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오 스님(부산 도원사 주지)

사찰 개·보수, 증축 불사보다
환자·청소년 후원이 최우선
시줏돈을 독사 대하듯 해야
천원 한 장의 값어치 안다 

지구촌공생회·굿네이버스 등
9월에만 46천만원 후원
35년 어려운 이웃 돌보며
지역 복밭 일구는 데 앞장

▲ 만오 스님은… 20대 초반 석남사에서 출가했다. 현재 부산 도원사 주지로 나눔 활동을 펼치고 있다. 스님은 35년 간 지역 소년소녀가장 돕는 것을 시작으로 동국대 경주캠퍼스 장학금 후원 및 세계선센터 건립, 지구촌공생회·굿네이버스·엄홍길휴먼재단 기금 전달 등을 통해 어려운 이들을 보살피고 있다.

46천만원. 지난 한 달 동안 단 한 사람을 통해 지구촌 어려운 이웃들에게 전해진 거금이다. 나눔의 주인공은 부산 도원사 주지 만오 스님(79). 자신이 생활하는 데는 최대한 청빈하려 노력하지만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이들에겐 가진 걸 아낌없이 퍼주는 수행자다.

나눔을 실천함에 있어 화두는 인재불사’, 오직 그것만이 답이라는 만오 스님의 가르침을 듣기 위해 지난 930일 부산 엄궁동에 위치한 도원사를 찾았다.

지구촌에 핀 희망의 씨앗
아프리카 케냐 남부 카지아도주에 희망이 일렁였다. 현지인들은 학교 울타리를 짓기 위해 주춧돌을 쌓았다. 그들이 찍은 사진에 보인 학교부지는 거친 황무지일 뿐이었지만 사람들은 바쁘게 움직였고 눈빛은 반짝였다. 그리고 그들은 돈을 모았다고 한다. 학교를 짓기 위해 기부하고 현장에서 직접 봉사하며 기쁨의 손길이 모인 일은 처음이라고 했다. ‘희망은 그들을 스스로 움직이게 했다.

이들이 희망의 첫 삽을 뜨고 가장 먼저 감사의 인사를 올린 대상이 바로 만오 스님이었다. 스님의 나눔이 그들에게 한 줄기 희망이 됐고, 그 희망은 열악한 환경에 처한 사람들의 마음가짐을 바꿔놓았다. 학교 짓는 모습을 사진으로 본 만오 스님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만오중고등학교는 그렇게 탄생했다.

지난 923일 만오 스님은 불교계 국제구호NGO 지구촌공생회에 26천만원을 후원했고, 스님이 전달한 후원금은 아프리카 케냐에 새 삶을 안겨줬다. 이전까지 카지아도주에 만연한 가난은 현지인들에게 단순히 배고픔만을 안겨주진 않았다. 교육 기회도 박탈했으며, 여학생의 경우 조혼을 강요받으며 성폭력에 시달려야 했다.

그래서 만오중고등학교는 먼 거리를 오가기에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는 여학생들을 위해 특별히 기숙사를 짓는다. 만오중고등학교는 단순히 학교를 넘어 새로운 삶을 살게 할 터전이 되고 있다.

만오 스님은 이보다 앞서 921일 굿네이버스에도 2억원을 기탁했다. 아프리카 탄자니아와 말라위 지역 환자와 산모들을 위해서다. 그리고 7월에는 엄홍길휴먼재단과 후원 약정을 체결했다. 네팔에 14번째로 지어질 학교 건립에 동참한 것이다. 앞으로 스님은 학교가 착공되는 12월부터 완공 예정인 20181월까지 35천만원을 매달 나눠 기부할 예정이다.

이처럼 지구촌 곳곳에 희망을 안겨준 만오 스님의 발자취는 최근 언론매체를 통해 화제를 모았다. 그리고 부산 만오사를 찾아 이야기를 듣고자 하는 기자에게 스님은 손사래를 쳤다. 당연한 일이니 크게 할 말이 없다며 조용히 미소 지을 뿐이었다.

▲ 만오 스님이 지구촌공생회에 후원한 기금을 바탕으로 케냐 현지인들이 만오중고교를 짓는 모습.

나눔은 마음으로 하는 것
도원사 법당을 마주했다. 20평 규모인 소담한 대웅전의 단청은 색이 바랬고 문지방은 낡았다. 법당 아래 요사채로 들어가자 무엇 하나 새 것은 눈에 보이지 않았다. 낡은 좌탁을 넓게 펴고 앉아 말을 아끼는 스님에게 넉넉하지 않은 살림으로 어떻게 큰 기부를 할 수 있었는지 묻자 스님이 답했다.

시줏돈을 전달한 거예요. 저는 다리 역할을 했을 뿐이죠. 신도들이 얼마나 어렵게 돈을 버는지 다들 아시잖아요? 아침 일찍 일어나 부지런히 움직이고, 온갖 스트레스 받아가며 힘들게 모아 부처님 전에 정성을 올리는 거예요. 한 푼이라고 해도 함부로 쓰면 안 되죠. 그들이 낸 것을 모아 그들이 복 받을 수 있게 최대한 좋은 곳에 회향하려 하는 것이죠.”

만오 스님은 옆에 앉은 상좌 도원 스님에게 시줏돈 보기를 독사 대하듯 두려워해야 한다고 다시 한 번 강조하고 말을 이었다.

요즘에는 스님들이 절에 들어와서도 호화스럽게 살려고 해요. 그런 삶을 꿈꾸며 출가하는 이들도 있다고 하니 참 슬픈 일이죠. 출가 전에 편하게 살고 아끼지 않았던 그 습관대로 대접받고 지내려 하잖아요. 근데 신도님들이 어떤 마음으로 기도를 부탁하시겠어요. 가족들을 위해, 자식들을 위해 부처님께 소원을 빌어요. 단돈 천원짜리 한 장도 천근만근이 되는 거죠. 정말 무거워서 함부로 다루면 안 된다고 느껴야 합니다.”

만오 스님은 불자들이 낸 보시금을 자신을 위해 허투루 쓰지 않는다고 했다. 옆에서 스님의 얘기에 귀를 기울이던 상좌 도원 스님이 병원에서라도 편히 계셨으면 좋겠는데라고 운을 떼자 만오 스님은 곧바로 말이 많다그런 말은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을 막았다.

조금 더 자세한 얘기를 듣고자 만오 스님에게 부탁했다. 스님은 대단한 것도 아니다며 극구 사양했다. 고집스럽게 거듭 매달리자 스님은 할 수 없다는 듯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만오 스님은 자신을 위해선 최대한 돈을 아끼고 있었다. 신장이 망가져 잦은 병원 입원에도 언제나 6명이 모여 복작거리는 다인실을 택했다. 행주 하나가 찢어지면 깨끗하게 빨아 꿰매 쓸 정도다. 요사채에 자리한 가구와 집기들은 대부분 주변 아파트에서 쓰다 버린 것을 모은 것이다. 신도들이 가져다주는 좋은 물건은 다시 다른 사람들에게 나눠줬다. 좋은 음식도 마찬가지다. 스님은 가끔 절에 일을 도와주러 오는 이들을 위해 물건을 꼭 챙겨두었다가 도와줘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나는 이렇게 좋은 것은 필요 없다며 건넸다.

만오 스님은 시줏돈을 전혀 안 쓴다고 했다. 그리고 나눔을 위해 철저히 모아 회향한다고 했다.

생명나눔실천본부, 어린이재단, 동남아 지역 학생 30명 후원 등 매달 정기적으로 나눔에 사용되는 지출만 어림잡아 130만원이 넘었다. 그리고 동국대 경주캠퍼스에 관음장학회를 설립하고, 부산 해동고와 구덕고등학교 등 곳곳의 학생들을 위한 후원도 잊지 않았다. 지난해 5월에는 동국대 경주캠퍼스에 2억원을 전달했고, 비구니 학인스님들을 위한 수행관 사라림 시공에도 참여했다. 올해 5월에는 동국대 경주캠퍼스 세계선센터 건립을 위해 6억원을 내놓았다. 이뿐만이 아니다. 인도에 동사하는 이들이 많다는 소식을 듣고 스님은 집을 지어주기 위해 후원금을 전달했다. 또한 동국대병원을 찾은 중국인 조선족 노동자가 심장병으로 죽을 위기에 처했다는 소식에 모든 병원비와 수술비를 지원하고 그를 살렸다. 세이브더칠드런과 굿네이버스에도 스님은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후원하지 않는 것은 나눔의 가치를 퇴색시키는 그릇된 시각이라고 지적했다. 스님은 기독교에 후원하는 것이 아니라 어려움을 겪는 이들에게 후원하는 것인데 왜 그리 구분하느냐고 일침을 놓았다. 만오 스님은 굿네이버스에 후원금을 전달하며 아프리카 산모들이 건강한 아기를 낳으며 행복하길 서원했다.

아기 낳을 곳이 없어 땅 위에서 낳는다고 합니다. 2차 감염으로 산모가 죽고 아기들도 목숨을 잃습니다. 예산이 부족해 병원을 짓지 못하고 의료장비조차 구하지 못한다고 들었습니다. 조금만 노력하면 살릴 수 있는 생명이라는데 어디에 돈을 써야겠습니까?”

스님은 매년 있는 절 행사에서 공양미와 보시금 등이 들어오면 크게 기부할 곳과 매달 지출할 기부금을 나눠 통장에 입금한다고 했다. 행사가 없을 때 어려워질 절 형편을 생각하고, 기부처에 후원금이 끊어지지 않도록 계획을 세워두는 것이다.

▲ 스님은 굿네이버스에도 2억 원을 전달했다.

인재 불사가 참된 불사
만오 스님 나눔의 중심에는 오직 사람이 있었다. 낡은 대웅전을 보며 단청불사가 필요하지 않겠냐는 말에 스님은 인재불사가 먼저라고 했다.

대웅전 문지방이 너무 낡았죠? 하지만 신도들이 찾아와 기도하는 데는 전혀 어려움이 없습니다. 그거면 되지 않겠습니까?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은 굶어 죽어가는 사람에게 밥 한 술 넣어주고, 공부하고자 하는 이에게 배움의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단청이 낡고 문지방에 문제가 있어도 지금 우리는 밥 먹을 수 있지 않나요? 불사의 의미를 깊이 생각해봐야 합니다.”

스님은 현재 자신이 교육불사에 뜻을 갖게 된 근원을 어릴 적 어머니에게서 찾았다. 대한민국 독립 후 아주 가난했던 그 당시에도 스님의 어머니는 마을을 찾아다니며 학교에 가지 못하거나 배우지 못하는 아이들이 있으면 굶더라도 아이는 학교에 보내야 한다고 강조했다고 한다.

교육을 강조하신 어머니 영향이 큰 것 같습니다. 당시 학교도 못 가던 아이들이 대부분이었는데 저는 고등학교까지 편하게 다녔어요. 공부에 대한 어머니의 열정 덕분이었죠.”

어머니 가르침 때문이었는지 만오 스님은 출가 후에도 열악한 환경에 처한 아이들을 보면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이곳에 오기 전 제주도에 몇 년 있었는데 그때는 고아원도 별로 없던 시절이었어요. 고아원이 있어도 정부 지원이 없어 열악했죠. 고아원에서 지내는 것보다 절에서 돌보는 게 낫겠다 싶어 아이들을 데리고 살았어요.”

그렇게 스님이 키운 여아만 5명이었다. 아이들을 가르치고 입히고 먹이고 키웠으며, 그 중 한 명은 대학교 진학에 이어 호주로 유학까지 보냈다.

제주도에서 두 명을 먼저 만났고 이곳에 와서 또 세 명을 만났죠. 부모가 키울 형편이 안 되는 아이, 버려진 아이들이었어요. 몸에 진물이 나는 피부병으로 고생하며, 지능이 부족해 16살이 되도록 머리조차 스스로 못 감는 아이도 있었어요. 지금은 다들 성장해 독립하고 자신의 역할을 다해주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한 명은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으로 갑자기 생을 마감해 지금도 제 마음에는 아픔으로 남아있습니다.”

▲ 엄홍길 휴먼재단과의 후원 약정 체결.

열악한 지역은 복 밭
만오 스님이 부산 엄궁동에 온 것은 1981년쯤이다. 어릴 적부터 몸이 약했던 스님은 요양 차 어머니 손에 이끌려 절에 머물렀고 스님들이 전해주던 여러 경전내용과 새벽 염불 소리에 마음을 빼앗겼다.

부처님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믿게 되었어요. 환희 그 자체였습니다. 염불 소리가 정말 아름답고 스님들이 건네준 경전으로 만나는 부처님 말씀은 감동적이었죠.”

그 후 고등학교 졸업 후 스님은 출가를 결심했다.

저는 풍족했어요. 어려움이 없었죠. 그러나 출가 후 부산 엄궁동 산속에 절을 짓고 보니 사는 모습들이 너무나 비참하더군요. 그때 산 아래 600세대 정도 살았는데 그 사람들은 살기 위해 지금의 동래와 대연동까지 매일 10를 걸었습니다. 물건을 팔기 위해서였죠. 마실 물도 먹을거리도 충분하지 않았던 시절이었습니다.”

나눔을 결심하게 된 계기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스님은 당시 어려웠던 부산 엄궁 지역에 대해 설명했다. 어려운 이들이 많은 이곳이 자신에게는 복밭이었다고.

새벽에 도량석을 돌 때였어요. 과거 생으로 이번 생은 그리 힘들지 않았는데 다음 생을 위해 어떤 복을 지었나 하는 생각이 떠올랐어요. 이 깨달음은 인과법을 통해 철저히 저를 되돌아보는 계기가 됐습니다.”

이때부터 스님은 나눔을 실천했다. 지역 통장을 불러 모아 마을에 어려움을 겪는 집이 어디인지 묻고, 소년소녀가장들을 돕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한 나눔은 35년이란 시간이 흘러 오늘에 이르렀다.

마지막으로 만오 스님에게 앞으로의 계획을 물었다. 그러자 스님은 눈을 반짝이며 되물었다.

정말 순수하게 나눔이 필요한 곳이 어딘가요? 알고 있는 데 없어요? 취재 다니면서 많이 보셨을 것 같은데 있으면 알려주세요.”

오직 아프고 힘든 사람들을 찾아 나누는 것, 그것이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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