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 선운사 단풍

선운사 도솔천 계곡의 만추
만추의 도솔천은 여울이 아니라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의 모든
집착을 내려놓는 무여열반 도량

두두물물 종의 다양성

1980년대에 ‘뿌리깊은 나무’에서 발행한 〈한국의 발견〉 전라북도 편에서 이 고장 사람들의 기질을 일러 “낙천적이며 평화롭고 다사로움을 드러내는” 온의 정신을 가졌다고 평했다. ‘온’ 이라는 말은 백제의 ‘백(百)’이나 전주의 ‘전(全)’이나, 완산의 ‘완(完)’이나 모두 같은 뜻이라고 하면서, ‘온’은 완전하고, 원만하며, 순수하고, 모든 것이 어울린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하늘은 땅을 내고 땅은 사람을 기른다. 사람의 기질은 환경과 자연으로부터 커다란 영향을 받는다. 지리가 인문의 바탕이 된다. 인문(人文)이라는 것은 삶의 무늬다. 삶의 무늬를 펼쳐보면 어느새 자연을 닮아 있다. 인문은 자연의 서정을 재해석한 무늬다. 온의 서정이 따사로이 흐르는 전라북도의 특성도 자연에 그 바탕의 원형질이 있을 것이다. 사람 기질의 바탕엔 그가 태를 묻은 곳의 대지와 하늘, 강, 바다, 숲이 깊숙이 배어 있기 마련이다. 삶도 자연의 한 부분이다. 자연의 ‘온’은 더불어 숲이다. 전북 고창 선운사의 숲길은 자연의 ‘온’ 세계다. 두두물물(頭頭物物) 종의 다양성을 지닌 안정된 숲이자, 풍부한 생태공간을 자연 스스로 이룬 화엄세계다.

2016년 현재 우리나라 천연기념물의 개체 수는 456건에 이른다. 그 중 절집의 노거수, 혹은 숲, 자생지 등을 천연기념물로 지정한 곳은 30 곳이다. 진도 쌍계사나 고창 문수사, 장성 백양사, 강진 백련사, 화순 개천사, 고흥 금탑사, 고창 선운사 등은 사찰의 특정나무 숲이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천연기념물 사찰 숲은 대체로 전라도 서남해안 지역에 집중적으로 분포하는 측면이 있다. 고창 문수사는 단풍나무 숲으로, 금탑사와 백양사, 개천사는 비자나무 숲이 울울창창하다. 특히 강진 백련사와 광양 옥룡사, 고창 선운사는 동백나무 숲이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공통점을 갖는다.

선운사 애기단풍

한 절집에 천연기념물 세 곳
고창 선운사는 우리나라 식물의 식생분포에 있어 여러 가지 측면에서 중요한 위상을 가진다. 차나무 자생지로 유명하고, 난온대성 상록활엽수림, 이를테면 동백나무, 참식나무, 후박나무 등의 내륙 북방한계선에 위치하는 까닭이다. 또 사찰 한 곳에서만 세 그루의 천연기념물 노거수를 한꺼번에 만날 수 있는 진귀한 곳이기도 하다. 고창 삼인리 송악(천연기념물 제367호), 고창 선운사 동백나무숲(제184호), 고창 선운사 도솔암 장사송(제354호) 등이 그 나무들이다. 송악과 동백나무 수림의 내륙 북방한계선이 영광과 선운산(도솔산) 선운사를 잇는 위도에 겹쳐진다.

선운사 동백나무 숲은 1483년에 산불로부터 사찰을 보호하기 위하여 목적의식적으로 조성한 것으로 전한다. 500여년 수령의 동백나무 평균높이는 약 6m이고 가슴높이둘레는 30㎝ 정도다. 대웅보전 뒷쪽 산등성이에 30m 넓이의 띠 모양으로 3,000여 그루가 식수되어 있다. 절집 뒤편에 띠 모양으로 잎이 두터운 상록활엽수 동백나무 숲을 조성한 것을 보면 화재방지를 위한 내화수림대적 목적성이 보다 분명해 보인다. 임상 내 어느 활엽수림에 비해 수분함량이 높게 나온 조사결과도 그 목적성을 뒷받침한다.


선운사 들머리에서 도솔암에 이르는 3km 도솔천 숲길은 국가지정문화재 ‘명승 54호’로 지정되어 있다. 도솔천 주변은 다양한 활엽수들의 숲이 청정한 사찰림을 이룬다. 활엽수(闊葉樹)는 말 그대로 잎이 활짝 펼쳐져 평평하고 넓은 잎을 지닌 나무다. 단풍나무, 갈참나무, 느티나무, 서어나무, 팽나무 등 낙엽활엽수들의 식생이 왕성하다. 활엽수들의 전성기다. 문화재청의 자료에 따르면 2016년 현재 국가지정 명승은 109 곳이다. 그 중 사찰 이름이 들어간 명승지는 12 곳이다. 해인사, 선운사, 대흥사, 법주사, 백양사, 송광사/선암사, 화엄사, 미황사, 낙산사, 수종사, 불영사, 청평사 등이다. 그런데 선운사와 불영사의 경우는 사찰의 계곡 일원을 명승지로 지정하고 있다. 계곡의 빼어난 아름다움을 반영한다. 선운사 가을단풍은 도솔천 계곡이 있어 본색이 여여하다. 만추의 선운사 계곡은 또 하나의 설법전이 된다. 숲의 총림이다. 만유를 반영한 개천은 마음의 거울이다. 온갖 색이 거울에 비추인다.

나뭇잎에는 모든 생명의 에너지 원천을 생산하는 엽록체가 있다. 이 세상에서 태양에너지를 끌어 모아 화학에너지로 전환하는 것은 유일하게 식물의 엽록체뿐이다. 엽록체가 광합성을 통하여 포도당과 산소를 생산한다. 엽록체에는 엽록소라는 색소가 있어 나뭇잎은 녹색을 띈다. 그런데 잎에는 원래 엽록소, 안토시아닌, 카로티노이드 등의 색소가 함께 들어 있다. 엽록소는 말 그대로 잎에 있는 녹색 색소다. 가을이 되면 나무는 스스로 나뭇잎으로 보내는 물과 영양분을 차단한다. 잎으로 가는 모든 회로를 폐쇄회로로 만든다. 광합성 작용이 급격히 쇠퇴하고, 엽록소는 분해된다. 모든 생명의 젖줄이었던 초록의 에너지가 사라진다. 초록색이 사라지면서 엽록소에 가려 보이지 않던 다른 색의 색소들이 시나브로 드러난다. 안토시아닌의 색소는 붉은 색으로, 카로티노이드 색소는 노란 색으로, 그 자연현상이 단풍이다. 단풍은 물드는 것이 아니라 원래 감추어져 있던 색소가 드러나는 것이다. 더 엄밀히 말하면 빛의 색 스펙트럼 중에서 저마다의 색소가 해당 색만을 반사시킬 뿐이다. 그러면 하나의 의문이 생긴다. 엽록소 이외의 색소들은 단지 색만 드러내는 작용을 하는 것일까?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붉은 색소는 자신의 나무 아래 떨어져 땅 속으로 스며들어 다른 수종의 생장을 막는 것으로 알려진다. 경이롭고 놀라운 자연의 지혜다. 스티븐 해로드 뷔흐너가 쓴 책 제목이 〈식물은 놀라운 화학자〉다. 식물은 정교한 화학적 메커니즘이자 화학공장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단풍도 그 화학적 과정의 산물이다. 단지 눈부신 아름다움을 구사한 예술적 페인팅으로 미래 생명력을 담지한 생명과학의 빛일 따름이다.

진흥굴 앞의 천연기념물 장사송

제행무상 일깨우는 도솔천 무정설법
선운사 도솔천 숲길은 도솔천의 여울과 함께 흐른다. 봄이면 벚꽃과 연두빛의 향연이고, 여름철은 초록의 신록, 초가을엔 꽃무릇, 만추의 시간엔 만산홍엽, 겨울이면 설국의 여울이다. 도솔천은 연두-초록-빨강, 노랑 등의 형형색색-하양(white)으로 순환한다. 그 순환은 지구의 자전과 공전의 우주적 주기와 리듬에 상응하는 색의 연속 스펙트럼이다. 도솔천 여울이 삼라만상이 변화하는 시간의 강으로 흐른다. 도솔천은 시간과 공간이 투영된 무시무종의 뫼비우스 띠다. 스스로 그러함으로 순환하고 반복하며 연속한다. 여래의 불성이 충만한 세계다. 시간은 빛이고, 빛은 색으로 투영한다. 새벽, 아침, 오후, 저녁, 밤의 빛이 다르다. 시간은 색의 층위이고, 다른 형식과 다른 형태를 촉진한다. 제행무상이고 제법무아이다. 교외별전으로 일깨우는 도솔천의 무정설법이다. 색으로 일깨우는 붉고 푸르른 단청의 강이고, 물빛 두루마리 경전이다.
봄꽃의 개화는 하루에 20km 속도로 북상하고, 가을단풍도 하루에 20km 속력으로 남하한다. 자연의 속력과 질서엔 어김없고 삼엄하다.

만추의 시간엔 그 여울에 나무가 간직한 내밀한 색이 여과없이 반영된다. 순환과 재생의 극적인 찰라다. 빛을 돌이켜 거꾸로 비추는 회광반조(回光返照)의 모멘트다. 낙화의 꽃잎과 비움의 낙엽은 수직의 파문을 남기는 열반적정의 고요한 아름다움이다. 만추의 선운사 도솔천(川)은 내원궁의 도솔천(天)이다. 개여울의 여울이 아니라, 〈금강경〉에서 가르치는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의 모든 집착을 내려놓는 무여열반, 적멸의 도량이다. 여울에 색즉시공을 일깨우는 낙엽이 우화의 꽃비다. 자등명 법등명의 보현행과 무엇이 다른가. 부처님도 보리수나무 아래서 무상정등각을 얻으셨다. ‘님만 님이 아니라 기른 것은 다 님이다’고 만해스님은 말씀하셨다. 저 나무 한 그루도, 저 숲도 님이고 선지식이 아닌가.

선운사 도솔천의 참나무 아래 앉아 개여울을 본다. 무수한 잎들이 개천을 덮었다. 소동파는 계곡의 물소리가 팔만사천법문의 장광설이고, 산빛 그대로는 청정법신이라 하였다. 무정설법을 눈으로 듣는다. 낙엽 하나가 일승원음의 법음을 지녔다. 모든 질량과 에너지는 보존된다. 일체의 존재와 현상에는 실체가 없다.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일 따름이다. 서로 다른 형태로, 서로 다른 인연으로 침잠하는 묵시의 시간이다. 만추의 절집 숲에 앉았는데 ‘기른 것은 다 님이다’는 만해스님의 말씀이 가슴에 파문을 남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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