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신문사 사장 주경 스님

참불선원 인문학강좌종교로부터 자유로운 세상

불교를 제외한 대부분의 종교에는 절대자 개념이 존재한다. 이로 인해 종교 간 갈등이 발생하고, 대규모의 전쟁을 벌이기도 한다. ‘죄악을 절대자가 용서한다는 가르침으로 자살테러를 일삼거나 비윤리적 행위를 자행하기도 한다. 이를 두고 비종교인들은 종교의 무용(無用)’을 꼬집는다. 과연 종교는 필요할까? 불교신문사장 주경 스님은 1017일 서울 참불선원 인문학강좌서 종교로부터 자유로운 세상을 주제로 강의했다. 스님은 부처님 가르침인 삼법인에 따르면 열반 전까진 일체가 고통이다. 그렇기에 불교가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은 종교가 없는 세상이다. 누구나 세상을 바르게 보고, 올바로 살아간다면 종교의 존재는 중요치 않다고 강조했다.

정리=이승희 기자

▲ 주경 스님은… 1989년 범어사에서 자운 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수지했으며, 한국불교문화사업단 사무국장, 조계종 총무원 기획실장, 14·15대 중앙종회의원, 서산 부석사 주지 등을 역임했다. 현재 16대 중앙종회의원과 불교신문사 사장을 맡고 있다.

절대자 능력에 매달리면
주종관계로 주체성 잃어
자신에 대한 확신 갖고
삶 속 고통 해결 나서야

종교는 두려움을 먹고 산다?
근래 우리사회에 인문학 열풍이 불고 있습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우리가 사는 게 다 인문학입니다. 영어로는 ‘humanities’라고 하는데 인간애, 사람다움을 뜻하는 ‘humanity’의 복수형인 점이 재밌습니다.

종교학도 인문학의 한 영역입니다. 과거에 단순히 개별 종교를 연구했다면 현재는 비교종교학을 통해 모든 종교를 이성적, 물리적, 분석적으로 연구합니다. 오늘은 불교라는 종교를 인문학적 시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여러분, 과연 종교가 없는 세상이 좋은 세상일까요 나쁜 세상일까요. 극단적으로 들리겠지만 저는 종교가 없어도 될 것 같습니다. 지구 역사상 가장 큰 전쟁, 테러 등은 종교가 원인인 경우가 많습니다. 중동 자살 특공대도 종교를 기반으로 합니다. 유럽의 전쟁들은 전부 종교 혹은 종교와 비슷하게 강력한 국가적사회적개인적 신념 때문에 일어났습니다.

개별 종교에선 생산적, 화합적, 창조적인 활동이 많지만 종교끼리 부딪혔을 땐 파괴적 전쟁이 일어납니다. 그러니 종교가 없어도 괜찮지 않을까요.

그러나 한편으론 종교가 없다면 사람들의 고통과 두려움에 대한 해답을 과연 어디서 얻을 것인가 고민이 됩니다. 종교, 특히 불교는 고통의 문제를 해결해 줍니다. 부처님이 출가해 수행했던 근본적 이유도 결국은 고통의 문제를 뛰어넘기 위해서였습니다.

동양에선 현실적 고통의 문제를 다루는 반면 서양 종교에선 고통보단 두려움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신의 뜻에 어긋나게 살았을 때 받을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 가득합니다. 따라서 인간에게 받는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는 부작용이 나타납니다. 어린아이들이 폭탄을 짊어지게 하고, 종교의 이름으로 숱한 죄악을 저질러도 절대자에게 용서받으면 다 괜찮다는 생각이 만연합니다. 신과 주종 관계를 맺는 걸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3가지 외도의 문제점
이에 대해 부처님께선 3가지 외도 비판을 하십니다. 외도란 잘못된 가르침을 일컫습니다.

첫 번째가 존우화작인설(尊祐化作因說)입니다. 절대자에 의해 세상이 창조운영된다는 믿음을 말합니다. 부처님께서 살아계실 당시 인도에선 범천이 세상을 창조하고, 인드라가 이를 경영한다는 사실을 널리 받아들였습니다. 이에 대해 부처님은 주어진 범위 내의 창조일 뿐이라고 한정했습니다. 엄마가 아기를 낳을 수 있는데, 그렇다고 모든 아이들의 엄마가 되는 것은 아니듯 말입니다. 범천도 마찬가지로 자기가 창조할 수 있는 세상의 범위가 정해져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천신조차도 사람으로 분류해 천인(天人)이라고 부릅니다. 사람과 동격의 인격체로 분류됩니다. 우리가 논의하는 인문학의 범위에 범천이나 인드라 같은 신들이 포함되는 이유입니다.

두 번째는 숙작인설(宿作因說) 입니다. 날 때부터 부모와의 인연, 수명까지 인생의 모든 일이 결정돼 있단 게 숙명론인데, 그렇다면 그냥 사는 대로 살지 않겠습니까? 부처님은 그렇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콩을 심으면 반드시 콩이 나지만 노력하기에 따라 질 좋은 콩이 많이 열릴 수도 있고, 말라비틀어진 쭉정이가 될 수도 있습니다. 많은 엄마들이 우리 아이가 머리는 좋은데 노력을 안 한다고 말합니다. 이는 숙명론을 거부하는 말이며, 노력여하에 따라 상황이 달라진단 사실을 이미 알고 있단 뜻입니다. 물론 일이 잘 안 풀리면 팔자를 탓하기가 쉽습니다. 우리 노력의 범주를 벗어난 일에 있어 팔자라며 받아들이곤 하지만 그곳 또한 결정된 것은 아닙니다.

2,500년 전 인도의 카스트 계급 간 차별이 만연할 때 부처님은 사람은 혈통에 의해 사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행동에 의해 고귀함과 천박함이 결정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귀한 행동을 하는 사람은 천한 혈통으로 태어났어도 고귀한 사람입니다. 이런 이유로 숙명론을 부정하셨습니다.

세 번째는 무인무연설(無因無緣說)입니다. 원인도 없고 결과도 없는 이 세상은 아무도 알 수 없는 것이란 가르침을 일컫습니다. 어느 제자가 부처님께 이 세상에 나쁜 짓을 해도 잘 먹고 잘 사는 사람이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하고 물었습니다. 부처님께선 악한 일을 행하더라도 전생에 쌓은 선업이 다하지 않는 한에서 좋은 공덕을 받을 수 있다고 대답하셨습니다. 지금 열심히 노력한 공덕은 어디로 가지 않습니다. 반드시 내게 와 행복한 삶을 살게 합니다. 부처님은 어미 양-새끼 양비유를 드셨습니다. 수천마리 어미 양 사이에 새끼 양을 풀어놔도 아무나가 아닌 꼭 제 어미젖을 무는 새끼 양처럼 미물도 제자리를 찾는데, 하물며 인연법이란 어김이 없다는 겁니다.

외도가 가진 가장 큰 문제는 도덕성과 책임감 결여에 있습니다. 존우화작인설은 내가 무슨 짓을 해도 위에서 절대자에게 책임을 전가하기 때문에 도덕률을 파괴하고 상식적이고 건전한 의식을 유지할 수 없게 합니다. 또 숙작인설은 팔자만 탓하게 하고, 무인무연설은 악업을 부정해 세상에 뻔뻔한 사람들이 많아지게 됩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선 인과법칙을 가르치셨습니다. 모든 일에는 원인, 과정, 결과가 있고 그 주인은 바로 자신이 된다는 생각을 설파하셨습니다. 물론 궁극적으론 무아를 가르치셨습니다.

지금의 나와 5년 전의 나는 다릅니다. 다른데 왜 같은 이름을 쓰고 같은 집에 살까요.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합니다. 머릿속 생각이나 육신의 물질적 구조도 달라지지만 변함없이 나라고 인식합니다. 이 모든 것들이 연결선상에 있기 때문입니다.

불법 만났다면 확신 가져라
우리 스스로에게 누구냐고 물어볼까요? 사실 내가 누군지 잘 모릅니다. 평생을 살면서도 누군지 물어보면 잘 모르겠다고 대답합니다. 그래서 대선사께서 내가 누군지 자각하기보다 내가 이 사회서 어떤 역할, 책임을 갖고 살아야 할 것인가가 중요하다고 말하셨습니다. 신이나 팔자에 책임을 떠넘기지 않고 오롯이 스스로 만들어나가고 겸허히 결과를 받아들이는 게 불교의 인과설입니다. 이 때문에 부처님께선 오직 나만이 존귀하고 또 존귀하단 천상천하유아독존을 말하시며 내가 책임자고 주인공이란 가르침을 펼치셨습니다. 부처님께선 모든 사람이 주인공이며, 모두 주인공의 책임이 있다고 보셨습니다.

이웃종교는 많은 사람들이 나 대신 책임져줄 사람이 없을까 생각하며 번 돈의 10분의 1을 바칩니다. 뉴스에서 사기꾼이 사기로 번 돈을 바쳤다는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 사기꾼은 예수님을 공범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전 신도들에게 부처님을 공범으로 만들지 마십시오라고 합니다.

현명한 사람이라도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받고 있다면 믿고 의지할 존재를 그리워합니다. 기대고 싶기 때문이지요. 그게 바로 종교의 함정입니다. 해결해 줄 것처럼 굴지만 근본적으로 책임지지 않는 게 종교입니다. 내가 해결해야 합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삼법인을 말씀하셨습니다.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 열반적정(涅槃寂靜). 이 세상은 끝없이 변하므로 나라고 단정 지을 근거가 없고 열반만이 궁극적 해결이란 뜻입니다. 열반 전까진 일체가 고통입니다. 그런 까닭에 저는 불교가 궁극적으로 원한 건 종교가 없는 세상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구나 세상을 바로 보고, 바로 살아간다면 종교는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두려움으로부터 회피하고 대안이 필요해 종교를 요구한다면 그 종교의 허물 속에서 맹신, 광신으로 치달아 상식적이고 일상적인 판단생활 자체를 무너뜨리게 됩니다. 그래서 자기 목숨, 남의 목숨도 허뭅니다. 불교에서 목숨을 얼마나 귀하게 생각합니까.

저는 16년간 주지 생활하면서 늘 그렇게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불교를 믿는 사람이 매번 똑같이 보고 듣고 이해한다면 고정관념, 선입, 편견 등 악견에 빠진 겁니다. 이것을 늘 새롭게 만들지 않으면 수행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늘 자기세계에 갇혀 살면 부처님도 제도하기 힘듭니다.

지난주에 중학생 때부터 20년간 인연을 맺은 유발상좌가 결혼했습니다. 덕담을 해달라고 해서 편안하게 이야기하기 좋은 육화경의 가르침을 말했습니다.

첫째, 신화공주(身和共住)는 몸으로 화합하라는 말인데 가족과 비유하면 가족이 모두 같이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둘째, 구화무쟁(口和無諍)은 입으로 화합하라는 뜻으로, 서로 다투지 말고 화목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셋째, 의화동사(意和同事)는 서로 협력해 함께 일하라는 말이며, 넷째, 계화동수(戒和同修)는 함께 계율을 지키며 수행하란 말이니, 보살님들은 가족들, 자녀들과 함께 법문을 들으시면 좋겠습니다. 다섯째, 견화동해(見和同解)는 서로 이해하며 의견을 나누라는 말이며, 여섯째, 이화동균(利和同均)은 동등한 이익으로 화합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육화경에는 화합하기 위해 2가지 방법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치로 화합하는 이화, 삶 속에서 일로 화합하는 사화가 그것들입니다. 화엄경엔 이치와 현실생활이 구분이 없다고 말합니다. 이사명연무분별(理事冥然無分別)입니다.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듯 때론 막혀도, 돌아가도 결국 불교계에 몸담으면 깨달음으로 향한다는 사실을 믿는 게 신심입니다. 불법을 만나 듣고 행하는 사람들은 나는 이미 불법의 흐름에 들어왔다는 확신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금강경엔 부처님 말씀을 듣고 곧바로 4과중 수다원과(수행자가 비로소 성자의 흐름에 들어섰다는 의미로, 깨달음으로 향하는 흐름에 갓 합류한 경지)에 들어선 도둑에 대한 얘기가 있습니다. 불교의 도도한 깨침의 흐름에 들어온 사람은 결코 물러나지 않아야 합니다.

종교를 떠나서 육화경의 가르침이 인문학에 부합한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이렇듯 불교 가르침은 매우 섬세해 우리 생활에 연결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