禪과 현대미술- 마우저(Mauser)

▲ 사진 : 마우저의 작품인 〈해안의 한 부분에서 모래를 운반(Sand von einem Teil des Strandes zum anderen tragen, 2000)〉은 햇볕이 드는 건물의 공간에서 해안에서 가지고 온 모래를 보행하며 조금씩 떨어뜨리는 행위 예술이다.
햇볕이 화창한 날에 산속을 산책하면 기분이 좋아진다. 걸어가는 동안 무슨 생각을 하든 자연의 맑은 공기가 온몸에 퍼져 새로운 자극을 주기 때문이다.

불교 접하고 空사상 이해 노력
‘공간 속 空’을 예술 개념 승화
“명상 통해 眞我 만난다” 강조
관념적인 현대인에 신선한 자극


마우저(Mauser, 1932~, 독일)는 보행선을 예술로 승화한 작가이다. 유럽에 스즈키 다이세츠의 영향으로 불교와 선사상이 새로운 철학으로 각광을 받던 시기에 마우저는 처음 선사상을 접하고 깊은 고뇌를 하게 된다.
당시 독일에도 불교와 선사상이 확산되기 시작하며 ‘ZEN STIL(선스타일)’이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을 때이다. ‘Wahren Selbst(진정한 자아)’, ‘Wahren Natur(진정한 자연)’ 등에 관심을 가지게 된 마우저는 이러한 변화에 대하여 능동적으로 수용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는 무대예술을 공부하며 가상의 공간에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된다. 극장에 마련된 무대는 연극의 내용을 받쳐주는 보조적인 역할을 하며 가상의 공간성을 제공하여 관객들에게 새로운 인식을 하도록 유도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점차적으로 가상의 공간과 진실한 공간의 관계성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며 진실한 공간의 의미를 찾아가게 된다. 가상의 공간은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이를 달성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인위적인 공간이다.

이러한 가상의 공간이 모두가 가짜이거나 허상인 것은 아니다. ‘어떠한 인위적인 행위에 의하여 만들어진 공간일지라도 그 속에는 진정한 진실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라는 생각을 그는 하게 된다. ‘그러면 진정한 공간은 어떠한 공간인가? 자연의 공간인가? 아니면 인공적인 공간인가?’등 많은 의문을 가지게 되며 자신이 존재하고 있는 공간에 대하여 그는 깊이 있게 인식하기 시작한다.

마우저는 명상으로 공(空)의 사상을 이해하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텅 비어있다고 하는데 세상은 온통 모든 것이 가득 차 있다. 그런데 왜 모든 것이 비어있다고 하는가? 이러한 사상을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서 그에게 공은 또 하나의 개념으로 인식되게 됐다. 비어있다는 것은 그 어떠한 것도 그대로 있지 않고 변화하여 사라진다는 것이다. 때문에 비어있다는 것은 사라진다는 개념을 설명하기 위한 방법일 뿐이다. 공이라고 하는 것이 어디에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마우저는 선사상의 영향을 받아 스스로 명상을 하며 진정한 자아에 대하여 깊이 있게 성찰하게 된다. ‘진정한 자아는 어디에서 오는가? 아니면 학습에 의하여 만들어 지는 것인가’. ‘지금의 나는 진정한 자아가 결핍되어 있는가’ 등 진정한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이 시작된다. 그러한 과정과 더불어 예술 속에서 진정한 자아를 찾아가는 방법들을 계속해서 시도한다. 무대미술, 설치, 조각, 회화, 행위예술, 건축 등 그는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그가 줄곧 관심을 가지는 것은 공과 공간이었다. 다시 말해 공간 속에서 공의 개념들을 설정하고 어떻게 표현하는가에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다.

예술가로서 독일을 제외한 유럽에서 별로 알려지지 않았던 마우저가 유명세를 타게 된 계기는 ‘선사상이 서양예술에 미친 영향(Zen und die westliche Kunst)’이라는 제목으로 보쿰미술관서 2000년 진행된 전시에 참가하면서 부터이다. 여기에는 세계적인 인지도가 있는 이브 클라인(Yves Klein), 리처드 롱(Richard Long), 에드 라인하르트(Ad Reinhardt), 존 케이지(John Cage), 리처드 세라(Richard Serra) 등 최고의 예술가들이 참가하게 되는데 공통점은 이들이 선사상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많은 비평가들이 선적 개념과 연결하여 그 특성들을 개념화하는 일련의 과정을 보여주면서다. 이 전시 이후 독일을 비롯한 유럽에서 많은 예술가들이 선사상에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던 전시이다.

당시 독일에 유학하고 있던 필자도 이 전시를 직접 볼 수 있었는데 더욱 놀라운 것은 미술관에서 전시를 기획하며 많은 토론과 세미나, 자료수집 등 약 5, 6년의 시간동안 많은 학자, 평론가, 철학자 등이 준비하였다는 것이었다. 철저한 준비를 통하여 검증된 예술가들이 전시에 참가하면서 독일을 비롯한 유럽에서 많은 관람객들이 방문하여 좋은 전시를 이루게 되었다. 전시장에서 세계적인 작품들을 직접 본 필자는 역사의 한 중심에 서있는 느낌이었다. 당시 필자가 뒤셀도르프 쿤스트 아카데미에서 선과 현대미술에 관하여 논문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이 전시는 많은 도움이 되었으며 나아가서 필자가 선과 현대미술에 대한 확고한 개념을 정립하는 계기가 되었던 전시였다.

마우저의 작품을 처음 접한 것도 이 전시장에서이었다. 마우저는 〈해안의 한 부분에서 모래를 운반(Sand von einem Teil des Strandes zum anderen tragen, 2000)〉이라는 제목의 작품을 선보였다. 햇볕이 드는 건물의 공간에서 해안에서 가지고 온 모래를 보행하며 조금씩 떨어뜨리는 행위를 하는 행위예술이다.

모래가 바다에 있을 때에는 수많은 모래 중의 일부분이었다. 하지만 그 중 일부가 다른 공간으로 이동하여 조금씩 바닥에 떨어져 모래의 존재들이 느껴지게 되는 과정에서 그 모래 위에 그가 걸음을 걸어가는 흔적들이 그대로 남게 된다. 모래 위에 남겨진 흔적들은 행위가 반복되는 동안에 사라지고 생겨나기를 반복한다. 그러한 반복되는 행위 속에서 작가는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

마우저의 이러한 행위는 다분히 선적이다. 공간 속에 설정된 내용들은 비어있음을 보여주기 위한 방법이다. 텅 빈 공간에 들어가면 그 공간이 비어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공간은 가득 차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되고 그 공간이 상대적으로 작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 하지만 텅 빈 공간 속에서 아주 작은 모래알을 흩어놓는 행위를 통하여 그 공간은 확장이 된다. 즉, 작은 모래로 인하여 공간을 인식하는 생각이 변화하여 공간이 작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이다.

마우저는 이러한 일련의 행위들을 통하여 공은 관념적 개념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공이라는 것이 비어있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하고 있다는 것, 즉 시간성과 공간성의 교착점을 인식하지 않으면 하나의 관념으로 인식할 수 있는 오류를 인지하게 해주고 있는 것이다. 느린 시간성을 통하여 공간이 변화해 가는 과정에서 인식의 변화도 이와 동일하게 변화한다는 것을 암묵적으로 이야기 하고 있다.

존재하는 것이 변화한다는 인식은 하면서 그것이 사라지고 다시 생겨나는 과정을 반복하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는 것은 일상의 삶의 과정에서 쉬운 일은 아니다. 자신의 체험을 기억하지 못하고 인지하지 못하는 이 순간에도 모든 것은 변화하고 있다. 그는 변화를 공의 개념으로 설정하여 자신만의 방식으로 이를 합리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분법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절대성과 상대성의 개념이 아니며 존재와 비존재의 관점마저도 넘어서는 선적 관점들이 그의 이러한 행위에서 나타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가 행한 행위들이 촬영이 되어 그가 행위를 한 흔적과 함께 그 영상을 반복해서 보여주고 있다. 반복되는 영상 속에서 관객은 어떠한 변화를 인지할 수 있을까? 시간성의 관점에서 보면 시간은 흘러가고 있다. 반복되는 영상의 이미지들은 계속해서 그의 행위들을 보여주고 있지만 그것을 보는 관객은 시간이 흐름을 인식하게 된다. 따라서 그 영상이 끝나고 다시 처음으로 나타나는 시간까지 짧은 시간 동안의 정적이 관객으로 하여금 지금 자신이 보았던 영상들을 생각하며 깊은 침묵 속에서 사라짐에 대하여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진정한 자아는 언제 느낄 수 있는가? 작품을 보는 순간인가? 아니면 영상이 반복되는 시간인가? 아니면 행위가 끝나고 남아있는 모래위의 흔적인가?

그는 명상을 통하여 진정한 자아와 진정한 자연을 만나고자 한다고 하였다. 마우저가 이와 같은 행위예술을 통하여 진정한 자아를 찾았는지는 알 수 가 없다. 하지만 그의 작품을 보면서 필자는 그가 추구하는 진정한 자아와 공이 둘이 아니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진정한 자아는 자아라는 인식이 없는 상태 즉, 공의 상태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필자가 독일에 유학하던 당시 독일 선방에서 같이 선을 하던 도반들에게 ‘자아가 없는데 어떻게 공을 인지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그때 필자가 인용한 것이 ‘진공묘유(眞空妙有)’이다.

현재 존재하는 것이 우월적 관계에 있다고 생각하는 서양식 사고에서 현재 존재하지 않는 것도 동일한 관계를 형성한다고 설명을 하였다. 예를 들면 지금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모든 것들은 생각일 뿐이다. 하지만 내일이 되면 다시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어제의 생각과 오늘의 생각이 같지 않은 데 그 생각이 현실에서 활용되는 것은 어제의 생각이든 오늘의 생각이든 차이가 없다. 다시 말해 지금 존재한다는 것이 영속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지금 존재하지 않는 것 또한 영속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나타날 때가 되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붉게 물든 저 낙엽들이 처음에는 초록색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색이 변화한 것이다. 이처럼 모든 것은 변화하며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는데 그 속에는 항상 변화하는 이치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마우저의 작품 속에서 발견할 수 있다.

진정한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행하여지는 예술가의 행위들이 관념적 사고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신선한 자극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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