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사, 용문사, 보석사, 적천사 은행나무

영국사 나무 스스로 후계목 뿌리내려
용문사 나무 국내 최고최대 은행나무
보석사 은행나무는 육바라밀 상징
적천사엔 암,수 두 그루 나란히 붙어

영동 영국사 은행나무(약1,000년, 31m)
사찰이 숲이고, 숲이 청정도량
석가모니께선 룸비니 동산의 무우수 나무 아래에서 태어나, 보리수 나무 아래에서 무상정등각을 얻었고, 녹야원에서 최초의 설법을 폈으며, 쿠시나가라의 사라쌍수 아래에서 열반에 드셨다. 부처님의 탄생, 성도, 전법, 열반의 과정에 나무가 함께 한다. 부처님 입멸 후 무불상시대 오백 년 동안에 부처님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예배대상은 보리수 나무였다. 한 그루 나무가 부처님의 상징이었다. 지금도 선원, 율원, 강원을 모두 갖춘 사찰을 ‘수풀로 우거진 숲’, 곧 총림(叢林)이라 부른다. 경전 곳곳에서 전단향나무와 보배나무가 등장한다. 그 나무들은 부처님의 공덕과 위신력에 의한 현현이다.

사찰건축과 장엄에서 나무와 숲은 핵심적인 모티프다. 불전건물 자체가 나무들로 경영한 숲의 재현에 가깝다. 붉고 푸른빛의 ‘단청(丹靑)’은 나무줄기와 잎의 차용으로 알려진다. 불교는 청정국토 숲의 종교다. 사찰이 곧 숲이고, 숲이 곧 도량이다.

때때로 한 그루 나무가 그 절집을 상징하곤 한다. 운문사의 처진소나무, 진안 천황사의 전나무, 내소사의 느티나무, 송광사 천자암의 곱향나무, 통도사의 자장매, 선암사의 백매 홍매 등이 대표적인 사례일 것이다. 절집 초입, 혹은 불전건물 앞의 노거수들은 대단히 깊고도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나무 한 그루가 절집의 얼굴이 되고, 청정도량의 상징이 되곤 한다. 그런데 하나의 사찰을 대표하는 데 가장 보편적으로 등장하는 나무는 아무래도 은행나무다. 은행나무로 유명한 사찰은 전국 곳곳에 분포한다. 흥주사, 운문사, 범어사, 수종사, 우곡사, 전등사, 고견사 등 수령 500년이 훌쩍 넘는 은행나무들이 저마다 신화와 역사의 향기를 간직한 채 사람들의 이목과 발길을 끌어 모은다.

양평 용문사 은행나무(약1,100년, 42m)
천연기념물 절집 은행나무는 네 그루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은행나무는 2016년 11월 현재 23그루다. 올해 새로 지정한 당진 옛 면천초등학교내 은행나무를 포함해서다. 23그루 중 절집에 있는 천연기념물 은행나무는 네 그루다. 용평 용문사 은행나무, 영동 영국사 은행나무, 금산 보석사 은행나무, 그리고 청도 적천사 은행나무가 그것이다. 네 그루 모두 절집의 초입에 있는 천 년의 노거수들이다. 하나의 공간을 압도적으로 주도하는 수처작주(隨處作主)의 목신들이다. 그 은행나무 앞에 서면 내면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오는 경이로움과 거룩함을 감출 수 없다. 땅에서 솟아난 거대한 육신이 나무의 물리적 차원을 넘어서 신령한 기운을 내뿜는다.

가을이면 저 나무가 있어 지구의 모퉁이는 노랗게 물든다. 은행나무는 가을의 전설이다. 우주의 전설이, 우주의 순환이 저 나무에 기록되어 있다. 은행나무 유전자에 깃든 시공은 몇 억년을 거슬러 오른다. 3억 5천만 년 전의 고생대에 출현한 것으로 추정한다. 빙하기가 닥치면 생명체들은 멸종하거나 환경에 맞게 진화를 거듭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반복되는 빙하기에도 은행나무는 멸종하지 않았고, 현재에도 존재하고 있으며, 고대의 화석에서 발견되는 잎의 형태와도 거의 변함없다. 진화하지 않고 살아남은 까닭에 1목 1과 1속 1종의 식물분류 계통을 유지하고 있다. 진화론의 찰스 다윈은 은행나무에 ‘리빙 포실 (living fossil)’, 곧 ‘살아있는 화석’이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 은행나무의 강인한 생명력을 대변한다.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진 폭심에서도 살아남아 현재도 자라고 있다니 은행나무가 지닌 강력한 생존력과 내성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런 놀라운 생명력을 헤아려보면 몇 몇 은행나무 노거수에 전해지는 ‘삽목설화’를 일정 정도 수긍할 수 있다. 영국사와 적천사 은행나무에 지팡이 꽂은 삽목설화가 전해진다. 한 그루 나무에 자연과학과 역사, 종교, 민속의 인문이 밴 까닭에 노거수는 살아있는 생명 문화재이다.

영동 영국사 은행나무는 수령 1,000년으로 추정하는 31m 높이의 암나무다. 왕성한 생명력으로 지금도 매년 세 가마니씩 은행을 수확한다고 전한다. 그러고 보면 절집에 있는 네그루 천연기념물 은행나무 모두 암나무라는 공통점이 있다. 숭유억불의 조선에 이르러 그 점이 사찰을 수탈하는 명목이 되기도 했다. 매년 수확량을 할당해서 공물로 공출한 까닭이다. 강화도 전등사 은행나무의 경우에는 수확량을 초과해서 공출을 요구하니 견디다 못한 스님들이 염불과 기도를 올려 암나무를 수나무로 바뀌게 해서 공출을 면했다는 설화가 전해지기도 한다. 영국사 은행나무의 가장 큰 특징은 서쪽의 가지에서 유주(乳柱)가 뻗어내려 땅에 뿌리를 내린 후 독립한 나무처럼 자라고 있다는 점이다. 스스로 하나의 후계목을 식목한 경이로운 장면이 아닐 수 없다. 또 영국사에는 천왕문이 없다. 은행나무 자체가 사찰의 수호신이자 천왕인 까닭이다. 나라에 큰 변고가 있을 때 나무가 울었다는 구전은 수호목으로서의 덕성을 환기시켜 주는 대목이다.

금산 보석사 은행나무(약1,000년, 34m)
지팡이 삽목설화와 변고 알리는 신목
양평 용문사 은행나무는 수령 약 1,100년으로 추정하고, 높이 42m에 이르는 우리나라 최고, 최대의 은행나무로 알려진다. 지팡이를 꽂은 것이 나무가 되었다는 삽목설화와 나라의 변고를 울음으로 알리는 신목설화를 두루 갖추고 있는 나무이다. 최고, 최대의 물리적 특성뿐만이 아니라 인간의 사회적 직위를 하사받은 유일한 은행나무로서 풍부한 서사를 갖추고 있다. 세종때 장차관급인 정3품 당상관 품계를 하사받은 것으로 전한다. 이런 사실은 세계 수목문화사에 남을 경이로운 기록이 아닐 수 없다. 나무에 유산을 물려주고(예천 석송령, 황목근, 고성 김목신 나무), 사람 이름을 지어주고, 또 재산세를 내는 나무들이 있는 나라이기에 가능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심지어는 더 높은 직위를 지닌 정이품송 소나무도 있다. 그런데 지금도 논란이 되고 있는 대목이 있어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곤 한다. 바로 나무의 높이다. 시대에 따라, 안내문에 따라 67m, 63m 60m, 57m, 42m, 41m 들쑥날쑥이다. 문화재청 기록마저도 갈팡질팡이다. 인공위성을 쏘아올리는 시대에 한 나라를 대표하는 나무 한 그루의 높이 재는 것에서조차 충실하지 못한 무능함이 그저 놀랍다. 근래에 문화재청 공식기록으론 42m로 공인해 두었지만, 2005년 연세대의 한 교수가 사다리차를 동원해서 실측한 길이는 39.2m여서 여전히 논란거리로 남아 있다. 한 해에 맺는 은행나무잎의 무게만 2t, 은행은 15가마를 거두는 거대한 천왕목임에는 분명하다.

청도 적천사 은행나무(약 800년, 26m)

절집 은행나무는 천왕목이며 우주목
금산 보석사 은행나무는 보시, 지계, 인욕, 선정 등 육바라밀을 상징하는 종교적 신심이 투여된 이채로운 나무다. 조구대사께서 886년 보석사를 창건하면서 다섯 제자와 함께 육바라밀의 실천을 다짐하며 창건 기념식수로 심은 여섯 나무가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한 나무로 합쳐졌다고 전해진다. 그렇게 계산하면 1130년 수령의 나무가 되고, 또 망국을 등지는 길에 마의태자가 심었다는 한국 최고의 용문사 은행나무보다 앞서는 것이라 혼란스럽다. 이 나무 역시 마을과 사찰에선 안녕을 수호하는 천왕의 신목으로 여기며 대신제를 올린다. 열반에 이르는 불교 신행의 지계, 선정 등 육바라밀을 담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나무 자체가 선원이고 율원이며 유례없는 총림의 나무라 할 것이다. 삼엄한 심검의 나무이자, 열반에 이르는 신행을 일깨우는 거대한 ‘직지의 나무’라 하겠다. 나무가 있는 언덕이 침묵의 설법전이다.

청도 적천사 두 은행나무는 천왕문 앞에 두 분의 금강역사처럼 버텨 서있다. 드물게도 한 공간에 500~800년 된 암나무와 수나무가 서로 가지를 맞닿은 진귀한 형상이다. 보조국사께서 짚고 다니신 은행나무 지팡이가 이 나무의 원형으로 전한다. 은행나무 앞에 이 사실을 기록한 1694년의 비석 ‘축보조국사수식은행수게(築普照國師手植銀杏樹偈)’가 세워져 있다.

절집의 천왕문 자리에, 혹은 천왕문 앞에 은행나무들이 있다. 사찰의 수호신이자 천왕으로 신격화하여 예우한다. 나무 한 그루가 절집이며, 마을 공동체이고, 정부(政府)다. 당산제를 지내고 대신제를 올리며 별빛축제를 연다. 은행나무가 천왕(天王)이고, 당산목(堂山木)이며, 하늘과 땅을 잇는 우주목이다. 세세생생 나고 지는 생멸을 반복하며 제행무상을 불립문자로 일깨운다. 그 자체가 우주이고, 경전이며, 무정의 설법전이다. 진금색 빛이 나투신다. 바야흐로 가을의 전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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