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려와 교유로 고단한 격무 피로 잊어

어린 시절부터 관심 높고
책 발간해 교화사업에 힘써
탁월한 글재주로 시문 남기며
茶香 속 유불 경계 넘나들어

▲ 모재 김안국이 자주 찾아와 승려들과 시를 교유한 가야산 해인사. 그는 하루 종일 쌓인 문서와 씨름하면서도 승려들을 만나 수행자와 속인의 삶에 대해 고찰했다. 사진제공=해인사

모재 김안국(慕齋 金安國, 1478~1543)은 김굉필(金宏弼)의 문인으로, 조광조와 함께 도학에 밝았던 인물이다. 자는 국경(國卿)이며 호()를 모재라 하였다. 저서로는 모재집〉 〈모재가훈(慕齋家訓)을 남겼고, 사림파의 선구자로 지극한 정치(至治)를 표방하였다.

1503년 별시문과에 합격한 후 승문원에 등용된 이래 박사, 부수찬, 부교리 등을 역임하였다. 1517년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하여 향교마다 소학을 권했다고 하니 이는 어린 시절 소학을 읽었던 감동과 관련이 깊은 듯하다. 국조인물고에는 그가 7세에 이미 글을 읽을 줄 알았는데 소학효성스럽도다. 민자건(閔子騫)이여라고 한 장구(章句)의 대목에 이르러 말하기를 나는 마땅히 이것으로써 법을 삼을 것이다고 하였으니 어린 시절부터 효에 대한 관심이 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자신의 호를 모재(慕齋)라 한 것은 부모에 대한 사모의 정과 효심이 지중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교화사업에도 힘써 이륜행실도언해(二倫行實圖諺解)〉 〈여씨향약언해(呂氏鄕約諺解)〉 〈정속언해(正俗諺解)등을 간행·보급했고, 벽온방(瘟方)〉 〈창진방(瘡疹方)등 병을 치료하는 책을 편찬하여 백성의 실생활에 도움을 주고자 했다.

늘 도학 정치를 실현하고자 했던 그는 참찬으로 임명되던 해인 1517년에 기묘사화가 일어나 조광조 등 소장파 명신들이 참화를 당할 때 겨우 화를 면하고 파직되어 고향 이천으로 돌아가 후학을 양성했다. 여주 천녕(川寧)가에 작은 초정(草亭)을 지어 범사정()이라 불렀고 당명(堂名)을 팔이정(八怡堂)이라 하였다. 이곳을 찾는 고을 사람이 술을 싣고 오는 자가 누구든 가리지 않고 함께 즐겼다고 한다. 이렇게 은일을 즐기고 후학을 양성하던 그가 다시 등용된 것은 1532년이다. 예조 판서는 물론 좌참찬, 대제학, 찬성 등 높은 관료로 임명되어 비교적 순탄한 벼슬길에 올랐다.

무엇보다 그는 경악(經幄)과 서연(書筵)에서 시강(侍講)할 때에는 성리학(性理學)을 주로 하여 간결하고 유순하게 끝까지 관철시켰으므로, 임금이 허심탄회하게 받아들였다고 한다. 특히 그는 역수(易數)에 깊이 들어가 심오한 이치를 탐색하였고 천문(天文)지리(地理)를 두루 탐구하여 널리 관통하고 막힘이 없었다고 한다.

그와 교유했던 승려들 중에는 그에게 제발(題跋)을 부탁하는 이들이 많았으니 이는 그가 시문에 밝았기 때문이다. 특히 일본 승려 붕중()과 교유했던 사실이 눈에 띠는데 이는 국조인물고“1511년 일본 사신인 승려(僧侶) 붕중()이 내빙(來聘)하였는데, 공을 선위사(宣慰使)에 충원하자 예의를 갖추어 대우함이 체모를 얻었으며 또 시문(詩文)을 지어 서로 주고받은 것이 많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붕중이 대단히 추앙하고 복종하여 말하기를 상국(上國)에 알현하고 이웃 나라에 빙문(聘問)한 것이 두세 번에 이르렀으나 공 같은 인물은 보지 못하였습니다고 하였다. 그가 하직 인사를 하고 돌아갈 때는 눈물을 흘리면서 이별하기를 애틋하게 여겼었는데, 이러한 일이 있은 뒤로 왜사(倭使)가 내조(來朝)하게 되면 반드시 공의 안부를 묻곤 하였다는 것이다. 김안국도 붕중을 위해 시를 지었으니 이는 바로 차붕중상인청금운(次中上人聽琴韻)이다. 그의 깊은 의중은 다음과 같다.

옛 뜻을 이어 오랜 안족(雁足)에 의거했지만(古意仍將寄古徽)
자주 속된 귀 기울여도 아직 희미하네(頻傾俗耳尙依)
산골짜기 흐르는 물, 졸졸 메아리 치고(澗中流水淙淙響)
하늘가 오락가락한 구름, 자유자재 나는구나(天際閑雲自在飛)

김안국의 이 시는 붕중의 거문고 소리를 듣고(聽琴)라는 시를 차운하여 지은 듯하다. 그러므로 붕우가 연주하는 거문고의 고상한 경지를 속된 사람으로 표현했고, 자주 귀를 기울여도 그 뜻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붕중의 탄주 솜씨는 마치 산골짜기에 흐르는 물소리가 메아리를 치듯, 구애 없이 흘러가는 구름처럼 자유롭고 은근하였던 듯하다. 아마도 붕중과 그 자신을 백아와 종자기로 비견하여 지음(知音)의 우정을 나눈 사이로 상정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 속내가 어렴풋하다. 이뿐만이 아니다. 그는 수많은 승려들과 교유했는데 해인사를 방문한 그에게 시를 구하는 이들이 많았다. 취중에 문득 마음가는대로 써준 시는 이렇다.

눈 푸른 가야산 주인은(倻山主人眼紺碧)
몇 년이나 산중에서 수행을 했던가(山中幾年掛飛錫)
객이 이르자 문에서 맞이하며 말없이 웃는데(客至迎門笑不言)
창창한 가야산, 계곡물 맑아라(倻山蒼蒼倻水綠)
산승은 나를 알고 나 또한 산승을 알지만(山僧知我我知僧)
잠잠히 서로 보며 말없이 앉았네(默坐相看話不應)
가파른 언덕에 아름답게 핀 봄꽃(巖畔春花開灼灼)
못에 비친 밤 달은 맑고도 고요해라(潭心夜月照澄澄)
잠시 벼슬살이 고충을 피해(暫逃簿領叢中苦)
홍류동 동천을 찾았노라(來訪紅流洞裏天)
조물주는 일각의 한가함도 싫어하는 듯(造物似嫌閑一刻)
다시 산승에게 시편을 청하게 하네(更敎山衲乞詩篇)
잠시 선방을 빌려 턱을 괴고 졸다가(禪窓暫借支睡)
나를 잊은 후에야 곧 멍해짐을 알았네(覺後忘吾正然)
어느 곳의 노승이 와서 시구를 청하는가(何處老僧來索句)
내 말없이 이미 무연을 말했네(我無言說亦無緣)

가야산은 수많은 시인 묵객이 찾았던 승경지이다. 이곳에 위치한 해인사에는 선비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던 대찰이다. 김안국 또한 이 경승지를 찾았다. 이곳의 승려들이 앞을 다투어 시를 구했다고 한다. 그러므로 고단한 격무를 잠시 쉬고자했던 그는 조물주는 일각의 한가함도 싫어하는 듯/ 다시 산승에게 시편을 청하게 하네라고 하였다. 그의 여유와 넉넉함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가파른 언덕에 아름답게 핀 봄꽃/ 못에 비친 밤 달은 맑고도 고요한 가야산은 그의 말대로 동천(洞天)이었던 셈이다. 말없이 무연(無緣)을 말할 수 있었던 김안국은 분명 불교의 참 원리를 이해한 선비였다.

그가 장흥사의 사미승 신인(信仁)을 위해 쓴 시에는 서정적인 여유와 해학이 넘친다. 그가 이 시를 쓰게 된 연유는 장흥사에서 놀다가 돌아가려는데 마침 가랑비가 내렸다. 사미 신인이 또 종이를 가져와서 가는 길을 막으며 시를 구했다. 부담 없이 쓴 시(遊長興寺 欲還適小雨 沙彌信仁 又持紙遮行索 )”였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선방에서 차 마시기 끝내고 돌아가려하니(禪窓茶罷客將歸)
쏴아 맑은 바람 불고 가랑비가 내리네(颯颯淸風細雨)
길손을 잡으려는 산의 뜻을 뉘 알랴(山意欲留誰得會)
시를 청하는 사미승만이 알았으리라(乞詩僧亦解山機)

장흥사 선방은 그와 교유했던 승려와 아름다운 유불의 교유가 무르익는 곳. 이들의 고담(高談)은 차향 속에서 더욱 깊게 피어났을 것이다. 조선 전기의 차 문화는 고려의 유습이 잔재했던 시기이다. 이 무렵 차 문화를 주도한 것은 사원의 승려들이었다. 더구나 사미승까지도 문기(文氣)있어 김안국에게 시를 청했던 사격(寺格)이 있었던 시절이었다. 이어 그가 사운 사미에게 준 시에도 차가 나온다. 장흥사 사미 사운에게 주다(贈長興寺沙彌思雲)를 감상해 보자.

비온 뒤 활짝 핀 작약(芍藥來看雨後花)
사미승이 월중차를 다려 권하네(沙彌烹勸月中茶)
화려한 비단 휘장아래 양고주가(羊羔華屋圍紅粉)
선방의 차와 견주면 무엇이 나을까(較與禪房味孰多)

작약은 5월의 꽃이다. 초여름이 막 시작되면 작약이 핀다. 그런데 사미승은 월중차를 다린단다. 물론 그가 즐긴 차는 햇차였을 것이다. 선방의 아취는 작약보다 고상하고 맑은 차에 있었던 터이다. 한편 그가 현중 승려를 위해 쓴 시에 허탄한 속세의 삶과 속기를 벗어난 승려의 삶을 선명하게 대조했다. 현중승려에게 주다(贈玄仲上人)는 이렇다.

더러운 길에 잘못 떨어져 허망한 이름 쫓았더니(誤落塵途逐浪名)
남가의 미몽을 어느 때나 깰까(南柯迷夢幾時醒)
삼생이 청산의 빚을 아직 갚지 못했는데(三生未償靑山債)
천장의 허공에 백발만 남았네(千丈空餘白髮莖)
붕새의 길, 진실로 뱁새가 원하는 것 아니니(鵬路固非)
참죽나무의 봄을 어찌 여치나 하루살이 나이로 짐작하랴(椿春寧數菌齡)
다른 해에 만일 다시 만나길 약속한다면(他年許重逢約)
깊고 그윽한 숲, 맑은 바람 웃으며 맞으리(林壑淸風一笑迎)

1514년에 왕의 명으로 송도에 갔던 그는 무더운 장마철의 더위를 피하려고 송도에 위치한 광명사에서 집무를 본 적이 있었다. 하루 종일 쌓인 문서와 씨름하던 중에 현중 스님이 찾아왔는데 현중은 준수한 용모에 눈 푸른 납자였다. 그의 말을 듣고 피로를 잊은 건 김안국이다. 바로 붕새는 현중일 것이며 자신은 뱁새에 비유하였다. 이뿐만 아니라 1600년을 살았던 춘 나무의 나이와 하루살이를 비견하였으니 이는 수행자와 속인의 삶을 대비적으로 말한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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