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흥국(58ㆍ대한가수협회 회장)

1959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1978년 서라벌고등학교를 졸업하고 2004년 한국방송통신대 행정학과를 졸업했다. 1997년 동국대 문화예술대학원 문화산업관리자과정을 수료했다. 1989년 ‘호랑나비’ 발표 후 ‘내게 사랑이 오면’ ‘레게 파티’ ‘성공시대’ ‘무정’ ‘불타는 사랑’ ‘친구’ ‘으아!’ ‘사나이 가는 길’ ‘앗싸 월드컵’ ‘형광나방 한 마리가’ ‘불타는 금요일’ 등의 앨범을 발표했다. 1989년 MBC 10대 가수상, KBS 가요대상 올해의 가수상, 골든디스크 인기가수상 등을 수상했다. 사진=박재완 작가
“아! 응애에요” “으아” “들이대” 오래 전, 한 시대를 풍미한 이 유행어의 주인은 개그맨이나 배우가 아닌 가수다. 세월이 흐른 요즘 사람들은 그를 ‘흥궈신’ ‘예능 치트키’로 부른다. 예능 프로그램 곳곳에서 그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니, 만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웃음 코드로 대한민국을 웃게 하는 그는 ‘호랑나비’의 김흥국이다. 하지만 그가 많은 사람들의 입가에 웃음을 짓게 하는 것은 방송만이 아니다. 그는 오래 전부터 장학재단을 설립해 어려운 아이들을 돕는 등 말없이 많은 이타행을 해오고 있다. 그가 선사하는 진정한 웃음은 바로 그것일지도 모르겠다. 늘 누군가에게 웃음을 선사하며 살아가는 호랑나비 김흥국이 날아온 길을 따라가 본다.

제2의 전성기, 김흥국에서 흥궈신으로
“호랑나비 한 마리가~ ♬ … 호랑나비야 날아봐~ ♬”

1989년, 한국가요사에 전무후무한 곡이 등장한다. 그 노래는 대한민국을 휩쓸었다. 김흥국의 ‘호랑나비’이다. 노래도 가수도 다른 별에서 왔다. 한 마디로 무지하게 웃겼다. 노래도 웃겼고, 가수는 더 웃겼다. 그런 노래가 없었고 그런 춤이 없었다. 가사엔 호랑나비만 나온다. 그리고 콧수염을 기른 가수(김흥국)가 넘어질 듯 비틀거리며 아슬아슬하게 춤을 춘다. 대한민국은 노래 하나로 매일 웃었다. ‘호랑나비’는 그해 10월 KBS 가요톱10에서 1위에 올랐고 MBC 10대 가수상도 받았다.

‘호랑나비’는 국민가요가 됐고, 김흥국은 국민가수가 됐다. ‘호랑나비’의 히트로 가수 김흥국은 음악프로그램 외에도 많은 프로그램에 출연하게 되는데, 김흥국이 나오면 무조건 웃겼다. 독특한 억양과 어법, 익살스러운 표정, 어설프지만 준비된 것과는 다른 ‘김흥국’표 웃음에 사람들은 끌렸다. 노래로 시작된 웃음이 입담으로 이어진 것이다. 노래하는 가수가 사람들을 웃겼다.

30년이 다 되어가는 이야기이다. 웬만하면 잊혔어야 맞을 것이다. 하지만 김흥국의 이야기는 그렇지 않다. 어느 순간 또 다시 그 옛날 그때처럼 우리의 일상 속에는 그 옛날의 김흥국이 들어와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방송의 웬만한 예능 프로그램엔 그가 빠지지 않고 나오고 있다. 아니, 중심에 서있다. 그리고 30년의 세월을 무색하게 하며 제2의 전성기를 맞고 있다. 개그맨, 아이돌, 배우 등 시대의 초점이라고 할 수 있는 모든 이들 사이에 늘 그가 함께 있다. 육십을 바라보는 그가 이제는 흥궈신(중국어에서 ‘국’을 ‘궈’로 발음하는 것에서 착안한 ‘흥궈’와 ‘신(神)’의 합성어), ‘예능 치트키(컴퓨터 게임을 쉽게 풀기 위한 프로그램)’로 불리며 또 한 번 대한민국을 웃기고 있다.

이렇게 제2의 전성기를 누리며 30년 동안 사람들에게 웃음을 선사하고 있다면 그 삶의 키워드는 다름 아닌 ‘웃음’일 것이다. 하지만 ‘웃음’의 삶을 살고 있는 가수 김흥국의 삶에 웃음만 있는 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웃음을 선사하면서 살고 있지만 그렇게 남을 웃기기까지 그는 오랜 세월 동안 웃지 못했다. 힘들었던 유년 시절과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던 긴 무명의 세월이 있었다.

사진=박재완 작가
길었던 무명 세월
‘호랑나비’로 하루아침에 스타가 된 김흥국이지만 그 시절을 맞기까지 그에겐 힘든 세월이 있었다. 그는 1959년 서울 번동에서 육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 농사를 짓던 그의 아버지는 그가 초등학교 6학년 때 세상을 달리했다. 어머니 혼자서 육남매를 키워야 했다. 집안은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소년 김흥국은 축구부가 있는 학교로 전학을 할 만큼 축구를 좋아했다. 축구부 한 달 회비가 6천 원. 김흥국은 축구를 계속할 수 없었다.

“홀로 서야했죠. 다른 형제들과 어머니를 위해서도 그랬고, 저 자신을 위해서도 어쩔 수 없었죠. 그 길로 집을 나와 안 해 본 것 없이 여러 일을 했어요.”

소년 김흥국은 서라벌중학교와 서라벌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축구 대신 밴드부에 들어 음악을 시작한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해병대에 입대했고, 해병대를 제대한 후 부대에서 알게 된 동료들과 함께 ‘오대장성’이라는 밴드를 결성한다. 그는 밴드에서 드럼을 쳤고 나중엔 노래도 불렀다. 하지만 밴드 생활 역시 쉬운 일이 아니었다. 쉽지 않은 세계였다. 그는 밴드 생활을 접고 1985년 ‘창백한 꽃잎’이 담긴 앨범을 발표하면서 솔로로 데뷔한다. 하지만 그 역시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처음으로 대중의 관심을 받게 된 것은 1988년 MBC 다큐멘터리 ‘인간시대-정아의 겨울일기’의 주인공으로 나서게 되면서부터다. 가족처럼 지내던 선배의 딸 정아(당시 중3년)가 불치의 병으로 투병 중이었다. 김흥국은 정아의 병실을 찾아 정아에게 노래를 불러줬다. 가난한 가수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뿐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전파를 타게 됐고 화제가 된 것이다.

하지만 그것 역시 가수 김흥국을 세상에 각인시키지는 못했다. 그는 얼마 후 듀오 ‘배따라기’의 리더였던 이혜민으로부터 곡을 한 곡 받게 된다. ‘호랑나비’다. 김흥국은 기나긴 무명의 세월을 끝내고 전 국민이 알아보는 스타가 된다.

‘호랑나비’로 크게 날다
1989년 각종 가수상 휩쓸어
노래로 시작된 웃음 입담까지

무명시절부터 나눔행 펼쳐
1988년 선배딸 정아 돕기 나서
MBC다큐 인간시대에 소개돼

예능서 종횡무진 활약
삶의 키워드는 ‘긍정’

무주상보시…김흥국장학재단 설립
여기저기서 김흥국을 찾았다. 모든 것이 달라졌다. 춥고 배고팠던 시절의 김흥국이 아니었다. 하지만 김흥국은 굳이 간직하지 않아도 되는 어려웠던 시절의 기억을 버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 어려웠던 시절의 기억을 거울로 삼았다.

“제가 형편이 조금 나아지니까 나보다 어려운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하더라고요. 축구를 접어야 했던 어린 시절이 생각났어요. 분명 지금도 어딘가에는 나와 같은 아이들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느 날, 낙산사 홍련암에서 예불을 모시고 나서 발심했죠. 힘든 유년을 보내는 아이들에게 작은 도움이라도 주어야겠다고.”

2000년 11월 설립한 김흥국 장학재단 주최로 열린 장학금 수여식후 수혜학생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며 웃고있는 김흥국 회장.(사진 윗줄 왼쪽 첫번째)
제2 전성기 호랑나비…“무주상보시, 그것이 ‘극락’”

김흥국장학재단 만들다
올해로 17년째 저소득층 자녀 후원
무주상 이타행 원칙 철저히 지켜
개인이나 회사 등 외부 후원 안받아

김흥국과 불교의 만남
모정불심서 비롯… 항상 손목엔 단주
오늘의 김흥국 있게한 큰힘은 ‘불교’
최근 봉정암 참배후 제2 전성기 맞아

2000년, 그는 김흥국장학재단을 설립한다. 그는 자신이 마련한 기금으로 매년 전국의 초등학생 중에서 학교장 추천을 받은 저소득층 학생 10여 명에게 장학금을 주고 있다. 그리고 교통방송에서 프로그램을 진행하던 2007년에는 ‘교통사고 유자녀 돕기 기금 마련’ 디너쇼를 열어 수익금 500만원 전액을 교통사고 유자녀들에게 기부하기도 했다.

그는 그 밖에도 많은 보시와 독거노인들을 위한 봉사 등 각종 봉사활동에도 참여하고 있으며, 가정결연사업 행사에 동참하고, 뇌성마비 축구단을 후원하고 있으며, 한동안 불자가수회를 이끌기도 했다. 그는 무명시절에도 꾸준히 봉사활동을 해왔다. 형편도 달라졌고 공인이 되었으니 그 때보다 더 많이 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어려웠던 시절부터 남을 돕는 일에 남달랐던 그의 이타행은 ‘무주상’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장학재단을 통해 장학금을 전달한 학생들과도 기념행사 하나 열지 않았다. 오히려 수혜자들이 모임을 청해올 정도다. 하지만 그는 그런 행사를 여는 순간 보시의 진정한 의미를 잃게 된다며 행사를 열지 않았고, 외부의 후원도 받지 않았다.

“어려운 이들을 돕고 그들의 입가에 번지는 엷은 미소를 볼 때, 너무나 즐겁고 행복해요. 그 기분은 해 본 사람만이 알죠. 그게 바로 ‘극락’이에요.”

왜 보시를 하는지 묻자 그는 그렇게 답했다.

‘김흥국’표 웃음 히트
“이승만 어린이가 그랬죠. ‘공산당이 싫어요’”
“붓통에 목화씨 들여온 사람 있죠. 문익환”
“아, 성격 차이였나요? (남편과 사별했다는 라디오 청취자에게)”

김흥국의 웃음에는 묘한 카타르시스가 있다. 실수이든 계산된 것이든 결과적으로 관객은 그의 잘못된 문장으로 인해 웃을 때가 많은데, 그것이 ‘비호감’이거나 ‘모자람’으로 다가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그렇게 이리저리 계산하지 않고 궁리하지 않는다. 그냥 솔직 담백하게 망가진다. 자신이 망가져서 관객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주는 것이다.

또한 럭비공처럼 방향성 없이 튀어나오는 예측불허의 단어가 관객의 웃음보를 건드리는 것이다. 아울러 타고난 익살스러운 표정은 또 하나의 무기이다. 부담 없는 그의 표정은 보는 이를 김흥국의 세계로 끌어들인다. 예능에 있어서는 바야흐로 김흥국의 시대다. 가수가 본업인 그가 이 어렵고 건조한 시대를 웃길 수 있는 힘의 원천은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솔직함과 겸손함이 아닐까. 대부분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기보다는 손질하고 포장하여 내놓는 시대에 가수 김흥국은 이승복을 거침없이 이승만이라고 던지고, 문익점을 문익환이라고 적는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웃어버린다. 김흥국의 웃음은 1 더하기 1이 반드시 2가 아니라고 말하는 듯하다. 그것이 ‘김흥국’표 웃음이 아닐까.

어머니 손잡고 불연 맺어
얼마 전, 그는 SBS ‘판타스틱 듀오’라는 프로그램에서 가수 김건모와 콜라보레이션 무대를 가졌다. 그는 그 무대에서 드럼을 치며 김건모와 함께 ‘59년 왕십리’를 불렀다. 처음 보는 현란한 그의 몸짓에 관객과 시청자들은 모두 놀랐다. 그렇게 현란하게 드럼을 연주하는 그의 손목엔 붉은색 염주가 걸려있었다. 그는 얼마 전부터 그 붉은색 염주를 차고 있다고 했다. 그것은 얼마 전 돌아가신 모친의 당부에서 시작된 염주였다.

그의 어머니는 독실한 불자였다. 그의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얼마 전에 그에게 설악산 봉정암에 꼭 한 번 다녀올 것을 당부하셨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친구들과 얼마 전에 봉정암엘 다녀왔고 지금 손에 걸고 있는 염주는 봉정암에서 온 것이다. 어머니의 마지막 육성이라고 생각하고 늘 손목에 찬다고 했다.

“어려서 어머니 손을 잡고 절에 가곤 했죠. 멋도 모르고 그냥 따라다녔고 어머니가 왜 절에 다니시는지 잘 몰랐어요. 세월이 지나고 나서 알게 됐고, 그 멋도 모르고 다닌 시절이 지금의 저를 있게 한 것 같아요. 어머니 손에 이끌려 절마당을 걷고, 종소리 듣고, 스님이랑 얘기하고, 절밥 먹고, 뭐 그런 것들이 어린 시절의 저를 그렇게 자라게 했고, 훗날 힘든 시절을 견디게 했던 것 같아요. 꼭 경전 독파하고 참선하는 일만이 중한 것은 아닌 것 같아요. 멋모르고 그냥 절에 가서 실컷 앉았다 오는 것도 공부라고 생각해요. 그 시절이 지금의 저를 있게 했으니까요.”

가수 김흥국은 어린 시절 어머니의 손을 잡고 절엘 다녔다. 가수 김흥국이 힘든 유년 시절을 이겨낸 것도, 긴 무명의 세월을 견디고 스타가 된 것도, 제2의 전성기를 맞으며 오랜 세월 동안 사랑을 받고 있는 것도 모두 그 멋모르던 시절의 힘에서 온 것이었다.

“인기는 거품과 같은 것”
그는 2015년 10월 7일 대한가수협회 제5대 회장으로 취임했다. 그는 대한민국 가수들의 권익을 보호하고 복지와 처우 개선을 위해 회장직을 맡았다고 했다.

“지금도 제가 겪었던 것과 같이 무명의 시절을 보내고 있는 후배 가수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또, 이제는 설 자리가 없어 소외된 원로 가수들도 많이 계실 겁니다. 여러 사람이 같은 생각으로 뭉치면 쉬운 일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기는 거품과 같은 것입니다. 언제 사라질지 모릅니다. 인기라는 거품 위에서 살아가는 저와 그들이 좀 더 슬기롭게 살 수 있는 길을 모색하고자 회장직에 임했습니다.”

밝은 웃음과 무주상의 이타행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대이다. 일초의 웃음과 한 사람의 이타행이 이 다급하고 메마른 시대를 건지는 시작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오늘도 웃음이 필요한 이들에게 웃음을 들이대고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이들에게 따뜻한 마음을 들이대는 호랑나비 김흥국의 날개가 지치지 않고 계속 날아오르길 바란다.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