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광서 종교자유정책연구원 대표

참불선원 인문학강좌불교, 미래 사회 종교인가?

전 세계가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로 물들며 셀 수 없이 많은 종교가 공존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대한민국은 종교의 각축장이자 급변하는 종교지형의 대표다. 앞으로의 화두는 어떻게 살아남고, 사회를 이끌어 갈 것인가이다. 오래 전, 천재과학자 아인슈타인은 이렇게 말했다. “미래 종교는 우주적 종교가 돼야 한다.” 우주적 종교의 가치를 잘 담고 있는 불교는 어떻게 나아가야 할까? 박광서 종교자유정책연구원 대표는 1010일 서울 참불선원 인문학강좌에서 불자들은 가진 것을 사회에 환원하고, 교단은 재정투명화에 힘 쏟으며 인재를 양성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리=윤호섭 기자

▲ 박광서 대표는… 1949년 태어나 경기고, 서울대 물리학과를 거쳐 미국 Brown Univ. 물리학과서 박사학위를 받고 미국 MIT 화학과 연구원을 역임했다. 이후 서강대 자연과학대 물리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한국교수불자연합회 이사, (사)우리는선우 이사장, (사)생명나눔실천본부 이사, 고속철도 경주도심통과 백지화 위원회 위원, 참여불교재가연대 상임대표, 달라이라마 방한준비위원회 상임집행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만해상(선우단체상), 제16회 불이상, 홍법대상, 제1회 대원상 등을 수상했으며, 현재 서강대 명예교수와 종교자유정책연구원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종교 각축장대한민국
무분별한 종교과잉으로
종교 대한 염세 확대돼
종교계, 공공성 중시해야

오늘 강의 주제가 불교, 미래 사회의 종교인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 우리 사회는 어떻고, 그 안의 종교지형에 무슨 변화가 있는지 알아본 뒤 불교가 나아갈 방향에 대해 얘기하겠습니다.

본격적인 내용에 앞서 불교는 여러분에게 무엇인가요? 불자들이 부처님 가르침을 접하고, 불교를 신앙하게 된 데는 다 이유가 있을 겁니다. 저는 불교를 신앙하면서 욕심과 두려움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그건 잘못된 신행이라고 봅니다. 그렇기에 내가 살아가면서 욕심과 두려움을 없애는 데 불교가 힘이 되지 않는다면 과감하게 버려야 한다고 말합니다.

어느 날 원효 전기를 읽다보니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스님이 산중에 들어가 해가 질 무렵 땀을 닦고, 바위에 걸터앉아 쉬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귀신과 도깨비가 나와 스님을 희롱했습니다. 독자라면 누구나 원효 스님은 신통력이 있으니 잘 물리치겠지라고 생각할 겁니다. 저 또한 그랬고요. 그런데 귀신과 도깨비를 대하는 방식이 놀랍습니다. 죽이거나 물리치지 않고 그들의 모습처럼 함께 춤추고 낄낄거립니다. 당시 저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죠. ‘선도 있고 악도 있을 텐데 저럴 수 있나싶었으니까요. 그때가 1960년대였으니 남북대치 등으로 인해 이분법에 절어 생활했기에 더욱 심했습니다. 이때부터 불교에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그리고 욕심 없는 것은 비렁뱅이로 살라는 게 아닙니다. ‘라는 존재가 없기 때문에 두려울 게 없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욕심과 두려움 없는 건 당연히 따라올 일입니다. 어떤가요. 여러분 주위 도반은 그런가요? 또 불교지도자들은 어떤가요. 한번 자문해보세요.

지금 우리나라 현실은
그렇다면 우리 사회에서 불교는 건강할까요? 이대로도 좋다고 할 수 있을까요? 먼저 우리나라가 처한 현실부터 돌아봅시다.

우리나라는 경제적으로 세계 10위쯤 됩니다. 그런데 웰빙지수는 201375위에서 201542단계나 추락해 117위를 했습니다. 145개국 중에 말이죠. 자살률은 10여 년간 부동의 1위입니다. 어느 나라에 무슨 사태가 생겨 일시적으로 1위하는 일을 제외하고는 말이죠. 참 부끄러운 현실입니다. 정치인 책임이 크다고 탓할 수 있을 겁니다. 살만한 세상을 만들지 못했다고 말이죠. 하지만 이건 결국 불자들의 잘못이고, 우리 국민들의 잘못입니다.

이 같은 문제의 원인 중 하나는 양극화입니다. 1990년 월소득 상위 10%가구와 하위 10%가구의 차이는 8.5배였습니다. 하지만 2014년에는 11.9배로 그 차이가 더 벌어졌습니다. 게다가 우리나라 임금 불평등은 세계 4번째죠.

제가 1970년대 대학 졸업하고 서울 구로동에 있는 회사에 취직했을 때 35천원인가 받았습니다. 당시 적지 않은 임금이었는데요. 대기업들과도 큰 차이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요즘은 다들 대기업에 취직하려고 하죠. 출발선 자체가 다르니까요. 그래서 아예 작은 회사는 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다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에 휘말리며 우리나라는 승자독식 사회가 됩니다. 옛날엔 상위 20%와 하위 80%라고 말했지만 요즘은 상위 1%, 하위 99%라고 하죠. 세계적으로도 우리나라는 양극화의 선두주자입니다.

부패지수 역시 34개국 중 27위입니다. 관피아, 낙하산 인사, 전관예우, 금융 및 군납비리 등 수많은 부패 속에 살아갑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꿈꾸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입니다. 공공성이 높고, 신뢰할 수 있는 사회 말이죠. 공공성은 공익성, 공정성, 공개성, 시민성으로 이뤄집니다. 정상적인 사회는 부정부패가 드러나 해결돼야 하는데 우리나라는 높이 올라갈수록 더 잘 숨기게 됩니다.

세계적으로 종교가 점점 약해지고 있습니다. 탈종교 현상이죠. 사람들이 예전처럼 종교에 매달려 살지 않습니다. 해야 할 일이 굉장히 많거든요. 그러다보니 종교가 자본주의적 경영을 하기 시작합니다. 공동선 실현보다는 권력화에 무게를 두게 됩니다. 타종교의 이익을 빼앗아오거나 세속권력과 합작해 권력을 유지하려 합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을 멀리하면서 정치가 잘 되도록 나서주는 것이 종교의 역할입니다.

우리나라는 국민 절반 정도가 종교인이라고 하는데 증가세는 주춤한 상황입니다. 눈에 띄는 점은 단일문화권을 형성하고 있는 작은 나라임에도 전혀 다른 전통의 여러 종교들이 균형 있게 공존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종교의 각축장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그런데 유혈 수준의 종교분쟁이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불교의 관용성입니다. 불교가 조선 500년 동안 핍박을 받아서 그런지 웬만해서는 핍박으로 안 봅니다. 근데 꼭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사회적으로 민감해야 사회문제를 다룰 수 있는데 불이익을 받아도 넘어가는 일이 많습니다. 불교도 불교만의 목소리는 확실하게 있어야 합니다. 아무튼 관용성이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니지만 덕분에 종교 간의 심각한 싸움은 아직까지 없었습니다.

그런데 교회를 다니든 성당을 다니든, 아니면 천도교를 믿든 겉으로는 다 이름이 있지만 한 꺼풀 벗겨내면 전부 무속신앙과 다를 바 없습니다. 기복에 기대 점집에 가거나 부처님한테 빌어서 안 된다고 다른 종교를 찾아가기도 하죠. 또한 종교싸움 이전에 우리 사회에 갈등 구조가 중층이기에 종교갈등은 크게 부각되지 않는 면도 있습니다. 남녀·남북·빈부·세대·지역갈등 등 아주 다양하게 나타나죠.

우주적 종교, 불교
인류사회는 과거 산업·인간에서 정보·생명중심으로 변했고, 이제는 감성·공감의 가치를 중요시합니다. 이는 즉 다원화, 생태공동체, 공존·공생, 네트워크, 탈경쟁, 탈물질 등을 포함하죠. 그래서 저는 미래사회에 부합하는 종교가 바로 불교라고 주장합니다.

동도서기(東道西器)라는 말이 있죠. 저는 동쪽의 를 불교로 표현합니다. ‘서양의 과학문명에 불교를 담는다는 뜻이 되겠죠.

인류문명은 채집을 하다 농경사회로, 그리고 산업사회를 거쳐 정보사회로 변했습니다. 아놀드 토인비는 20세기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동양의 불교가 서양으로 건너온 일을 꼽았습니다. 스티브 잡스와 조지 루카스 등 영향력 있는 인물들이 불교에 관심을 가졌고, 미국을 비롯한 서양에서 불교의 위상은 많이 높아졌습니다.

아르헨티나의 소설가이자 시인인 보르헤스는 불교를 알지 못한 채 불이(佛二) 세계관을 확립해 주장했는데 나중에 그가 찾아보니 그것이 불교 가르침이었습니다. 철학자 에리히 프롬은 () 은 내가 알고 있는 한에서 가장 세련된 반이데올로기적이고 이성적인 체계라고 말했고, 프랑수아 슈네는 불교는 동서융합으로 생성될 세계 문명의 필수요소다. 불교에 주목해야 한다고 언급했습니다.

과학자인 아인슈타인이나 보어 역시 마찬가집니다. 아인슈타인은 미래 종교는 우주적 종교가 돼야 한다. 만약 누군가 나에게 현대의 과학적 요구에 상응하는 종교를 꼽으라고 한다면 그것은 불교라고 말하고 싶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이들이 물리학을 계속 파고 들어가면서 연기적 세계를 알게 됐기 때문입니다. 우주에 절대적인 하나라는 게 없다는 것을 말이죠. 반면 개신교에서는 있다고 믿습니다.

과학자들은 주체와 객체, 내적 세계와 외적 세계, 몸과 영혼 등으로 분리하는 건 무의미하다고 합니다. 상대성, 양자론을 발견한 과학자들은 불교와의 유사성에 주목했습니다.

과학과 불교는 닮은 점이 많습니다. 첫째, 자연세계와 인간문제를 통합적으로 관찰하고 존재방식과 상호작용에 관심을 갖습니다. 둘째, 권위에 주눅 들지 않고 직접 보고 확인하며, 모든 것을 철저하게 의심합니다. 셋째, 다양한 현상으로부터 설득력 있는 결론에 이르는 귀납적 방법을 택합니다. 넷째, 자비를 떠나지 않는 한, 어떤 방법도 가능하고 합리적 결과는 어떤 도그마(dogma)로도 배척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불교는 생태·포용·평화의 종교입니다. 부처는 빛과 그림자, ()과 단(), 흑과 백 같은 것들이 서로 다르고 구분돼야 한다는 것은 잘못된 생각에서 비롯된다고 했습니다. 서로 독립된 것이 아닌, 같은 것의 다른 모습일 뿐이라고 말이죠. 현실세계를 본연의 모습으로 표현한 것이 아니라 관계를 말한 겁니다. 모두 주인공이라는 얘깁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를 우주적 종교라고 합니다.

하지만 현재 세계는 사회통합 없이 선진국이 되긴 어렵습니다. 특히 우리나라는 배타성과 적개심이 개인적 인내 수준을 넘어섰고, 종교과잉을 서슴지 않습니다. 때문에 종교 혐오증이 확산되고 있습니다. 대광고 강의석 사건을 비롯한 학내 종교강요와 공인들의 종교이념 표출 등 사람들은 종교에 대해 염세적으로 변해갑니다.

이런 때일수록 불자들이 진정한 불자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무엇이 불자의 삶일까요? 짧게 설명하면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입니다. 위로는 지혜를 구하고, 아래로는 자비를 실천하는 것. 또한 머문 바 없이 마음을 내는 것. 이것이 불자들이 살아야 하는 삶입니다. 만해 스님도 불교와 사회를 넘나드는 삶을 강조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맑고 따뜻한 사회를 위해서 사회참여 의식과 행동이 몸에 밴 불교지도자를 양성하는 것과 새로운 기부문화를 정착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버는 것의 어느 정도를 기부하십니까? 불교에 기부하라는 게 아닙니다. 사회를 위해 가진 것을 환원하자는 겁니다. 이에 맞춰 교단 역시 재정투명화에 힘쓰고 인재를 양성해 사회로부터 신뢰를 높이고, 공공성 향상에 일익을 담당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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