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공만이 자기가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겁니다

벌써 날씨는 가을 날씨로 변했습니다. 우리가 살아나갈 때 쳇바퀴 돌 듯 찰나찰나 변해서 돌아가듯이 말입니다. 지난번에도 얘기했지만 인간이 정신계는 무시하고 물질계만 집착하여 물질 50%만 넣고 굴리려니까 맞지 않습니다. 정신계의 50%와 물질계의 50%가 맞먹어서 같이 작용을 해야만이 100%가 되는 이치입니다.

관하지 않는다. 끊어졌다 하는 생각은
자기의 관념적인 생각이지 포괄적인 생각은 아니야.
그러니까 쉬라 이 소리야, 그냥.

그런데 여러분은 바깥에서 끄달리고, 바깥으로 이름을 찾고, 바깥으로 형상을 찾고, 바깥으로 허공을 보고, 모든 것을 허무하다고 하고 이렇게 나가시니까 50%는 감추어져서 100%가 같이 돌아가지 못하는 이치가 됩니다. 그러니 뭐가 하나라도 걸리지 않고 순수하게 돌아가겠습니까? 모두가 걸리고 액난이 거듭거듭 닥쳐오고 내 몸도 이끌어 가지 못하는 그런 상태까지 오게 되는 거죠. 모두 회보에 나와 있으니까 보셨으리라고 믿고, 오늘은 살아나가다가 어떠한 고난이 생길 때 여러분이 여기를 찾아오시는 얘기를 합시다.

부처님 말씀과 다른가 안 다른가 한번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오시게 되면은 어떠한 액난이나 어떠한 고난을 안고 옵니다. 그 안고 오는 고난, 액난이 어디에 있는가? 바로 내 한마음 속에서 악이 술술 풀려나오고, 액이 술술 풀려나오고, 병고가 술술 풀려나오고 모두 과거에 살던 인연에 따라서 업이 지어진 관계로 그렇게 풀려나옵니다. 그렇게 나오는 것을 거기다가 되맡겨 놔야만 되입력이 돼서 앞의 것이 무너지고 새로이 입력된 게 현실로 나오게 됩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왜 “나는 생각해 본 예도 없고 말한 예도 없고 행한 예도 없다.” 하고 말씀하셨을까요? 그 이치는, 여러분이 여기에 오실 때 뭘 가져왔다면 마음으로 가져오시죠? 내게도 여러분과 똑같은 마음이 있습니다. 그 마음과 마음이 한데 합쳐졌을 때 광력이 일어나게 돼 있습니다. 합쳐서 작용을 할 때에 나오는 거죠. 그러니까 여러분의 마음과 내 마음의 양면이 합쳐지면 전자와 전자가 없어지고 그 에너지 광만 나오게 돼 있죠. 그런 거와 마찬가지로 양면이 다 없어지고 불만 번쩍 일어나듯이 여러분이 가져온 재료에 성사가 일어난다 이겁니다.

그런데 여러분! 내가 했다고도 할 수 없고 여러분 중에 어떤 누가 했다고 할 수도 없는 겁니다. 이걸 좁게 보면 네가 하고 내가 했다 하겠지만, 넓게 본다면 네가 했다 내가 했다 할 수가 없는 겁니다. 모두가 공(空)해서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독불장군이 없이. 이렇게 돌아가기 때문에 엄마 아빠가 애를 낳아도, 아내 자식이라고만 할 수도 없고 남편 자식이라고만 할 수도 없습니다. 넓게 보면 모든 문제들이 네 자식 내 자식이 따로 없고, 네 부모 내 부모가 따로 없고, 네 형제 내 형제가 따로 없다는 그런 이치가 돌아가죠. 그럼으로써 ‘하지 않았다’도 아니고 ‘했다’도 아닙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했다, 안 했다 이것이 없습니다. 네 자식이다, 내 자식이다 그게 없습니다. 네가 했다, 내가 했다 그게 없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신 겁니다. 일체 중생이 다 그 무심(無心)에 와서 닿는다고 하더라도 모든 게 무심이기 때문에, 들여놓은 것도 두드러짐이 없고, 그것을 많이 굴려서 내보내도 또 주는 사이가 없다 이겁니다. 영은 영이니까. 알아듣기 쉽게 하느라고 영은 영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영이 왜 묘하냐? 그것은 체가 없어서, 만물을 목신 한 가지로 비유할 때, 목신과 내 마음이 한데 한마음이 된다면 내가 목신이 될 수 있고 목신도 내가 될 수 있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무를 자르면 탈이 난다고 하는 것도 둘이 아닌 까닭인데 그 마음을 내 마음에다 넣어서 한마음이 된다면 그때는 잘라도 괜찮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모두 신중단을 만들어 놓고 영가 위패를 붙여 놓고 하는데 그것을 모두 없애도, 그 마음이 한마음으로 들기 때문에 위패는 치워도 된다 이겁니다. 이 뜻을 아시겠습니까? 이 마음의 작용이라는 것이 얼마나 묘하고, 뜻이 깊고 광대무변한지 여러분은 들은 얘기 또 듣고, 들은 얘기 또 듣고 그래야만이 어느 순간 귀가 번쩍 뜨이죠. 어언간 수만 번을 들어도 흘러져 가다가 어느 순간 한번 딱 감응이 오는 때가 있습니다. 듣는다고 다 감응이 되는 게 아닙니다. 그러니 잘 침착하게 들으시고, 침착하게 행동하시고, 침착하고 부드럽게 말씀하시고, 생전에 마음으로 항상 나쁘게 생각하지 마시고, 좋게만 굴려서 생각하고, 이익 하게만 굴려서 생각하고, 이익 하게 굴려서 말하고 이렇게 하십시오. 이 말이라는 게 그렇게 구덩이에 빠뜨릴 수도 있다 이 소립니다. 그냥 해 버리는 말, 아무렇게나 생각하고 아무렇게나 내뱉는 말이지만 그게 아주 적중해서 현실로 나오는 무서운 도립니다.

지난번에도 얘기했지만 전자와 전자가 한데 합일해서 돌아갈 때, 바로 두 전자는 그냥 없어지는 거죠. 없어진다 하는 거는 하나로 몰입하기 때문에 없어진다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광력만, 즉 에너지 광만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아니 하면 성사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여기도 보면 유전성으로 오는 사람, 영계성으로 오는 사람, 세균성으로 오는 사람, 업보성으로 오는 사람, 윤회성으로 오는 사람 등 갖가지로 많습니다. 이런 거를 병원에서 100%를 다 해결한다고는 못 봅니다. 과거로부터 온 거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이 정신계의 발전을 아니 한다면 그걸 대처해 나갈 수가 없습니다. 65%든 60%든 대처해 나갈 수가 없는 겁니다. 첫째는 내 몸을 이끌어 나가지 못하며 내 가정도 이끌어 나가지 못합니다. 넓게 생각하세요. 좁게 개별적인 하나만 생각하지 말고 포괄적인 하나로 생각을 하세요. 한 가정이라면 한 방통 안이라고 봅니다.

내가 항상 “전력은 다 똑같습니다.”라고 얘기를 하죠, 방편으로. 전구는 많지만 전력은 똑같다 이럽니다. 그래서 남편이나 자식이 내 뒤를 따라 주지 않는다고 해서 싸우고 “왜 나는 나가는데 안 나가느냐?” 하고 온통 야단들을 하지 말고 모든 것이 마음의 작용이니까 내 주인공에다가 ‘한마음 주인공! 주인공만이 나를 이끌어 줄 수 있고, 우리 식구를 다 이끌어 줄 수 있고, 내 몸을 이끌어 줄 수 있고, 성사가 되는 것도 거기요 성사가 안 되는 것도 거기니 성사가 되게 하는 것은 거기밖에 없다.’ 이렇게 믿고 맡기고 놓았을 때 가정이 점점 마음이 밝아지게 돼 있습니다. 전등은 다 각각이지만 전력이 같으니까. 그렇게 밝아질 것을 나가서 안 들어오느니 나가서 무슨 짓을 하느니 하면서 잠도 못 자고 아등바등하면서 온통 애를 태우니 병은 병대로 나고, 가정은 가정대로 파괴가 되고, 화목지 못하고, 부드러운 말 나오지 못하고, 부드러운 행 나오지 못하고 이거는 모두가 악화가 되는 거죠. 너그럽게 생각을 하십시오, 너그럽게.

지난번에도 얘기했지만, 우리는 배낭을 짊어지고 나왔기 때문에 과거는 없다는 얘깁니다. 여러분의 몸속에 벌써 현실로 수억 개나 되는 악업 선업을 짊어지고 나왔습니다. 그런데 과거가 어딨습니까? 미래는 또 아직 오지 않았으니깐 없고요. 그럼 그 배낭 속에, 이 몸을 배낭이라고 해도 됩니다. 배낭 속에 그렇게 수억겁을 거치면서 진화되면서 쫓고 쫓기면서, 인과를 짓고 업을 지은 이 악업 선업을 어떻게 해결을 하시렵니까? 모두 나오는 대로 용도에 따라서 거기다 맡겨 놓으신다면, 바로 앞서의 것은 무너져 없어지고 현실에 좋게 생각해서 새로 맡기는 것만이 풀려나오게 돼 있어요. 그거를 숙명통(宿命通)이라고 하죠. 비유한다면 지금 컴퓨터와 같은 거죠. 과거를 짊어지고 나오는 것은 컴퓨터에 입력이 되어서 나오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중에는 “나는 그렇게 해도 안 됩니다.” 이런 사람이 있거든요. 안 되긴 뭐가 안 됩니까? 생활이 그대로 부처님 법이자 우리들의 법인데. 모든 것이 여러분이 있으니까 상대가 있죠. 여러분이 없으면 상대가 있을 리가 있나요? 무효지. 여러분은 여러분이 있기 때문에 바로 상대가 있고, 상대가 있기 때문에 부작용이 나고 모든 게 일어나는 거니까, 모든 것은 나로 인해서 상대가 있다는 걸 먼저 알아야 됩니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태초요,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화두입니다. 그것이 그대로 화두예요. 화두를 받을 것도 없고 줄 것도 없어요. 그대로 내가, 내 주인공이 화두니까. 앉으나 서나 자나 깨나, 일을 하나 똥을 누나 모든 것이 참선 아닌 게 없어요. 좌선이다, 입선이다, 행선이다 이런 것을 모두 한데 합해서 참선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 앉았을 때는 앉아서 생각하고 설 때는 서서 생각하고, 일할 때는 일하면서 생각하고 그대로 하십시오. 내가 없으면은 일체 만법을 들이고 내고 할 수가 없거든요.

그러니 닥치는 모든 일이 여러분 배낭 속에서 나오는 것이지 딴 데서 나오는 것은 하나도 없어요. 그러니 배낭 속에서 나오는 것 배낭 속에다 다시 맡겨 놔야만이 과거에 입력됐던 것이 없어진다 이 소립니다. 여러 가지 천차만별로 나오는 그 액난을 어떻게 소화하고 나갈 겁니까? 거기서 나오는 줄 모르고, 거기서 딴 사람을 통해서 나를 지겹게 만들고, 딴 사람을 통해서 망하게 만들고, 딴 사람을 통해서 죽도록 매를 맞게 하고, 딴 사람을 통해서 사기를 당하게 하고 이 별의별 우환이 다 드는 것이 바로 거기서 나오는 겁니다. 억지로 못합니다, 이거.

그러니 여기서 나오는 거니까 여기에다가 모든 것을 맡겨 놓고 ‘거기서 액난이 다 나오는 거니까, 액난을 다 없앨 수 있는 것도 그 자리밖에 없다.’ 하고 놓는 것이지 ‘나를 잘되게 해주시오.’ 하고 비는 것이 아닙니다. 곧바로 믿고 그냥 직선으로 들어가야 되는 것입니다. ‘주인공(主人空)! 한마음 주인공! 나를 이렇게 해 주시오.’ 이게 아닙니다. ‘해 주시오’가 어딨습니까? 둘이 아닌데. 유심(有心)과 무심(無心)이 어떻게 둘이 됩니까? 정신과 육체가 어떻게 둘이 됩니까? 그러니까 ‘해 주시오’가 아니라 ‘틀림없이 거기서만이 해결할 수 있다. 안 되는 것도 거기서 나오는 거니까 되게 하는 것도 거기다.’ 하고 놓는 겁니다.

이심전심으로써 수없이 통하고 돌아가는데 내 마음이 저쪽 마음으로 가서 해결을 하는 것도, 내 몸뚱이 속에 있는 중생들을 바로 보살로 화하게 만드는 작업입니다. 이 작업이 없이는 내 속에 있는 이 업보성을 전부 해결할 수 없습니다. 전부 보살로 만들 수 없습니다. 보살로 만들지 못하면 중용을 할 수 없습니다. 즉, 무심(無心)의 중용. 보이는 데나 보이지 않는 데나 100%를 작용하면서 굴리는 것이 중용이에요.
그러니까 이쯤 해 두고 여러분이 질문할 게 있으면 질문하십시오.

질문자1(男) 저희들은 윤회라는 것에 대해서 모르는 점이 많습니다. 현대 과학에서는 윤회한다는 그것을 유전자를 통해서 후세에게 계속 자기를 복제해 주고, 그렇게 하면서 개선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육신은 본래 죽어서 흙으로 돌아가고 마음은 다시 본래 주인공 자리로 되돌아간다고 그러신다면 그 업식으로 뭉쳐서 윤회하는 그것이 과연 무엇인지, 그리고 앞전에 배낭이라는 표현을 하셨는데 그 배낭 속에서 나온 업식이 모양이 있는 것인지, 거기에 관해서 말씀을 해 주십시오.

큰스님 물론 그 배낭 속에 생명, 의식, 모습 다 있습니다. 이건 의학적으로도 증명할 수 있는 거죠. 그러나 그 의식 자체는 체가 없기 때문에 우리 마음 자체가 체가 없듯이 모두가 내 마음이 하는 대로 행을 따라 줍니다. 이 인과의 업식은 잘되고 잘못되고를 자기가 자진해서 하는 게 아니라 우리 인간의 마음 따라서 움죽거리게 돼 있습니다.

그리고 윤회라는 거. 우리가 어떻게 윤회라는 거를 못 느낍니까? 사계절이 돌아오는 것도 윤회입니다. 우리가 어린애로 태어나서 늙을 때까지 이것도 윤회입니다. 또 저런 별성도 이 거죽만 벗습니다. 은하계에서 별성들의 마음이 태양계를 만들었다 합시다. 그럼 만들었으면 이 옷만 벗지 영혼 자체는 그대로 있는 겁니다. 근본 말입니다. 거기에 에너지가 부합되면은 다시 옷을 입고 생산이 됩니다. 인간도 영혼이 그냥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가 있다고, 과거의 업보가 있다고 하는 겁니다. 자기가 살아나가는 모든 것이 조금도 에누리 없이 자기한테 입력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현실에 나오는 겁니다. 그러면은 그대로 우리가 몸을 받아서 또 나오죠. 부모의 정자와 난자가 있다 해서 어린애가 되는 게 아닙니다. 영혼이 거기 한데 합쳐져야, 삼합이 합쳐져야 임신이 되는 겁니다.

그런가 하면 물이 올라가서 비로 내립니다. 비로 내리면 천차만별로 돼 있는 이 생명체들이 다 그걸 먹고 삽니다. 살아나가는 데도 수없이 돌고 도는 겁니다. 엊그저께도 얘기했지만 독사가 먹으면 독물이 되고 독의 피가 되고, 약초가 먹으면 바로 약초가 되는 겁니다. 우리가 또 물을 먹고 땀을 흘리고 죽고 그러면 다시 원점으로, 물로 돌아가서 도랑물을 만들고 바다를 만들고, 바다에서 또 올라가고 또 이렇게 먹고 사는 겁니다. 이런데 어떻게 윤회가 아니라고 그럽니까? 윤회라는 건 이름이지 일체 만물만생이 다 그렇게 하고 사는 겁니다. 우리가 살기만 하고 죽어서 그냥 없어진다면 지속되는, 끝 간 데 없는 진리가 어떻게 구성이 됩니까?

질문자1(男) 스님, 제가 지금 이 자리에 살아 있는데 어떻게 윤회라고 말씀하실 수가 있습니까? 과거….

큰스님 그럼 말입니다, 댁이 이름을 몇 개를 가졌죠? 몇 개를 가졌습니까, 이름?

질문자1(男) 그냥 저죠.

큰스님 형님이라는 이름도 가졌죠? 동생이라는 이름도 가졌겠죠?

질문자1(男) 예, 물론입니다.

큰스님 자식이라는 이름도 가졌겠죠. 사위라는 이름도 가졌고요, 남편이라는 이름도 가졌고요, 아버지라는 이름도 가졌고요. 그런데 순간순간 남편이 될 때는 자동적으로 남편의 말을 하고 남편의 행동을 하고 이런단 말입니다. 또 “아버지!” 하고 오면은 자동적으로 아버지의 말을 하고 아버지의 행동을 한다 이겁니다. 또 “얘, 아무개야!” 부르면은 자동적으로 아들의 노릇을 하고 아들 말을 하고 아들의 행동을 한다 이겁니다. 이렇게 변화무쌍한데 어떻게 없다고 합니까?

질문자1(男) 제가 지금 살아 있고 또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 자체, 또는 생각하고 제 본래 주인공 마음에다가 입력하고 다시 내놓고 그러는 것은 지금 제가 살아 있기 때문인데 그게 과거에서 이어져 오고 미래에까지 연결된다고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현재에 제가 지금 이 자리에 살아 있다고 생각을 하거든요. 그런데 그 생활 자체가 다른 사람에게, 지금 나하고 같이 살아있는 다른 사람에게 이익 되게 할 수도 있고 또 손해를 많이 끼치게 하는 그런 경우도 참 많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 것들이 인연대로 뭉쳐서 돌아가는 것이 세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러한 현상들이 참으로 제 소견으로 이해하기에는 너무 어려운 것 같습니다.

큰스님 이해하기가 그렇게 어려울 게 뭐 있습니까? 평상시에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살고 있는데. 그래서 모르면은 얽매이고 알면은 벗어난다고 그랬습니다. 모든 것은 이렇게 고정됨이 없이 돌아가는 진리 속에서, 말하는 것도 고정됨이 없고, 듣는 것도 고정됨이 없고, 보는 것도 고정됨이 없고, 먹는 것도 고정됨이 없고, 만남도 고정됨이 없고, 가고 오는 것도 고정됨이 없어요. 이렇게 시시각각으로 자꾸자꾸 바뀌어서 돌아가는데, 생활 속에 있는 것을, 뭐가 그렇게 의정이 납니까? 그게 아니라면은 우리가 정신계의 무심도(無心道)를 이렇게 생활로써 엮어 나가려고 하지도 않을 겁니다. 여러분이 지금 정신이 빠졌으면 무효야! 하하하. 그런데 그 정신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찰나찰나 돌아가고 있어요. 그대로 부처님 법이라. 여러분의 법이 그대로 부처님 법이라. 아, 윤회라고 말할 건덕지가 뭐 있나? 고정됨이 없이 공(空)해서 그대로 그대로 돌아가는 것을.

질문자2(男) 큰스님께서는 말씀하실 때 특히 강조하시는 부분은 ‘모든 것은 주인공이 하니까 그 주인공에다가 몰락 놓으라’ 말씀하십니다. 나라는 존재를 관찰해 보면 ‘예전부터 믿어 왔던 나’가 아니라 참나 또는 주인공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느껴집니다. 일상생활에서 늘 느낄 순 없지마는 주인공을 찾을 때 큰스님께서는 관(觀)하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일상생활에서 늘 주인공을 찾을 때 어떻게 해야 가장 올바른 관을 할 수 있는지 그 관하는 관법(觀法)을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큰스님 허허허. 여태 얘기했는데도 묻는다면 어떡해? 관법은 누우나 앉으나, 내가 좀 앉아서 참구해 보겠다 하고 앉았으면 ‘주인공, 당신만이 당신이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어.’ 하는 겁니다. 그게 관법입니다. 당신이 당신이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거지 바깥에서 증명할 수는 없는 겁니다. 주인공만이 자기가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겁니다. 뛰어넘고 뛰어넘고 하는 교차로가 바로 거기입니다. 우리가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교차로와 같습니다.

여러분이 숨을 들이쉬고 내쉴 수 없다면 죽을 거고, 내쉬고 들이쉴 수 있다면 살 겁니다. 그 양면이 교차하는 그런 틈에서 그냥 그대로 숨을 쉬고 살고 있는 거와 마찬가지니까, 바로 그놈이 있으니까, 그놈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건 그놈밖에 없잖아? 그리고 모든 생활을 들이고 내는 것이 자기가 있기 때문에 들이고 내는 게 아닌가. 자기가 없다면 들이고 낼 건덕지는 뭐 있어? 아무것도 없지. 그리고 숨을 들이쉬고 내쉴 수 없다면은 이 공부는 어떻게 해? 그렇기 때문에 이 배낭이라는, 종이라는, 집이라는 육신에 50%가 달려 있다 이 소리야. 그래도 이해가 안 가나?

질문자2(男) 저 나름대로 이렇게 생각하고 있거든요. 스님께서는 배낭에서 나오는 문제를 관하라고 말씀하시는데 실제로 관할 때는 잘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떨 때는 전혀 관하지 않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거든요.

큰스님 관하지 않으나 관하나 지구는 돌아가고 있어. 허허허. 세상은 그냥 돌아가고 있고, 자기가 관을 안 하든 하든 돌아가고 있어, 그냥. 안 하는 것도 그 자리요 하는 것도 그 자리라 이거야. 그러니까 그대로 여여함이야. 안 한다, 끊어졌다 하는 생각은 자기의 관념적인 생각이지 포괄적인 생각은 아니야. 그러니까 쉬라 이 소리야, 그냥. 하루 종일 24시간 얘기를 안 하고 그거를 끊어뜨리고 있다 하는 것도 자기 관념의 생각이지 끊어지긴 뭐가 끊어져, 시공이 없이 그냥 돌아가는데.

질문자2(男) 그럼 정말 쉬라는 얘기가 맞을 것 같습니다.

큰스님 하하하. 아, 끊어진 것도 거기서, 하루 종일 일을 하다가 문득 생각이 나도 거기서야. 이게 이런 게 있어. 24시간이라는 거는 우리의 관념적인 생각이지 24시간이라는 것도 없어. 그러니까 아침에 생각했다 저녁에 생각해도 아침하고 저녁하고 그냥 붙어 버려. 그 공간이 그냥 없어져 버려. 이렇게 묘한 법이야. 이래도 모르겠어요? 그건 사람이 만들어 놓은 관념적인 생각이라 이거야. 하루 종일 내가 끊어뜨렸다 하는 생각은.

(다음 호에 계속)


※위 법문은 1991년 10월 20일 정기법회에서 설법하신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한마음선원 홈페이지(www.hanmaum.org)에서도 같은 내용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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