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마왕의 집착에 대한 해석

오! 시작하자마자 나칠계님 손을 번쩍 드시네요. 오늘 미인 이야기를 하기로 한 거, 잊지 않았느냐구요? 당연히 잊지는 않았죠. 조금 그런 약속드린 걸 후회는 했습니다마는…. 그래도 약속은 약속이니 조금 하고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空이 있는 ‘완공’ 집착 지적
잘못된 진리의 무서움 묘사
한마음 돌리면 모두 다 선지식

서유기는 철저히 남성 중심적인 책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네요. 아니 서유기뿐만 아니라, 그 당시에 지어진 어떤 문학작품도 남성중심을 벗어나기 힘들었다고 말할 수 있겠지요. 남성중심의 가부장적 사회에서 여성의 위상은 자연 남성에 종속될 수밖에 없었고, 행불행이 모두 남성에 의해 좌우되었지요. 그러니까 그런 사회 속에서 여성상은 자연 남성 중심의 사고를 반영할 수밖에 없었고, 서유기도 그럴 수밖에 없었겠지요. 거기에 서유기는 불교 수행을 중심축으로 해서 엮어지는 이야기지요. 그리고 불교는 출가자인 스님을 중심축에 놓고 있었고, 스님의 중심은 확실하게 남자 출가자인 비구 중심이었고…. 그런 스님들의 세계에서 여성성이 정당하게 평가되기 힘들었다는 것은 앞에서 여러 번 이야기 했습니다.

여성성이 아니라 성 문제에 대한 온당한 견해 자체가 제출되기 힘들었지요. 그런 덕분(?)에 서유기에서도 남녀의 진정한 사랑 이야기는 나오기 힘든 것이 사실이고, 여성하면 바로 인격 그 자체로 대접받기 보다는 성적인 대상, 아니면 성적인 유혹을 하는 장애물 정도로 취급될 수밖에 없다는 점을, 만천하의 여성 여러분들 너그럽게 이해해주시옵기 앙망하옵나이다. 결코 삼쾌선생이 여성을 낮춰보는 관점을 지니고 있다던가 하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도요. 그런 변명 아닌 변명을 앞에 내세우고, 남성 중심사회에서 고난의 삶을 이어왔던 여성 가운데 미인으로 이름을 떨쳤던 예들을 좀 들어보고, 그들의 어려웠던 삶까지 한번 조명해 보도록 하지요. 여성의 운명적인 고난에 대한 깊은 이해를 곁들여가면서요.

일반적으로 중국의 사대미인이라 하면 서시(西施), 왕소군(王昭君), 초선(貂蟬), 양귀비(楊貴妃)를 꼽습니다. 그 가운데 초선은 실제 인물이 아니고 삼국지연의라는 소설에 나오는, 즉 삼국지의 저자 나관중에 만들어진 여성이지요.

그런데 그 각각이 침어낙안(沈魚落雁), 폐월수화(閉月羞花)라는 미인을 형용하는 말에 대응하기 때문에 가공의 인물인 초선이 들어가게 된 것 같습니다. 처음의 침어, 즉 물고기가 그 미모에 홀려 물속으로 가라앉는다는 것은 서시에 해당하구요, 기러기가 날갯짓을 잃고 떨어진다는 것은 왕소군을 말합니다. 왕소군이 오랑캐 땅에서 비파에 맞춰 고향 그리는 노래를 하니 기러기가 그 노래에 취해 떨어졌다 하지요. 달이 구름 속에 숨는다는 것은 초선에 해당합니다. 왕윤이라는 사람이 그의 양녀인 초선의 미모에 달이 구름 속으로 숨는다고 찬탄했다는 이야기가 삼국지에 있지요.

마지막 꽃을 부끄럽게 한다는 것은 당 현종이 양귀비의 미모를 찬탄해서 한 말입니다. 그 밖에 조비연(趙飛燕)이라는 한 시대의 여성을 꼽기도 하는데, 이 비연은 얼마나 날씬했던지 손바닥 위에서 춤을 출 수 있었다 하네요. 그 반면 양귀비는 아주 풍만한 미인이었죠. 이 둘을 대조하여 연수환비(燕瘦環肥), 즉 “비연은 말랐고 양귀비는 살이 쪘다”고 말하기도 합니다.(양귀비의 이름이 옥환(玉環)이어서 ‘환비’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이 둘과 또 대조하면 서시는 가슴앓이 같은 병을 앓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가슴을 문지르는 자태를 그린 그림도 있고, 또 서시가 얼굴 찌푸리는 것을 아름답게 여긴 못난이가 그 찌푸리는 흉내를 내다 아주 망신을 했다는 ‘효빈’이라는 이야기도 있지요.(<장자>에 나옵니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이들이 모두 불행한 삶을 살았다는 사실입니다. 서시는 월왕 구천에 의해 정략적으로 오왕 부차에게 바쳐진 여자입니다. 정략적 목적을 달성한 뒤에는 비참한 죽음을 당했다는 설이 유력하지요. 왕소군은 한 나라 궁전의 궁녀였는데, 화공에게 뇌물을 바치지 않아 그 모습이 밉게 그려졌지요. 오랑캐에게 궁녀 가운데 뽑은 여자를 정기적으로 보냈는데, 그림만 보고 선택을 하는 바람에 천하의 절색인 왕소군이 뽑혀 가게 되었답니다. 결국 돌아오지 못하고 오랑캐 땅에서 죽었지요. 시인 이태백이 왕소군이 오랑캐 땅으로 떠나는 모습을 그린 시가 있습니다.

昭君拂玉鞍 소군 옥 안장에 올라앉았네.
上馬涕紅顔 말 위서 고운 얼굴 눈물에 젖는구나.
今日漢宮人 오늘은 한나라 궁전 사람이지만
明朝胡地妾 내일 아침이면 오랑캐 땅의 첩(妾)

중국인들의 자존심에도 상처를 주고, 그 기구한 삶으로 인하여 더더욱 애틋한 동정심을 자아내는 것이 바로 왕소군이겠습니다.

초선 역시 정략적으로 동탁과 여포라는 인물 사이를 오락가락하는 불행한 삶을 살았다고 하지요. 양귀비는 애초에는 당 현종의 며느리였다가 현종의 비가 되었고, 그 뒤 안녹산의 난으로 인하여 비명에 죽게 되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지요. 한 때는 왕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지만 결코 행복하다고는 할 수 없는 삶입니다. 그래서 또 사람들의 마음을 흔드는 면이 있고, 당현종과 양귀비의 사랑 등을 소재로 한 여러 작품들이 만들어지기도 했습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백락천의 장한가(長恨歌)일 것 같군요. 그 마지막 구절이 생각납니다.

在天願作比翼鳥 하늘에 있다면 비익조 되어 함께 날고
在地願爲連理枝 땅에서라면 연리지가 되어 함께 이어지리.
天長地久有時盡 하늘땅이 비록 오래 간다 하여도 다할 날이 있지만
此恨綿綿無絶期 우리의 사랑하는 그리움은 끊어지는 날 없으리라

시인의 눈으로 다시 해석되고 미화된, 참으로 사랑의 그리움을 절절하게 표현한 절구라고 할 수 있겠지요?
아무튼 이들 미인들은 남성들에 의해 그 운명이 결정되었고, 그 미모 때문에 기구한 삶을 살아간 것이지요. 그것이 그들의 죄일까요? 결코 아닐 것입니다. 여성을 자신의 종속물로 여기고, 그들의 미모를 정략적 도구로 이용하기도 하고, 또 인격적으로 대등한 관계가 아니라 성적인 쾌락을 위한 도구로 본 남성들 때문에 그리 된 것이겠지요. 그런 점에선 남성들 중심의 역사에 대한 엄한 반성이 있어야 할 것이고, 지금에까지 그러한 성적인 불평등이 있지는 않은가 돌아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 남성들의 죄야 아니지만, 과거의 업에 대하여 남성들이 깊은 반성을 할 필요도 있을 것 같군요. 그런 점에서 남성 일동 묵념! 이크, 삼쾌선생은 묵념타령을 하는 병이 있군요. 반성하는 의미에서 묵념! 애고 또!

정말 애고입니다. 조금 쉬어간다는 것이 많이 길어졌지요? 아직 못 다한 이야기도 많은데. 앞에서 말한 무산 운우(巫山雲雨)라든가, 설도(薛濤)이야기도 못했어요. 그래도 설도에 관해서는 조금 이야기하기로 하죠. 설도는 당 시대의 유명한 여류시인인데, 신분은 기녀였어요. 당대의 여러 유명한 시인 묵객들과 교유를 했지요. 직접 아름답게 꽃물들인 종이를 만들어 거기에 연애편지도 쓰고 했다는, 정말 멋있는 여성이죠. 그런데 우리가 잘 아는 동심초라는 가곡 있지요? 그 노랫말이 바로 설도의 시라는 것 아세요? 안서 김억이 설도의 춘망사(春望詞)라는 시를 맛깔나게 번역한 것이 바로 그 노랫말입니다. 기왕 쉬어가는 김에 조금 퍼져 버릴까요? 설도의 춘망사가 나갑니다.

風花日長老 바람에 날리는 꽃은 긴 날에 시들어가고
佳期猶渺渺 만날 기약은 아득하기만 하구나
不結同心人 마음을 함께하는 이와는 맺지 못하고
空結同心草 헛되이 풀로 동심결만 맺는구나.

김억 시인의 절묘한 번역과 삼쾌선생의 직역의 비교는 여러분이 해 주시기 바라구요. 이제 정말 서유기의 본 이야기로 갑니다요.

앞에서 화염산의 불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 불을 끌 수 있는 열쇠를 우마왕 부부가 쥐고 있네요. 사도(邪道)의 요괴놀음 시절에 맺은 인연, 그것이 결국 정도로 돌아선 뒤에서 여전히 이어지고 있군요. 그리고 여기서 우마왕은 완공(頑空)에 매달리고 있는 집착을 상징합니다. 완공이 뭐냐구요? 갑자기 어려운 얘기로 돌아서게 되는군요. 완공은 공(空)에 대한 참다운 이해인 진공(眞空)의 반대말이지요. 공이란 정말 아무 것도 없는 텅빔이 아니라, 바로 연기적인 세계의 참 모습을 말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공을 그대로 아무 것도 없는 것이라는 식으로 굳게 믿어서, 연기적 세계의 참모습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집착을 갖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어찌 될까요? 잘못된 진리에 대한 집착이라는 정말 무서운 병에 걸려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불교는 자칫하면 이러한 ‘완공’병 같은 병에 걸리기 쉬운 측면이 있지요. 얼마나 부정적인 표현들이 많아요? 버젓이 있는 눈, 귀, 코, 혀 등을 없다 하잖아요? 반야심경의 무안이비설신의(無眼耳鼻舌身意) 말입니다. 이걸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 “와! 참으로 불교는 심오하구나. 눈 귀 코 혀 몸과 뜻이 없는 것이로구나!” 하면서 억지로 그것을 진리로 받아들이려 한다면, 이것도 일종의 ‘완공’ 병이라 할 수 있겠지요. 이 병은 참으로 치료가 힘든 측면이 있어요. 이 병에 걸린 사람들이 상당한 지성을 가진 확신범(?)인 경우가 많아요. 나름대로 사상적인 무장이 잘 되어있어 설득이 잘 안돼요. 아무튼 이런 완고한 집착, 그 황소고집 같은 집착을 바로 우마왕으로 상징화한 것이라 할 수 있겠네요. 서유기의 표현을 직접 볼까요?

우마왕은 본디 마음 원숭이(心猿)가 변한 것
시원한 곳으로 나아가 화염을 쉬게 하고
공(空)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깨뜨리고 부처님 모습을 뵈어야지!

그렇습니다. 참된 부처님 뵈려면 너무 성급하게 용쓰다 걸리는 불의 병도 물리치고, 공과 같은 진리에 대한 잘못된 집착도 깨뜨려야 합니다. 그런데 진리에 대한 잘못된 이해는 참으로 다른 병보다도 더 위험하지요. 사이비가 제일 위험한 것입니다. 비슷하기 때문에 속기도 쉽고 또 빨리 거기서 빠져나오기도 어렵거든요.
우마왕과 싸우는 대목도 참으로 재미있는 도술대결, 권모술수의 대결 장면이 많지만 그런 것들은 앞에도 나왔고 뒤에도 또 나오니까 생략했습니다. 그렇지만 너무 힘든 난관에 슬그머니 피해가고 싶어 하는 저팔계에게 토지신이 한 이야기는 꼭 다시 음미해야 하겠네요. “꾀부릴 생각 마십시오. 딴 길로 돌아가면 바로 그게 이단의 문입니다. 여러분의 사부는 올바른 길에서 여러 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어떤 난관도 정면으로 돌파해야 합니다. 특히 수행에 있어서 지름길, 샛길은 없지요. 그래서 손오공 일행, 당당하게 화염의 난관, 완공의 장애 물리치고 당당하게 올바른 길로 오늘도 나갑니다. 여러분, 모두 함께 묵념!…이 아니고, 이 당당한 행보에 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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