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면이나 외부나 모든 것이 전부 한마음으로 돌아갑니다

기도를 하라는 게 아니라 관(觀)하라 이겁니다.
자기가 자기 주처에 놓고 거기 맡기고 지켜봐라.
이게 관이에요. 기도가 아니에요.

(지난 호에 이어서)
질문자2(남) 예, 제가 질문 하나 드리겠습니다. 한마음선원 뉴욕지원 개원 1주년 기념으로다 이렇게 멀리서 오셔서 저희들한테 좋은 법문 해 주셨습니다. 한마음선원 이름을 지으실 때 어떤 동기로 지으셨으며, 또 한마음이라는 뜻을 여러분에게 좀 설명해 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큰스님 한마음의 뜻이라는 건요, 우리가 소소한 마음이 아니라, 물론 종지에 담았어도 한 종지죠. 큰 그릇에 담았어도 한 그릇이고요. 그리고 또 한바다만큼 담았어도 그저 한 그릇이고요. 그러나 조그만 거서부터 큰 것까지 전부 한 그릇으로 돌아가요, 한마음으로. 어떻게 해서 한마음으로 돌아가겠습니까? 내 이 마음은 체 없는 무의 세계에서도 그렇고, 무의 세계에서 한생각이 유로 나오고 유에서 또 무로 가고, 이렇게 돌아가면서 그렇게 조화를 이루는 그 진리…. 여러분의 이 몸만 봐도 여러분이 마음먹는 대로 이 속에서 운행을 해 줘요. 여러분, 그걸 아셔야 돼요. 여러분이 맘먹는 대로 이게, 속상하게 생각하면 이 모두가 속을 뒤집어서 나옵니다. 생각할수록 그냥 속에서 이런 게 치밀죠. 여러분이 속상하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걸 둘로 보는 겁니다, 인제. 그러니 여럿이서 모두 그냥 일어나는 거죠.

그와 같이 한마음으로 돌아가는 건 내면이나 외부나 모든 것이, 전체가, 삼라대천세계가 전부 한마음으로 돌아갑니다. 그건 왜? 우주 삼천대천세계의 근본은 인간의 마음의 근본이니라. 이 사바세계의 그 천차만별로 일체 만물만생이 살아나가는 거는 가설이 돼 있는데 그 가설의 근본은 바로 인간의 마음에 가설이 돼 있느니라. 그러니 천체가 한마음에 있는 거예요. 그러니 한마음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한마음은 천체를 한마음이라고 할 수도 있고 내 내면세계의 그 생명들 마음들과 내 마음하고 한마음도 될 수 있고 그런 겁니다. 별성은 마음을 말하지만 이 혹성은 그 마음을 담은 거를 말하는 겁니다. 전체가 그저 한마음 아닌 것이 없어요. 오고 감도 없이 오고 가고 이어 감도 없이 이어 가고. 그래서 사과나무도 그렇고 은행나무도 그렇고 모두가 둘이 마주 봐야, 천 리라도 마주보지 않는다면 그게 잘 안 열려요. 그래서 벌이 갖다가 자꾸 심어 줘야 열리죠. 그 조화를 어떻게 인간이 다 알겠습니까마는 그래도 물리가 다 터집니다, 이 공부를 통해서.

여러분도 남녀가 없다면 어떻게 자녀들을 생산하셨겠습니까? 그래서 태양은 일체 만물만생을 소생시키는가 하면 어머니는 산하대지로서 기르고 가을에 엄마 아빠가 다 씨를 거둬들인다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그래서 중들은, 비구는 비구니도 아니고 비구도 아닌 도리를 알아야만이 같이 씨를 거둬들일 수 있고 씨를 뿌릴 수가 있다 이런 거죠. 아니, 자기네들 배 속에는 요런 벌레로서 자기가 그렇게 커졌다는 걸 모르고, 벌레도 자기와 둘이 아니거늘 하물며 여자라고 여자, 여자, 여자 이런다면, 자기도 여자 속에서 나왔지 딴 데서 나오지 않았거든. 그런데 그런 걸 가지고도 분별하는 사람이 어찌 산하대지를 집어먹을 수가 있겠느냐 이거죠. 그래서 공부를 못하는 거죠. 그래서 역시 우리는 마음을 좀 더 넓게 가져서, 생명 가진 풀 한 포기도 나 아님이 없고 내 생명 아님이 없고 바로 내 모습 아닌 게 없으니, 아무리 잘못하더라도 ‘내가 수억겁 광년을 거쳐 오면서 저렇게 모르던 내 모습도 그때 있었다. 그러니 그 모습이 내 모르는 모습이지.’ 하고 둘로 보지 않을 때 비로소 그 사람도 착해지고 나도 아주 보살이 되는 거죠. 그러니 망하게 생각하지 마시고요, 질문하실 분들 질문하세요.

질문자3(여) 저는 그냥 굉장히 무식한 질문을 하나 하겠습니다.
큰스님 아니, 무식해도 법 안에 들어 있습니다. 팥죽이 뭐 팥죽 솥에 있지 어디 딴 데 갑니까?

질문자3(여) 엄마 입장에서 제가 뭘 좀 여쭤 보겠는데요, 지금 제가 큰아이를 여기서 한 대여섯 시간 걸리는 학교에 보내 놓고 가서 잘되기를 바라는 게 엄마로서 당연하잖아요. 근데 예를 들면 제가 보기에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이라는 거를 놔두고 기도를 하는 거, 그러니까 ‘잘되게 해 주십시오.’ 하고 기도를 하는 방법으로 하는데 불교에서는 잘되기를 바란다는 생각을 하는 게 하나의 에너지잖아요? 그러니까 그게 그쪽으로 도달함으로써 ‘걔가 잘되겠지.’ 하는 생각을 하면서 매일 그런 생각을 하고 지내지만 그래도 불교의 뜻을 몰라서, 그렇게 항상 생각을 하는 그게 잘하는 건지 못하는 건지 잘 모르겠어요.

큰스님 이거 보세요. 내가 지금 어저께부터 여러분한테 말을 했고요, 수없이, 20년 30년씩 이렇게 지금 얘기해 오는 겁니다. 여러분이 잘되기를 바라고 기도하라는 게 아니에요. 그러면 벌써 상대가 생기죠? 벌써 한 다리 건너서, 공을 딱 쳤을 때에 맞은 자리가 그냥 정통으로 들어가야 공이 힘이 있죠. 만약에 한 번 맞아 가지고 그쪽으로 가 보세요, 힘이 있나? 그러니까 여러분이 기도를 하라는 게 아니라 관(觀)하라 이겁니다. 자기가 자기 주처에 놓고 거기 맡기고 지켜봐라 이겁니다. 이게 관이에요. 기도가 아니에요.

그러니까 당신네들은 당신네들대로 업신여겨서 믿지 않고 ‘주여! 하나님 아버지시여!’ 그러고 또 부처님 믿는 사람은 ‘칠성이시여! 독성이시여! 부처님이시여!’ 하고 그저 땅에 가서 빌질 않나, 용신한테 가서 빌질 않나, 지신에게 빌질 않나. 온통 빌고 돌아다니는 그러한 분들이 그렇게 빌고 돌아다니는 그 미신 행을 하니까 미신이 있고 귀신이 있지 왜 귀신이 있고 미신이 있겠습니까? 예?

달마 대사께서는 양 무제가 그렇게 많은 절을 지어 주고 옷을 해 입히고 시주를 많이 해도 공덕이 하나도 없다고 그랬어요. 왜 그런 줄 아십니까? 여러분이 한마음으로 돌아가질 않기 때문에 공덕이 없는 겁니다. 그래서 공덕이야. “하나님” 하고 지금 말씀하셨는데 하나님은 자기의 하나님이야, 하나님! ‘님이시여! 님이시여! 나의 영원한 님이시여! 수억겁 광년을 거쳐 와도 나하고 바로 당신과 둘 아니게 이끌어 오신 당신이시여! 님이시여!’ 하는 겁니다. 그 님을, 내 님부터 알아야 하늘님을 알고 한울님을 알아요. 요 세 가지가 바로 그런 뜻입니다. ‘하늘님!’ 지혜입니다, 이게. ‘한울님!’ 통신입니다, 법계. 이게 내 님에서 물리가 터져야 하늘님도 한울님도 다 알게 되는 거죠.

불가에서 말하면 지금 보이지 않는 데의 그 들음, 바다와 같이 넓은 자비, 모두가 그것이 나를 증득하면, 나를 발견해 내면, 즉 말하자면 현재 의식의 자기는 자(子)고 과거의 자기를 지금 끌고 나온 그 무심은, 불성은 바로 부(父)다 이겁니다. “부와 자가 상봉하면 그대로 둘이 아닌 도리를 알게 되느니라. 그대로 물리가 터지느니라.” 이 소리거든. 육조도 달마도 나를 발견했는데, 둘이 아닌 도리와 그것은 다 알았는데 둘이 아니게 나툴 줄을 몰라서 면벽을 했단 말이에요. 아시겠어요? 한 분은 6년을 면벽을 했고 한 분은 12년을 그렇게 돌아다니면서 실험을 했어요.

그런 거와 같이 여러분은 좀 더 생각을 넓게 해서…. 지금 이 자리에 앉아서도 연습을 한번 해 보실까요? 집에 한번 갔다 와 보세요, 어떤가? 그래서 ‘하나님! 하나님!’ 하고 잘된다 하고 기대는 게 아니라 여러분도 갖추어 가지고 있으니까, 여러분 주처를 믿고 거기에 그냥 맡기시고 ‘너만이 나를 이끌어 갈 수 있어. 너만이 나를 형성시켰으니까.’ 또 ‘너만이 나를, 병을 낫게 해 줄 수 있어. 바로 내 아들이라는 거, 어머니라는 거 그게 가설이 돼 있기 때문에 내가 불을 켜면 네 마음속에도 불이 들어와. 그런데 어찌 나빠질 수가 있으랴.’ 그냥 거기다가 맡기는 거야. 그러면 스스로 공부 안 한다는 놈이 스스로 공부하게 돼. 그렇게 연결이 이어짐이 없이 이어져요.

그래서 가고 옴이 없이 가고 오고 이어짐이 없이 마음을 전달하고 이어지는 거라. 그러니까 끝 간 데 없이 시발과 종점도 둘이 아니요 이어지는 사이 없이 이어져서 돌아가니까 한마음이다 이거야. 그래서 원자라고 이렇게 말을 했지. 오온이라고 했는가 하면, 원자! 원자에서 입자가 되고 입자에서 분자가 되고 분자에서 그저 그냥 한생각에서…. 보세요. 한생각이고 뭐고 세 가지 네 가지 습이 있다면, 저기 쓰레기통에 뚜껑을 열어 보면 그냥 생명들이 와르르 하고 일어나는 거야. 누가 거기에 생명을 만들려고 생명을 조작해서 거기 넣은 거요? 자연이야, 그게. 그래서 습기가 있고, 이 지수화풍 습기가 있고 원기가 있고 그렇게 되면 다 생명이 생기게끔 돼 있어. 그것이 오래 살다 보면 경험을 얻고 경험을 얻고 해서 진화되고 그렇게 해서 인간까지, 이렇게 아주 영리한 인간까지 되지 않았어?

그런데 벌레를 업신여겨요? 남을, 아프다는 사람을 업신여겨? 그리고 자기가 자기를 업신여겨? 왜? 형상은 믿고 업신여기지 않으면서, 부처님 형상은 그렇게 고귀하게 생각하고 믿으면서, 이름도 믿으면서, 그리고 고상도 믿으면서 성모마리아 상도 믿으면서 왜 그거는 안 믿어? 자기! 자기가 지금 살고 말하고 다니면서, 산 부처를 왜 안 믿어요? 아, 자기 산 부처를 왜 안 믿어? 자기 얼굴 더러우면 닦아 주는 산 부처를 왜 안 믿느냐고? 그리고 더우면 시원한 옷 입혀 주지 모두 부처가 해 주는데 왜 안 믿느냐고. 조금 옷이 더러워 봐, 지금. 훨훨 벗어 버리고선 좋은 옷 입혀 주고 아, 그러는데 왜 안 믿어요? 형상을 믿을 거예요, 이름을 믿을 거예요? 고깃덩어릴 믿을 거냐고. 그리고 허공을 믿을 거냐고. 그러니 믿을 것이 하나도 없어. 못났든 잘났든 자기밖에 자기가 믿을 곳이 없어.

그러니 여러분이 내가 삼합이 틀리다면, 나보다 더 훌륭한 사람이 있으면 다 가라 이거야. 다 가! 나만 이렇게 하라고 꼬리표 해서 붙인 것도 아니고 내가 한다는 이 자체까지도 난 생각 안 해. 그러니까 믿는 거는 여러분의 주처, 주인공을 믿고, 이 주인공이라는 뜻은 돌아가니까, 찰나찰나 돌아가, 화해서. 금방 어머니가 되셨다가 금방 할머니가 되셨다가 금방 아내가 되시죠? 그런데 어떤 거 될 때 나라고 할 수 없으니까 그게 부처라. 그러니까 그 어머니가 되었을 때 놓고 빌지 말고 아내가 되었을 때 빌지 말고, 지금 불상을 놓으셨는데 부처님을 모셔 놓고 부처님 마음이, 마음을 내면 바로 문수가 되는 거예요, 법신이. 그리고 마음을 냈는데 또 보현이 됐다 이거야. 그 보현은 화신이라. 몸의 움죽거림이라. 그러니 여러분이 바로 그분들이에요. 여러분이 세 분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여러분의 생명 근본과, 마음 내는 거와, 또는 몸이 움죽거리는 거 셋이 이름은 각각이지만 같이 돌아가는 게 주인공이라. 같이 돌아가니까, 이 내면세계의 모든 생명들도 같이 따라서 돌아가니까 그것이 바로 한마음이자 주인공이라는 얘깁니다. 그러니 그 한마음 주인공에서 나오는 그 자체를 되놓으시면 바로 거기에서 앞서 짊어지고 나온 그 모두가 무너지고 말아 버릴 겁니다.

그래서 여기 나와서, 여기 도량에 제가 없어도요, 이 도량에만 와도, 왔다 갔다만 해도 허리도 낫고 다리도 낫고 다 나아. 뭐, 멀어? 천 리라도 요 문지방 너머밖엔 안 돼. 그러니까 충전이 필요하다. 만약에 가설을 해 놓고 전력이 들어오지 않는다면 그거는 이익이 하나도 없어. 그래서 공덕이 없다 이 소리거든. 그런데 전력이 들어오는 도량은 여러분이 충전할 수 있다 이 소리야. 충전! 배우는 동안에 충전할 수가 있다 이 소리지. 본바탕이 지수화풍이기 때문에. 그냥 가기만 하면 저절로, 저절로 충전이 된다니까. 전기에 껴 놓기만 하면 충전이 돼서 그 이튿날 뭐 저런 것도 켜고 그러죠? 내 말이 틀리다면 틀리다고 항의하세요. 나도 여러분한테 좀 배우기도 하고 그러게요. 그냥 질문하시는 거를 이렇게 삥 돌려서 얘기했으니 그냥 잘 들으세요.

질문자4(여) 스님, 제가 여쭙겠습니다. 요새 제가 느끼고 있는 경험인데요, 많은 것에 이제 거의 화가 잘 안 나요. 그런데 제가 가끔 화를 내야 될 필요성을 느끼거든요. 근데 어디서부터 화를 내야 되고 어디서부터 화를 안 내야 되는지 그 선을 못 긋겠어요.

큰스님 무조건 화내지 마시고요, 내가 지금 가르치는 건 어떠한 거든지, 남편한테나 자식한테나 부모한테나 모든 것을 여기다 맡겨 놓고 부드럽게 말씀을 드려요. 부드럽게, 애한테도 남편한테도 부모한테도 형제한테도 부드럽게 말해 줘요. 그러면 따뜻하게 고여서 당신을 또 따뜻하게 맞아 줘요. 그러니까 무조건 부드러워야 한다. 마음은 평등하게 가져야 한다. 또는 자기 주처를 믿고 거기 모든 것을 맡겨 놓고 거기서밖엔 해결해 줄 수가 없다 하고 믿어라 이거야, 물러서지 말고. 모든 거, 일체를 말입니다.

그러니까 용도에 따라서 자꾸자꾸 다가오는 그 생활이 전부 여러분의 공부할 수 있는 재료야. 그러니 아파도, 뭐 어떤 게 닥쳐도, 하늘이 무너져도 땅이 솟아올라도 그걸 재료로만 알고 맡겨 놓는다면 그것처럼 좋은 게 없어요. 거기서 물리가 터지고 거기서 그릇이 돼서 자기 자신이 바로 홀연히 나타나게 돼 있으니까. 나타나면 둘 아닌 도리 또 배우려고 또 점검을 받고 이러는 거죠. 길잡이도 필요해요. 이 못난 저 같은 길잡이도요.

그러니까 지금 질문하신 분, 무조건 오늘부터 그런 걸 따지고 ‘요런 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내가 말을 해야 하고, 어디까지 여기다 놔야 하고 이러는가?’ 이러지 마시고 무조건요. 여러분이 누구든지 다 이 세상에 태어났으면 무조건, 답답한 것도 그 속에서 나오는 거, 안되게 하는 것도 그 속에서 나오는 거니까. 자기가 이날까지 살림했지 누가 딴 사람이 해 줬나? 응? 그러니까 그 살림하는 게 전부 보고 듣고 판단을 하고 결정을 내리고, 하겠다 안 하겠다 하는 것도 결정 내리고 그러면서 이날까지 살아왔죠? 그러니까 결정 내린 그 장본인 자체에, 주처에다가 맡겨 놔라 이거야. 그러면 홀연히 자기가 나타날 테니까.

그러면 첫째, 마음이 편안하고, 이 모든 모습들이, 모든 의식들이 ‘야, 이거 나도 한마음으로서 자기와 똑같이 인정을 해 주는구나.’ 이러고선 그냥 ‘야, 부처님이 나하고 중생하고 똑같이 생각을 해 주는구나!’ 그러고 아주 좋아서, 흥겨워서 콧노래만 부르게 하고 그냥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거든. 그러니 병이 들었던 것도 낫게 되는 거지. 그러곤 무조건 믿어야지, 자기 끌고 다니는 자기를 왜 못 믿어요? 응? 얼마나 감사한데. 여기까지 오게 한 것만도 감사하지 않아요?

그러니 우리 불교를 생각할 때 저기 상단에 밥이나 놓고 떡이나 놓고 비는 것이 불교인 줄 알지 마시고, 불교는 풀 한 포기의 생명도 역시 불교가 아닌 게 없다. 기독교나 가톨릭교 어떤 교라 할지라도 모두가 불교다. 그러니까 한 솥에 죽 끓는 거와 같다 이거죠, 세상이. 그러니까 그 죽 끓는 데에 한 방울이 ‘이거는 내 방울이다, 네 방울이다’ 그래 봤자야 소용없어. 그 솥에 그냥 푹 나왔다 푹 꺼지고 푹 나왔다 푹 꺼져. 그와 같은 거니까 우리가 한번 넓게 본다면 지구 바깥도 벗어나야 되지 않느냐. 네 자리 내 자리 찾기 이전에 지구 바깥도 벗어나야 지구의 수명도 좀 넓힐 수도 있고 좁힐 수도 있는 자유자재권을 가질 수 있어요. 그래서 대권! 대권만 알지 마시고 또 도도 거기 겸해서, 그래서 태권도라고 하기도 하죠. 그런데 도를 모르면 ‘태권’도 소용없어. 도를 모르고 어떻게 태권이 견디겠어요?

그러니까 내면으로도 이것이 마음의 도리, 보는 게 없이 보고 가고 옴이 없이 가고 오고 이러는 팩스가 돼야 합니다. 그러나 팩스는 한계가 있죠? 아주 자동적으로 한생각이 그냥 그대로…. 저 산호세에도요, 아주 정성이 지극한 사람이 있어요. 처음에는 와서 이렇게 사귀기가 좀 깐깐했죠, 이거 공부하기가. 그런데 웬만큼 그냥 정성이 지극하게 다니다 보면요, “스님!” 하고 전화만 해도 “알았어.” 이렇게 말이 나와요. “알았어요.” 이러고 말이 나오지 “아이, 정성들이세요.” 이렇게 말이 안 나와요. 그만큼 익어라 이거야. 그만큼 지극해라 이거야. 아니, 자기가 그릇도 만들어 놓지 않고선 담아 달라고 그런다고 “아유, 담아 줄게.” 이러나요, 누가? 거지도 깡통을 가져와서 밥을 달라고 그래야 담아 주는 법인데. 그러니까 산호세에서 “스님! 지금 이렇게 이렇게 하는데 어떡합니까?” 이러면 “알았어!” 이 ‘알았어.’밖에는 몰라요, 나는. 너무 그냥 무식하거든. 그러니까 ‘알았어’밖에 모르지.

그래도 그 마음이란 천 리라도, 요기라고 해도 그건 과언이 아니면서도 요기라는 언어도 붙지 않는다는 얘기죠. 그래서 어느 사람이 “스님, 나를 이렇게, 이렇게 죽게 만들어 놓겠습니까?” 그랬더니, 금방 자기가 내가 됐대요, 금방, 그러는 동안에. 그러니까 자기가 내가 되니까 그것이 그냥 다 없어지더라는 거지. 그런 연에 나는 또 거기서 찰나에 나고 자기가 도로 된 거지. 어때요? 이렇게 묘한 법이 바로 이 도리거든.
그래서 32상이 구족하고 32응신이 구족하다. 62견이 또 구족한가 하면 62견도 없느니라. 62견도 없어. 부처는 어디서 나왔느냐? 중생 속에서 나왔지 딴 데서 나왔나? 그럼 중생은 어디 있느냐? 부처 속에서 나온 거라, 또. 그러니 아주 그냥 콤비죠. 부처와 중생은 콤비라고. 그러니까 얼마나 친절하고 사랑하고 그래요? 때로는 애인이 됐다, 때로는 아내가 됐다, 때로는 그냥 친구가 됐다가, 영원한 친구가 됐다가, 때로는 부처가 됐다, 법신이 됐다 이렇게 그냥 무변하게 돌아가는데 얼마나 그게 참 광대무변합니까?

정말이지 사랑, 진짜 사랑은 거기에 있는 겁니다. 나도 공부할 때 그런 예가 있었습니다마는, 공부라고 할 건 없지만, 묘지가 요기 있고 요기 있으니 요건 아들의 묘지고 요건 아비의 묘지인데, 인제 날 가르치는 거죠. 근데 요 아비가 요리로 오면 아들이 하나가 되고 아들이 요리로 가면 아비가 하나가 되니 그 무슨 연고냐 이거야. 그걸 몰라 가지고는 가만히 앉아서, 이게 남이 의정을 그냥 강제로 줘서 ‘이 뭣고?’ 하고 있는 거는 아니 되고 정말 자기 스스로 나와서 의정을 내야만이 그것이 진짜 의정이에요. 그래서 그것을 알 양으로 이거는 이리로 가도 아들이 되고 이리로 가도 아비가 된다니, 그러면 이게 둘이 아니라 이쪽으로 오면 하나가 되고 이쪽으로 가도 하나가 되니까, 우리가 일을 할 때는 ‘자’가 되고 일을 안 하고 가만히 있을 때는 ‘부’가 되는 거야, 그냥. 하나로! 하하하….

그러니까 그걸 몰라서 밤새도록 이슬을 맞고 앉아 있다가, 그 이튿날도 몰라서 그냥 있다가 보니까는 나중에, ‘아하!’ 그때서야 안 거야. 뭐냐? ‘아이고, 체는 없지. 그런데 이것이 그렇지! 열 개라도 하나로 될 수도 있고, 하나도 없을 수도 있는 거지. 하도 많아서 찰나찰나 돌아가니까 없다고 할 수도 있지.’ 그걸 생각을 한 거죠. 그래서 ‘옳지. 인간의 마음이라는 건 무궁무진하구나!’ 아비가 자식이 되고 자식이 아비가 될 수 있고, 며느리도 될 수 있고 딸도 될 수 있고. 달마 대사가 구렁이 속에 들어가서 구렁이가 돼 가지고, 구렁이 옷을 입고선 저기 멀리 갖다 벗어 놓고 자기 옷을 되입으려고 오니까 옷이 없어졌더래, 글쎄. 그래서 도둑놈이 벗어 놓고 간 옷을 입어서 그렇게 털북숭이라는 거야. 하하하.

그런데 그걸 가지고 인제 따리를 붙여 가지고 방편으로 낚싯밥을 자꾸 던지는 거야. 왜 달마 대사는 수염이 없느냐 이거지, 또. 이유들이 얼마나 많아? 그런데 난 지난번에 그랬지. 경허 스님 턱에 수염이 안 나는 까닭은 뭐냐고 그랬지, 또. 경허 스님이 상투를 틀고 다닌 까닭은 뭐며, 또 경허 스님이 사계절 빨가벗고 실오라기 하나 안 걸치고 다닌 까닭은 뭐냐 그랬지. 그랬더니 아무도 말 안 해. “도인만 앉아 있구나!” 그러고 그만뒀지.

지금 우리 부처님들이요, 조마증이 나요. 그러니까 여러 부처님들께서 질문하시라고 그럴까? 허허. 끝났어? 그러면 오늘 끝내고 참, 여러분과 더불어 같이 어저께처럼 재미있게 좀, 한 30분이고 놀고 가십시오. 그럼 그렇게 알고요, 여러분, 공부 열심히 하세요! ‘멀어도 먼 게 없고 가까워도 가까운 게 없다. 내가 이름을 믿겠느냐, 허공을 믿겠느냐, 형상을 믿겠느냐. 나는 오직 나를 형성시키고 나를 끌고 다니는 내 주처의 내 주인을 믿겠다.’ 이렇게 하시라고요. 그렇게 바로 맡기고 지켜보는 게 관하는 거고 실험하는 거고 체험하는 겁니다. 그럼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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