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습은 다를지언정 마음이야 어찌 다를 수 있겠느냐

잘못되는 일이 있어도 부드럽게 말해 주고
또 그 모든 잘못된 거는 주인공에 바로 맡겨 놓고
부드럽게 말을 해 줄 수 있다면 따뜻한 데로 고이기 마련입니다.

편히들 앉으세요, 스님도 편히 앉고. 우리 이 도량에, 법당에 여러분이 꽉 차진 않았어도, 단 한 분이라도 여기 앉아 계시면 이 도량이 꽉 찬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달려 있고 이 허공에도, 이 도량에도 꽉 차 있는 것입니다. 저 풀 한 포기도 우리의 생명 아닌 것이 없으니까요.

이 도량에서도 공부하는 사람이 점점 늘어 가서 생사의 어떠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그런 능력이 여러분한테 주어져야 살기가 좀 더 원만하게 돌아갈 것이며, 이 미국 국내 자체도 그렇고 또 여러분이 사는 마을에도 그렇고 이 도량에도 그렇고, 전부 한마음 한뜻이 돼서 뭉쳐 돌아가는 그 힘이 여러분을 다 살리실 겁니다.

첫째는, 우리가 이 공부를 해 나가는 데 대해서 잠깐 언급하겠습니다. 주인공이다 하면 여러분이 계신 이 자체 내에 바로 계신 겁니다. 여러분이 변소에 가니까 거기에 부처가 있고 법신이 있고 화신이 있는 것이지요. 또 ‘법신, 화신’ 이러니까 따로 있는 줄 알지 마시고요, 여러분이 생각을 안 하면 바로 부처고 여러분이 생각을 낼 때에는 법신인 것이요, 여러분의 몸뚱이가 움죽거릴 때는 화신인 것입니다. 그러니 그 삼위일체가 함께 하는 여러분 가운데에 바로 부처는 계실 겁니다. 그러니 그 모든 것이 삼위일체로 한데 합쳐서 찰나찰나 돌아가니 바로 여러분의 마음 그 깊숙한 곳에 주인공은 계신 겁니다.

그러니 주인공은 맷돌 돌릴 때의 심봉과 같고, 맷돌은 여러분의 마음과 같고 그 맷돌이 돌아가는 거는 여러분의 마음이 돌아가는 거와 같습니다. 그러니 그걸 따로따로 보시지 말고 ‘내 주인공만이 나를 이끌어 줄 수 있다, 내 주인공이 나를 형성시켰고 병이 났어도 내 주인공만이 고쳐 줄 수 있고 내 주인공만이 안 되는 것도 되게 할 수 있는 그런 능력을 다 갖추어 가지고 계시다’는 그 믿음으로 여러분이 진실하게 믿고 지켜보는 그 관법을 아셔야 됩니다.

둘째는, 가정을 이루고 사는 여러분이 될 수 있으면 첫째, 평등한 마음을 가지시고 주인공에다 맡겨 놓으면 스스로 평등해지니까, 그렇게 평등한 마음을 가지시고 좀 더 넓혀서 아량을 가지시고, 또 평등한 마음을 가지고 평등한 행을 하실 때에 부드러운 말도 나오는 거니까 둘이 아닌 도리를 가정에서도 모두 아셔야 합니다.

여기는 미국 사회라 한국과 같지 않아서 부부가 다 나가는 그런 집안도 많이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아빠를 이틀을 못 보는 사람도 있고 하루 24시간을 온통 다 아빠와 엄마가 서로 못 보고 작업을 하는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냉장고 문 밖에라도 메모를 붙여 놓으시고, 남편한테 “여보! 나는 당신을 사랑해.” 애들한테도 “너희들 참 사랑해. 근데 가정이 살려니까 엄마하고 모두 나가지 않으면 안 되겠어서 이렇게 나가는 거니까 요 음식을 요렇게 넣어 놨으니 꺼내 먹어!” 하고 써 놓으면 애들이나 어른이나 그걸 보고 사랑을 느끼는 마음이 될 수 있고, 화목한 가정이 될 수 있고 또 이탈되지 않는 그런 애들이 될 수 있고, 여러 가지로 다복하고 화목한 그런 가정을 이룰 수가 있지 않나 이렇게 봅니다. 잘못되는 일이 있어도 부드럽게 말해 주고 또 그 모든 잘못된 거는 주인공에 바로 맡겨 놓고 부드럽게 말을 해 줄 수 있다면 따뜻한 데로 고이기 마련입니다. 애고 어른이고 간에 추운 데로는 안 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정으로 들어오게 되죠. ‘어서 집에 가야지.’ 하는 그런 생각이 나게끔 만드시는 것이 바로 부모의 능력이라고 봅니다. 아무리 잘못됐어도 “너 왜 인제 들어왔어, 공부하지 않고?” 뭐 이러니저러니 욕을 하고 그렇게 너무 몰풍스럽게 말을 한다면 남편이고 자식이고 간에 따뜻한 데로 고이지를 못합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한다면 점점 냉기가 돌아서 보금자리로 들어오지 않고 바깥으로만 돌게 마련이고 아무리 몸이 들어온다 하더라도 마음이 바깥으로 돌 때는 그 가정은 불행한 가정입니다. 그러니까 살아나가는 데 가정에 충실한 그런 멋진 여러분이 돼야만이 가정도 이탈되지 않게 이끌어 나갈 수 있는 그런 보금자리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부터 되라고 그랬습니다. 부처님 믿으려면 부처님 믿는 그 마음과 더불어 사람이 되고 또 지혜롭게 위로는 부모를 모시고 아래로는 자녀를 이끌어 가면서 나라에 충성하고, 불쌍한 사람이든 가난한 사람이든 지혜롭게 이끌어 갈 수 있는 그 여유 있는 마음, 그것이 아마 사람이 사는 본의 같습니다.

또 셋째는, 우리가 지금 인간 된 도리가, 이 세상에 나왔을 때에 과거에 악이든 선이든 또는 크든 작든, 잘못됐든 잘됐든, 살인을 했든 또 남을 살렸든 이런 인과가 뭉쳐서 지금 여러분 몸속에 든 그 생명들이 전부 그 의식들입니다. 그 의식들이 뭉쳐 있기 때문에, 그 의식들이 뭉쳐서 돌아가기 때문에 여러분이 살았다고 보는 거지, 그리고 여러분이 태어난 거지, 그게 아니었더라면 또 태어날 수도 없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그 인과를 가지고 나온 여러분을 영혼이라고 합니다. 그럼 그 영혼이 엄마 아빠의 뼈를 빌리고 살을 빌려서 그 과거의 인과가 모두 담아져 가지고 내 몸뚱이 하나가 이 세상에 나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내면세계도 한마음으로 뭉쳐서 돌아가니까 그 한마음을 이끌어 갈 수 있는 지배인이 돼야만이 되기 때문에 여러분은 그 몸과 마음 내는 거, 마음 내기 이전, 그렇게 삼합이 같이 돌아가면서 그 여러 마음들이 같이 돌아갑니다.

그럼으로써 여러분의 세포 하나하나가 순화하고 있는 것이지 그것이 아니었더라면 어떻게 순응하고 돌아갈 수 있겠습니까? 또 그뿐입니까? 지수화풍이 거기 대두돼 있기 때문에 돌아가는 거지 어떻게 물이 없이 돌아가며 피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여러분이 이 세상에 나서 이 도리를 모른다면 참 어리석다고 볼 수 있겠고 인간이라고 할 수도 없다고 하신 부처님의 말씀도 있습니다.

또 부처님의 이러한 말씀도 있죠. “이 모든 부처님의 뜻이 한데 합쳐 우주 전체, 삼라만상 대천세계로 두루 하시니….” 그것을 비로 비유한다면 비가 내려서, 수증기가 오르고 내리지 않습니까? 오르고 내려서 그 깊은 물속에 모든 그 물이 한데 합쳐서 수증기로 오르고 내리면서 여러분에게, 산천초목도 물론이거니와 풀 한 포기도 빼놓지 않고 다 두루 그 물을 주실 때에, 그 물이 저 독사한테 들어가면 독사가 돼 버리고 선지식한테 들어가면 아주 선지식이 돼 버려. 그 물 한 방울 한 방울이 그렇게 똑같은 물방울이건만 그 물방울을 집어 먹는 그 부분에 의해서 독사가 되고 독사의 피가 되고, 선지식의 피가 되고 소의 피가 되고 저 풀포기의 피가 되고 이렇게 천차만별로 두루 화한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부처님 되지 않는 게 하나도 없거니와 그 생명 아닌 게 하나도 없으니 부처님께선 “나 아님이 하나도 없느니라.” 하신 겁니다.

그래서 중생들을 건질 때 부처님의 응신이, 빗방울이 누구누구를 막론해 놓고 그냥 전부 어디든지 적셔 주듯이 부처님의 마음이 그렇게 두루 해서 적셔 준다 이겁니다. 그러니 칼도 강도가 잡으면 그 칼이 강도가 되는 겁니다. 강도로 써지죠. 근데 그 칼이 말입니다, 좋은 사람을 좋게 먹이기 위해서 다뤄지는 칼이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묶여져서 옴쭉을 못하는 사람의 끈을 잘라 주는 칼이 된다면 얼마나 좋은 칼이겠습니까? 그러니까 선이고 악이고 모두 여러분의 마음에 달린 거지, 그리고 선이고 악이고 여러분이 행하는 데 달려 있지 딴 데 달려 있는 게 아닙니다. 아무리 독사가 있다 하더라도 내가 둘이 아닌 줄 알고 그 마음을 녹인다면 독은 없어집니다.

옛날에 원주에서 이런 예가 있었죠. 글쎄, 어떤 애가 길을 지나가다가 독사한테 물렸습니다. 근데 그 독사가 물고 말입니다, 한참 쳐다보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걔도 애인데 말입니다, 나무하러 갔던 애인데, 또렷이 쳐다보면서 하는 소리가 “네가 나를 물었으니, 집에 우리 엄마가 아파서 지금 나무도 못하는데 내가 발목이 이래서 나무를 못하면 우리 엄만 죽어. 그래, 너는 너희 엄마가 없니?” 이러면서 부르짖었단 말입니다, 울면서. 그러니까 그 뱀이 그 소리를 알아듣고 말입니다, 어디로 어디로 가더니마는 진흙이 묻은 풀잎 하나를 갖다가 물고 왔더라는 겁니다. 그 애는 일어나지도 못하고 앉아 있었는데 거기다 붙여 주더랍니다. 그 입으로 거기다 이렇게 놓더랍니다. 그래서 그걸 손으로 이렇게 눌러 놨더니 쪼끔 앉아 있으려니까 그냥 맑은 물이 줄줄줄줄 밑으로 흐르더랍니다. 그러더니 그냥 언제 물었더냐 하더랍니다. 그런 짐승에게도 아무 기탄 없는 그 깨끗한 마음이 그냥 그리로 들어간 겁니다. 그래서 그 뱀이 말을 알아듣고 그걸 갖다가 주어서 나았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그렇듯이 서로가 마음이 통하면 이 물질은, 즉 말하자면 모습은 다를지언정 마음이야 어찌 다를 수 있겠느냐. 이렇게 가는 겁니다. 그래서 그렇게 선의적인 행동도 많이 할 수 있다는 얘기죠, 뱀도! 사람을 살리고자 해서 뱀도 얼마나 애를 쓰는지 모르는 그런 이치를 나는 잘 압니다. 뱀이 물어서 고장이 났으면 뱀이 고쳐야 한다는 얘기가 있듯이, 옛날에 내가 했던 얘기가 있습니다. 여러 생명들의 그 모습들이 다르다 이러지마는 인간의 마음이 그렇게 착하면 서로 다 도와준다는 뜻입니다, 지금 내가 말하는 건.

예전에 내가 길을 지나가는데 어느 부자 대갓집에서 집을 헐어서 고치려고 하는데 큰 구렁이가 나왔어요, 그 집에서. 근데 그 집의 젊은이들이 모르니까 그걸 그냥 토막토막 내서 저 길바닥에다 내버렸단 말입니다. 그런데 그 토막토막 낸 것이 그냥 펄떡펄떡 뛰는 겁니다. 그것을 내가 지나가다가 봤는데 참 안됐어요. 어쩌면 그렇게 그 마음이 안됐는지 모르겠어요. 그래서 헌 통에 집게로다가 집어서 넣어 가지곤 저 모래톱이 있는 흙에다가 묻어 줬습니다. 밤 동산이라고 하는 데다가 묻어 줬거든요. 묻어 주고 기왓장으로 덮어 놨습니다, 비를 맞으면 썩을까 봐. 그렇게 했는데 얼마 있다 거길 지나가다가 그것을 헤쳐 보니까 간 곳이 없어요. 그게 썩었으면 거기에 구더기가 생겨야 할 텐데 간 곳이 없단 말입니다, 아예. 해 놓은 거는 그냥 그대로 있는데, 묻어 놓은 구렁이를 한데 합치면 한 깡통이나 되는데 그게 가뭇없어요.

나는 사람들이 다 자면 저녁마다 풀숲이든 어디든 내가 앉아 있고 싶은 데 그냥 앉아서 30분…. 그거는 30분이다 한 시간이다 이런 게 없습니다. 내가 앉아 있고 싶으면 별을 쳐다보고 나 보고 이러면서, 그 재미있는 거는 말도 못해요. 그 정말이지 저녁이 돌아오면 그렇게 조용하고 내 마음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어요. 그 별성 하나하나가 나 아님이 없고 풀 한 포기 하나하나가 나 아님이 없으니 그 벗들하고 노느라고 아주 정신이 팔렸죠. 그랬는데 그날 저녁에, 잠시 이렇게 앉아서 참, 저녁이 돼서 별이 뜨고 그래서 좋아서 쳐다보고 그러는데, 쳐다보니까 그 구렁이가 말입니다, 공중으로 저, 광목 있죠? 하얀 광목. 그것이 퍼르르르 날더니 그걸 타고선 그냥 올라가는 겁니다. 그러더니 그것이 저 꼭대기로 올라가더니마는 탁 보이는데 부처님 상이 그냥그냥 보이는 겁니다, 그게 화해서. 몸뚱이는 벗어지고 그 마음이 화하면 마음이 바로 사람도 될 수 있고 부처로서 한마음이 될 수도 있고 모든 게 될 수도 있다는 얘깁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내가 거기다가 묻어 줄 때 벌써 나로 변했고 내가 변해서 벌써 그리로 올라가는 겁니다. 그러니 그 뱀도 모두가 언짢을 때는 도와줍니다. 어디 가서 어떻게 됐든지 그 용도에 따라서, 어려움의 용도에 따라서 모두 그냥 도와주는 겁니다. 그래서 시골에 다니면서 소에 치인 사람, 뱀에 물린 사람 이런 사람들도 극히 한생각만 하면 그 병이 나았단 말입니다.

그건 왜냐? 모두 그 용도에 따라서 도와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무궁무진합니까? 그러니 한마음으로 뭉쳐지지 않는다면 그 능력을 발휘할 수가 없다는 얘기죠. 그러니 우리 몸뚱이 속에 천차만별로 들어 있는 그 이름들이 다, 의식들이, 그 생명들이 다 나 아님이 없다는 얘기죠. 그럼으로써 그걸 한데 합쳐서 부르는 게 바로 사람이라는 겁니다. 그 사람 속에 그렇게 자기 사람이 많은데 말입니다, 그 이름을 어떤 걸 부를 때 나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위장에 있는 그 모습들이 나라고 하겠습니까, 또는 간장에 있는 생명들이 나라고 하겠습니까? 그러니 내 생명이 그렇게 많고 내 모습이 그렇게 많고 내 마음이 그렇게 천차만별로 화해서 자꾸 나투고 나오는데 그걸 어떻게 끊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끊는 것도 없고 안 끊는 것도 없느니라. 색과 공은 그냥 그대로 둘이 아니어서, 바로 여러분이 움죽거리는 대로 공해서 돌아가니까 둘이 아니란 뜻이죠. 그러니 그 뜻이 그렇게 광대무변하고 그렇게 작은 것 같으면서도 그렇게 크단 말입니다. 여러분이 그 고통이 돌아오는 용도에 따라서 그것을 이끌어 갈 수 있고 면할 수 있고, 과감하게 밀칠 수 있고 들일 수 있고 자유자재할 수 있는 그런 공부라고 생각합니다.
인제 우리가 서로 이렇게 오붓이, 사람도 많지 않고 이러니까 여러분이 서로 오손도손 질문을 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런 데서 우리가 얻을 바가 많이 있으니까요. 그럼 질문할 시간을 우리 가져 봅시다.

질문자1(남) 얼마 전에 송광사에서 돈오돈수가 옳으냐, 돈오점수가 옳으냐 하는 걸 가지고 학술 대회도 했다고 그러는데요, 담박 깨닫는 게 옳으냐, 깨닫고 나서도 더 수행을 하는 게 옳으냐 하는 걸 가지고 뭐 토론들이 많았다고 그러는데 큰스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큰스님 어린애를 금방 낳아 놓고서는 어른이 되라고 그러면 안 되죠. 어린애를 금방 낳아 놓고서 사회에 나가서 일을 해라 그런다면 못하죠. 그런 거와 똑같으니까요. 그래서 “도랑 없는 도랑이 있느니라.” 했습니다. 이거를 도랑으로 쳤거든요, 이거, 이걸요. (가사의 골을 손가락으로 그어 보이시며) 그래서 들어갔던 구멍으로 과정을 거쳐서 다시 나왔을 때 돈오라고도 볼 수 있겠죠. 그런데 이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면 어떻게 돈오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돈오와 점수는 둘이 아닙니다. 탑을 쌓을 때 쌓는 과정과 그 한 찰나에 봉우라지 올리는 그거와 똑같습니다. 만약에 봉우라지가 없다면 탑이 없고 탑이 없다면 봉우라지가 없는데 어떻게 그것을 둘 다 따로따로 치겠습니까? 여러분의 마음과 몸이 둘이라고 보십니까? 돈오가 마음이고 점수가 만약에 몸이라면 어떻게 그걸 둘로 보겠습니까?

그래서 나는 싸움을 하기 이전에, 아랫사람들이 그러더라도 “야, 돈오와 점수가 어찌 둘이겠느냐? 둘이 아니니 그러지 말라. 어떻게 얼음과 물과 둘이겠느냐? 그러지 말라. 똥물이나 구정물이나 핏물이나 모두 개울물이 돼서 한데 모여서 바닷물이 된다 하더라도 그것은 젖는 것이니라. 똥물에도 젖고 구정물에도 젖고, 말을 하자 하면 이름해서 그것도 젖는 것이니라.” 이렇게 말을 해 줘야지 아, 돈오가 옳으니 점수가 옳으니 이러고 싸움을 해야만 옳겠습니까? 만약에 학술적으로 그런다면 싸움이 그렇게 벌어질 수가 있지만 뜻으로써 선으로 들어간다면 그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 언어도 붙지 않는 자립니다, 이게. 아니, 얼음입니까, 물입니까? 물이 옳습니까, 얼음이 옳습니까?

대중 가운데서 다 맞죠, 뭐.

큰스님 그런데요, 뭐. 그러니까 이 뜻이라는 거는 그렇게 무궁무진하다 이겁니다. 우리가 어린애를 금방 낳아 놓고선 기르는 거와 마찬가지로, 견성이라는 거는 어린애를 금방 낳아 놓은 거와 같고 또 우리가 학업을 마치고 교양이라든가 상식이라든가 사회 상식 이런 거를 모두 배우려면,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사회에 딱 나설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딱 낳았을 때는 돈오지마는 그것을 배울 때는 점수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점수와 돈오가 둘이겠느냐 이런 말입니다. 일테면 그렇다 이거죠.

질문자2(남) 깨치는 과정이 어떤 분은 점진적인 단계를 거쳐서 밝아지는 수도 있고 어떤 분은 어떤 계기로 해서 확 깨치는 단계가 있고 그런 것을….

큰스님 아, 이런 예도 있죠. 예전에도 내가 얘기했지마는 경허 스님도 아주 대 강백으로 유명하게 이름을 날렸던 분입니다. 경전이라는 경전은 무불통지하고요. 그런데 호열자가 돌아다니는 마을에 들어섰는데 그거를 알아도 어쩌지 못했단 얘기입니다. 하룻밤 자고 가자니까, 죽으니까 빨리 달아나라고 그러거든요. 이 집 가도 그러고 저 집 가도 그러고. 그러니까 인심이 고약한 줄만 알았는데 나중에 보니까 호열자가 돌아다녀서 사람이 전부 쓰러졌더라는 얘깁니다. 그런데도 자기는 살자고 그 고을을 벗어나서 나무 밑에 앉아서 생각을 하니 기가 막히더라는 얘기죠. 세상에 자기도 죽을까 봐 뛰어나왔거니와 그 사람네들을 하나도 어쩌지 못했다는 얘기예요. 그러니 여직껏 배우고 여직껏 강의한 게 무슨 소용 있느냐 이래서, 다시 돌아와서 강당을 그냥 문 닫아걸고서 다 해체를 시켰단 얘기죠. 그리고 자기 공부를 시작하고 책을 다 태웠다는 얘깁니다.

그런 거와 마찬가지로 이 선에는…, 즉 말하자면 견성, 이거는 내면세계를 발견했을 때입니다. 견성을 해 가지고도 거기다 다시 뭉쳐 놓지 않는다면 미해진다 이런 문제도 있습니다. 왜 미해지느냐? 흩어지니까. 그걸 갖다가 자기가 견성했다고 온통 자기라고 내세웠을 때 벌써 착이 붙고 욕심이 붙고 아만이 생기고, 삼독을 벗어날 수가 없는 거죠, 견성을 했어도. 그래서 다시 뭉쳐 놨을 때에 둘이 아닌 도리를 그때 홀연히 알게 되죠. 그래서 “견성을 하고 성불을 해야 그 다음에 열반경지에 들어서서 자유인이 되느니라.” 이런 겁니다. 그러니 둘이 아니게 나툴 줄 알게끔 됐을 때에 비로소 그 원 하나 탁 놓는 거와 마찬가지라 이겁니다. 봉우라지 하나 탁 올려놓는 그것이 돈오다 이거야. 그러면 그렇게 이름을 해서 돈오지 그걸 어떻게 돈오라고 이름을 붙이겠습니까, 그 경지에.

그러니 이 죽은 세상, 즉 보이지 않는 세상을 접하는 때라 견성을 하고 나면 그 공부를 하기 위해서 그때 대 의정이 생기고 그때에 시공이 초월된 것도 거기서 배우게 되고 찰나찰나도 거기서 배우게 됩니다. 둘이 아닌 도리 배울 때. 그러니까 나 하나의 마음이 수천수만으로, 입자로 인해서 분자가 돼 가지고 화신으로 화해 가지고 이 털구멍을 들고 나면서 그냥 전부 응신이 돼 주는 그런 보살이 된다 이거죠. 그랬을 때에 그것이 모두가 보살 아닌 게 없고 또 나 아님이 없고 이 도리가 나오고 그러는 거지, 그 도리를 거치지 않고는 안 됩니다.

그래서 죽은 세상의 죽은 사람도, 보이지 않는 영혼도 보이는 영혼도 또는 생각이 없는 영혼도 생각이 있는 영혼도 모두 그냥 다 건질 수 있는 아주 광대무변한 그런 도리. 부처라는 건 어느 게 부처인지 모르는, 아니, 뭐라고 말을 해야 좋을까요? 말을 붙일 수가 없어요! 어느 게 찰나찰나 아니 되는 게 없기 때문에, 그리고 내 한마음이 이 우주를 전체 덮고 전체 굴리고 전체 딛고 그러기 때문에, 어떤 걸 어떻게 갈라서 말할 건덕지가 하나도 없기 때문에 말할 아무것도 없다 이거야. 이름 붙일 수가 없다 이거야.

그런데 지금 양면에서 돈오가 옳으니 점수가 옳으니 이런다는 건 그건 있을 수가 없는 거죠. 또요? 이렇게 서로 질문하고 그러는 데서 속속들이 또 서로 토론도 할 수 있으니까요.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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