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선종사찰 순례 - ⑤ 지상사·화엄사·흥선사

중국 서안 지상사 대웅보전 전경. 지상사에서 의상 스님은 화엄종 2조 지엄 스님을 만나 화엄 사상을 배웠다.
[현대불교= 신성민 기자 ]당나라 당시 화엄조 제2조였던 지엄 스님 앞으로 이역만리 구법승이 찾아온다. 지엄 스님은 기시감이 들었다. 전날 꿈에서 본 징조가 있었기 때문이다.

지엄 스님의 꿈은 대략 이렇다. 큰 나무 한 그루가 신라 지역에 나서 가지와 잎이 널리 퍼져서는 중국까지 덮었다. 나무 위에 봉황의 둥지가 있어 올라가니, 한 개의 마니보주에서 나온 빛이 멀리까지 퍼졌다. 이내 잠에서 깬 지엄 스님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곧 주위를 청소하고 기다리니 나타난 사람이 바로 신라 유학승 의상 스님이었다. 지엄 스님과 의상 스님이 만난 곳이 바로 중국 서안 지상사다.
 
신라 의상 스님 머문 지상사
지엄 스님에게 화엄사상 배워
귀국 후 ‘해동 화엄’ 길 열어
中 화엄종 본산 화엄사 ‘눈길’

흥선사, 中 밀교의 발원된 곳
신라 혜초·日 쿠카이도 수학
동아시아 불교 교류 단면 확인

지상사에 건립된 의상 스님이 화엄을 수학했음을 알리는 기념비.
‘해동 화엄’의 뿌리를 찾다
지상사는 중국 화엄종의 조정(祖庭)이자 발상지로서 실질적인 화엄종의 종찰로 손꼽히는 사찰이다. 수나라 문제 개황 초년 동연 법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며, 당나라 시기에 전성기를 맞는다. 당대 고승들이 많이 주석했는데 화엄종 초조 두순, 2조 지엄, 3조 법장 등이 지상사에 주석하면서 화엄종을 전파했다.

조계종 교육원 순례단과 찾은 지상사는 최근 중창불사를 거쳐 완연한 사격을 갖추었다. 현재 사찰에서는 의상 스님이 주석하며 화엄을 배웠던 것을 기리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기념비는 2007년 12월 조계종이 건립한 것으로 정병삼 숙명여대 교수 등이 글을 썼다.

의상 스님은 이곳에서 지엄 스님에게 화엄 사상의 요체를 배운다. 최고의 화엄 학승에게 수학한 결과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668년 저술한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다. 〈화엄일승법계도〉는 7언 30구 210자로 화엄 사상의 핵심을 도인(圖印)으로 나타낸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화엄일승법계도〉의 게송(偈頌)들은 4개의 ‘회(回)’자 모양의 도인(圖印)으로 구성돼 있는데, 첫 글자인 ‘법(法)’과 마지막 글자인 ‘불(佛)’이 가운데에서 다시 만나 이어진다. 특히 “하나 속에 일체가 있고 일체 속에 하나가 있으며, 하나가 곧 일체요 일체가 곧 하나(一中一切多中一 一卽一切多卽一)”라는 구절은 모든 것들이 서로 의존하고 관계를 맺고 있다는 ‘상즉상입(相卽相入)’의 연기(緣起)를 나타낸다.

의상 스님은 중국 화엄종 3조인 법장 스님이 화엄종의 교리를 집대성하는 데에도 영향을 주었다. 이는 법장 스님이 의상 스님에게 보낸 서신 등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법장은 서신에서 “상인께서는 고향으로 돌아간 후 화엄경을 개연천명해 법계무애연기를 선양해 겹겹의 제망으로 불국을 새롭게 하여 크고도 넓게 이익을 끼치신다고 하니 기쁨이 더욱 더하고 이로써 부처님 멸후에 불법을 빛내고 법륜을 다시 굴려 불법을 오래 머물게 하는 이는 오직 법사임을 알았습니다”라고 상찬했다.

의상 스님의 진영. 해동화엄 초조로 숭앙받고 있다.
18세 연하였던 법장 스님이 의상 스님을 사형이자 멘토로 모셨던 것은 분명하지만, 의상 스님은 671년 신라로 귀국했다. 귀국 후에도 법장은 신라 유학승을 통해 의상의 안부를 묻고 서신을 보내곤 했다.

의상 스님이 신라로 급히 귀국한 것은 신라와 당 사이에 전운이 돌았기 때문이다. 〈삼국유사〉에는 의상 스님이 당나라 군대가 신라를 공격하려 한다는 정보를 알리기 위해 서둘러 돌아왔다고 기록돼 있다.

이후 의상 스님은 676년 왕명에 따라 영주 부석사를 건립하고 그 곳에서 화엄의 교리를 널리 전파했다. 그의 명성은 중국과 일본에도 전해지며 ‘해동(海東) 화엄(華嚴)의 초조(初祖)’라고 불리게 됐다.

의상 스님이 한반도와 일본에 화엄을 전파할 수 있던 시작은 중국 서안 종남산 지상사에서 지엄 스님을 만나면서부터다. 유학생 의상의 그릇을 알아보고 그에게 화엄의 요체를 가르쳤던 지엄 스님의 혜안은 동아시아 불교 발전에 큰 획을 긋는 역할을 한 것이다.

중국 화엄종을 대표하는 사찰은 지상사 이외에도 화엄사가 있다. 803년 지어진 화엄사는 작은 동굴들을 법당으로 사용한 사찰이었다. 과거에는 제법 큰 규모의 사찰이었으나 쇠락을 거쳐 지금은 한창 도량 정비 불사가 진행 중이다. 순례단이 찾은 날에는 내렸던 비로 인해 가는 길이 모두 황토 진창으로 변해 한 걸음 한 걸음 걷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현재 화엄사에는 화엄종 초조부터 4조까지의 사리탑이 있었다고 전해지나 청나라 시기 산사태로 인해 초조 두순과 4조 징관의 탑만이 남았다.

흥선사의 자안지장왕보살. 서안 시민들이 복덕을 기원하는 장소다.
과거와 현재의 공존
앞선 두 사찰이 교종(敎宗)의 중심이었다면 서안 시내에 위치한 흥선사는 밀종(密宗)의 시원이다. 흥선사 정문에 들어서면 ‘국토장엄(國土莊嚴) 이락유정(利樂有情)’이라는 문구가 눈의 띈다. ‘국토를 장엄하고, 중생을 이롭게 한다’는 문구에서 흥선사가 가지는 위치를 알 수 있다.

현재 흥선사는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모습을 여실히 보여준다. 관광객, 순례객 뿐만 아니라 현지인들이 많이 찾는 사찰이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향을 사르고 불보살에게 복덕을 기원하는 모습을 자주 찾아볼 수 있다. 또한 젊은 커플들이 부처님께 참배를 드리며 데이트를 즐기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흥선사가 창건된 것은 서진 무제 시기인 265년이다. 수·당 시대에는 이곳에 역경원이 있었고, 그 때문에 인도 출신 외국인 승려들이 많이 있었다고 한다.

이 중 주목해야 하는 스님은 스리랑카 출신 불공 스님이다. 그는 인도어, 자바어, 중국어 등 여러 언어에 능통해 남들이 12년 걸리는 번역을 6개월만에 끝내는 높은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불공 스님의 법을 이어받는 8대 제자가 있었는데 이 중 한 명이 우리가 잘 아는 혜초 스님이다. 그는 흥선사에서 역경하고 천복사에서 금강지를 만나 밀교를 배우기도 했다.

당나라 국사의 자리까지 올랐던 다른 제자 혜과 스님은 신라승 혜일과 일본승 쿠카이(空海) 스님에게 밀교의 법을 전했다. 특히 쿠카이 스님은 귀국 후 일본에 밀교 진언종을 전파했다. 흥선사에는 쿠카이 스님 동상이 있고, ‘자각대사(慈覺大師) 기념당’도 건립돼 있다.

종파 불교와 관련된 사찰을 순례하면서 놀란 것은 당나라 당시 장안의 다양성·개방성이다. 실력있는 신라·일본 유학승들에게 자신들의 종파 교리 요체를 전달해주는 것은 쉬운 결심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문호를 개방한 것은 ‘일불제자’라는 상호 가치가 작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당나라 시기 불교의 개방성은 민족·이념 등으로 나눠 갈등과 반목하는 현재의 우리가 반성하고 살펴봐야 할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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