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는 것도 고정되지 않고 안 되는 것도 고정되지 않아요

고라는 이름에 끄달리지 마세요.
우리가 고라는 이름을 잘 요리를 해서 맛을 볼 수 있다면
그거는 아주 맛이 좋은 겁니다. 감사하고 말입니다.

만물을 누가 생기게 했는지
질문 어느 종교에서는 지구나 모든 만물이 어떤 신에 의해서 만들어졌다고 얘길 하고, 불교에서는 겁의 윤회를 거쳐 가면서 인간이라는 몸이 만들어졌다고 얘길 합니다. 그러면 불교에서는 자연법칙을 그대로 순응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부처님의 힘이나 그 누군가의 힘에 의해서 인간의 마음이나 모든 만물이 움직인다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까.

답변 뭘로 어떻게 표현해야 될까요? 이런 게 있죠. 보이지 않는 세계가 50%라면 보이는 세계가 50%예요. 그래서 의학적으로도 나와 있지만 음과 양이 한데 합친다, 정자와 난자가 한데 합친다는 그런 문제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정자와 난자가 한데 합쳐지는 동시에 어떤 것이 필요하냐. 자기 영혼이 거기에 계합이 되지 않으면 안 되죠. 자성신이 즉 자신(自神)이란 말입니다. 신이 계합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 신의 역량에 따라서 아이가 출중하냐 안 하냐가 달려 있습니다. 참 묘한 법이 있죠. 정자와 난자가 한데 합쳐서 하나만 남고 나머지는 물로 그 물질 자체가 다 없어지죠. 정자와 난자가 한데 합쳐졌던 그 하나에서 모습을 바꿔서 다시 수억 마리가 된단 말입니다. 두 사람의 정자와 난자 속에서 한 사람이 태어나면 이 인간의 몸 하나에 또 수억 마리가 들어 있듯이 말입니다. 이거는 대표로 대장을 하나 바깥으로 내보낸 겁니다. 그런데 이 커다란 몸뚱이를 하나 내놓고는 그 몸뚱이 속에 내가 수억 마리가 돼 가지고 또 있습니다.

그러면 몸뚱이 속에 있는 내가 옳습니까, 현재 나와서 사는 내가 옳습니까? 우리가 표면적으로 볼 때 말입니다. 그러면 내 속에 천차만별로 들어 있는 그 생명들과 지금 이 몸의 생명이 따로 있습니까? 예? 내 배 속에 있는, 오장육부 속에 있는 생명들이 진짜 생명입니까, 지금 내 생명이 진짜 생명입니까? 그 영혼이라는 것은, 신이라는 것은 여러분 모두에게 다 있습니다. 한마음의 자성신이 수십억도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얘기가 있죠. 어느 나라에 아주 급한 일이 생겼어요. 50억의 군사가 나라를 먹어 치우려고 쳐들어오고 있었답니다. 이쪽 나라에는 군사가 10억뿐이니 저쪽에 비하면 아주 적은 군졸들이죠. 그러니 저쪽에서 50억이 쳐들어오니 10억으로는 질 게 뻔한 일이죠. 그런데 이쪽 나라에 어느 한 사람이 이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야, 저 50억을 10억이 어떻게 대적할 수 있겠느냐. 같이 대항하자면 40억이 더 많아.’ 그러니 어떡합니까. 그래서 한생각을 하기를 ‘모습 없는 모습이여! 그쪽이 50억이라면 나도 체가 없으니 50억이 될 수 있지 않겠느냐. 모습 없는 내 모습이 그쪽 모습 있는 데로 가서 만약에 내가 된다면 50억이 싸움할 일도 없지 않은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그 한생각을 하면서 피리를 부니까 그 50억이 전부 그 피리 소리를 듣고 ‘야, 우리가 싸움을 해서 뭘 하냐.’ 이런 생각이 그냥 들어간 거예요. 50억이 전부 피리 부는 사람 한 사람이 돼 버린 거예요. 아시겠어요? 그 한 사람이 그 50억이 돼 가지고 뿔뿔이 다 헤어진 거예요. 그러니 싸움을 할 수도 없고 이기고 지고 할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나라에 의인이 있었기 때문에 그 나라를 치지 못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신이라는 것은 30억 년 전이나 지금 현재 여러분의 신이나 자성신이나 둘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 신의 놀음은 바로 자기가 마음먹는 대로입니다. 차를 끌고 다니는 것을 예를 든다면, 신이 기름이라면 기름은 이리로 가든 저리로 가든 도둑질을 하러 가든 말을 안 합니다. 아시겠어요? 근데 이 신의 놀음, 즉 마음 내는 그 놀음은 이 운전수에 달렸어요. 이리로 가든지 저리로 가든지 망해 먹든지 이건 운전수가 끌고 가기에 달렸단 말입니다.

그렇듯이 사람에게 짐승의 허물을 쓰게 하느냐, 다시 사람의 허물을 쓰게 하느냐, 또는 비상한 인간으로 만들어 놓느냐, 또는 한 나라의 왕이 되게 하느냐 이런 것도 보이지 않는 데서 다 하는 겁니다. 자기가 하는 대로 자연 법계에서 벌써 주어져요. 그래서 나는 생각하기를 ‘아이고, 사람 살기 귀찮아서 어떡하나.’ 하고 말입니다, 죄가 있다 없다, 유전이 있다 업보가 있다, 내가 얼마나 죄를 많이 졌기에 이런 일이 벌어지나, 내 팔자가 어떤가, 운명이 어떤가 이런 거 아랑곳없다는 얘깁니다. 왜냐? 자성신은 생각 내는 생산처란 말입니다. 그러면 그 주인공에, 즉 말하자면 체가 없는 데다가 체가 없는 걸 놓을 때에 모든 것이 다 녹아져 버려요. 예를 들어서 자석에다가 자석을 붙이면 다 자석이 되듯이 그냥 없어져 버려요.

그러면 없어져 버리는 동시에, 즉 체가 없는 것이 체가 없는 생각을 잘하면 다 녹아 버리는 동시에 생각을 좋게, 자기 분수에 맞게 잘 내면 생산이 돼서 현실로 나오는 겁니다. 이건 과학적이기도 하지만 자연과학이라고 ‘학’을 붙이기보다는 ‘자연과학심’이라고 할까요, 자성신의 활용이라고, 자활이라고 할까요. 그래서 내가 항상 얘기했듯 원통 자활, 즉 내공을 타파한다면 삼심 내공을 타파하게 된다. 사공법을 타파한다면 원통 자활을 하게 된다. 육바라밀의 그 평등공법을 타파하게 된다. 그리고 칠(七)! 이것은 모든 사람들이 이 도리를 알게 되면, 깨달으면 보배가 딴 데 있는 게 아니라 흙에서 일체 만물을 소생시키고 길러 내듯 모든 것은 자기 아님이 없는 까닭에 자기 거 아님이 없다 이겁니다. 그러니 일체 전체에 칠보가 가득 차 있다. 내 마음속에, 육근에도 육진에도 육식에도, 둘이 아닌 내 한마음 근본에 그냥 칠보가 가득 차 있으니 바로 그것이 칠공법의 자활이 된다 이겁니다.

그러면 주는 것도 뺏는 것도 자유자재하다. 어느 나라든지 망하게 하려면 그냥 삽시간에 망하게 해요. 그런데 그런 도리를 배우는 사람이 그냥 망하게 하려고 하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남을 이익 하게 하죠. 그 도리를 알기 때문입니다. 자연법칙이 그렇게 질서 정연하고 무섭다는 걸 알기 때문에 자기만을 위해서 사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그리고 남을 위해서 살면 자기는 저절로 한마음으로 돌아가면서 잘 지내게 돼 있죠.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마음을 잘 쓰시는 것이 좋지요.

또 사무 사유를 한데 합쳐서 팔정도라고 하죠. 수레공법을 타파해야 자유스럽게 다니면서, 이 몸도 자유스럽고 마음도 자유스럽고, 그래서 걸림이 없이 그 권리가 하늘에 솟은 듯하다 이런 말이죠. 그래서 산 사람이 한 찰나에 저승을 왔다 갔다 할 수 있어야 하고, 또 한 찰나에 저승 천자가 되고 한 찰나에 이승 천자가 될 수 있는 그 능력이, 자재법이 있어야 열반인 것입니다. 스님네들이 돌아가셨다고 해서 열반이 아닙니다. 살아서 열반을 못했는데 죽어서 어떻게 열반을 합니까? 여러분이 한 달 내내 일을 안 해 놓았는데 어떻게 일한 대가를 받습니까? 그와 같습니다.

그러니까 삼천 년 전의 신이 따로 있고 지금 현재의 자기 신이 따로 있다고 생각한다면 자기 신은 능력이 없고 부처님 신만 능력이 있는 줄 알죠.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한생각을 하는 데에 따라서, 기름은 본래 주어져 있는 거니까 여러분이 차 끌고 가는 거를 잘만 끌고 간다면, 잘 생각을 해서 끌고 갈 수만 있다면 구덩이에 빠지지 않고 사고 나지 않고 돈 벌 수 있는 거죠. 그와 같은 겁니다.

그러니까 신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내가 한생각을 하게 할 수 있는 그 신, 자성신에 의해서 내 신이 이 우주 공간 안의 어떤 것 하나도 빼놓지 않고 일체가 다 될 수가 있고, 천차만별의 신이 내 신 하나가 될 수가 있는 겁니다. 내가 만약에 그런 이치를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해 보지 못했다면 이런 얘기를 함부로 할 수도 없어요. 이 말을 거짓으로 했다 하면…, 여러분은 모르지만 보이지 않는 법계에 수많은 생명들과 신이 있는 겁니다. 그게 거짓말이라면 한마음이 될 수 있겠습니까. 이 세상에 거짓이 어디 있습니까.
어떤 사람이 그랬답니다. 뇌물을 가지고 가서 바치니까 “야, 이거 못 받겠다. 난 이런 거 안 받는다. 내가 해 줄 수 있으면 그냥 해 줄지언정 이건 받지 않겠다.” 하니까 아무도 없는데 뭘 그러느냐는 겁니다. 그러니까 “너하고 나하고 있지 않으냐.” 그러더라는 겁니다. “그래, 네가 없고 나만 있어서 안다 하더라도 그것은 이 우주 전체에서 알고 있는 것인데 어찌 없다고 하겠느냐. 내 마음에서 아는 거를 전체가 알고 있거늘 어찌 그렇게 얍삽하게 생각할 수 있겠느냐. 내가 될 수 있는 대로, 힘닿는 대로 해 볼 테니까 짐 무겁게 해 주지 말고 이거 가지고 가라.” 그러더랍니다.

될 수 있으면 짐을 무겁게 짊어지고 살지 마세요. 여러분이 생각 하나로 인해서 그냥 짐을 잔뜩 무겁게 짊어지고 사시면 아주 괴롭습니다. 알고 보면 괴로운 것도 없지만 말입니다.

술도 하고 매운탕도 먹는데…
질문 『수능엄경』에 보면 “여래가 멸한 후에 말법 시대가 되면 고기 먹고 다 하면서도 소위 ‘도를 깨쳤느니라’하는 사람들이 많이 나타난다.”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나름대로 볼 때 효봉 스님이나 경허 대선사 같으신 분은 걸림이 없이 행을 하셨는데, 제가 주변의 사람들하고 직장에서 어울리고 하다 보면 뭐, 매운탕도 먹을 때가 있고 술 한 잔 하고 그럴 때도 있습니다. 그러면서 부처님 말씀을 생각하면 ‘내가 마귀가 아니냐.’ 이런 생각들이 때때로 들기도 하고, 그러면서 경허 스님이나 효봉 스님의 그 걸림 없는 행을 보고 자신을 합리화시키는 그런 것이 아닌가 하고 걸리기도 합니다.

저는 재가불자지만 마음은 스님같이 끝없이 닦아 나가려고 하는데요, 그래서 첫 번째, 제가 이후로 공부를 어떻게 해 가야 되겠는가, 두 번째는 남들을 어떻게 인도할 수 있겠는가, 세 번째는 재가불자라고 하지만 제가 주변의 사람들하고 매운탕 먹고 이러는 것이 공부를 잘못 해 나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문제들에 대해서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답변 첫째는 자기를 자기가 이끌어 가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고, 둘째는 자기 몸뚱이 속의 자생중생들을 제도를 못했기 때문에, 조복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고, 셋째는 남들에게 보이는 이 모습이 부처님 모습 같지가 않으니깐 그렇습니다. 어때요? “모든 것을 알기만 해도 아니 되느니라.” 하는 거는 “천차만별로 찰나찰나 바뀌고 찰나찰나 나투는데, 어떤 거 할 때 내가 했다고 볼 수 있겠느냐.

내 도량 아님이 하나도 없고, 하다못해 곤충에 이르기까지 나 아님이 하나도 없느니라.” 하는 그 뜻을 모르게 되기 때문이죠. 천차만별로 내 속에 들어 있는 중생들을 제도를 못했기 때문입니다. 어디로 갑니까, 그게? 그 속에서 나오는 게 그냥 그렇죠.
그러니 아는 것만 많고 지식이 많고 모든 걸 달달달달 외워서 이 세상이 다 그냥 그렇게 되는 거를 알고 있어도 소용이 없는 겁니다. 내가 다리 병신이 돼서 요만큼 한 발짝을 떼어 놓지 못하고, 귀머거리가 돼서 듣지 못하고, 눈 한쪽이 멀어서 보지 못한다면 그거는 헛거야, 전부! 그래서 부처님이 “오신통을 한다 하더라도 했다고 하지 마라. 모두 오신통 안에 조복을 받고 오신통을 벗어나야만이 오신통을 굴리고 그 응신이 화해서 천백억으로 나투느니라.” 하고 말씀하신 거죠. 그러니까 천백억이란 숫자를 말하는 게 아니에요.

그러니 아는 거를 다 놓으면 혹시 모르죠. ‘아이고 이것이 열반경지가 아닌가. 이 세상이 다 그런 게 아닌가. 이게 내가 홀연히 깨친 것이 아닌가.’ 이렇게 다 안다 하더라도…, 이 물컵에 물이 들어 있는 거를 보고 알고 있다고 얘기하는데 이 물컵을 들어서 목마른 사람을 먹일 수 있고 내가 이렇게 먹을 수 있어야만이 그게 도 아닌 도예요. ‘도’도 이름일 뿐이지, 도 아닌 진실한 도! 그러니까 그 아는 거를 다 좀 놨으면 좋겠어요. 네? 그 아는 거를 그 나오는 구멍에, 보고 듣고 알고 이러는 거를 나오는 거기다가 다시, ‘아는 것도 네가 아는 거지 내가 아는 게 아니요, 또 듣는 것도 네가 듣는 거지 내가 듣는 게 아니요, 하는 것도 내가 하는 게 아니요, 사는 것도 내가 사는 게 아니니 너만이 이끌어 줄 수 있잖아.’ 하고 거기다 되놔야만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건 남이 해서 주는 것도 아닙니다.

되고 안 되고를 모두 뛰어넘으려면
질문 스님께서는 “놓으세요. 놓고 가세요. 맡겨 놓고 가세요. 잘된 거는 감사하게 맡겨 놓고 또 안 되는 것은 ‘응, 안 되는 것은 주인공만이 해결할 수 있다.’하는 두 가지만 생활 속에서 진실하게 실천할 수 있다면 눈물 흘리지 않고 살 수 있을 겁니다.”라고 하셨는데, 조금만 더 구체적으로 되고 안 되는 것을 모두 뛰어넘을 수 있는 가르침을 설하여 주십시오.

답변 허허, 두 가지만 있는 거는 아닙니다. 도둑질을 하고도 그렇게 한다고 해서 되는 건 아니니까요. 예를 들어서 이런 게 있죠. 인간이라면 계율, 질서, 교양, 충성, 효도 이런 거는 다 잘 아시리라고 믿습니다. 그건 아주 전제하고 들어가죠. 그리고 불심도 돈독하고요. 그렇다면 도둑질도 못할 거고 강도질도 못할 겁니다. 돈 주고 하래도 못해요. 그러니까 그렇다는 것을 믿고 전제하고 들어가죠.

그런데 그렇게 하고 다니는 사람들은 언제나 모든 것을 맡길 줄 아셔야 합니다. 안 되는 거는 한번 쓱 뒤집으세요. ‘아하! 주인공밖엔 해결을 못하지.’ 그러고 믿고, 믿고 거기다 맡겨 놓으면 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아무 걱정이 없어요. 안 되는 것도 되는 거니까 걱정이 없다니까요. 안 되면 여러분은 방황하죠? 그런데 그 안 되는 것도 고정되지 않았거든요. 되는 것도 고정되지 않고 안 되는 것도 고정되지 않아요. 그러니 안 된다고 하더라도 되는 거죠. 금방 돌아올 테니까요. 그러니 운전수 노릇을 잘해야 돼요. 또 모든 것을 거기다 맡겨 놓고 갈 때 참 감사하죠. 그게 됐을 때 참 감사하죠. ‘참 감사하다’ 하고 또 감사하게 놓고요.

그런데 고집멸도(苦集滅道) 사제법에 이런 게 있죠. 고라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 살림살이하는 데에 모두가 고라고 생각하시죠? 그런데 고가 아닙니다. 인간은 부처가 될 수 있게끔 고등 동물로서 태어났습니다. 그러면 그 과정을 거쳐야 벗어나죠. 그래서 “사람 되기 어렵고 정법 만나기 어렵고 부처 되기 어렵더라.” 이런 게 있죠. 그러니 사람이 됐으면 우리가 ‘그 모든 것은 내 주인공이 나를 성숙하게끔 둥글게 이끌어 주는 과정이로구나.’ 하는 걸 믿고 놓을 때 감사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그때는 집도 없고 멸도 없고 도도 없을 겁니다. 고에서 그냥 타파를 해 버렸기 때문에요. 고라는 이름에 끄달리지 마세요. 우리가 고라는 이름을 잘 요리를 해서 맛을 볼 수 있다면 그거는 아주 맛이 좋은 겁니다. 감사하고 말입니다.

지금 그냥 누구한테 맞아서 기어서 가도, 밥을 굶고 지금 기어간대도 ‘아이고! 참 감사하구나. 이렇게 감사할 수가 있나.’ 하고 아마 눈물을 흘릴 겁니다. 그러니 ‘고가 고가 아니다.’ 이겁니다. 업보가 많으니 죄가 많으니 이러고 난설하지 마세요. 어떤 안 되는 일이 있어도 ‘아! 이거는 주인공밖에 해결 못하는구나.’ 하고 믿고 놓으세요. 안 돼도 ‘이것도 되는 거지, 뭐.’ 하고 그냥 편안하게 놓으시란 말입니다. 그러면 쓱 한 찰나에 돌면서 그게 슬금슬금 돌아가지 않겠습니까.

복덕과 공덕에 대해서
질문 부처님 당시에는 복덕과 공덕의 개념이 나뉘어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다 선불교에 들어서면서 자성을 깨치는 것을 공덕으로 설명하게 되었다고 하는데 복덕과 공덕을 어떻게 봐야 하는지요.

답변 공덕이란 뭔가. 모두 한데 뭉쳐서 서로가 너 나가 없이 해 주는, 아픔을 서로가 알고 내 아픔도 둘이 아니게 위해 주는 그런 마음 자체가 바로 공덕입니다. 그런데 내가 개별적으로 이렇게 기도를 하고 이렇게 정성을 들이고 이렇게 시주를 했는데도 나한테 이득이 없다고 한다면, 복덕이 있다 하더라도 그게 얼마나 되겠습니까? 복덕을 누리는 것은 우리가 사는 동안 아주 짧은 기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복덕하고 공덕하고는 천지 차이입니다. 복덕은 잠시 잠깐 그저 불 반짝 켜 주다가 꺼지는 거와 같습니다. 그러나 공덕은 세세생생입니다. 무명의 굴레에서 벗어나서 세세생생의 밝음을 언제라도, ‘꺼진다 켜진다’ 이런 도리가 아닌 밝음의 세계로 우리는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공덕이 돼야지 복덕을 찾아서는 아니 된다 이런 말입니다. 기복이 복덕이죠.

즉 말하자면 내면의 자기 자성을 믿는 데에 공덕이 되는 거죠. 그러니 ‘자성으로 인해서 내 몸뚱이 나무가 살고 있구나. 자성의 뿌리로서 내 모든 것이 살고 있구나. 그러면 내가 먹는 게 혼자 먹는 건가? 내 몸뚱이 속에 내가 얼마나 많이 들어 있나. 내가 일한 것도 혼자 했나?’ 하는 겁니다. 언제든지 말하는 건 좋게 말하죠. “내가 죽도록 애를 써서 벌었다.” 그러거든요. 아이 참 내! 아니, 혼자 번 게 어디 있어요? 수십만의 생명들, 의식들, 모습들이 한데 작용을 해 줘서 자기 몸뚱이 하나가 움죽거려서 번 거지 혼자 번 게 어딨어요? 혼자 먹는 게 어딨고 혼자 듣는 게 어딨고, 혼자 만나는 게 어딨고 혼자 걸어가는 게 어딨습니까? 말씀들 좀 해 보세요. 그런데 내가 했다고 내세울 건덕지가 있을까요? 내가 했다고 세워서 ‘아, 내가 잘못했어.’ 하는 것도 없고 ‘내가 잘했어.’ 하는 것도 없고 ‘내가 업이 많아.’ 하는 것도 없고 ‘내가 얼마나 과거에 잘못했으면 업이 이렇게 많을까.’ 하는 것도 없어요. 모두가 공생, 공심, 공용, 공체, 공식화 하고 돌아가고 있어요.

여러분, 반야심경을 자주 읽으시죠? 반야심경이 천체, 이 세상 돌아가는 진리, 팔만대장경이에요. 그것을 함축해서 거기다가 모두 한데 합쳐 놓은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은 지금 화엄경이니 금강경이니 반야경이니 어떤 경이든 막론해 놓고 무슨 공덕이라도 들어올 줄 알고 아침저녁으로 달달달달 글자로다가 그냥 외우죠? 그렇게 염불을 하지 않나 염(念)을 하지 않나 절을 하지 않나, 별거를 다 하고 있어요. 그거는 단시일 내의 복이지 세세생생에 벗어나는 공덕은 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여기에서는 “기도를 해라, 정성을 들여라” 이런 말을 여러분 앞에 내놓고 하면서 정성을 들이게 하고 그러지 않죠. 자신이 알아서 하는 대로 공덕이 되는 거니까요. 달마 대사께서 양 무제더러 하신 말씀이 있죠. “당신은 아무리 했어도 공덕이 없노라.” 하고요. 마음을 그렇게 뒀으니까 그 마음대로죠. 마음을 그렇게 가졌으니까 그분이 커질 수도 없고 또 작게 될 수도 없는 거죠. 우리가 자유권을 얻는다면 때로는 작게도 되고 때로는 크게도 되고, 때로는 길게도 되고 때로는 짧게도 되고, 둥글게도 되고 모도 나고 이렇게 할 줄 알아야만이 이게 자유스러운 거죠.

이 한 생을 살아나가는데 한 철 왔다가 가는 겁니다. 모습은 한 철이요 마음은 영원한 겁니다. 마음의 차원은 영원하기 때문에 우리가 벗어나서 그 도리를 안다면 살고 죽는 것도 없고 그대로 영원하다는 걸 아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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