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선종사찰 순례- ② 소림사下

소림사 소실산 발우봉 능선에 자리한 이조암의 입구. 최근 복원이 새롭게 이뤄졌다. 이곳에서 중국 선종 2조 혜가는 달마에 이어받은 선법을 펼쳤다.
굳이 불자가 아니더라도 소림사를 모르는 사람은 현대사회에 없다. 아마 한국인에게도 가장 유명한 중국 사찰을 묻는다면 주저없이 ‘소림사’를 말할 것이다. 이유는 명확하다.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소림사만의 ‘무술’ 때문이다. 소림사 입구에도 강인한 인상의 포권을 한 무승(武僧) 동상이 커다랗게 자리하고 있다. 소림 무술을 배우기 위해 중국인은 물론 전 세계에서 수련생들이 몰려들고 있고, 소림사 주변에만 무술학교 40곳이 성업 중이다. 사설 학원은 수를 헤아릴 수 없다.

495년 공사 시작돼 소림사 창건
서역승 불타 주석하며 불법 전해

달마·혜가 머물며 선종 역사 열어
260여 탑이 숲을 이룬 ‘탑림’ 장관 

수행 일환으로 파생된 무술 유명
이제는 ‘사찰 비즈니스’에 활용돼
중뤼그룹과 합작 ‘주식회사’ 변모
관광상품 개발로 세속화 진행


이조암 가는 길은 최근 케이블카가 설치돼 쉽게 이동 가능하다.
선종 역사 담아낸 法의 전당들
불교의 순례자에게는 이렇게 관광화된 소림사보다는 달마대사 9년 면벽굴과 초조암·이조암·탑림·입설정 등이 더욱 눈에 들어왔다. 중국 선종의 근원이 된 수행처를 만날 수 있던 것은 소림사 순례에서 가장 큰 위안이었다.

중국 선종 2조 혜가(慧可, 487~593) 스님은 초조 달마에게서 법을 이은 제자다. 그가 주석한 곳은 스승의 면벽 수행굴, 초조암과 맞은 편 봉우리에 있다. 이조암은 소림사에서 도보로 2시간 걸리는 발우봉의 능선에 있다. 지금은 케이블카를 타고 15분 정도면 도착할 수 있다. 현재 이조암은 복원이 마무리돼 가고 있는 중이다.

혜가가 달마의 선법을 전수받게 되는 이야기는 정말 드라마틱하다. 혜가는 본래 신광(神光)이라는 법명을 가진 수행자였고, 일설에는 불교뿐만 아니라 도교와 유교의 모든 경전에 능했다고 한다. 하지만, ‘마음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해 방황했다.

달마 스님의 명성을 듣게 된 혜가는 법을 얻기 위해 그를 찾았다. 때는 눈이 오던 겨울, 달마에게 전법을 청한 혜가는 서서 움직이지 않고 허락을 기다렸다. 한참 후 달마 스님은 “정법을 구하기 위해서는 신명을 내던지는 각오가 있어야만 한다”고 했다.

소림사 입설정에 있는 달마 스님과 제자들의 상(像).
그러자 혜가 스님은 자신의 한쪽 팔을 끊어 눈 위에 던지고 다시 법을 구했다. “제 마음이 아직 편안하지 못합니다. 제발 이 마음을 안심시켜 주십시오.”

달마 스님은 다시 입을 열었다. “그 마음을 내게 가져와라. 너의 마음을 안심케 하리라.”  여기에서 혜가 스님은 달마 스님의 안심법문을 듣고 안심을 얻게 된다.

이후 법을 전수받은 혜가는 북조시대 무제의 불교 탄압에 맞서 이조암에서 법을 펼쳤고, 3조 승찬에게 법을 전해 법맥을 잇게 했다.

달마와 혜가 스님의 만남을 기리는 곳은 소림사 본찰 안에 있다. ‘입설정(立雪亭)’이라고 명명된 이곳은 달마 스님을 중심으로 혜가, 승찬, 도신, 홍인 등 4명의 조사 입상이 양 옆으로 봉안돼 있다. 청나라 강희제의 작품이라는 ‘설인심주(雪印心珠)’ 편액도 눈길을 끈다. ‘눈 속에 새긴 마음 구슬’이라는 편액에서 자신의 팔을 끊어내서라도 법을 구했던 혜가 스님의 구도심을 상찬했던 강희제의 불심이 느껴진다.

중국 건축사상 가장 위대한 프로젝트 중 하나라 할 수 있는 탑림(塔林)도 소림사를 대표하는 유적들이다. 소림사 개산이후 시대별로 다양한 형태의 탑들이 246개가 조성돼 있다. 달마의 법을 이어낸 고승들의 탑은 선종의 효시가 되는 곳이 소림사임을 말해주고 있다. 
 
소림사 본찰의 입구. 최근 공격적인 마케팅으로 1년에 700만 명의 국내외 관광객들이 찾아간다.
중원 武學은 소림서 나왔다
소림사는 불타선사(佛陀禪師)라는 서역 승려가 북위의 효문제의 명으로 495년 공사를 시작하며 창건됐다. 소림사라는 사명(寺名)은 숭산 소실봉(少室峰)의 숲(林)에 자리잡았다고 해서 붙여졌다. 창건 직후 소림사는 인도의 불경을 중국어로 번역하는 역경처 역할을 했다.

원래 사찰의 구조는 단순했다고 한다. 하지만 왕조가 바뀔 때마다 더욱 웅대해졌다. 현재 구조는 주로 명·청대의 것이 대부분이다.

지금은 패방(牌坊, 일종의 중국 사찰 일주문)인근 주차장에서 내려 소림사 본찰까지 가려면 별도의 버스를 타고 10분가량 들어가야 한다. 본래의 소림사는 증축이 수차례 이뤄졌지만, 사격이 잘 보존돼 있다. 종루·고루·본전·승방·대웅전·장경각 등이 전 세계에서 온 참배객들을 맞이한다. 특히 정교한 벽화로 장엄된 천불전은 눈여겨 볼만 하다.

그렇다면 선종 사찰인 소림사는 왜 무술로 유명해졌을까.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소림사를 창건한 불타선사는 참선을 보완하는 방법으로 무술을 도입했고, 이것이 소림 특유의 무술로 발전했다.

이후 무술을 익힌 소림 무승들은 역사적으로 활약하기도 한다. 수나라 문제 시절 극성을 부리던 도적떼를 소림사 무승들이 제압하고, 당나라 초기에는 13명의 무승이 태종 이세민을 도와 수나라 복건 세력인 왕세충을 토벌했다.

전설 같은 이야기도 전해진다. 원나라 말기 홍건적이 소림사에 침입했는데, 공양주 소임을 보던 무승이 오로지 곤(棍) 하나로 제압했다. 그는 스스로를 ‘긴나라왕(緊那羅王)’이라고 칭했다고 한다. 긴나라왕의 곤법은 제자 편둔에게 전해지고 편둔은 묘족 땅으로 가서 곤경에 처한 묘족들을 구하고 영웅으로 추앙받았다.

또한 명나라 시기의 각운이라는 무승은 나한 18수를 응용해 유명한 ‘소림 72절예’를 완성했고, 제자인 일관은 금나술(擒拿術, 일종의 관절기)과 소림 검술의 대가로 중원에 이름을 알렸다.

이런 역사로 ‘중국공부경천하(中國功夫驚天下) 천하공부출소림(天下功夫出少林)’이라는 말까지 나오게 된다. 이는 ‘중국의 무술은 천하를 놀라게 하고, 천하의 무술은 모두 소림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참선과 함께 무술을 익히도록 한 불타선사는 후대 수행자들의 몸과 마음이 바로 서길 바랐을 것이다. 몸이 바르지 않으면 바른 정신을 유지하기 힘들고, 정신이 바르지 않으면 몸의 행실이 통제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소림사 입구의 무승 동상. 소림사는 중국 무학의 상징이기도 하다.
禪·武 본향인가 테마파크인가
입구부터 강인한 무승의 동상이 서 있는 소림사는 최근에는 공격적인 쿵푸 마케팅으로 덩치를 키워가고 있다. 근자 소림사를 향해 ‘염불보다 잿밥’이라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이기도 하다. 1년에 약 700만 명의 국내외 관광객들이 다녀가며, 주위에 성행하고 있는 무술학교 수련생도 2만 명이 넘는다. 입구에는 병장기들을 파는 가게들이 즐비하고, 시간에 잘 맞추면 무승들의 무술 시연을 관람할 수 있다. 본찰을 제외하고 나면 나머지는 관광 지역이라고 보는 게 타당하다.

소림사의 이런 변화는 현 주지인 스융신 방장의 아이디어다. 그는 경영학 석사(MBA) 출신이기도 하다. 스융신 방장은 홍콩 중뤼그룹·덩평시와 합작해 ‘강중뤼숭산소림문화관광유한회사’를 설립했다. 쉽게 말하면, 소림사가 ‘주식회사’를 소유하게 된 것이다.

‘강중뤼’는 관광객을 모집하고 소림사의 각종 수익 사업을 진행하며 벌어들인 수익금 중 30%는 소림사에 환원된다. 소림사는 30%의 수익금과 시정부의 지원금 등을 문화유산 보호와 대외교류, 승려생활 등 사찰 운영의 기본 재원으로 사용한다. 승려와 일부 인원을 제외한 소림사 내 1300명의 인력은 모두 강중뤼 직원이다. 문제는 전체 수익금은 공개되지 않아 얼마만큼의 재원이 어떻게 사용되는지는 알 수가 없다는 점이다.

또한 최근에는 수익금을 두고 소림사와 ‘강중뤼’ 사이에 마찰도 있었다. 동행한 현지 가이드는 “소림사 승려들이 수익금이 환원되지 않자 시와 홍콩그룹을 상대로 파업을 진행하기도 했다”고 귀띔했다.

어쩌면 중국 소림사는 자본주의 시대 상업화된 종교의 단면을 그대로 보여준다. 한국의 대형교회가 영성 비즈니스로 재물을 취한다면, 중국 소림사는 자신들의 역사와 전통을 상품화해 마케팅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전통과 현대의 갈림길에 서 있는 소림사의 단면 같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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