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바로 이끌어서 가는 데는 자비성이 거기에 깃들어야!

자꾸 자꾸 이 공부를 하면, 우연 중에 집도 생기고
부지깽이 하나라도 늘어 가면 늘어 갔지 줄어들진 않습니다.
나는 이거 다짐합니다.

(지난 호에 이어서)

질문자3(여) 스님, 그 뱀 토막 쳐서 죽인 사람들은 어떻게 됐습니까?

큰스님 그 집은 자손들이 애를 못 낳았어. 딸만 아홉을 낳았는데 아들을 못 낳아.

질문자3(여) 손이 끊어졌습니까?

큰스님 끊어졌어, 아주.

질문자3(여) 근데 저희 시어머님이 옛날에 광산 뭐 하신다고 그랬을 때 구렁이가 나왔대요. 그래서 옛날에 굉장히 잘사셨는데 그걸 술을 담아 가지고 자셨나 봐요.

큰스님 먹기까지? 허허허.

질문자3(여) 그 뒤로 그냥 집에 그렇게 재수가 없고 사업하시던 거 다 날리시고 그랬거든요. 어제도 제가 구렁이 생각을 했는데요, 그러면 그런 경우에는 이미 지나간 일이니까 ‘구렁이도 한마음의 내 몸이다.’라고 생각을 하면 그게….

큰스님 아, 그럼! 그 모습은 다를지언정 어찌 생명이나 그 마음이 둘이겠느냐는 얘기지.

질문자3(여) 그러니까 그 구렁이를 제 한마음으로 생각할 때 그 구렁이도 그렇게 하늘로 올라갈 수 있습니까?

큰스님 하늘로 올라가는 게 아니야. 즉석에서 요리가 되는 게 뭐냐 하면 나하고 둘이 아닌 마음이 됐을 때 구렁이는 모습만 벗어졌지 그 구렁이의 마음은 내 마음과 둘이 아니기 때문에 사람으로 그냥 체인지가 돼 버리는 거지. 여러분의 주인공에다가 수만 개를 집어넣는다고 하더라도 두드러지지 않고, 수만 개를 꺼낸다고 하더라도 줄지 않는다 이거예요.

질문자3(여) 그러니까 거기에다 착을 붙일 필요 없이….

큰스님 응, 착을 붙일 수가 없지.

질문자3(여) 일부다 그렇게 생각하면….

큰스님 ‘일부다’ 그러지도 마라. 일부는 무슨 일부야? 그냥 거기 맡겨 놔. ‘당신만이 그런 모든 살생에 대해서도 그렇고 모든 것을 당신만이 해결할 수 있다.’ 하는 그 믿음을 가지고.

예전에 어떤 스님도 그랬거니와 상단만 남겨 놓고 중단을 다 치우기로 했거든. 그 작업을 하다가 그걸 다 치웠는데 그 의식들, 사람이 가서 빌고 그러던 의식들을 내 마음에 한데 합쳐서 뭉쳐 놓지 않고 그거를 없앴기 때문에 동티가 난 거야. 자기 몸이 해쳐지는 거지. 그 몸이나 그 몸이나 둘이 아니기 때문이야. 내 몸을 해쳤으니 너도 좀…. 따귀를 때렸으니까 결국은 따귀가 되돌아온 거지. 그래서 어떠한 물건도 그 의식을 빼서 내 주인공에다 맡겨 놓고선 그거를 하면 아무 지장이 없어. 그건 약도 될 수 있고 또 물건도 될 수 있고 여러 가지로 될 수 있는 거니까, 쓰이는 데 따라서. 암만 써도 상관이 없다는 얘기지. 그럭하면 살생도 되지 않고. 왜냐하면 내가 되기 때문이지. 외려 무명을 벗겨 줘서 감사하게 생각하고 그 은혜를 갚기 위해서 하나가 돼 가지고 좋은 마음만 자꾸 일어난다는 얘기지.

질문자4(여) 그럼 스님, 저희들과 같은 차원에서도 스님이 알려 주신 대로 하면 그렇게 되겠습니까?

큰스님 그대로 하시면 돼요.

질문자4(여) 그대로 그냥 해 나가면….

큰스님 예, 예. 실천을 지금 가르치는 건데 왜 안 되겠습니까? 나는 그러한 것을 말로만 해 놓고 만약에 그것이 한데 떨어진다면 이런 말을 안 한다고 아주 다짐하고 이 세상을 살아왔으니까요. 여러분한테 한마디라도 거짓된 말을 해서, 안 되는 말을 해서 여러분이 해를 본다면 나 또한 여러분과 같이 해를 볼 겁니다. 왜냐하면 망을 본 놈도 도둑놈이요, 가서 훔친 놈도 도둑놈이요, 가지고 가는 놈도 도둑놈이니까. 붙잡히게 되면 다 같이 붙잡히게 됩니다, 도둑놈으로. 그러니 내가 한마디 했을 때에 내가 어찌 그것을 한만히 말을 하겠습니까?

이것이 진실된 말이 아니고 진실되게 우리가 살림하는 행이 아니라면…. 그대로 여러분이 할 수 있는 그런 실상의 실현과 실행이 되는데 어찌 그걸 거짓으로 돌리겠습니까? 그러니까 여러분이 이익 하게 사시라고 하는 얘기죠. 여러분은 그저 어떠한 악이 들어오더라도…. 아까도 전화가 왔어요. 누가 어디 붙잡혀 갔답니다. 나라의 제일 큰 데로. 허허허. 그랬는데 벌써 그렇게 믿는 사람들이니까 정성을 한번 들여 놓고 여기다가 턱 맡겨 놓고 있으니까 그게 그냥 스르르 풀려서 어떻게 됐든지 하여튼 문 밖을 나오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모든 게 내가 실천하는 데 목적이 있는 거지, 내가 죽어서 천당에 가려고 믿습니까? 오늘 없는 내일이 어디 있습니까? 오늘 모자라는 사람이 죽어서 다시 태어난다고 해서 모자라는 게 자라집니까? 죽으면, 이 몸뚱이가 없으면 부딪칠 게 없어서 공부도 못 합니다. 그걸 아셔야죠. 그러니까 죽기 전에 공부 열심히 하라 이거죠. 악한 거, 모든 걸 빼 버려라. 악하지 않더라도 경우를 따지지 말라 이거야. 이게 옳고 이게 그르고 이런 거 따진다면 벌써 이 공부 하는 데는 팡입니다.

남편, 아내도 그렇고 자식들도 그래요. 내가 항상 그럽니다. 공부를 안 하고 온통 나쁜 짓은 있는 대로 하고 나가서 잠을 자고 안 들어오고 가출하고 그러는데 부모가 얼마나 속이 썩겠습니까? 배우는 시기에 배워야 할 텐데. 그러면 그거를 나무라지 말고 주인공에다 맡겨라 이거야. 그건 당신의 입 가지고는 고칠 수가 없어. 그렇기 때문에 입으로는 부드럽게 해 주고 나가서 안 들어왔다가 들어오더라도 “얘! 너 어디로 그렇게 다녔니? 배고프지 않았니? 어떻게, 잠은 춥게나 자지 않았니?” 요렇게 꼭, “배고픈데 어서 먹어라! 내가 차려 줄게!” 하고선 이렇게 좋은, 부드러운 말을 따뜻하게 해 줘라 이거야. 그리고 그 잘못되게 한 거를 여기다 다 맡겨라 이거야.

아무리 잘못했어도 본인들은요, “너 잘못하고 이런 거 몰라? 몰라?” 그러면요, 반발심이 생겨서 더 안 듣습니다. 번연히 잘못하는 거 알면서도 잘 안 합니다. 그것이 인간의 심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올바로 이끌어서 가는 데는 자비성이 거기에 깃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속이 상하는데 무슨 자비야?” 이러겠죠. 그러나 여기다 다 맡기시고 그냥 부드럽게 말을 해 주시는 그것이 고쳐지는 방법입니다. 모든 게 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신랑이나 뭐 이런 사람들도, 아주 나쁘고 두들겨 패기만 하고 술 먹고 주정을 하고 못살게 굴었던 사람들이 술도 안 먹고 “내가 당신을 왜 그렇게 들볶았지?” 이러고 나중엔 착한 사람이 되니까 “아이고, 스님! 세상에 이럴 수가 있어요? 아이고, 스님!” 이러고는 말을 잇지 못해요. 그 사람이 좋으면 나도 좋은 거 아닙니까? 그러니 즐겁죠. 즐겁게 살지 왜 그렇게 그냥 볶이고 삽니까?

그러니 가르칠 때도 이거는 틀리고 이거는 옳고 이렇게 가르친다면 그건 팡입니다, 벌써. 내가 만약에 그렇게 여러분한테다 한다면 여러분한테 그 슬기로운 마음이 생길 때는 생겨도 분노가 있는 대로 치밀고 이래서, 반으로 나누어진 그 상태, 상대적인 원리, 이것이 상대성 원리로서 그냥 나가기 때문에 싸움이 없이는 못 산다 이런 문제가 나오죠.

그러니 우리가 이 공부 하는 데는 물질적으로 놓고 빌고 온통 타의에다가 구하려고 애를 쓰고 잘되게 해 달라고 빌고 이러는 기복을 떠나서 우리가 지금 이 공부 하는 거지, 그렇게 빌고 해 달라고 노예가 돼서 그렇게 애를 쓰다 보면 죽어서도 눈이 멀고 귀가 막혀서 그저 개나 돼지나 토끼나 닭이나 또는 새나 뭐 뱀이나 이런 소굴로 들어가게 돼 있어요. 뭔지 모르니까. 모습이 어떻게 생긴 건지 모르거든. 모르고, 쉽게 말해서 부부가 잠자리하는 데만, 그 의식만 안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리로 들어갈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뱀이 그러는지 사람이 그러는지 그걸 분간을 하지 못하니까 들어가는 겁니다. 그래서 그 모습으로 된다면 얼마나 애를 쓰고 애를 써야 그 모습을 벗어나는 줄 아십니까? 그 모습을 벗어나려면 참, 눈뜬 사람을 천 년 만에 한 번 만날까 말까 하단 말입니다. 그 눈뜬 사람을 만나야만이 자기의 모습 그 자체를 벗으니까요, 무명을.

뭐, 그런 일들이 한두 건이 아닙니다, 실질적으로 내가 보는 견지에서도. 한 십 몇 년 전이죠. 그때 신문에도 났지만 저 산에 있을 때 김포인가 거기에서 공양주로 다니던 보살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 보살네 집이 김포인데, 군인이 들어와서 주둔해 가지고 몇 사단이 들어와서 그 산을 닦는 겁니다. 거기다가 사단본부를 만들려고 닦는데 큰 돌이고 나무고 다 그냥 깨뜨려 내고 들어내고 이 야단을 하는데 그 보살 꿈에, 치우지 않은 큰 돌이 있었는데 그 돌을 딱 3일만 놔뒀다가 하면 어떻겠느냐고 가서 얘길 해 달라고 그러더라는 거죠. 그래서 군인 대장한테 가서 얘기를 하니 글쎄, 듣습니까? 안 듣죠. 그 이튿날 또 그렇게 말을 해 달라고 또 와서 그래도 안 듣는 겁니다. 그러곤 그냥 무찔렀죠.

그런데 이런 게 그냥 토막토막 갈갈이 뜯겨서 나오는데, 사람이 구렁이가 돼서 구렁이 허물을 벗으려고 살생을 하지 않고 거기서 이파리만 따 먹고선 공부하는, 도를 닦는 구렁이를 그냥 그렇게 만들어 놓았어요. 그것이 그렇게 되고 아무 일 없었는데 그날 밤에 말입니다, 천둥 번개만 그냥 번쩍번쩍하더니만, 군인들이 텐트를 치고 그냥 전부 잠든 연에 비가 얼마나 그냥 억수같이 쏟아졌는지…. 그 공부하던 구렁이가 돼서 더하죠, 근데 그래도 그 군인들이 하나도 비오는 소리를 못 들었답니다. 그런데 비가 와선 그 뒷산이 그냥 무너져서 뒤덮은 거예요. 그래서 다른 사람의 논밭은 다 그냥 못 지어 먹게 됐는데 그 포천 할머니, 그 할멈네 집 논만 산이 무너져서 요렇게 자기네 집을 막아서 아무 일도 없었어. 그 집하고 논만. 군인들은 다, 싹 쓸려 죽은 거야.

질문자4(여) 스님, 그런 경우에는 그 대장의 판단이 잘못돼서 그런 일이 벌어졌는데….

큰스님 조금만 저거 했어도 좀 될 텐데 그런 거를 군대에서는 쳐 주지 않는다는 얘기지, 미신이라고.

질문자4(여) 그럼 그 밑의 장병들은 죄가 없었잖아요?

큰스님 죄가 없었어도 할 수 없는 거지, 어떻게 해? 그러니까 껴서 돌아가는 거지.

질문자2(남) 거기서 가장 중요한 문제가 발생하는데, 러일전쟁 때 일본의 내목대장이 자기 부하를 많이 죽여 가지고 전쟁은 이겼지마는 가책을 받아 가지고 일본 절에 가서 스님한테 물었답니다. 나라를 위해 이렇게 해서 전쟁은 이겼지만 이렇게 부하를 많이 죽였고 업을 지은 것 같은데 그 책임이 어디 있느냐고 물었어요, 스님한테. 그 스님이 쓱 보더니 “저 뜨락에 있는 나무를 가서 흔들어 보아라!” 그랬거든요. 그래서 흔들어 보니까 이슬이 떨어지는데 “그게 어디에 떨어지는가 봐라. 시키긴 내가 시켰지만 떨어지긴 흔든 사람한테, 너한테 떨어지지 않느냐?” 이렇게 가르친 걸로 나와 있거든요. 근데 그런 경우에 군에서는 명령 계통이니 대장이 판단만 잘해서 조금 늦췄으면 그런 일이 안 벌어졌을 텐데, 대장은 실지 일은 안 했겠지마는 아랫사람들이 그렇게 움직였을 거란 말씀이에요.

큰스님 그렇죠.

질문자2(남) 그럼 그 업이 어디로 갑니까.

큰스님 흔든 놈이나 뭐, 흔들라고 시킨 놈이나 똑같겠죠. 허허허. 그래서 아까도 그랬잖아요. 도둑질한 놈이나 망보는 놈이나 물건을 가져가는 놈이나 똑같이 도둑놈이라고요.

신도(남) 그래서 아까 큰스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거든요. “내가 여러분한테 하는 말이 옳지 않은데 왜 말을 하겠느냐?” 그런 말씀을 하셨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그 장교가 잘못된 생각을 했기 때문에 다 그렇게 됐다 하고 생각하시면 되죠.

질문자2(남) 사실 이 업이 어디로 돌아가느냐가 문젠데요.

큰스님 그 업은 그 셋이 다죠, 뭐. 그러니까 예를 들어서 그렇게 살고 저렇게 살고, 이렇게 잘못하고 저렇게 잘못하고 잘하고 이런 것이 다 모인 겁니다. 이 지금 여러분 몸에 모인 겁니다. 모여서 지금 작당을 하는 거죠. 근데 그 작당을 하는 데 말리지 말라 이거죠. 이 작당하는 데 왜 말리느냐? 왜 속느냐? 거기에 속지 말라. 속이 상하고 막 이러는 것도, 즉 말하자면 화탕지옥이다, 그게. 그냥 불같이 일어나고 속상하는 것도 화탕지옥이야. 그러면 지옥고를 당하라고 일부러 그렇게 하는데 왜 거기에 말리느냐 이거야. 거기에 속지 말고 그거를 허허허 웃고선 ‘그것도 그놈 속에서 나오는 거니까.’ 그러곤 그냥 탁 맡겨 놓으면 거기서 다 저희들이 다시 집어먹게 되죠, 뭐.

질문자2(남) 글쎄, 그게 자기의 업에 의해서 일어나는데 그렇게 일어나는 것은 하나의 우주의 생명의 법칙인데요, 말려들지 말라고 가르치는 것은 법칙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스님께서는 알려 주시는 것 같은데….

큰스님 아니요. 벗어나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것도 그르지 않고 또 자기가 한 대로 받는 것도 그르지 않은 겁니다. 하지만 그것을 화해서 벗어나려면 악과 선을 벗어나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잘하는 거에도 속지 말아야 돼요. 잘되는 것도 ‘내가 잘됐으니까 좋다.’ 이러고선 흥겨워서 그러지 말라 이거야.

신도(남) 스님, 인과응보라는 게 죽어서 받습니까, 살아 있을 때 받습니까?

큰스님 모르고 지은 거는 모르고 받게 마련이고 알고 지은 거는 알고 받게 마련이죠.

신도(남) 그러니까 자기가 지은 죄를 자기가 알았을 때는 살아 있을 때 그 죗값을 받는다 이런 말씀이죠?

큰스님 아이, 그대로 다가오죠.

신도(남) 네. 그걸 내가 어저께 밤에 느낀 게 하나 있어요. 제가 14년 전에 지은 죄가 하나 있거든요. 그런데 어저께 그것이 왔어요. 그래서 내가 오늘 이 질문을 꼭 스님한테 해야 되겠구나 했는데 아직까지도 그것을 해결을 못하고 있어요.

큰스님 그래서 옛날에 이런 점이 있었죠. 어떤 분이 와서 나한테 이렇게 묻습디다. 날더러 하는 소리가 “스님!” 그래서 왜 그러냐고 그러니까 “귀신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그러고 물어요. 그래서 “자기가 귀신 노릇을 하면 귀신이 있을 거고 자기가 귀신 노릇을 안 하면 귀신이 없을 것이다.” 그렇게 얘기했거든요.

그랬더니 “어린애는 죄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그러고 또 물어요.

그래서 “어린애가 죄 짓는 거는 자기가 모르고 죄를 범하는 거다 이거야. 그런데 알면 아는 대로 자기가 알고 어른이 돼서 받는 수도 있고.” 그러니까 하는 소리가 “아니, 그런 소리는 틀렸습니다.”라는 얘기죠. 뭔 소리냐 하면 세 살 먹은 애들이 놀다가, 그러니까 불집게로다가 정수리를 찔렀나 봐. 그래 가지곤 죽었다는 거예요. 근데 그거는 그 어린애가 알지도 못하고 불집게로 찔러서 죽였는데 어떻게 죄가 되느냐 이거야. 그러니까 죽인 놈이나 죽은 놈이나 모르고 전자에 인연이 돼서 그렇게 저질렀으니까 모르고 또 했다 이거야. 모르고 저지른 건 모르고 또 받게 마련이니까.

질문자5(남) 스님, 제가 한 가지 여쭤 보고 싶은 게 있는데, 벌을 받는 거에 대해서 말이죠. 그러니까 인과응보 때문에, 자기가 벌을 받는 것은 그 법칙 때문에 틀림없이 올 거니까 올 것을 받는다는 자기의 그 자세 그것 자체가 모든 것의 기본적인 태도로서도 나타날 수 있나요?

큰스님 그래서 이 공부를 안 하면요, 내가 얘기한 거는요, 과거에 살던, 악이든지 선이든지 모자라는 거든지 잘하는 거든지, 전부 살던 그것이 몽땅 그냥 그 컴퓨터 숙명통에 입력이 돼 가지고 짊어지고 나오는 거거든요. 그래서 지금 현재에 그 입력된 것대로 나오는 거예요. 나오는 거를 뭐라고 말들을 하느냐 하면 팔자 운명이니 이러죠. 나는 잘못도 안 했는데 운명이 이렇고 팔자가 이렇고 그러죠. 그러나 그건 독 안에 들어도 못 면한다 이겁니다. 그러니까 거기다 다시 입력을 해라 이겁니다. 그 팔자를 못 면하니까. 자기 한 대로 못 면하니까 거기다가 다시 입력을 해 놓으면, 지금 우리가 잘못하는 거는 이 몸뚱이가 있는 걸로다가 잘못하지마는 이 인과로 뭉쳐지는 업보는 이 마음으로 잘못된 그 의식 자체들이 전부 걸려 가지고선, 그러니까 글씨 써 있지 않은 백지에 적혀 있는 거와 마찬가지로 컴퓨터에 입력이 돼 있어요. 그러니까 무심 컴퓨터에 입력이 돼 있다 이거야. 그래서 무심 속에서 나오는 것이 유심으로 나오고 유심 속에서 나오는 것이 현재 행으로 그냥 막 뒤집어엎죠. 그러니까 거기에다 다시 입력을 한다면 그 마음속에서 다시 확연히 그것을 다 벗어 버리고서 나오는 거죠.

질문자5(남) 그러면 벌은 자기가 받는 건가요, 혹은 안 받는 건가요?

큰스님 안 받을 수도 있고 받을 수도 있죠. 그거는 생각하기에 달렸습니다.

신도(남) 아니, 죄를 지으면 자기가 괴롭잖아요? 그러니까 불안하고 괴롭고. 그게 벌 받는 거 아닐까요?

신도(여) 그거예요, 마음이 받는 게.

큰스님 그런데 벌 받는 건데, 마음이 벌을 받고 마음이 죄를 짓기 때문에, 마음이 끌고 다니면서 육체를 움죽거리면서 강도질을 해도 마음이 끌고 다녀서 했지 이 육체는 송장이나 마찬가지예요. 근데 그 마음이 끌고 가서 손짓을 하게끔 손도 움죽거리게 하고 발도 움죽거리고 그러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마음, 이 마음이라는 주인의 문제지, 운전수가 문제지 이 차가 문제가 아니란 말입니다. 끌고 다니는 운전수의 문제지. 차를 타고 갈 때 도둑질을 시키느냐. 그래서 물건을 거기 싣고 오느냐, 그렇지 않으면 좋은 선덕을 하게끔 차를 끌고 가느냐 그 두 가지에 달려 있거든요.

그럼 그 두 가지를 다 한 것이 누가 했느냐? 마음이 한 거란 말입니다. 마음이 한 거라면 그 마음속에서 나오는 대로 모든 걸, 잘못되는 걸 자기가 다스리면서 거기다가 맡겨 놓고 ‘영원한 친구, 네가 다스려야지 어떻게 다스리니? 나는 너 하자는 대로 하고 지금 돌아다니는데 네 그 심부름을 잘하게 하려면 네가 잘 이끌어야 될 거 아냐? 그리고 모순되게, 누가 되게 이렇게 해서는 안 되잖아?’ 하고서 거기다가 충고해서 놓는 것도 자기고 충고를 받는 것도 자기고 아, 그러니까 그건 아주 묘한 법이죠. 그러니까 거기에다가 그렇게 다시 놔라 이거야. 그럼으로써 그 앞서 죄지은 것도 무너질 수가 있다 이거지. 왜, 카세트에다가 노래 넣었다가 또 노래 넣으니까 앞서 노래 넣은 게 없어졌죠? 안 그래요? 그렇게 돼 있는 겁니다. 그렇게 일러 드려도 뭐 자꾸 글쎄입니까?

그래서 우리가 잠시 잠깐이라도, 여기 이렇게 몇 분 안 되더라도 여러분이 자꾸 자꾸 자꾸 공부해서 그 불쌍한 사람들, 그렇게 그냥 복작거리고, 지금 외국에 와서 집도 한 칸 없이 애를 쓰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이 공부를 하면, 우연 중에 집도 생기고 부지깽이 하나라도 늘어 가면 늘어 갔지 줄어들진 않습니다. 나는 이거 다짐합니다. 그러니까 모든 불쌍한 사람들, 병고에 휘달리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 자꾸자꾸 해서 여러분이 이끌고 나가세요. 그것도 보살행입니다. 과거에 내가 그냥 남을 쫓아가서 죽이고 이러던 그 업보도 없앨 수 있는 그런 보살행이니까요. 그러니까 나 한 몸뚱이만 하라는 법이 어디 있어요? 여러분도 다 보살행을 하셔야지.

그러니까 요다음에 올 때는 여기가 꽉 차도록, 그리고 토론들 할 수 있도록 노력들 합시다. 감사합니다.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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