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움죽거릴 뿐이고 그냥 말할 뿐이고 그냥 살 뿐이다

(지난 호에 이어서)
질문자1(여) 스님, 이렇게 만나뵈어서 반갑습니다. 다름이 아니고 저는 이번에 설악산 꼭대기에 있는 봉정암이라는 절에 갔었습니다. 가서 눕지도 않고 순전히 기도만 하고 앉아 있는데, 조그마한 시루에다 시루떡을 쪄 가지고 김이 무럭무럭 나는 것을 들고 들어오는 것이 보였고, 또 조그마한 그릇에다 맑은 물에 고기 한 마리 띄워 가지고 들고 들어오는 것도 보였고요, 또 조금 있다가 기도드릴 때는 새카만 엽전 두 개를 가지고 와서 나에게 주어서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오늘 스님께 한번 여쭈어 보려고 왔습니다.

우리가 지금 행선을 하면서
생활이 그냥 참선이라고 하면서 돌아갈 땐
모든 것을 한데 합쳐서 용도대로 놔 버려야 합니다

큰스님 보살님, 잘 들으세요. 세 가지의 꿈이라고 그러셨죠?

질문자1(여) 예. 꿈인지 내가 눈을 감고 있으면서 봤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큰스님 한 시루의 떡은 우주 전체를 뜻하는 겁니다. 둘이 아니게 돌아가는 걸 말입니다. 그리고 또 고기 한 마리가 물에 담겼다고 그랬죠?

질문자1(여) 예, 띄워서 들고 들어오는 걸 봤습니다.

큰스님 우리가 지금 물속에 고기 한 마리 떠 있는 거와 같습니다. 그렇죠? 흘러 도는 물에 고기 한 마리! 그 한 마리만이 아니라 여러분이 다 그렇게 놀고 있다는 표현이죠. 또 돈은, 여러분이 지금 찰나 생활을 하는 것이 돈입니다. 돌고 돌죠. 돈이라는 거는 어느 개인 한 사람 앞에만 있는 게 아니라 여러분 모두한테 돌아가고 있죠. 우리 인간도 고정되게 묶여 있거나 머물러져 있지 않고 찰나찰나 맥박 뛰듯 돌아가죠, 시공이 없이. 그 뜻입니다.

그런데 이걸 잘 들으세요. 우리가 지금 행선을 하면서 생활이 그냥 참선이라고 하면서 돌아갈 땐 모든 것을 한데 합쳐서 용도대로 놔 버려야 합니다. 꿈도 아니요 생시도 아닙니다. ‘생시도 꿈이고 꿈도 생시다’ 이렇게 하는 겁니다. 내가 진실되게 알기 위해서고 깨닫기 위해서 나오는 것이니 그 꿈에 착을 두어서는 아니 됩니다. 그거는 공부하는 과정을 표현해서 여러분한테 꿈으로 보여 준 겁니다. 그것은 내가 모르니까 이 도리를 공부하는 데 깨달음을 주기 위한 과정이고 환상일 뿐입니다. 환상입니다. 그러니 그런 환상이 나타나걸랑 ‘아하, 나를 깨닫게 해 주시고 지혜로운 마음이 생기게 해 주시느라고 이런 꿈을 꾸게 해 주셨구나!’ 그러고선 ‘감사하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 놓는 겁니다, 그것도 또.

그렇기 때문에 타의에서 구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 바깥에서 무엇이 보인다, 생시에 뭐가 안 된다, 누가 잘 보는 사람이 “당신 한 달 후에 뭐가 생길 거야.”, “병고가 생길 거야.”, “잘될 거야.” 하더라도 여기에도 빠져서는 안 됩니다. 그런 것도 거기다가 모두 놔야 됩니다. 잘될 것이라고 해서 좋아하지도 말고 언짢다고 하더라도 거기에 걸려서는 안 됩니다. 언짢긴 뭐가 언짢습니까? 여러분이 마음먹기에 달린 거지 그 사람이 언짢다고 그래서 언짢은 게 아니고 좋다고 그래서 좋은 게 아닙니다.

그러니 꿈에 그렇게 보였다, 또 꿈을 나쁘게 꾸었다 이런 때도, 예를 들어서 여러분이 오시다가 엎어지셨으면 자기가 일어나야죠? 그렇죠? 그와 같이 거기서 언짢다고 생각하는 건 내 소견이니 언짢은 거를 언짢다고 생각 마세요. 그리고 언짢다는 생각이 들면 ‘아하, 언짢은 것도 좋게 할 수 있는 건 주인공밖엔 없지.’ 하고 생각을 하면 그것도 놓는 겁니다.

질문자1(여) 그런 게 있어서 ‘어이구, 높은 산에 이렇게 내가 힘들게 올라왔으니 내가 성불을 하려는가 보다.’ 그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큰스님 뭐라고요? 허허, 이거 보세요. 성불이라는 것이 가깝고도 멀고 멀고도 가까운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부처를 이룬다는 생각도 말고 ‘아이고, 나는 부처가 안 돼.’ 이런 생각도 하지 마세요. 중생이다 부처다 이런 생각도 마시고 자기가 성불하기를 집착하고 그러질 마세요. 그래야만이 부처가 되지 그렇지 않으면 부처가 될 수가 없죠? 부처님이 진짜 되신다면 한 발 내려딛고 보살행을 하면서 천백억화신으로서 보살행을 한다 이 소립니다.

질문자1(여) 예, 감사합니다.

큰스님 예. 질문하실 분 없어요?

질문자2(여) 영가 천도에 대해서요. 저는 법을 잘 모르는데 제가 알고 있는 사람 얘기로는 해마다 조상 천도를 해야 되고, 그런 행사를 각 사찰에서도 하고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먼젓번에 백중 때에 여기 와서 보니까 ‘아무개 성씨의 일체 조상’ 그러고 그 기도를 접수하더라고요. 그래서 그걸 보면서 ‘일체 조상이다’ 하는 것에 대해서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 많은 성씨들이 거기 다 같이 결합해서 오늘의 내가 있다고 생각했을 적에 어느 조상이든지 내 조상이 아님이 없다 하는 데 공감을 가졌습니다.

큰스님 아유 참! 도인이 나셨네요, 또.

질문자2(여) 죄송합니다.

큰스님 아니에요. 정말 그런 생각 하시기가 어렵죠.

질문자2(여) 그래서 저는 천도를 부탁하고 제가 다니던 사찰 도반에게 “나는 이번에 큰스님한테 조상 천도를 부탁드렸는데 틀림없이 천도가 될 거라고 확신을 한다.” 그렇게 얘기를 했더니 “왜 그런 믿음을 갖느냐?” 그래요. 그래서 “내가 아는 바로는 법력이 크신 분은 그 근원을 찾아서 천도를 하시기 때문에, 스님이시라면 완전히 천도를 해 주실 거라는 그런 믿음을 가지고 있다.” 그랬더니 “그럼 당신은 다음 해부터는 조상 천도를 안 할 거냐?”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한 번 천도된 영혼이라면 다시 할 필요는 없는 거 아니냐. 이제부터는 일체의 유주 무주 고혼을 위한 천도의 방법은 택하겠지만 내 조상을 위해서 하기보다 부모나 형제, 친척이 죽기 전에는 거기에 얽매이지는 않을 거다.” 그런 얘길 했거든요. 그랬더니 저 보고 잘못 알고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무엇을 잘못 알고 있는 건지 제가 모르는 것이 무엇인지를 한번 여쭈어 보고 싶습니다.

큰스님 그거는 보살님이 지금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참 생각 잘하셨습니다. 틀렸다는 사람은 자기 소견이지 보살의 소견이 아닙니다. 그러니 지금 생각도 천차만별 아닙니까? 그러니 전부 부처가 될 수가 없는 거죠. 그저 모두 부처가 될 수 있는데도, 부처님이 다 건져 놓으셨는데도, 여러분이 벌써 인간이 됐으니까 99% 부처가 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생각 때문에 모두 중생인 것입니다. 아까 ‘일체 유주 무주’라고 그랬죠? 그러면 일체 조상과 부처의 조상, 자기 전생의 조상도 전부 일체입니다. 유주 무주를 말할 건덕지도 없죠.

그러니 만약에 떡 한 그릇, 밥 한 그릇, 물 한 그릇 놓고 내가 밥을 먹다가 천도를 시켜도 시킬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깨달은 분들은 그렇게 호탕하게 “얼씨구절씨구 좋을씨구!” 하하하…, 이러는 겁니다. 이 말을 해도 함이 없이 하게 되고 그냥 그대로 말을 하면 법이 되고 그대로 움죽거리면 행이 되니 너무나 좋은 겁니다.

그리고 요 알뜰살뜰한 말, 내가 끝으로 한마디 해 드리겠는데, 지금 보살님이 생각하는 대로 그대로 여러분의 생각이 그러시다면…, 이렇습니다. 절에서 상을 크게 차려 놨습니다. 차려 놨는데 고여서 놨죠? 그런데 먼저 스님네들이 음식들을 그렇게 고여 놓고 크고 작은 거를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스님이 ‘아! 이만큼 차렸으면 영가도 마음이 풍족하겠지.’ 요렇게 생각합니다. 허허허…. 그러니까 그 상에 차린 것밖에는 영가가 모릅니다. 만약에 영가를 천도시킬 분이 우주 삼천대천세계의 일체를 그 한 손에 쥐고선 이걸 한 떡이라 생각할 때 그 영가도 ‘아, 그 떡이구나!’ 이렇게 아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가 천도는 그냥 스스로 되는 겁니다. 그런데 스님이 그렇게 물질로만 생각을 하니까 영가들도 둘이 아니기 때문에 그거밖에는 못 받고 그거밖에는 모르죠. 그래서 여러분의 마음이 모두 넓어져서 항상 그저 이리로 가도 둘이 아니요 저리로 가도 둘이 아니요, 이렇게 주고 살아야 되는 것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면 과학적으로도 천체물리학으로도 보세요. 얼음 속에 생명을 넣었다가 다시 살리는 실험이 수십 년, 수백 년 전부터 있었습니다. 겨울에 물고기들이 얼음 속에 있다가 봄이 와서 물이 녹으면 그냥 살아납니다. 그러한 걸로 봐서도 그렇지만 이 부처님 법이란 깨달으면 다 알게 되는 이유가 마음은 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를 든다면 누가 돌아가신 아버지를 못 잊어서 참 애쓰길래 그 가족 과거를 이렇게 보니까 아, 그분이 참 착하더란 말이죠. 산 자식들도 착하고 그분도 착하더라 이거죠. 그러면 착한 것만 아는 게 아니죠. 그분을 만 명으로도 만들어 놓을 수 있고 또 천 명으로도 만들어 놓을 수 있고 세 명으로도 만들어 놓을 수 있고 한 명으로도 만들어 놓을 수 있는 거죠. 왜냐하면 그분을 그 집에다가 세워 놓고 그 집을 위해서 심부름하게끔 하기 위해서죠. 살아서도 자식들을 위해서 심부름을 했는데 죽어서도 모습 없는 모습으로서의 그 마음을 심부름하게끔 할 수 있는 거죠. 요걸 잘 들으세요. 그 아버지가 착하니까 내 마음과 둘이 아니게 내 주장자를 그쪽으로 주니까 그분이 고만 나하고 똑같이 알게 됐더라 이거죠. 또 그분이 모른다면 그분 주장자를 내가 뺏어 올 수도 있는 거죠.

그래서 예를 들어 그 도리를 모른다면 항상 세균에 끄달리지, 영계에 끄달리지, 업보에 끄달리지, 윤회에 끄달리지. 여러분이 그런단 말입니다. 왜 그러느냐. 그냥 들어오고 나가는 것도 없이 들어오고 나가거든요. 영계가 들어와도 들어왔는지 안 들어왔는지도 모르거든요. 가정을 온통 그냥 막 뒤집어 놔도 그게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거든요. 그래서 여러분은 중생이라 하지요. 그러니 그것을 다 해결하고 녹이고 막고, 둘이 아니게 모든 것을 법바퀴로 둥글리고 불바퀴로 굴려서 새로 생산해서 보살로 화해서 나가도록 해야만 되는데 그러지 못하니까 여러분은 고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거지요. 그래서 중생이라는 거죠.

그러니 거기에서 뭐냐? 아까 고거 얘기했죠. 네가 그 마음을 알면 내가 주장자를 줄 것이로되…. 예전에 임제 스님도 그랬어요. “만약에 네 주장자가 없다면 내가 네 주장자를 빼앗을 것이고…. 네 주장자가 없다면 일체 모든 세균이나 영계가 털구멍을 통해서 너의 집을 드나들고 들어왔다 나갔다 하더라도 너는 들어왔는지 나갔는지도 모르느니라. 네가 네 주장자가 있다면 내가 네게 주장자를 줄 것이니라.” 이랬거든요. 그게 뭔 소리냐. 그 마음이 통하니까, 힘을 저기다가 줘도 저 사람은 그 힘을 악의로써 쓰지 않고 선의로써 만법을 들이고 내면서 보살행을 할 것이라는 겁니다.

지금 여러분이 내가 행하는 거를 알려면 여러분도 나와 같이 알아야 내 속을 바로 꿰뚫어 볼 거 아닙니까? 내가 구름을 타고 다니면서 나쁜 짓을 하는지, 구름도 안 타고 가고 옴이 없이 돌아다니는지, 무엇 때문에 다니는지 그것도 알 거 아닙니까? 왜 저이가 저렇게 못났는지 그것도 알 거고요. “아니, 그렇다면 저이는 잘 그려 가지고 나오지 왜 저렇게 못나게 그려 가지고 나왔어?” 한다면 내 속을 알아야 왜 이렇게 그려 가지고 나왔는지 알 거 아닙니까? 내가 만약에 잘 그려 가지고 나왔다면 난 이러지 못하거든요. 안 그래요? 미인으로 아주 잘생기게 태어났다면 내가 이 일을 할 수가 있어야지요. 차라리 못 그려 가지고 나오는 게 좋겠지요?

못 그려 가지고 나왔는데도 젊어서 한때는 남이 더러워서 피하게끔 얼굴에 진흙을 발랐거든요. 어때요? 그 방편도 좋죠? 그래서 볕에 말리니까 진흙과 같이 말라서 피부가 쩍쩍 갈라져서 피가 나오더군요. 그러니까 모두 “미쳤다. 미쳤다.” 하고 또 그냥 싱글벙글 싱글벙글 하니까 “아, 미친 사람인데 갓 미쳤나 봐. 그런데 왜 산에까지 올라왔지?” 이러거든요. 만약에 그럭하지 않았더라면, 키도 크고 미인이었더라면 날 그냥 놔두지 않았을 거예요. 그러고도 또 내가 공부하려고 하는 의도대로 마음대로 못했을 거다 이겁니다.

나는 잠깐 동안이라도 안 해 본 게 없어요. 하다못해 맷돌질, 키질, 모심는 것까지도 조금씩 안 해 본 게 없어요. 어떻게 하나만 가지고 잔뜩 붙들고 몇 해씩 나가겠어요? 잠깐잠깐이지요. 그러니까 그 경험을 해 본 바, 경험을 하고 체험을 하고 그러니까 더 당차지고 믿음이 옵디다. 그러니 여러분도 각자 자기가 자기를 진짜로 믿고 실험하고 체험해야 합니다. 처음에는 무조건 믿어야 해요. 왜? 자기가 이 세상에 나왔으니까 있었던 거지 자기가 없는데 뭐가 있어요?

그래서 옛날에는 “너부터 알라.” 이랬더니 죽였다지 않습니까? 허허허…. 잘못이라고 말입니다. 아까 천도에 대해서도 얘기했지만 어떤 분들은 천도를 꼭 상을 차려 놓고 해 줘야 ‘우리 아버님, 우리 어머님이 잘 잡숫고 가시게 해 드렸으니까 잘됐겠지.’ 요렇게 생각한다 이겁니다. 그런 분들은 차려 놓고 해 주고, 어떤 분들은 “스님, 제 성심으로 부모를 위해서 마음을 냈습니다. 자식으로서 부모한테 해 드린 것도 없고, 또 그렇게 고생만 하셨는데 살 만하니까 돌아가셨으니 이렇게 해 드리는 겁니다, 부모를 위해서. 그러니 천도 좀 시켜 주십시오.” 그러고는 가거든요. “그러면 주소하고 이름도 써 놓고 가고 뭐, 물건을 해 와야지.” 그러니까 하는 소리가 “이름도 성도 없어도 부처님은 아실 거 아닙니까?” 이러는 거라. ‘야, 참! 저이가 부처구나, 하하.’ 이러고선 말입니다, 얼마나 껄껄대고 웃었는지…. 그래 그 돈을 받아서 두 군데 세 군데로 나눠서 누구를 줘 버렸어요. 그냥 줘 버렸죠. 난 그렇게 쓰는 돈이 한 달이면 아마 꽤 될 거예요.

스스로 그렇게 그냥 그런 거죠, 뭐. 그냥 돌아갈 뿐이에요. 그냥 움죽거릴 뿐이고 그냥 말할 뿐이고 그냥 살 뿐이에요. 모두가 내 형제 아님이 없고 내 자식 아님이 없고 위로는 내 부모 아님이 없으니, 우리가 잠시 잠깐 살다 가는 것이 저 뜬구름 한쪽 모였다가 흩어지는 거와 같죠. 그처럼 흘러내리는 물과 같고 스쳐 가는 바람과 같고 가을에 나뭇잎 떨어지는 거와 같고 꽃이 피었다 한 잎 두 잎 떨어지는 거와 같은 것이 인생 아닐까요?

그러니 우리가 ‘모른다 안다’ 그걸 떠나서, ‘저 스님은 도인이야, 도인이 아니야’ 이런 거를 떠나서 인간으로서 좀 더 진실하게 행할 수 있어야 하는 겁니다. 말을 할 수 있다면 행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또 유(有)의 법으로써 남을 돕는다고 자기 먹을 것도 다 갖다가 주라는 게 아니라 나와 그와 둘이 아니게 생각한다면 바로 내가 줄 수 있는, 콩 한 쪼가리라도 나눠 먹을 수 있는 마음이 생기고, 또 마음을 내되 남에게 해롭게 마음을 내지 않는다 이겁니다. 행을 하지 않으면 안 돼요. 행이 없이 무(無), 공(空)에 빠지거나 유(有)에 끄달리거나 이래도 안 되죠. 유의 법으로 물질세계로 끄달리거나 그래도 안 되고 무의 세계, 공에 빠져도 아니 되고, 나만 참선을 한답시고 안주해도 아니 됩니다. 이거는 천체가, 변소간에 가도 부처는 거기 있으니 참선이요, 어디든 내가 가는 족족 부처가 그 자리에 있으니까 바로 그것이 참선이라. 그것이 행선입니다. 일체 만법이 다 행선이며 참선이에요. 여러분 생활이 따로 있다고 생각한다면 도를 이루지 못하고 환상천을 넘지도 못하고, 바로 불사천을 넘지도 못하는 것이고 무명천도 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기복으로 끄달린다면 달마 대사가 양 무제더러 한 말과 같은 겁니다. “나는 절도 짓고 또 물건도 많이 장만해서 스님네들한테 보시했고 옷도 해 드리고 쌀도 갖다 드리고 그랬는데 공덕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하고 달마 대사한테 양 무제가 물어보니까 공덕이 하나도 없다고 그러더라는 거지요.
그래서 여러분이, 아까도 얘기했지만 “부처님은 아실 것이니까 우리 아버지 천도시켜 주세요.” 하고 갖다 준 돈이 바로 그분이 다시 태어날 때 통장을 해 가지고 나오는 그 돈이 돼 버렸더라 이거예요. 그러니 얼마나 좋습니까? 그래서 그분하고 마음이 둘이 아니게 되어서 그분도 그냥 한 찰나에 부처의 도리를 알게 됐으니 부처님이 됐고 보살행을 하게 된 겁니다. 그 돈은 그렇게 공덕이 됐으니 그냥 그분의 무의 통장이 돼 버렸어요. 유(有)의 통장이 아니고 무(無)의 통장 말입니다. 그 무의 통장이 미래의 유의 통장으로 나오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미래에 이 도를 깨쳐서 나올 사람을, 즉 말하자면 미륵보살이라고 그러거든요. 그리고 기독교에서는 재림하신다고 그러고요. 그런데 지금 그냥 생활하고 사는 사람들이라도 마음이 그만큼 그렇게 됐으면 벌써 그건 보살이요 부처입니다.

바깥으로 끄달리면서 ‘내가 보시를 했으니까….’ 이러면서 아무개는 얼마 했고 아무개는 얼마 했고 이렇게 주렁주렁 써 붙인다면 어떻게 자기 미래의 통장을 갖겠습니까? 그러니 공덕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물건을 사러 가서 “이 돈은 내가 줬으니까 내 돈이요.” 하고 돈을 쥐고 있으면 물건을 주지 않습니다. 돈을 가져와서도 ‘요 돈을 내가 갖다 줬으니까….’ 하고 항상 생각하고 있다면 돈을 못 받았으니까 가게에서 물건 주는 사람이 물건을 안 주죠. 돈을 만져 보기만 했지 그게 준 돈입니까, 어디? 이거는 “아주 너 써라.” 이러고 준 게 아니거든요.

그러지 않아도 여러분이 시주를 하면서 함이 없이 하지를 않고 ‘시주를 하면 이 일이 이루어지겠지.’ 요렇게 하고 보시한단 말입니다. 요렇게 하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요걸 주고 끝끝내 줬다는 거거든요. 줬다고 아주 써 붙여 달라는 거거든요. 그러니 물건을 가져갈 수가 있어야지요. 여러분이 그렇게 해 놓고도 “나는 이렇게 주인공을 믿고 이랬는데도 안 됩니다. 믿었는데도 그렇거든요.” 이래요. 믿긴 뭘 믿었습니까? 세상에 죽고 사는 것도 다 거기에 놓고 믿어 보세요. 여러분은 정말 영광스러울 것입니다.

여러분 가만히 보면 진짜 믿는 사람은 별로 없어요. 진짜 믿는다면 내일 죽으면 어떻고 오늘 죽으면 어떻습니까? 그리고 내 자식이 금방 이 자리에서 죽는다 해도 그게 뭐가 그렇게 대단한 겁니까. 어떤 사람이 묘지를 쓰고 나서 무척 앓았습니다. 그 집안의 아버지가 죽고 어머니가 죽고 자식들이 그냥 내리내리 자꾸 죽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산소 묘지가 잘못됐다고 갖다 옮기려니까 돈이 없어서 산을 사지 못하는 거예요. 화장을 시켜 버린다니까 또 가족들이 야단들이고요. 그래서 “산을 사서 이쪽으로 묻자니 돈이 없고, 그냥 놓아두자니 자꾸 집안사람들이 죽습니다. 그러니 이 일을 어쩌겠습니까?” 그러더라고요. “나더러 그런 소리를 했으니까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잘 들어. 거기에 산소 잘못 썼다고 할 게 아니라 그 의식 자체만 딱 들어내면 그거는 그냥 고깃덩어리고 흙덩어리야.” 그랬거든요. 그랬더니 거기에서 탁 오는 게 있었던 모양입니다. “주인공에 그냥 놔 버리면 될 것을…. 스님, 죄송합니다. 스님, 감사합니다.” 그러곤 울면서 가더니 그 뒤에 그 집안이 다시 일어섰어요. 그러니까 마음먹기에 달린 겁니다.

질문하실 분 없으면 그만 일어날까요? 여러분, 앞으로 열심히 해서 새달이나 또 훗달에도 그렇고, 같은 도반으로서 항상 질문하고 토론하면서 우리 자유권을 얻읍시다. 감사합니다.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