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공에서 나오는 거를 주인공에다가 모두 되놔라

 

되고 안 되고에 집착을 하는데
질문 주위의 신도님들 중에 주인공에 관하고 맡겨서 내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는 것만이 공부이고 이루어지지 않으면 공부를 못하는 거라고 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되고 안 되고에 너무 집착을 하게 되면 진정 내 안의 근본을 찾는 일은 부차적인 일이 되지 않을까 생각이 듭니다. 마치 우리 주위의 유사 종교에서 “나무묘법연화경”을 염하면 모든 것이 다 된다고 하듯이 말입니다. 가르침 부탁드립니다.

답변 여러분께서 나쁘고 좋은 건 다 아시죠? 이거 하면 나쁘다 좋다 이런 건 다 아시지 않습니까? 강도도 강도질하는 게 나쁘다는 거 알면서 합니다. 몰라서 그렇게 하는 게 아니에요. 도둑질이나 사기질이나 이런 거 하는 것도 번연히 나쁘다는 걸 알면서 하는 거지 몰라서 그러는 게 아닙니다. 그건 왜냐하면 여러분이 ‘주인공’ 하면은…. 여러분이 이 세상에 탄생을 했다 하면 주인공입니다. 생명과 마음 내는 거와 육신이 움죽거리는 거, 이것이 종합해서 주인공입니다.

여러분이 이 세상에 탄생을 했다 하면 주인공입니다.
생명과 마음 내는 거와 육신이 움죽거리는 거,
이것이 종합해서 주인공입니다.

주인공이 부처인 줄로 아는 것도 또는 부처가 아닌 줄 아는 것도 놓으십시오. 왜냐하면 여러분이 그대로 주인공이자 주인공이 과거로부터 벌여 놓고 어저께 벌여 놓은 게 오늘에 닥치고 이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당신이 저지른 것 당신이 해결하라’ 이겁니다. 누가 대신 아파 주고 대신 죽어 주고 대신 해 주는 사람 봤습니까? 자기가 저질렀으면 자기가 거둬야 하는 것이 분명한 거죠. 자기가 잘못 저질렀으면 자기가 고통을 받는 것이요, 자기가 잘했으면 자기가 즐거울 것이요. 여러분을 이끌고 성품을 발견해서 제대로 걸음을 걷게 하려면 자기가 저지른 것 자기한테 되놔라 이 소립니다.

자기가 본래 주인공입니다. 그러니 예를 들어 말하자면 여러분이 이 세상에 나왔기 때문에 있는 것입니다. 또 여러분이 이 세상에 나와서 어른이 됐으니까 일을 하는 거고 사는 거 아니겠습니까. 여러분의 주인공이 다 일들을 하고 모두 행하고 생활을 하고 나가지 않습니까. 딴 놈이 해 주는 거 없죠? 각자 하는 거죠? 과거에도 그렇게 살아왔고 현실에도 그렇게 살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그렇게 사는 것을 자기 주인공한테 되놓으라는 거고 되입력을 하라는 겁니다.

물질적인 입력은 한계가 있지만 인간의 컴퓨터에다 입력하는 거는 한계가 없고 자동적입니다. 그래서 과거로부터 자기가 저지른 거 현실에도 자기가 저지르고, 잘하고 잘못하고 그렇게 가는 거 아닙니까. 잘하든 잘못하든 모든 걸 당신이 하는 거니까 몰락 당신한테다 놔라 이 소립니다. 그렇게 자기가 저지른 거고 자기가 이 세상에 태어났고 자기가 생활을 하고 있으니, 그 생활 전체가 바로 자기가 하는 거지 누가 하는 겁니까? 그러니까 자기한테다 되놔서 입력이 되게 하라 이겁니다. 자기가 한 것대로 입력이 돼서 현실에 자꾸 나오니까 그 자리에다가 되놔서 되입력이 된다면 앞서의 입력이 없어지면서 새로이 입력이 들어가는 대로 현실에 또 나올 거란 말입니다.

그런데 “주인공에다가 자꾸 놓고 관(觀)하는데도 안 됩니다.” 이러거든요. 이건 아주 하근기입니다. 우리가 생활을 잘하든지 못하든지 모든 건 여러분, 각자 여러분께서 하는 겁니다. 잘하든 못하든 못났든 잘났든. 그러니까 여러분이 주인공의 뿌리요, 주인공이지 다른 분들이 주인공이 아닙니다. 그래서 주인공을 통해서 주인공에서 나오는 거, 주인공에서 하는 거, 용도에 따라서 닥치는 거 모든 것이 주인공이 하는 것입니다. 보세요. 주인공이 모두 하는 거, 바로 주인공이 하는 거지 누가 하는 겁니까? 그런 걸 주인공에다 되놔라 이 소립니다. 그래야 주인공의 그 성품을 발견할 수가 있죠. 어떻습니까? 이해가 됩니까? 각자 여러분이 그대로 주인공입니다. 주인공이 하는 일을 주인공한테다 되놔라 이겁니다. 그러니 못 믿고 믿고 이런 게 없죠. 그렇게 작업을 하지 않는다면은 그 심성(心性)을 발견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주인공에다가 관하고 그랬는데, 주인공은 뭐든지 할 수 있는데 왜 안 되느냐?” 이런 게 나옵니다. 여러분이 지금 생활하는데, 만약에 부산으로 차를 타고 갔으면 타고 올 수도 있어야죠. 내리고 타고 내리고 타고 하는 것을 모르십니까? 죽고 살고 죽고 살고 해야 이 끊임없이 이어서 진리의 길이 되는 거지, 끊어진다면 어떻게 진리라고 하겠습니까? 또 우리가 잘못하는 일도 있고 잘하는 일도 있는 것이지 어떻게 여러분이 다 잘하고 가십니까? 그러니까 자기의 마음의 선장을 만들어 놓고, 아까 얘기처럼 잘못하게 되면 그 잘못하지 않게 가차 없이 쳐서 거기다가 되놓고 잘못하지 않도록 이렇게 다스리는 겁니다. 너무도 잘못하고 잘하는 걸 알기 때문입니다. 잘되는 건 감사하게 놓게 하고 또 잘 안되는 거는 ‘아, 나를 가르치느라고 이러는구나!’ 하고 ‘너만이 잘 되게 할 수 있잖아!’ 하고 돌려서 놓는다면 ‘이거는 안 되는 것도 알고 되는 것도 아는구나!’ 하게 되니 안 되는 거와 되는 거 그 가운데서 진짜 성립이 돼야 되는 것이죠. 내리고 타는 그 가운데 있는 거지, 내리고 타는 데 있는 게 아닙니다. 잘되고 못되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잘되고 못되는 그 가운데에 자유인이 성립되는 겁니다.

그래서 자유인이 되려면 그 주인공 가운데서 바로 내 성품이 발견돼야 됩니다. 그렇게 발견되게 하기 위해서는 모두 여러분이 지금 살고 있는 거, 여러분이 주인공이니까 여러분이 살고 있는 게 공(空)했으니까 모든 걸 주인공에 되놔라 이겁니다. 무슨 못 믿고 믿고가 없어요. 종교를 믿고 안 믿고 하기 이전에 바로 여러분이 이 세상에 났으면 주인공이자, 바로 주인공이 살림을 하고 생활을 하고 상대를 겪고 이렇게 나가는 겁니다. 그러니 주인공이 그렇게 하고 살고 있는 것을 주인공 자기한테다 다시 ‘네가 하는 거니까 잘할 수 있잖아!’ 하고 자꾸 마음의 계발을 시키면서, 발전을 시키면서 창조력을 기른다면 그 가운데서 성품의 작용이 드러나게 되고 성품을 발견하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들 자체가 주인공인데도 불구하고 주인공을 잘못 알고 있습니다. 주인공이 모든 생활을 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이 마음을 발전시키려면 주인공에서 나오는 거를 주인공에다가 모두 되놔라. 잘하는 건 감사하게 놓고 잘못하는 건 잘하게 굴려서 놔라.” 하는 그것이 배움의 지름길입니다.

형제간의 종교가 달라서 힘들어요
질문 스님, 우리가 이렇게 살다 보면 형제간들이 많지 않습니까? 그리고 종교도 종류가 많고요. 그래서 그 형제들이 각각 다른 종교를 가지고 있다가, 예를 들어서 상을 당해서 초상을 치를 때는 그 절차를 각자 자기 종교 의식대로 하기를 원하거든요. 불교 믿는 사람은 불교식으로 하자, 또 성당에 다니는 분들은 성당식으로 하자, 교회 다니시는 분은 교회식으로 하자 이런 문제가 일어났을 때 어떻게 하면 좋을는지요.

답변 아이고 참, 왜들 그렇게 고통스럽게 살까요? 형제가 오 형제든 팔 형제든 상관이 없어요. 이 사람은 기독교를 믿고 이 사람은 가톨릭교를 믿고 이 사람은 불교를 믿는다 하더라도 말이에요. 예를 들어서 나는 여기 다니니까 여기 식으로다가 하자, 또 나는 여기 다니니까 여기 식으로 하자 하고 세 사람이 나누고 싸웠어요. 그럴 때 나는 이렇게 말을 해 주었지요. “누가 제일 큰형이냐?” 그러니까 불교 믿는 사람이 제일 큰형이래요. 그런데 어떤 형제들은 기독교 믿는 사람, 또 천주교 믿는 사람이 큰형이라고 그럴 때도 있겠죠. 그러면 “큰형이 불교를 믿으니까 불교 의식을 따라라. 따르되 이건 이름에 불과하고 형식에 불과한 건데 당신네들, 이 지구가 독이라면 독 안에 같이 들어서 오물오물하면서 왜 이렇게 따지길 좋아해?” 내가 그랬지요. 그렇잖아요?

기독교다 불교다 이건 이름이에요. 진리는, 평등 진리는 하나고 마음먹기에 달렸다고요. 거기에 마음이 걸리면 손해를 보고 걸리지 않으면 아주 이익을 보고 그래요. 그리고 남 편안하게 해 주고, 남 편안하면 나도 편안한 거예요. 남을 편안치 않게 해 주면 나까지 편안치 않아요. 나는 내가 편안하기 위해서 여러분한테 그렇게 말하기 싫어요, 귀찮으니까. 그리고 여러분이 인식들을 그렇게 갖는다면 끝 간 데 없이 그렇게, 자식들까지 그렇게 내려갈 테니까 그게 난 싫습니다. 부처님이 가르쳐 주신 그 뜻대로 사는 것뿐이죠.

큰형이 가톨릭교라면 가톨릭교 의식으로 따라라 이거죠. 또 큰형이 아니고 동생이 바둥바둥 우기고 온통 그냥 고집을 세우는 경우가 있지요? 그러면 동생 따라 줘요. 하하하…. 기독교든 불교든 가톨릭교든 상관이 없어요. 부모도 그렇고 자식도 그렇고 형제도 그렇고, 그네들 마음 편안하게 해 주면 내 마음도 편안하고…. 그것이 둘이던가, 네? 둘이에요? 하나지. 그 하나마저도 없어요. 그런데 왜들 그렇게 붉히고 그냥 그렇게 해야 돼요? 부모 제삿날 형제들이 네가 더 냈느니 내가 더 냈느니, 이렇게 하느니 저렇게 하느니 그러고 싸워 봐요. 생시에 부모 앉혀 놓고 상 차려다 놓고 싸우는 거나 똑같아요. 그럼 그 밥맛 나겠어요? 좀 넓게 생각하라고요.

천도시켜 드리고 싶은데…
질문 요즘 들어 제 주위의 사람들 중에 몇 분이 급작스럽게 생을 마무리하는 것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생활이 넉넉하면 그분들을 위해서 천도재를 올려드렸을 텐데 그러지를 못해서 마음이 착잡합니다. 스님, 어떻게 해야 제 주위의 분들의 천도를 시켜 드릴 수 있을까요?

답변 영가 천도? 이거 봐요. 지금 내 몸에 있는 수십억의 생명들이 회전을 하고 있는데, 그게 똑같이 회전을 하는 게 아니고 인과가 똑같이 된 게 아닙니다. 모두 업식으로 뭉친 것이기 때문에 때에 따라서는 화를 일으키고, 때에 따라서는 안 되게 만들고, 때에 따라서는 질병이 오게 만들고, 때에 따라서는 친척 간에도 막아 놓고, 때에 따라서는 이혼을 하게 하고 뭐, 별짓 다 해요, 이 속에서. 이걸 어떻게 말해야 자세히 알아들을까요?

그러니까 이 속의 세포를 통해서 회전하는 그 무리들이 그렇게 찰나찰나 여러분을 괴롭히는데, 괴롭히는 대로 놓는다면 하나하나 보살로 화한다 이거예요. 왜 내가 이런 소리를 하느냐 하면 조상도 거기 있는 거고 모든 사생이 거기 있는 거니까, 거기에 업식으로써 모두 뭉쳐진 것이기 때문에 거기다 놓는다면 그대로 보살로 화해서 신장도 되고 호법신도 되고, 법신도 되고 화신도 되고, 지장도 되고 약사보살도 되고, 용왕신도 되고 지신도 되고, 어느 것 하나 아니 되는 게 없어요. 자기의 용도에 따라서 말입니다, 찰나에! 그래서 찰나의 살림살이를 잘할 수 있고 소화를 잘 시킬 수 있다면 그게 바로 보살이요, 부처다 이 소립니다.
여기에서 또 한마디 덧붙인다면, 조상이든 형제든 자식이든 그 영혼을 천도시키는 데는 꼭 여러분 주인공에 일임을 해야 합니다. 죽은 사람은 이 도리를 모른다 할지라도 여러분은 지금 살아 계시잖아요. 살아 계신 분이 내 어머니라는 것도 알고 내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것도 알고 내 자식이라는 것도 알고, 다 알고 계시죠? 알고 계시기 때문에 통신이 되는 겁니다. 선맥이 이어지고 또 통신이 되고요. 그러니까 그것이 바로 천도를 시키는 길이다 이겁니다. 그래서 여러분 주인공에 모든 것을 일임하고 ‘조상들 잘되게 하는 것도 당신이요, 자식 잘되게 하는 것도 당신이요, 나를 이끌어 가지고 다니는 것도 당신이요, 병을 낫게 해 주는 것도 당신이요’ 하고 믿어야 합니다. 일체 만법이 주인공으로 말미암아 나고 드는 것인데 다른 어디를 믿겠는가 이 말입니다. 다른 어디에서 구하겠습니까?

여러분은 잘 아시죠? 의학으로 고치는 거는, 아주 똑바로 말한다면 30%가 조금 넘는다고 할까요? 그러니 못 고치는 게 많아요. 그럼 나머지 70% 조금 못되는 것은 어디서 벌충을 합니까? 그것을 누가 충당을 하나요? 여러분이 하셔야죠? 보세요, 우리가 농사짓는 데도 약을 뿌리면 면역성이 생겨서 그다음에 가서는 그 약을 뿌려도 안 죽는 문제가 나오죠. 그것이 바로 진화를 하기 때문이죠. 어때요? 내 말이 틀려요? 약을 뿌려서 죽이고 난 뒤에는 영락없이 다른 모습으로 또 나오는데 이제는 같은 약을 뿌려도 죽지 않는 껍데기를 쓰고 나와요. 과학자들이 수년, 십 년을 연구해서 그걸 죽일 수 있었는데 그다음에는 또 딴 껍질을 쓰고 나오니 그건 또 어떻게 하겠습니까? 의학으로도 당해 내질 못해요! 당해 내지 못하는 그 70%를 여러분이 이 도리를 알아서 감당해 내라 이겁니다.

이루종차 누구한테 밥을 놓고 떡을 놓고 빌어서 우리 형제를 살릴 수도 없고, 모든 게 다 그래요. 부처님한테 가서 삼천배를 하고 백팔배를 하고 이래도 일배만 못해요. 이 도리를 모르는 사람이 종종걸음으로 백 번을 뛰어갔어도 그 자리에 앉아서 한 번 한생각 한 것보다 못해요. 이렇게 좋은 법을 두고 왜, 여러분은 항상 바깥에 끄달리고 윤회에 끄달립니까! 윤회에 끄달리지 않으려면, 생사에 끄달리지 않으려면 이 도리를 꼭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여기 바닷물이 가까운 데 있으니 잘 보고 다니시겠죠? 뭐, 좀처럼 해서 바닷물은 얼지 않겠지만 말입니다.

아니 글쎄, 얼음은 뭐고 물은 뭐겠습니까? 얼음이 녹았다면 이 세상에 생(生)했다고 할 것입니다. 얼음이 얼었다면 죽어서 송장이 됐다고 할 겁니다. 그러면 물의 이치는 뭐며 얼음의 이치는 뭐겠습니까? 그저 한때 얼었다가 한때 녹으니 그것을 바로 생사에 비유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는다 산다’ 이런 언어도 붙지 않는 것이 바로 진리며 부처님이 가르치신 그 길이다 이겁니다.

자유인의 경지까지 가는 과정
질문 스님께서는 제 안의 근본이 세상 만물만생의 근본과 하나로 연결되어 있으니 모든 것을 그 근본 축에 놓으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그런 과정을 거쳐서 자유인의 경지까지 가기 위해서는 어떠한 과정을 거쳐야 하는지, 그리고 자유인은 어떤 경지인지요? 구체적인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답변 사람의 허물은 썼지만 마음 씀씀이를 잘 쓰면 사람이고 잘 쓰지 못하면 짐승만도 못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을 누가 가르쳐서라기보다도 자기가 한생각을 잘하고 행동 하나를 잘하고 말 한마디를 잘했을 때, 삼합(三合)이 맞았을 때에 보지 않는 것 같아도 어디선가 봐 주는 데가 있습니다. 그건 왜냐? 여러분의 마음이 알기 때문에, 각자 자기가 자기를 너무 잘 알기 때문에 자기가 아는 것만치 다 안다 이겁니다. 자기가 자기한테 속지 않고 자기를 속이지 않고, 진실한 마음으로써 말을 하고 행을 했을 때에 다른 사람은 다 몰라도 참나는 알고 있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그 마음을 보이지 않는 세상에서 잘 알기 때문에 우주간 법계에서 안다는 뜻입니다. 마음은 체가 없기 때문에 우주 천체, 일체 만물만생이 공생하면서 공용하면서 공체로서 공식하고 돌아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 알죠.

그래서 내 마음을 잘 쓰면 체가 없는 마음이 오고 감이 없이 오고 가면서 모두 한마음이 되게 하니 그 능력을 발휘하게 해 줄 수 있지만, 내 마음을 잘못 쓰면 잘못 쓴 대로 배척을 당해서 보이지 않는 데서 한마음이 돼 주질 않아요. 사람은 전부 마음에 의해서 육신이 움죽거리게 돼 있고 마음에 의해서 좇아다니는 거니까요. 그 마음들이 한마음이 됨으로써 육신은 거기에 호응을 해 주는데 마음이 그러지 않으니까 육체도 호응을 안 해 주죠. 그러니 무의 세계에서, 즉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오지 않으면, 봐 주지 않으면 보이는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나를 도와주지 않는다 이런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천국이 따로 있고 지금 현상세계가 따로 있고 이런 게 아닙니다. 순간순간 돌아갑니다. 한 찰나에 돌아갑니다. 여러분의 마음은 하나지만…. ‘마음은 하나지만’ 하는 건 축과 같다 이겁니다. 저 프로펠러가 돌아가든 연자방아가 돌아가든, 뭐가 돌아가든 축은 움죽거리지 않습니다. 영원한 겁니다. 여러분 안의 축을 믿으세요. 축을 믿는다면 그 축에 의해서 프로펠러가 돌아갑니다. 그걸 심봉이라고도 합니다. 이 세상 법이 다 돌아갑니다. 우주 전체가 돌아가듯이 이 몸뚱이도 내 축에 의해서, 그 힘에 의해서 마음을 만 가지로 낼 수 있죠. 만 가지로 낼 수 있는 그 마음을, 즉 말하자면 묘법이라고 할 수 있죠. 망상이라고는 생각 마세요. ‘나는 망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렇게 나오니 이거 언제 공부하느냐.’ 하고 생각하지 마세요.

고집멸도(苦集滅道) 사제법에 이런 게 있죠. “고·집·멸·도” 이랬습니다. 고를 고라고 생각을 안 하니 집착이 없어요. 집착이 없는데 멸이 어디 있겠습니까? 멸이라는 언어가 붙습니까? 그러니 도는 무(無)죠. 왜? 어느 거 하나 돌아가지 않는 게 없고, 어느 거 하나 생명 없는 게 없고, 어느 거 하나 내버릴 게 없기 때문이지요. 프로펠러가 막 돌아가는데 어느 것이 프로펠러고 어느 것이 아니냐고 할 수 없듯이 세상 이치가 그렇단 말입니다. 우리 인간만 어머니 아버지가 있는 게 아니라, 음과 양이 있는 게 아니라, 영혼이 있는 게 아니라 벌레도 엄마 아빠가 있고 자식을 낳고 그렇습니다. 이 세상만사가 그렇게 돌아가고 있어서 풀포기 하나도 둘이 아니므로 버릴 게 없습니다. 모두가 둘이 아니게 돌아가는 이 영역을 우리가 마음대로 잡아 쓸 수가 있고 꺼내서 줄 수 있는 그런 능력을 길러야 자유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첫째는 각자 내 영원한 내공을 타파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그래야 여러분은 자신의 길잡이가 생겨서 샘물의 맛을 볼 수 있으며 ‘아, 샘물 맛이 참 좋더라.’ 하고 따라갈 수 있는 겁니다. 내 내공의 타파가 있어야 과거심 현재심 미래심, 삼심(三心)의, 삼세심(三世心)의 내공을 타파할 수 있죠. 그거를 타파함으로써 내가 과거생 현재생 미래생을 다 알 수 있고 볼 수 있고 마음대로 할 수 있을 때, 그때에 사공법을 타파할 수 있죠, 이 세상 법을. 그렇지 않을까요?

알지도 못하는 데다가, 조그마한 그릇에다가 에너지만 많이 넣어 주면 담기지도 않고 넘쳐흘러서 아무 소용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모른다 할지라도 이치적으로만 들어 놓아도 언젠가 문득 생각이 날 때가 있습니다. ‘아, 그 스님이 그렇게 말을 했지.’ 하고 말입니다. 사공법을 타파함으로써, 즉 말하자면 오신통을 자유스럽게 굴릴 수가 있는 거죠. 오관을 통해서 들이고 내는 오신통을 뭐라고 그러느냐 하면, 그전에도 얘기했죠? 지금은 망원경이라고 하던가? 자연법칙에 의해서 망원경을, 즉 천안통이라고 해도 됩니다. 그 얘기를 언젠가 했습니다. 또 숙명통은 컴퓨터라고 해도 됩니다. 또 타심통은 탐지기라고 해도 됩니다. 또 천이통을 천체무전통신기라고 해도 됩니다. 표현을 말입니다. 이 다섯 가지 안에 들어 있으면 다섯 가지를 굴릴 수가 없으니 다섯 가지에서 벗어나야 원통력을 벗어난다는 얘깁니다. 즉 말하자면 항아리 속에 들어 있으면 항아리를 굴릴 수가 없고 항아리를 벗어난다면 항아리를 굴릴 수가 있죠. 그렇죠? 안 그럴까요?

마음은 체가 없습니다. 마음은 체가 없으니까 지구 바깥을 벗어나든지 우주 바깥을 벗어나든지 그 안에 있든지 자유롭습니다. 내가 났기 때문에, 내가 그걸 알고 있기 때문에 곧 내 마음의 근본으로부터 세상 천지 만물 이 자체가 생겼다는 것입니다. 천지의 근본이나 태양의 근본이나 인간 삼세의 근본이나 인간의 모든 삶의 근본이 바로 내 한마음 근본인 거죠. 체도 없고 볼래야 볼 수도 없고 내놓을 수도 쥘 수도 없는, 빛깔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영묘하고 영원한 그 불심 자체, 바로 표현해서 주인공 그 자체의 근본입니다. 축!
그러니 그 근본에 모든 게 들어 있고 그 근본에서 모든 게 나갑니다. 여러분 마음은 하나지만 마음 내는 거는 천차만별로 낼 수 있죠. 24시간을 통해서 별의별 생각을 다 해요. 애정, 미움, 증오, 사랑 온통 그냥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오니 머리카락 수효보다 더하죠. 머리카락을 헤아릴 수가 없듯이, 모래알을 셀 수가 없듯이 세상은 그런 겁니다. 그러니까 생각을 했어도 무효입니다. 생각을 했어도 없고 또 생각을 했어도 없고 그렇건만, 여러분은 생각을 해 놓고 그것에 착을 두고 잡고 있어요. 그러니 끄달리죠. 생각 하나 잘하면 그게 바로 생산을 해내는 건데 말입니다.

그래서 내가 가르칠 때에는 주인공을 믿고 거기에다가 모든 걸 놓으라고 합니다. 잘되는 거는 감사하게 생각하고 놓고 안되는 거는 ‘주인공밖엔 해결 못한다.’ 하고 믿고 놓고 이런다면 양면이 다 거름이 되는 거죠. 그냥 넣기만 하면 없어지고 넣기만 하면 없어지고 그러니, 수가 없이 넣어도 넣은 사이가 없고 꺼내도 꺼낸 사이가 없이 여여하게 이 세상을 자유인으로 살 수 있다. 내 영원한, 내 몸 태어나기 이전, 그 콩씨를 알게 된다 이겁니다.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