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선일 위원의 佛母列傳 - 사인(思忍) 스님

▲ 1649년에 조성된 순창 회문산 만일사 목조석가여래좌상. 포천 동화사에 있다.
17세기 중반에 활동한 많은 조각승 가운데 수화승(首畵僧)이 되어 1, 2점 밖에 남아있지 않은 경우는 깊이 있는 연구를 진행할 수 없다. 그러나 이와 같은 경우에 특이한 인상이나 대의 처리의 표현 등으로 독보적인 작품이 있는 경우가 있다. 독보적인 불상을 만든 조각승의 삶을 구체적으로 알 수 없지만, 앞으로 문헌 기록의 체계적인 연구와 제작연대를 알 수 있는 불상이 발견되기만을 기다릴 수 밖에 없다.

조각승 무엽·계훈 계보의 조각승
전북 순창 만일사 여래좌상 조성
포천 동화사 목조석가불좌상 유일
지리산 내 사찰서 거주·활동 추정

이와 같은 조각승 가운데 사인 스님이 만든 불상은 한국전쟁 중 빨치산 활동의 근거지였던 회문산(해발 830m) 만일사에 봉안돼 있던 불상으로, 전쟁의 포화 속에서 이운되어 현재 포천 동화사에 봉안되어 있다. 이 불상을 만든 사인(四印, 思忍, 思印)은 무염(無染) 스님과 계훈(戒勳) 스님의 계보를 잇는 작가로, 1640년부터 1650년대까지 많은 불상을 조성하였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아직까지 수화승으로 참여한 작품은 1점만이 조사되었다.

아직까지 사인 스님이 언제 어디서 출생하였는지 알 수 있는 기록은 없다. 단지 그가 수화승으로 활동하기 이전 불상 제작에 참여한 가장 빠른 작품은 1612년에 전남 해남 대흥사 대웅보전에 협시불로 봉안된 불상이다. 이 불상은 17세기 초반을 대표하는 태전(太顚) 스님이 수화승으로 만들었고, 사인 스님은 11명의 작가 가운데 마지막에 적혀 있다. 또한 스님은 2년 후인 1614년에 전남 구례 천은사 목조보살좌상 조성에 참여하였다.

이 목조보살좌상은 대화주 영원 스님이 발원하여 부휴선수(浮休善修, 1543~1615) 스님과 벽암각성(碧巖覺性, 1575~1660) 스님 등이 시주자로 참여하여 화사(畵士) 현진(玄眞) 스님, 명은(明隱) 스님, 몽능(蒙能) 스님, 언호(彦浩) 스님, 사인(思印) 스님이 제작하였다. 사인 스님은 불상 제작에 마지막에 언급되어 보조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 기록은 조각승 사인 스님이 불상 제작의 수련기를 현진의 밑에서 시작하였음 알게 한다.

그러나 사인 스님은 15년 후에 전북 남원 풍국사 목조삼세불좌상(예산 수덕사 대웅전 봉안)을 수화승 수연(守衍) 스님과 제작하였다. 그후 사인 스님은 1649년에 수화승으로 전북 순창 회문산 만일사 목조석가삼존불좌상과 16나한상 등을 제작하였다. 이 때 두 명 밖에 언급되지 않았지만, 1633년에 수화승 응원 스님이 제작한 전북 김제 귀신사 응진전 불상 25구를 12명의 조각승이, 1684년에 전남 강진 정수사 나한전 불상 23구를 9명의 조각승이 제작하여 언급된 인원보다 더 많이 참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사인은 1654년에 전북 완주 송광사 목조원패를 계훈 스님과 제작하고, 1656년에 수화승 무염과 완주 송광사 영산전 목조석가삼존불좌상과 오백나한상을 제작하였다. 이 불상을 만들 때 화원 무염(無染) 스님, 현준(玄准) 스님, 수화승(首畵員) 계훈(戒訓) 스님, 사인(思印) 등이 제작하였다. 또한 사인 스님은 1664년에 수화승 녹원 스님과 전남 고흥 능가사 능인전 목조지장보살삼존상과 시왕상 등을 조성하였다. 

▲ 1649년 포천 동화사 봉안 목조석가여래좌상 얼굴
따라서 지금까지 밝혀진 발원문과 사적기를 중심으로 사인 스님의 생애를 살펴보면, 1590년을 전후하여 태어난 스님은 1612년에 태진 스님과 1614년에 현진 스님 밑에서 보조화승(補助畵僧)으로 불상 제작의 수련기를 거친 후, 1639년에 남원 풍국사 불상(예산 수덕사 봉안) 제작에 조각승 8명 가운데 4번째 언급되어 중년에 접어들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649년에 수화승으로 상림과 전북 순창 만일사 목조여래좌상(포천 동화사 봉안)을 제작하였다.

또한 스님은 1654년에 전북 완주 송광사 대웅전에 1m 이상의 목조원패를 수화승 계훈 스님과 만들고, 1656년에 완주 송광사 영산전 목조석가삼존불좌상과 500나한상 제작에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1664년에 수화승 녹원 스님과 전남 고흥 능가사 능인전 목조지장보살삼존상과 시왕상(서울 지장암 봉안)을 조성하였다. 따라서 사인 스님은 17세기 전반부터 중반까지 40여년동안 불상 제작에 참여하였다. 스님이 불상을 제작한 지역은 전남 구례, 전북 남원, 전북 순창, 전북 완주, 전남 고흥 등으로, 지리산을 중심으로 활동한 조각승일 가능성이 높다.

현재까지 밝혀진 사인 스님의 활동 시기는 1612년부터 1664년까지이다. 사인 스님의 조각승 계보는 무염(無染, -1633-1656-)→계훈(戒勳, -1654-1656-), 사인(思印, 思忍, -1612-1664-)→상림(尙林, 尙琳, -1649-1661-) 등으로 이뤄진다. 무염과 그 계보에 속하는 조각승들은 17세기 불교 조각계를 주도하던 작가들이다.

또한 사인 스님의 후배로 추정되는 상림(尙林, 尙琳) 스님은 1649년에 사인 스님과 순창 만일사 불상을 제작한 후, 1649년에 수화승 무염 스님과 대둔사 묘련암 목조보살좌상을 조성(남양주 불암사 봉안)하고, 1661년에 회감(懷鑑) 스님과 전남 강진 무위사 명부전 목조지장보살좌상과 시왕상 조성에 부화승으로 참여하였다.

사인 스님이 만든 유일한 불상은 포천시 이동면에 위치한 동화사(東和寺)에 봉안되어 있다. 이 사찰은 1957년 8월 15일에 이간대(李干大) 보살이 창건한 후, 봉선사 회주 밀운 스님이 군대 시절부터 인연을 맺어 출가한 곳이다. 현재 동화사는 조계종 제25교구 본사인 봉선사의 말사(末寺)로, 대웅전을 중심으로 요사와 범종각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대웅전 내 수미단에 봉안된 목조여래좌상은 높이가 101.5cm로, 조선 후기에 제작된 중형 불상이다. 불상의 신체는 은행나무로, 바닥면은 소나무로 제작되었다. 불상은 얼굴과 상반신을 약간 앞으로 내밀어 구부정한 자세를 취하여 앉은키에서 얼굴이 차지하는 신체비례는 1:0.3 정도이다.

이와 같은 신체비례는 같은 시기에 제작된 불상과 유사한데, 17세기 전반에 제작된 불상보다 신체에서 차지하는 얼굴의 비중이 커졌다. 머리에는 뾰족한 나발이 촘촘하고, 경계가 불분명한 육계 밑에 반원형의 중앙계주와 정수리 부위에 원통형의 정상계주가 있다. 얼굴은 작으면서도 두 귀가 옆으로 벌어지고 귓볼이 두툼하여 과장되게 보인다. 갸름한 얼굴에 반쯤 뜬 눈은 눈꼬리가 약간 위로 올라갔고, 코는 오뚝하게 뻗었으며, 입은 옆으로 길면서도 끝이 살짝 올라가 미소를 머금고 있다.

오른손은 무릎 밑으로 내려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왼손은 무릎 위에 수평으로 놓아 가운데 두 손가락을 구부린 전형적인 조선 후기 석가불의 수인을 취하고 있다.

바깥에 걸친 대의는 오른쪽 어깨에서 대의자락이 짧게 내려와 U자형을 이루고, 나머지 대의자락은 팔꿈치와 복부를 지나 왼쪽 어깨로 넘어가고, 반대쪽 대의는 왼쪽 어깨를 완전히 덮고 내려와 복부에서 넓게 펼쳐져 있다. 하반신을 덮은 대의는 앞에 펼쳐진 5겹 주름 가운데 안쪽에서 두 번째 주름이 가장 윗부분에 놓여있고, 나머지 주름은 규칙적으로 펼쳐져 있다.

왼쪽 무릎 위에는 나뭇잎 모양의 소매 자락이 펼쳐져 늘어져 있다. 대의 안쪽에 입은 승각기(僧脚岐)를 묶은 상단의 표현은 6개의 연판이 표현된 앙련형(仰蓮形)이다. 불상 뒷면의 처리는 목 둘레에 대의 끝단을 두르고, 왼쪽 어깨에 앞에서 넘어온 대의자락이 완전히 등을 덮고 있어 조선 후기 제작된 불상과 많은 차이점이 있다.

▲ 포천 동화사 목조석가여래좌상 발견 조성발원문(필사본) <사진은 동북아불교미술연구소에서 일괄 제공했습니다>
목조여래좌상은 2005년 3월 5일에 도둑이 들어 수미단을 훼손한 후, 불상 바닥을 뚫고 내부에 봉안되어 있던 조성발원문 등의 복장물(腹藏物)을 훔쳐가 현재 분철된 〈지장보살본원경(地裝菩薩本願經)〉 몇 장만이 봉안되어 있다. 이 불상이 동화사에 봉안된 내역(來歷)은 봉선사 회주인 밀운 스님의 증언에 의하면, 이후락 前 중앙정보부장이 소유하던 것을 자신에게 기증하였고, 이후 동화사로 모시게 되었다고 한다. 이 불상은 1970년대 개금하던 중에 발견된 조성발원문을 밀운 스님이 필사해 놓아 조성시기와 조성사찰 및 연화질 등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

조성발원문에 의하면 목조여래좌상은 1649년에 전북 순창 회문산 만일사에 봉안하기 위하여 화원(畵員) 사인(思忍) 스님과 상림(尙琳) 스님이 제작하였다. 발원문 내용에 석가여래, 가섭·아난존자, 좌우 제석, 십육나한, 장군, 사자를 제작한 것을 보면, 이 존상들은 나한전이나 응진전 등에 봉안하기 위해 제작된 것이다.

특히, 불상 제작에 증명(證明)을 맡은 태호(太浩, 1564-1652) 스님은 호(號)가 호연(浩然)이고, 속성은 장(張)씨이다. 전남 나주(錦城)에서 태어나 15세에 장흥 천관산 일종(一宗) 스님에게 출가하여 30세에 보은 속리산에서 정관(靜觀) 스님의 법을 이었으며, 1652년에 나이 89세로 입적하였다. 그의 부도는 철원 보개산 심원사지에 남아 있다. 불상 제작에 화주로 참여한 덕월(德月) 스님은 이름 앞에 산인(山人)이라 적혀 있어 회문산에 거주한 큰스님으로 추정된다.

회문산 만일사는 사적비와 1760년에 간행된 〈옥천지(玉川誌)〉에 의하면 백제시대에 건립된 사찰이고, 사적비에 무학자초(無學自超) 스님이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의 등극을 위하여 만일(萬日) 동안 이곳에서 기도하여 사명(寺名)을 얻은 것이라 한다.

1597년에 정유재란 때 소실된 것을 지홍(智弘) 스님과 원측(元測) 스님이 중건하였는데, 당시 요사는 2채, 암자는 동암(東庵), 칠성암(七聖庵), 선적암(禪寂庵)이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폐사되었다가 1946년에 이르러 주지 이금담(李錦潭) 스님이 대웅전, 칠성각, 산신각을 짓고 불사를 추진하였지만, 1950년에 한국전쟁 중에 칠성각을 제외한 대웅전과 대부분 전각이 소실되었다. 사찰은 전쟁이 끝나고 1954년에 현 위치로 옮겨 법당과 삼성각 등을 건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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