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안(草安) 스님

1654년에 조성된 금강산 안양암 목조지장보살좌상. 속초 보광사에 있다. 사진제공=동북아불교미술연구소
17세기 중반에 불상을 만든 조각승 가운데 스님 몇 명은 보조화승으로 활동하다가 수화승(首畵僧)이 되어 여러 작품을 제작한 것으로 보이지만, 1-2점 밖에 조사되지 않은 경우가 많다. 불상의 제작은 상당히 고도화 된 기술이 결합된 것이라 어느 날 갑자기 불상조성을 주도한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조각승 인균·응원 계보 조각승
금강산 안양암에 지장보살상 조성
속초 보광사 목조지장보살상 유일
장성 백양사 불상 만든 것 추정

이와 같이 적은 수량의 불상이 조사된 조각승들은 당시의 활동내용과 불상 양식을 접근할 수 없기에 현재 상황에서 스님들이 남긴 흔적을 찾는 것이 시급하다.

이와 같은 조각승 가운데 초안 스님은 왕을 시중하는 내시의 아내가 발원한 불상을 만든 작가다. 초안 스님은 17세기 전반 대표적인 조각승 인균(印均, 仁均)이나 응원(應元, 應圓) 스님의 계보를 잇는 작가로 보인다. 이는 초안 스님이 삼인 스님이 수화승으로 만든 불상에 보조화승으로 참여한데 기인한다. 삼인 스님은 응원 스님과 인균 스님 두 조각승과 밀접한 관련성을 가지고 있는 스님이다. 초안 스님이 1650년대를 전후하여 여러 불상을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아직까지 수화승으로 참여한 작품은 1점이 조사되었을 뿐이다.

초안 스님의 생애와 조각승이 된 배경에 대하여 알려진 바가 없지만, 불상에서 발견된 문헌을 통하여 스님의 활동 시기와 내용, 조각승 계보 등을 추정할 수 있다. 초안은 현재 속초 보광사에 봉안된 목조지장보살좌상을 1654년에 단독으로 조성한 것으로 미루어 이전부터 불상 제작에 참여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는 1659년에 삼인 스님이 수화승이 되어 제작한 전남 고흥 금탑사 목조지장보살좌상과 시왕상 제작에 참여하였는데, 이때 참여한 조각승 8명 가운데 초안 스님은 3번째로 언급되어있기에 불상조성에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17세기 중반에 조성된 장성 백양사 목조지장보살좌상

17세기 중반부터 사찰의 부속 전각이나 암자에 불상이 봉안되면서 불상의 크기가 줄어들었다. 이렇게 불상의 크기가 작아지면서 제작에 참여한 조각승의 숫자도 적어지는데, 속초 보광사 봉안 목조지장보살좌상은 암자에 봉안한 50㎝ 정도의 크기로, 목재의 가공, 옻칠, 금을 칠하고 붙이는 전 과정을 초안 스님이 주도한 것이 특징이다.

이제까지 밝혀진 초안의 활동 시기는 1654년부터 1659년까지이다. 초안이 1650년대 수화승으로 활동할 정도라면 1620년대 태어나 1630-40년대 보조화승으로 불상 제작에 참여하였을 것이다. 그가 1650년대 강원 고성과 전남 고흥에서 불상 제작에 수화승(首畵僧)과 차화승(次畵僧)으로 활동한 것을 보면, 이후에 기년명 불상이 조사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17세기 중반에 활동한 초안 스님을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기년명 불상은 1659년에 제작된 전남 고흥 금탑사 목조지장보살좌상과 시왕상이다. 이 가운데 오도전륜대왕(五道轉輪大王) 내에서 발견된 조성발원문에 의하면, 순치14년 6월에 전남 고흥 천등산(天燈山) 금탑사(金塔寺)에 지장삼존과 시왕상을 조성하였는데, 증명(證明)은 성일(性一) 스님이 맡고, 화공(畵工) 삼인(三忍) 스님, 묘관(妙寬) 스님, 초안(楚安) 스님, 하륵(何勒) 스님, 약육(若六) 스님, 덕민(德敏) 스님, 미찬(未讚) 스님, 도잠(道岑) 스님, 도헌(道軒) 스님이 만들었다. 수화승으로 참여한 삼인 스님은 1628년에 전남 순천 송광사 소조사천왕상을 수화승 응원(應圓) 스님과 제작할 때 14명 중에 11번째 언급될 정도로 나이가 어리고 기능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후 30여년이 지나 1655년에 전남 여수 흥국사 응진당 목조석가여래좌상과 나한상을 수화승 인균(印均) 스님과 제작할 때 부화승으로 참여하고, 같은 연도에 경북 구미 자운사 석비를 임의강(林儀江)과 건립하였다.

속초 보광사 목조지장보살좌상에서 나온 견직물

금탑사 불상 제작에 부화승으로 참여한 묘관(妙寬) 스님은 1653년에 전북 고창 문수사 목조석가삼존불좌상과 목조지장보살좌상 등을 수화승 해심(海心) 스님과 제작할 때 16명 중에 6번째로 언급되고, 1654년에 전남 영광 불갑사 명부전 불상을 무염(無染) 스님, 정현(正玄) 스님, 해심(海心) 스님과 조성하였다. 이들은 17세기 중반에 전국을 무대로 활동한 대표적인 조각승들로, 대부분 1650-70년대에 불상 제작을 주도한 수화승들이다.

또한 도잠(道岑)은 1651년에 서울 봉은사 대웅전 내 본존 옆에 위치한 목조여래좌상과 1657년에 전북 무주 북고사 극락전 목조아미타불좌상을 수화승 승일(勝一) 스님과 조성하고, 1674년에 경북 청도 용천사 불연(佛輦)을 제작하였다. 마지막 도헌 스님은 1659년에 금탑사 명부전 불상을 제작할 때에는 맨 끝에 언급되었지만, 1680년에 전남 화순 영봉사 목조지장보살좌상과 시왕상(광주 덕림사 소장), 1684년에 전남 강진 정수사 나한전 목조석가불좌상과 16나한상(강진 옥련사 본존, 정수사 나한상), 1685년에 전남 고흥 능가사 응진전 불상을 수화승 색난이 제작할 때 부화승으로 참여한 스님으로 17세기 후반을 대표하는 조각승 가운데 하나이다.

따라서 초안 스님의 계보는 인균(-1615-1655-), 응원(-1600-1636-) →삼인(-1628-1659-)→초안(-1654-1659-) 등으로 이어진다. 또한 삼인 스님과 초안 스님의 활동 시기가 시기적인 차이가 있어 선후배보다 사제지간(師弟之間)일 가능성이 높다. 조각승 초안이 불상을 만든 지역은 전남 1곳, 강원 1곳 밖에 없어 거주 지역이나 사찰을 정확하게 단정할 수 없다. 조각승 초안은 임진왜란 이후에 태어나 1654년에 수화승으로 강원 금강산 화엄사 안양암 목조지장보살좌상(속초 보광사 봉안)을 단독으로 조성하여 최소한 30대 이상으로 추정되고, 1659년 수화승 삼인과 전남 고흥 금탑사 목조지장보살삼존상과 목조시왕상 등을 만들 때 9명 가운데 3번째 언급되어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할 연배였을 것이다. 이 불사를 진행할 때 부화승으로 참여한 묘관은 무염, 해심과 공동으로 작업을 한 조각승이지만, 아직까지 수화승으로 제작한 기년명 불상이 발견되지 않았다.

속초 보광사 목조지장보살좌상에서 나온 발원문

초안 스님이 만든 대표적인 불상은 강원도 속초시 위치한 보광사 주지실에 봉안된 지장보살좌상이다. 보광사는 1938년 1월 19일에 정화담(鄭華潭) 스님이 건봉사(乾鳳寺) 속초포교당(束草布敎堂)으로 창건하였다.
목조지장보살좌상은 하나의 나무로 만들어진 일목식(一木式) 불상으로, 높이가 46㎝, 무릎 너비가 30.5㎝로, 높이와 폭이 1:0.6의 신체비례를 가져 17세기 중반에 제작된 기년명 보살상에 비하여 옆으로 퍼진 느낌이 든다. 지장보살상은 민머리의 성문비구형(聲聞比丘形)으로, 머리를 약간 앞으로 내밀고 있다. 엄지와 중지를 맞댄 커다란 손은 불신(佛身)과 따로 만들어 끼우는 구조이다. 이러한 수인(手印)은 조선후기 제작된 석가불(釋迦佛)을 제외한 여래상과 보살상이 공통으로 취하고 있다.

목조지장보살좌상은 방형의 얼굴에 눈 꼬리가 약간 위로 올라갔고, 코는 원통형으로 짧으며, 인중이 다른 불상에 비하여 넓은 편이다. 몸에 걸친 대의는 변형편단우견(變形偏袒右肩)으로, 두꺼운 대의 안쪽에 편삼(扁衫)을 입었다. 오른쪽 어깨에는 한 가닥의 대의자락을 비스듬히 걸치고, 팔꿈치와 배를 지나 왼쪽 어깨로 넘어가며, 왼쪽 어깨의 대의자락은 수직으로 내려와 반대쪽 대의자락과 겹쳐져 있다. 하반신을 덮은 옷자락이 완만하게 흘러내린 표현은 17세기 중반부터 나타나는 대의처리이다. 대의 안쪽에 가슴을 가린 승각기(僧脚崎)는 수평으로 묶어 상단에 연판형의 주름이 접혀있다. 보살상 뒷면에는 대의(大衣) 자락이 목에 둘러있고, 왼쪽 어깨에 앞에서 넘어온 대의자락이 길게 늘어져 있다.

지장보살상에서 발견된 발원문은 한 장의 백지(白紙)에 조성과 중수·개금에 관련된 내용이 묵서(墨書)로 쓰여 있다. 조성발원문은 크기가 89㎝×44㎝로, 전반부에 지장보살을 조성한 내용이, 후반부에 지장보살이 조성된 후 80년이 지나 중수한 내용이다. 전반부에 지장보살의 조성 시기는 “갑오팔월이십구일(甲午八月二十九日)”로 간지와 일월만 언급되어 있다. 그러나 후반부에 “갑오년팔월신조지장존상이금경팔십여년지간(甲午年八月新造地藏尊像而今經八十餘年之間)”이라는 문구를 통하여 조성된 지 80년이 지난 “건륭오년경신(乾隆五年庚申)”인 1740년에 중수되었다면 역으로 환산하여 조성된 갑오년은 1654년에 해당한다. 이 지장보살이 봉안되었던 강원도 금강산 안양암은 「금강산화엄사안양암중건기(金剛山華嚴寺安養庵重建記)」와 「화엄사안양암중수기(華嚴寺安養庵重修記)」를 통하여 구체적인 접근이 가능하다. 안양암은 인조가 즉위한 1623년에 광명등휘 스님이 창건한 후, 해성후정(海城厚鼎) 스님이 중수하였으며, 1860년에 천재지변으로 파괴된 것을 춘담법함(春潭法咸) 스님이 중창하였다.

불상 제작을 발원한 한씨는 죽은 남편인 숭록대부(崇祿大夫, 조선시대 종일품 상 문무관의 품계에 해당하는 관직)인 라업(羅業)의 극락왕생을 축원하였다. 그의 부인이 1654년에 지장보살상 제작을 발원한 것을 보면 1651년에서 1654년 사이에 사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증명(證明)으로 참여한 등휘(謄輝) 스님는 광명당(廣明堂)으로, 「금강산화엄사안양암중건기」와 「화엄사안양암중수기」에 화엄사를 창건하였다고 적혀있다. 하지만 화엄사 사적에는 광명승휘(廣明勝輝) 스님으로 나와 있으나, 지장보살에서 발견된 조성발원문을 통하여 등휘가 올바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목조지장보살좌상>은 조각승 초안이 단독으로 제작하였다. 이는 다른 사찰의 명부전 존상이 30여 점이 되는 것에 비하여 암자에 단독으로 봉안하였기 때문에 소형보살상이라 단독으로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 불상은 80년이 지난 1740년에 초흠(楚欽) 스님과 풍택(豊擇) 스님이 중수·개금하였다. 수화승으로 참여한 초흠은 1739년에 서울 학림사 괘불도 조성을 주도한 불화승이다.

조각승 초안이 만든 보광사 목조지장보살좌상과 얼굴의 인상과 대의 처리가 동일한 작품은 전남 장성 백양사에 봉안된 목조지장보살좌상으로, 초안이나 그 계보의 조각승에 의하여 1650년대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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