있다. 그리고 왼쪽 어깨에 한 가닥의 두꺼운 옷주름이 길게 늘어져 있어 제작시기를 추정할 수 있다. 보살상의 뒷면에는 목에 대의(大衣) 자락이 둘러있고, 왼쪽 어깨에 앞에서 넘어온 대의자락이 길게 늘어져 있다. 대의 안쪽에 승각기를 묶은 끈이 복부에 간략하게 표현되어 있다.

보살상에서 발견된 조성발원문에 의하면, 보살상은 1633년에 경기 양주 천보산 회암사에 봉안하기 위하여 화원(畵員) 영색(英) 스님, 성근(省勤) 스님, 지월(智?) 스님, 옥준(玉俊) 스님, 영축(靈竺) 스님이 제작하였다. 목조보살입상이 조성된 회암사는 1472년에 세조의 왕비인 정희왕후가 하성부원군 정현조를 시켜 중창한 후, 명종 연간에 문정왕후가 섭정을 할 때 보우 스님을 통하여 불교 중흥을 꾀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한 사찰이다. 이 사찰에 대해서는 17~18세기 문헌 기록이 거의 남아있지 않고, 1800년대에 폐사(廢寺)되었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보광사에 봉안된 보살입상은 1630년대 전반에 회암사에서 제작되었다는 것은 당시에 나한전이나 영산전이 건립될 정도로 사세(寺勢)가 있었음을 알려주는 단서이다.

특히, 불상 제작에 증명(證明)으로 참여한 탄오(坦悟) 스님은 1623년에 조각승 수연(守衍) 스님이 제작한 강화 전등사 대웅보전 목조삼세불좌상 제작 시에도 증명으로 참여한 고승(高僧)이다. 1633년에 회암사의 주지(住持)는 도오(道悟) 스님이고, 사찰에 덕연(德衍) 스님, 법탄(法坦) 스님, 일종(一宗) 스님, 신원(信元) 스님, 나기(懶奇) 스님, 후원(後元) 스님이 거주하고 있었다.

수화승 영색 스님을 따라 회암사 목조보살입상을 제작한 조각승 성근(性勤) 스님, 지월(智?) 스님, 옥준(玉俊) 스님, 영축(靈竺) 스님 등은 17세기 전·중반에 여러 지역의 불상 조성에 참여하였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수화승으로 불상을 제작한 작품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성근 스님은 1657년에 수화승 도우(道雨) 스님과 경북 칠곡 송림사 대웅전 목조삼존불좌상을, 영축 스님은 1641년에 수화승 청헌과 전북 완주 송광사 대웅전 소조석가삼세불좌상 조성에 참여한 조각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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