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네 가지 대상에 대해 주의 깊음의 발휘와 지속을 명상의 내용으로 하는 사념처(四念處)를 살펴보았다. 사념처라는 체계 안에서의 사띠()’대념처경-청정도론의 설명을 지침으로 삼아 주의집중/알아차림을 발휘하고 지속시키는 효과적인 방법으로 계발되어 왔다. 이러한 해석과 실천의 체계는 현재의 남방불교에서도 확고한 지침으로 견고한 위상을 확보하고 있으며, 불교 밖에서도 스트레스 완화 등 갖가지 치유의 방법으로 널리 활용되고 있다. 이는 불교명상의 사띠를 주의집중/알아차림으로 해석하여 확립한 하나의 의미 있는 사용설명서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기존에 관련 서적에서 보듯이 사념처를 유일한 길’ ‘부처님이 직접 수행한 최고의 명상법등으로 자리매김 하려는 태도에만 빠져 있으면 마치 불교의 내용이 사념처의 체계 안에 모조리 갖추어져 있다는 시선에 제한되기 쉽다.

<상윳따니까야> 7710이나 <잡아함> 615 ‘비구니경등의 서술에 보이듯이, 사념처는 선정(禪定)의 방법과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어서 상호보완 구조를 이루고 있는 지점 또한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중아함> 98 ‘염처경(念處經)’을 살펴보면, ‘몸에 대해 주의 깊음의 발휘와 지속’(身念處)을 닦고 나서 곧바로 또 다른 명상법인 네 가지 단계로 이루어진 선정’(四禪定)의 제1~3단계의 정형적인 서술을 모두 포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신념처수행을 통해 사선정의 제3단계 성취로 이어지는 구조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사념처와 사선정의 밀접한 결합 양상을 살펴볼 수 있게 된다.

▲ 그림 나은영.

<맛지마니까야> 125 ‘단타부미경에서도 사념처를 닦아 사선을 수행하고, 번뇌를 모두 없애버린 능력을 성취하여 마침내 괴로움/괴로움의 발생과 소멸/그 소멸에 이르는 길과 번뇌[]/번뇌의 발생과 소멸/그 소멸에 이르는 길을 있는 그대로 알고 보게 된다(如實知見)”는 서술구조 또한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일련의 자료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불교 명상법은 결코 단일한 하나의 해석체계나 실천의 방법으로 단순화 할 수 없는 면모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전통적인 해석체계나 방법론이라 하더라도 거기에 안주하지 않고 최적의 방법을 찾으려는 노력은 지금도 여전히 의미 있음의 영역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처럼 사띠라는 하나의 엔진은 사선(四禪), 삼매(三昧) 등의 또 다른 명상 영역과 맞물려 있는데, 이 경우 사띠의 기능과 역할에 대해서는 심도 있는 논의가 필요하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사띠가 지금 이 땅에 여전히 필요한 이유가 있다면 그것에 내장된 반성적 사유의 존재이다. 니까야의 운문계열 경전들과 후대 논서들의 설명에서도 나타나는 것처럼, 사띠의 성찰기능은 갖가지 명상의 진행과정을 자체 점검할 수 있는 능력으로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르면, 사띠는 가만히 앉아서 몸/느낌/마음상태/사유 대상 등에 주의집중/알아차림만을 반복함으로써 무상(無常)-()-무아(無我)를 통찰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전통적인 방법론에 제한되어 있지 않다. 그것은 바로 사띠에 명상을 일상의 영역으로 이끌어오는 능력이 있다는 점이다. 바로 잊지 않기/주의력의 발휘와 지속이라는 의미에 내재된 힘이다.

하루 종일 주의집중/알아차림의 무한반복을 일삼을 것이 아니라 일터에서 보내는 시간 중간 중간에 찾아오는 선택의 순간, 판단의 순간바로 거기에서, 말과 행동으로 나타나는 바로 그 순간, 짧지만 강렬하게 사띠의 힘을 운용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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