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남자 어르신을 상담할 때였다. 고된 노동으로 평생을 보내셨고 떨어져 사는 가족들과 사이도 좋지 않은 분이셨는데, 신세한탄을 하시다가 느닷없이 자기 상황에서 어찌하면 좋을지 똑 떨어지게 답해달라며 졸랐다. 원하는 답을 내놓지 않고 말을 돌리니 그만 화가 폭발하셨다. “이게 무슨 상담이냐. 원 이거 해서 밥이나 먹는 놈인지 모르겠다며 화를 내시는데 여간 당황스럽지 않았다. 하지만 상담이란 거울 같은 것. 차분히 이해시키고 달래드리니 조금씩 화가 누그러져갔다.

찔끔찔끔 눈물을 쏟고 이런 저런 후회를 하며 해묵은 감정들을 묶고 풀기 여러 번, 그러다가 문득 한마디를 하셨다.

그래도 나 착한 늙은이여, 마누라는 그래도 나 오래 살기 바랄거야.” 패인 주름 사이로 빛나는 눈빛을 비롯해 그 분의 첫 표정에서 보지 못했던 것들이 보였다. 그리고 이 분이 나에게 진정 바라던 것이 과연 그 똑 떨어지는 답이었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되었다.

상담사는 왜 늘 시원하게 정답을 짚어주지 않을까? 그것은 상담사를 찾아온 내담자를 상담에 의지하는 존재가 아닌 스스로 결정하며 살아가는 주체적 인간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마음의 주인을 공경하기 위한 약속인 것이다.

▲ 그림 박구원.

정신과 낮병원에서 상담을 하는 선생님들에 따르면 상담 프로그램이나 놀이치료 기간이 끝나더라도 불안을 떨치지 못하고 곧 다시 참여하기를 원하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그분들은 상담을 통해서 어떤 문제를 해결하려 하기보다는 상담행위 자체에서 안도감을 얻는 것 같다고 한다. 누군가의 마음을 돕던 상담행위가 어쩌면 마지막에 가장 극복하기 힘든 장애물이 될지도 모른다는 것은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부처님의 생애 마지막 말씀 중 자등명 법등명(-light)’이 사실은 (-island)’의 한자 오역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은 새삼 깊은 깨달음을 던진다. 우리는 섬처럼 홀로 이 세상에 나타났으며 지혜는 오직 스스로를 의지해 찾아야 함을 잊지 말라는 간곡한 당부가 아닐 수 없다. 꼭 상담관계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늘 생각해야 한다. 부모와 자식, 남편과 아내, 스승과 제자, 직장이나 학교의 선후배, 친구 관계에서 권위와 지식을 앞세워 다른 이의 생각과 판단을 빼앗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현재 불교상담에서 최고, 최상의 멘토로 여기는 것은 다름 아닌 부처님과 그 설법이다. 부처님 시대에 많은 제자와 장자, 귀족, 여러 직업의 사람들은 괴로움과 고민들, 진리추구의 방도를 부처님께 직접 묻고 답했다. 하지만 그 어느 경우든 부처님께서 해답을 내리고 일방적으로 그것을 따르게 한 경우는 없었다. 사람들 스스로 알아차리고 주체적인 모습으로서 번민을 떨쳐 일어설 수 있도록 했다. 금강경에서 그대 생각은 어떠한가?’로 나타나는 환기적 화법을 떠올려보자. 부처님은 설법을 하실 때마다 일일이 소통을 통해 사람을 일깨우셨고 결국 어떤 상대든 불성을 일으키셨다. 마음의 주인을 대하는 부처님의 변치 않는 자세였다.

불교상담이 서구 상담심리학계의 허점과 의문점을 지혜롭게 채워갈 수 있던 저력은 오롯이 인간의 정신적 본질과 소통에 대한 치열한 사유정신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부대끼고 사는 일상생활에서도 서로의 소통과 믿음이 더 자연스럽게 이뤄지기를 기대하고, 그 중심이 되는 철학을 부처님의 설법과 논리에서 살펴 볼 수 있는 기회가 많아지기를 바란다. 저마다 귀한 마음의 주인이시다. 자기 마음의 이야기를 평소 잘 귀담아 들어주고 사랑하셨으면 좋겠다. 모두의 마음이 부처님을 빼닮아서 좋은, 달처럼 환하게 소통하는 세상을 간절히 기도해본다.

-신동찬(불교상담심리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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