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괴 쫓던 손오공의 보살 바라보기

황미대왕 등 요괴 만나
인생의 여러 장애 의미
자비실천 구도행이 해답

물과 불의 장애, 진리에 대한 잘못된 집착을 넘어서면 이제 좀 평탄한 길이 나올 수 있다 했지요? 그렇지만 평탄한 길에는 그 길에 걸맞는 장애들이 있어요. 그 가장 큰 장애는 해태해진 마음, 풀어진 마음이지요. 사람의 습성이라는 것이 좀 쉽다 싶으면 바로 늘어져버리지 않습니까?

우리 현장법사가 그리 쉽게 풀어질 사람은 아니라 하지만, 그래도 사람인지라 쉽게 여기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것이 바로 다른 사단을 일으켜 고생을 하게 마련이지요. 그리고 경지가 높아질수록 이만하면 다 온 것 아닌가 하는 자만심의 장애가 있습니다. 슬슬 아래가 내려다보이고, 그 경치도 좋고…. 그러면 “이만큼 왔으니 좀 쉬어볼까?”하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좀 쉬는 거야 뭐 나쁠 게 있겠어요? 문제는 좀 쉰다는 것이 아주 푹 눌러 앉아 버리려는 마음으로까지 발전할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스스로를 속이며 그 자리에 안주하려는 마음을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이것도 수행의 큰 장애가 되지요. 궁극적인 깨달음에 도달하기 전에는 결코 물러서지 않으리라는 큰 서원이 슬며시 자취를 감추게 되는 것입니다.

자, 앞에서 큰 흐름을 보았으니 이런 시각을 바탕으로 좀 그 숨은 의미를 캐어 볼까요? 우선 제새국에서 고통 받는 스님들을 구해주고, 나라의 보배를 찾아 줌으로써 큰 공덕을 쌓았지요? 일행의 초상까지 그려서 그들을 기렸다 하니 얼마나 큰 은혜를 베푼 것이겠어요? 이제 현장법사 일행의 힘이 그만큼 커져서 중생을 이익되게 하는 일에 힘을 발휘하는 것이지요. 물론 지금까지 오는 도중에도 요괴를 물리치는 과정에서 알게 모르게 공덕을 쌓았지만, 이제 그 공덕 쌓기가 좀 더 수월해졌다고나 할까요? 그리고 수행을 통해 힘을 얻으면 그것을 올바르게 써서 공덕을 쌓는 일도 그만큼 중요하다고 합니다.

단순히 지적인 성취만으로 부처를 이루는 것은 아니거든요. 자비의 실천, 그것이야말로 부처를 이루는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공덕이 원만하게 성취되고, 그 바탕 위에 지혜의 광명이 빛날 때 바로 성불이라는 궁극적 목표가 성취되는 것이겠지요. 그렇기 때문에 중생을 이익 되게 하는 자비행이야말로 불교의 근본이 되는 것입니다. 불교를 왜 지혜와 자비의 종교라고 하겠습니까? 그런데 현실의 불교는 지나치게 지혜에 기울어져 있는 것 같지 않습니까? 중생의 아픔을 없애주고, 그들을 행복의 길로 이끄는 자비행이 부족하다는 것이지요. 수행하여 깨달음을 얻는다는 것이 중심이 되어있고, 깨달음을 이루는 길이나, 깨달음을 성취한 뒤에나, 언제나 자비행이 함께해야 한다는 사실을 소홀히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현장법사 일행이 공덕을 쌓아가는 일들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새겨봐야 할 것 같습니다.

다음으로 나타난 ‘소뇌음사’의 요괴 사건, 황미대왕이라는 요괴가 나왔죠? 미륵부처님 회상에서 종치던 동자가 분장하고 나온 사건이었죠? 그 사건의 무대가 된 소뇌음사를 한번 생각해 보세요. 부처님이 계신 영취산의 대뇌음사를 모방한 소뇌음사! 현장법사가 앞에 ‘소’자를 못보고 대뇌음사라고 착각하지요? 그리고 얼마나 기뻐해요? 그것이 바로 이 사건을 보는 열쇠입니다. 현장법사의 급한 마음, 빨리 도달하고자 하는 마음이 바로 소뇌음사를 나타나게 한 범인이라는 것을, 삼쾌선생이 지혜의 눈으로 간파하였답니다. 공자의 말씀이 있죠. “빠르게 하고자 하면 도달하지 못한다”(欲速則不達)고. 그저 그 길을 좋아하여 그 길 가운데 쓰러질 각오로 꾸준히 가야만 하는 길, 그것이 바로 구도의 길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의 마음이 어찌 그렇습니까. 좀 빨리 도달하여 쉬고 싶고, 언제나 이 길은 끝이 나는가 조바심을 내고, 그러한 마음 앞에 사이비(似而非) 떡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거기에 홀리게 되어 있는 것이죠. 그리고 그곳에 주인 노릇하는 요괴도 비보통 요괴잖아요? 미륵부처님 회상에 있던 존재이니, 진리의 한 자락은 파악하고 있는 요괴! 그러니 가짜 소뇌음사도 만들 수 있었겠지요? 또 미륵부처님의 보기(寶器)를 훔쳐서 왔으니 손오공 일행을 괴롭힐 수도 있었구요. 그렇지만 결국 진리의 화신으로부터 나온 존재, 본래의 진리라 할 수 있는 미륵부처께서 거두어 가시지요. “그렇게 조바심 내는 마음을 쉬게 하거라!”하는 경계를 내리고는, 본래 가문인 부처님 가문으로 돌아가는 황미대왕! 그 뒤에 손오공의 안보이는 주먹질이 몇 개 날아갔다는 건 여러분이 잘 아시지요? 하하.

그 다음 주자국에 가서는 역시 큰 공덕을 쌓는군요. 국왕의 상사병을 해결해주는 공덕! 현장법사가 비록 자신은 여색과 담 쌓고 살지만, 국왕과 왕비의 사랑을 다시 이어주는 공덕을 쌓는 것입니다. 물론 활약이야 손오공이 대표로 하지만, 결국 현장법사의 공덕이죠. 그런데 이 국왕이 삼년동안 왕비를 요괴에게 빼앗기고 상사병을 앓게 된 사연이 또한 재미있군요. 전형적인 인연설화가 등장합니다. 왕이 사냥을 좋아하여 공작대명왕보살(孔雀大明王菩薩)의 새끼 한 마리를 해쳤고, 그렇게 하여 보살의 마음을 아프게 한 과보를 받게 하느라 관세음보살이 타는 금모후가 요괴로 분장하고 나타난 것이라는…. ‘결국 요괴 쫓던 손오공 보살 쳐다보기’가 재연되는 것이지요. 전형적인 인연설화 이지만 이 속에는 몇 개의 재미있는 대목이 있습니다. 왕비는 비록 요괴한테 잡혀갔지만, 전혀 요괴에게 마음을 주지 않고 또한 몸의 정절도 더럽히지 않습니다. 마침 이런 사연을 지나가던 자양지인이라는 분이 알고는 종려나무를 재료로 해 만든 옷을 왕비에게 입게 하였는데, 그것을 입자마자 왕비의 몸에 가시가 돋아나 왕비의 몸에 직접 손을 댈 수가 없게 되었다는 군요.

그래서 왕비도 정절을 유지할 수 있었고, 그 덕분에 요괴한테 3년이나 잡혀가 있었음에도 그 변함없는 마음과 몸으로 온전하게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이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역시 왕비에 대한 변함없는 사랑을 품고 상사병을 앓고 있던 왕과 재결합하여 행복하게 살았다더라…. 하는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속세의 이야기로 치면 참으로 아름다움 사랑의 이야기가 되겠네요. 그것을 성취시켜 준 현장법사 일행의 공덕이야말로 참으로 모든 사람의 마음을 흡족하게 해주는 그런 공덕이라 할 수 있을 것 같구요.

그리고 이 이야기의 중심에 있는 황미대왕이 불과 연기와 모래를 내뿜는 신기한 보배 방울을 가지고 있어요. 손오공이 요괴 소굴에 변신 잠입하여 술법으로 가짜 방울을 만들어 놓고 진짜 방울을 훔쳐냅니다. 그리고 요괴와 싸움이 벌어질 때 요괴와 손오공이 같은 방울을 꺼내들지요. 요괴가 놀라서 “어찌 네가 나와 같은 방울을 가지고 있느냐?”고 물으니 손오공이 “네 것은 숫 방울이고 내 것은 암 방울이다”라고 사기를 칩니다. 결국 방울을 서로 흔드는데 당연히 요괴의 방울은 불과 연기를 내뿜지 못합니다. 그 때 요괴가 말하지요. “이상하구나! 이 방울도 마누라를 무서워하나부다. 수놈이 암놈을 보고는 나오지 않나보다.” 하하. 요괴 동네나 사람 동네나 대개 가장 무서워하는 것이 마누라인가 봅니다. 그리고 그러한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 것 같구요. 에헹? 나칠계님? 왜 그렇게 헤벌쭉 웃고 계세요? 삼쾌선생이 공처가라는 것을 지금 확실히 알았다구요? 그렇지 않으면 이 대목에서 그렇게 말할 리가 없다구요?

무슨 말씀을! 저야말로 집안에서 가장의 권위를 가장 확실하게 세우는 대표적이고 확고한 당당남편! 제 아내는 제 말이라면 그저 꼼짝을…. (두리번두리번….) 혹시 마누라가 주변에 있을까를 살피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을…. (두리번두리번) 아닙니다. 이런 이야기는 그만 하도록 하지요. 줄거리와 관계없는 이야기 꺼내서 시간 잡아먹게 하지 마세요!

어험! 좀 분위기를 바꾸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래두 여러분들이 저를 보는 시선에 무언가 얕잡아보는 듯한 느낌이…. 험, 험. 집안이 평화로운 지름길은 무조건 남편이 마누라에게 지고 사는 것이라는 것을 모르시는 분들이 많은 듯. 이기지 못해서 이기지 않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모르시는 듯. 모르셨으면 지금부터라도 알아 가시도록 하세요! 이야기 앞으로 나갑니다!

상사병 치료라는 큰 공덕을 쌓은 현장법사 일행이 다음에 만나는 난관은 거미요괴와 지네요괴의 난관, 한마디로 벌레 난관이로군요. 여기서 거미요괴들은 일곱 마리나 나오고, 모두 절세의 미녀로 등장합니다. 그들은 탁구천(濯垢泉), 즉 때를 씻어낸다는 아름다운 이름을 가진 온천을 차지하고 앉아서 요괴짓을 벌이고 있죠. 마침 탁발을 나왔던 현장법사를 잡아서, 그 고기 먹고 불로장생하려는 꿈에 부풀게 됩니다. 손오공이 구하러 갔는데 마침 요괴들이 온천에 목욕을 하는 장면이라, 점잖은 손오공은 옷을 모두 훔쳐 요괴들이 온천에서 못나오게 하고(와! 부끄럼 타는 요괴들, 체면 차리는 요괴들!) 저팔계가 나서게 됩니다. 사정을 듣고는 환희에 차서 달려가지요. 그 하는 수작을 보세요. “보살님들께서 목욕을 하고 계셨군요. 이 중도 함께 씻으면 어떻겠소?”하곤 메기로 변신하여 풍덩! 앞에 요약 글에서 말했듯이 서유기에서 나오는 이야기 가운데 아마 최고로 외설적인 대목이 아닐까 싶네요. 그러다가 참지 못한 거미요괴들이 배꼽에서 실을 뿜어내어…….

결국은 거미요괴들 달아나 동문인 지네요괴에게 하소연을 하지요. 겉으로는 도사로 변신해 있는 지네요괴가 저팔계의 음란한 행태에 분개하여(?) 손오공 일행과 싸우게 되고, 도사가 독을 탄 차를 먹이는 바람에 손오공을 빼놓고는 모두 중독이 되어 죽을 지경이 되고 맙니다. 이런 어려운 상황에서 여산노모라는 신선이 해결의 길을 가르쳐주지요. 그래서 비람파보살이라는 분을 찾아가 도움을 청하는데, 알고 보니 이 보살님이 바로 앞에 나왔던 수탉의 화신 묘일성관의 어머니네요. 지네나 벌레의 천적은 바로 닭이니~. 이 보살님은 아들이 만들어 준 작은 침을 가지고 계신데, 이 침 하나면 모든 벌레 종류는 다 잡아내네요. 휙하고 던진 침에 도사 변신해 있던 지네요괴 꼼짝 못하고 잡히지요. 그리고 해독제까지 주셔서 모든 일행들 해독하고. 보살님도 하나 건져 가십니다. 바로 지네 요괴를 문지기로 쓰겠다면서 잡아가십니다. 수탉의 화신인 묘일성관의 어머니라면 암탉이 틀림없는 것 같은데, 암탉의 집 문지기가 지네라니…. 하아, 뭔가 좀 이상하네요.

이 이야기에서는 저팔계의 음란한 행태가 두드러지네요. 현장법사는 전혀 흔들림 없는데, 그 제자 저팔계가 음심을 못 이겨 장난을 치는 바람에 일이 좀 복잡해지는 이야기지요. 그렇지만 결국 수탉의 울음에 모든 어둠 가시고 새벽이 오듯이, 일행의 헛된 욕망도 마찬가지로 사라지고 밝은 길을 향해 힘차게 나가게 되겠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새벽을 여는 닭의 울음은 암탉의 울임인가요? 아니면 묘일성관이 만들어준 바늘의 힘을 입었으니 여전이 수탉의 울음인가요? 갸오똥~ 헷갈리면서 오늘 이야기 마쳐 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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