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선종사찰 순례 - ① 소림사上(면벽굴·초조암)

소림사 소실산 유봉 중턱에 있는 달마동 입구. 달마동은 길이 7m, 넓이 3m의 천연동굴이다. 이곳에서 달마 스님은 9년간 면벽했다.
[현대불교=신성민 기자] 부리부리한 눈매의 서역 출신 승려가 양나라 황제인 무제 앞에 섰다.  제왕은 평소 불교를 숭앙해 많은 불사를 일으키고 승려를 배출해 스스로 자부심이 대단했다. 그런 양무제가 물었다.

양무제를 피해 온 달마 스님
소림사서 머물며 면벽 수행
가파른 계단 올라야 가는 곳
어린 武僧 오르며 심신 단련
복원위해 닫은 초조암 아쉬워

“내가 제왕이 된 후 무수한 절을 짓고 승려를 출가시켰다. 스님께선 나의 공덕이 얼마나 된다고 생각하는가?”

승려는 “없다”고 즉시 답했다. 황제는 다시 물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같았다. “무공덕.”

답답한 황제는 “왜 나의 공덕이 없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그것은 인천(人天)의 작은 복이니 유루(有漏)의 공덕이 될 뿐”이라고 답했다.

황제의 질문은 이어졌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진실한 공덕이라는 말이냐?”

서역 승려의 대답은 간단했다. “맑은 지혜는 묘하게 밝아서 본체가 스스로 공적(空寂)하니 세상의 함이 있는 일(有爲之事)로는 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화가 치밀어 오른 양무제는 “그렇다면 나를 대하고 있는 당신은 무엇이냐”고 소리쳤다. 그러자 승려는 이렇게 말하고 황제와의 문답을 마친 후 사라졌다. “모릅니다.(不識)”

달마동 내부에 있는 달마상. 사진촬영을 하면 바로 안내원의 제지를 받는다.
달마동에 오르다
당대 최고의 권세를 누리던 황제 앞에서 한 치 두려움없이 불교의 교설을 설하던 승려. 그가 바로 중국 선종 시작을 알린 보리달마(菩提達磨, ?~495) 스님이다. 그는 남천축 향지국의 셋째 왕자로 태어나 반야다라(般若多羅)를 만나 출가해 부처님 법을 배웠다. 스승 밑에서 공부한 보리달마는 유지에 따라 스승 입적 후 6~7년이 지난 뒤 중국으로 건너가 전법을 한다.

달마 스님은 양무제를 만나 문답을 나눈 뒤 북쪽의 위나라로 향했고, 곧 낙양에 도착했다. 이후 숭산 소림사에 머물면서 면벽 수행을 했다. 

소림사에 주석하며 장장 9년 동안 면벽 수행을 했던 곳은 현재 ‘달마동(達磨洞)’이라고 불리는 곳이다. 달마동은 소림사 소실산 유봉 중턱에 있는 길이 7m, 넓이 3m의 천연동굴이다.

소림사의 탑림을 지나 올라갈 수 있는 계단을 만날 수 있다. 산 입구는 평탄한 길이지만, 몇 굽이를 돌아가면 곧바로 가파른 계단이 나온다. 솔직히 ‘악’ 소리가 나올 정도다. 이 같은 계단 약 20분 가량을 올라가야 달마동을 만날 수 있다.

사실 달마동으로 오르는 길은 최근 SBS에서 방영한 주말 예능 ‘주먹쥐고 소림사’에서 김병만, 육중완 등 남자팀이 매일 무술 수련을 하던 곳이기도 하다. 달마동을 오르던 시간이 약 오후 4시 가량이었는데 수련을 나온 어린이·청소년 무승(武僧)들을 만날 수 있었다.

가파른 계단을 오르는 어린 무승들은 빠르게 몸을 움직였다. 하지만, 얼마 안가 지쳐 숨을 헐떡이는 어린 무승들도 있었다. 물론 필자 역시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쏟아지는 땀과 헐떡거림 속에서 절로 조선 중기 문신인 양사언(1517~ 1584)의 시조 한 구절이 떠올랐다.

‘태산(泰山)이 높다 하지만 하늘 아래 산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 리 없건만/ 사람이 스스로 오르지 않고 산만 높다 하는구나.’

몇 번을 ‘가다 쉬다’를 반복하며 오르다 보면 드디어 달마동에 도착하게 된다. 숨을 몰아 쉬며 입구에 다다르니 중국인 관광객과 신도, 무승들이 한데 모여 있다.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달마동, 일명 달마대사 9년 면벽굴 앞에 섰다. 입구 안에 들어서면 총천연색 가사를 입고 있는 달마 스님이 봉안돼 있다. 1명 정도가 들어서 참배를 올릴 수 있는 곳. 이곳에서 달마 스님은 장장 9년을 면벽 수행을 했다. 왜 9년의 기간 동안 달마는 굴 속에서 면벽을 했을까?

일반적으로는 법을 전할 수 있는 제자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참된 제자를 만나지 못하면 혼자 죽을 각오까지 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법을 얻기 위해 나타난 사람이 중국 선종의 2조 혜가(慧可)였다. 소위 ‘안심법문’으로 잘 알려진 일화는 달마동 면벽굴에서 이뤄졌다. 

하지만 달마 스님의 9년 면벽은 간화선의 공안이기도 하다. 달마의 ‘9년 면벽’에 대해 자명 선사는 “풍년인데 소득이 없었다”, 양기 선사는 “서천사람이 중국말을 몰랐다”고 답했다. 어쩌면 달마가 행한 9년 면벽 진의는 참구하는 수행자만이 풀 수 있는 화두일지 모르겠다.  

달마 스님이 머물며 수행을 했다고 알려진 초조암. 이곳에는 육조 혜능이 달마 스님을 기리며 식수한 측백나무가 있다.
문을 닫아 아쉬웠던 초조암
달마동을 오르든 내려오든 만날 수 있는 곳이 ‘초조암(初祖庵)’이다. 초조암의 이름은 중국 선종의 초조인 달마 스님이 수행했던 곳이어서 붙여졌다. 달마동을 뒤로하고 내려와 초조암을 찾았다. 현지 가이드는 초조암이 곧 복원·보수 예정이어서 문을 닫았을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직접 들어가보지는 않았지만, 초조암에서 꼭 봐야하는 것은 2가지가 있다. 첫째는 초조암의 주전인 대전(大殿)이다. 대전은 북송시대에 세워졌으며, 초조암이라는 이름답게 달마상이 봉안돼 있다. 또한 동벽, 북벽, 서벽으로 혜가, 승찬, 도신, 홍인 스님 등 23명의 스님들의 진영들이 그려져 있다. 대전 건물의 기둥도 이색적이라고 한다. 기둥에는 인물상, 공양상, 꽃과 산수 등이 부조로 표현돼 있다.

두 번째는 대전 앞에 있는 커다란 측백나무다. 이는 육조 혜능 스님이 소림사에 참배하러 왔다가 초조암에 와서 달마 스님을 흠모하면서 식수한 나무라고 전해진다. 대전 앞 측백나무를 ‘육조수식백(六祖手植柏)’라고 하며, 보호수로 지정돼 있다.

달마동과 초조암에 가는 길에서 만날 수 있는 소림사 고승들의 탑들. 일명 ‘탑림(塔林)’이라고 부른다.
달마 스님이 양무제를 피해 몸을 숨긴 것은 양나라가 자신의 법을 펴기 위한 인연의 땅이 아니었음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그가 떠난 후 참뜻을 안 무제는 비통한 심정을 비문에 담았다.

‘보고도 보지 못했고, 만나고도 만나지 못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뉘우처지고 한이 되는도다./ 사후(死後)에라도 감히 스승으로 모시겠노라.’

지금의 달마동 9년 면벽굴의 달마상은 뒤편의 벽이 아닌 찾아오는 참배객을 보고 있다. 자신의 팔을 잘라서라도 깨달음을 얻으려 한 넓은 선기(禪器)를 지닌 제2의 혜가를 기다리는지, 탁한 사바세계를 경책하기 위해서인지는 알 수 없다.

초조암을 나와 소림사로 향하니 수많은 선사들의 탑들이 펼쳐진다. 중국 선종 초조 달마의 후예들이다. 유구한 선(禪)의 역사를 지켜왔던 선지식들이다. 과연 현대의 우리는 부처님의 마음법을, 달마의 법을 세상에 잘 담아내고 있는가. 자신에게 물음을 던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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