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 손오공과 미후에 대한 소고

이번 이야기의 주제는 갈라섬, 쪼개짐이군요. 현장법사 일행들 사이의 갈라섬, 내 속에서 내가 쪼개짐…. 즉 분열입니다. “뭉치면 살고 나눠지면 죽는다!”는 말이 있지요? 그런 말 하는 사람들 대개 어떤 저의를 품고 있는 경우가 많아서 저는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왜 그 당연한 말을 좋아하지 않느냐구요? 그런 말 나오는 경우, 꼭 그런 건 아니지만 주도적인 세력이 소수 의견 무시하고 나가려 할 때가 많더라구요. 자연스럽게 모두를 존중하면서 화합을 이루려는 것이 아니라, 일방통행 식으로 밀고 나가려 하면서 그런 소리를 하면 좀 밉거든요. 오래 살지는 않았지만 그런 경우를 종종 보다 보니…. 그래서 거부감이 있는 겁니다.

목적과 수단 분리해선 안 돼
밝은 지혜 바른 마음서 나와
세상 분열·화합도 이와 같아


아무튼 이 대목은 똘똘 뭉쳐도 힘든 긴 여정이, 일행들의 마음이 갈라져서 근본적인 위기를 맞게 되는 상황이네요. 그것이 대표적으로 현장법사와 손오공의 마음이 맞지 않는 것으로 드러났지만, 앞에서 살짝 말씀 드렸듯이 단지 둘만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일행들 모두의 마음에 조금씩 불만이 쌓여 있었던 것입니다. 왜 그렇지 않겠어요. 명목상으로야 거룩한 목적을 위해 함께 나아간다 하고, 또 스승과 제자, 사형제라는 명분에 묶여 있지만 얼마나 각각의 취향이 다르던가요? 앞뒤 돌아보지 않고 오로지 한길만을 고집하는 현장법사, 재주는 뛰어나지만 촐싹거리는 병이 있는 손오공, 힘은 좋지만 욕심에 늘 휘둘리는 저팔계, 두 형의 뜻에 따르지만 물귀신처럼(?) 집요한 자기 고집이 있는 사오정…. 지금쯤이면 알게 모르게 쌓여온 불만들이 폭발할 시점이 된 것이지요. 그것이 현장법사와 손오공 사이의 문제로 드러난 것이겠습니다.

자, 그러면 손오공과 현장법사의 문제를 좀 자세히 살펴볼까요? 앞에서도 손오공이 요괴를 잔인하게 죽여서 쫓겨난 적이 있었지요. 이번엔 요괴가 아닌 사람, 산적을 잔인하게 죽여서 문제가 되었네요. 여기서 아무리 나쁜 짓을 하는 사람이라도 그 생명은 소중한 것이라는 현장법사의 생각과, 눈앞에 방해가 되는 것이라면 자기 힘을 믿고 쉽게 치워버리려는 손오공이 부딪힌 것이지요. 전에는 그래도 요괴가 장난을 친 것을 손오공이 알아채고 미리 손을 쓴 것을 현장법사가 몰라서 손오공을 내친 것이니, 현장법사의 눈 밝지 못함을 탓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좀 문제가 다르네요. 요괴도 아닌 사람을, 단지 산적 질을 한다는 것으로 죽여 버린 것이지요. 손오공이 갑자기 왜 이리 흉포해졌는지 좀 이상스럽기도 하네요. 긴 여정에 피곤도 하고, 너무도 고지식하게 원칙만 고집하는 현장법사에 대한 반발도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무엇 때문에 힘을 죽이고 살아야 하는데?”하는 마음이 불쑥 든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그 점에서는 손오공이 분명 잘못한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아, 나칠계님. 손오공을 탓할 필요가 없는 것 같다구요? 어차피 도둑놈이니 나쁜 놈들이고, 이쪽을 해치려고 하는 존재들을 이쪽에서 해친다고 해서 무슨 잘못이 있느냐구요? 날 죽이려는 놈들을 내가 죽이는 것은 괜찮은 것 아니냐구요? 올바른 세상을 위해서는 그런 조그만 희생들을 감수해야 되는 것이라구요?
에궁….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좋은 목적을 위해서는 어떤 수단을 써도 좋다는 생각은 무척 위험한 것이지요. “개같이 벌어서 정승같이 쓰면 된다”는 말은 어떤 측면에서 옳을 수 있지만, 어떤 측면에서는 매우 위험하다는 말입니다. “개같이 번다”라는 말이 도덕적인 측면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천한 일이라고 여겨지는 일을 통해서 돈을 번다는 의미라면 괜찮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비도덕적인 짓을 통해 돈을 번다는 의미라면요? 전혀 아닙니다. 개같이 벌면 개일 따름이예요. 우리의 삶은 어떤 목적을 위해 수단으로 쓰여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한걸음 한걸음이 옳은 것으로 채워지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이지, 어떤 목적을 위해 그 올바른 한걸음을 저버려도 되는 것이 아니니까요. 남들이 천하다고 하는 일을 묵묵히 하는 것이라면 어떤 측면에서는 훌륭한 자세지요. 그러나 남들이 비도덕적이라고 하는 ‘개 같은 짓’을 해서는 절대 안 된다는 것! 그렇게 살면 개일 뿐이라는 것! 그것을 부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요, 어떤 수단을 사용한다는 것은 단지 수단에 끝나지 않고, 그러한 방식에 길들인 사람과 세상을 만들어낸다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목적과 수단은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 없습니다. 현장법사와 손오공의 경우를 가지고 말해볼까요?

불법의 목적은 자비실천에 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인도로 경을 구하러 가는 것은 불법을 널리 펴기 위해서이고, 그 불법을 널리 펴는 목적은 자비의 실현이라 할 수 있지요. 그런데 그 목적을 위해 가는 길에 자비심을 저버린 짓을 한다? 목적과 수단이 어그러지는 것이지요. 그런 짓을 하면 생명을 중히 여기지 않는 업이 생기고, 그것이 습을 이루게 되면 성불의 길과는 영영 멀어지고, 목적인 자비가 실종되는 세상을 만들게 되지요. 그러니까 현장법사가 너무 고지식하고 고리타분하다고 나무라서는 안 되는 측면이 있는 것입니다. 물론 어떤 경우라도 절대로 이것만은 안 된다는 원칙주의를 고수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목적이 정당하면 수단은 아무래도 좋다는 사고방식을 쉽게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지요.

요즈음에 필리핀에서 두테르테 대통령이 벌이는 ‘마약과의 전쟁’을 두고 말이 많습니다. 남의 나라 상황을 정확히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그것의 시시비비를 논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속이 다 시원하다”, “우리도 그렇게 강력한 정책을 시행해야 한다”하는 말들을 쉽게 하시는 분들에 대해서는 그렇게 쉽게 말해선 안 된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네요. 그쪽의 특수한 상황을 깊이 살피지 않은 채, 단지 피상적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참으로 위험하지요. 어떤 목적을 위해서 사람의 생명을 좀 가볍게 다룬다는 것, 그것이 일반적인 풍조로 되어보세요. 사람이라는 동물은 “이 방식을 이때까지만 쓰고 다음부터는 쓰지 않겠다”는 식으로 제어될 수가 없습니다. 어떤 생각과 행동방식에 익숙해진다는 것은 곧 그것이 편한 사람들의 사회를 만들게 됩니다. 자칫하면 생명을 가볍게 여기는 풍조가 만연한 사회를 만들 위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시각에서 본다면 현장법사가 좀 갑갑한 구석이 있다 하더라도, 또 충분히 존중받을 면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손오공이 가볍게 생명을 죽인 것이 잘못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문제는 그것이 그저 “너 그러면 안돼!”, “예, 제가 잘못했습니다”하는 식으로 가볍게 넘어갈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는 것이지요. 무언가 감정의 골이 깊어진 상황에서, 그것이 우발적인 행동으로 표출되고, 그것을 다른 한쪽에서 참을 수 없게 된 상황이 된 것입니다. 그걸 말려야 할 저팔계, 사오정도 은근히 속으로 꼬여 있다 보니 극단적인 결과가 나오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들 세상에서 분열이 일어나는 것은 대체로 이런 식입니다. 결과만 놓고 보면 우연인 것 같지만 오랜 동안에 쌓여온 유래가 있은 것이지요.

〈주역〉에 이런 말이 있다 했지요. “서리를 밟다 보면 단단한 얼음에 이른다”고. 큰 사건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손오공의 파문, 그것은 오랜 여행을 해온 일행 사이의 불만이 폭발한 사건이라 보아야 할 것입니다.

 

다른 한편에서 본다면 이 사건은 한 인격 안에서의 분열이지요. 자기의 마음 안에서도 여러 생각이 다투고 있는 것입니다. 유학에서는 “개인적인 사사로움을 꾀하는 마음과(人心) 도를 추구하는 마음(道心)이 사방 한 치 되는 마음속에 뒤섞여 나온다”고 표현하지요. 지금은 원칙을 고수하려는 마음, 계율을 지키려는 마음, 근본인 자비를 수호하려는 마음이 한편이라 할까요? 다른 한편은 목적을 향해 좀 쉽게 쉽게 나가려는 마음, 자기의 능력을 뽐내고 싶고, “내가 왜 이렇게 참기만 해야 돼?” 하는 식의 마음이 나온 것이겠지요. 결국 그 두 마음이 다투고, 이 마음의 주체라 할 수 있는 현장법사를 내쫓을 수는 없으니 그 인격의 한 측면을 상징화한 손오공을 내쫓을 수밖에요.

그런데 이번은 좀 그 분열이 심각해요. 내 쫓긴 손오공의 집착과 분함이 좀 깊었던 모양! 그것이 새로운 하나의 분신을 만들어냈군요. “꼭 현장법사 당신이 인도로 가서 경 가져오란 법 있어? 내가 가서 가져와버리지!”하는 마음으로 발전한 모습이랄까요? 그렇게 되면 내가 바로 이 동방세계의 불교 교주가 될 테고, 대대손손 우러름을 받을 것 아니냐! 사오정이 찾아갔을 때 가짜 손오공이 했던 말, 그것이 바로 분열된 손오공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군요. 이렇게 손오공 자신의 분열이 일어났으니, 둘이 싸우면 누가 이길까요? 자기와 자기가 싸우는데 누가 이길 수 있나요? 가짜와 진짜, 그것을 누가 가릴까요? 관세음보살도 못 가리죠. 옥황상제도 못 가리죠. 염라대왕도 못 가리죠. 당연한 이야기네요. 원래 한 몸인데 어찌 가리겠어요. 그래서 결국 석가모니 부처님 처소에까지 그 싸움이 이어지는 것입니다. 결국은 부처님의 밝은 지혜에 호소하는 길 밖에 없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두 손오공이 다투며 오는 것을 보고 부처님이 하신 말씀, 그 말씀이 바로 이번 사태의 본질을 정확하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다시 한 번 되돌이표….

“너희들은 모두 한 마음이로구나. 그런데 보아라! 두 마음이 서로 싸우며 오는구나.”

바로 이것입니다. 본래는 한 마음이어야 할 마음이 두 마음이 되었고, 그 두 마음의 싸우고 있는 것이지요. 물론 서유기에선 부처님께서 진짜 마음과 가짜 마음을 가리십니다. 원숭이 가운데도 요상한 원숭이 여섯 귀를 가진 요망한 미후가 바로 가짜로 둔갑한 것이라고 밝혀 주십니다. 그렇지만 그 뜻은 아마도 원숭이 같은 마음 가운데서 정말 요망한 원숭이 마음, 그것이 가짜 손오공으로 분장하고 나타났음을 말씀하신 것 아닐까 싶습니다. 한 마음의 나뉨이지만 거기에도 옳음과 그름, 바름과 삿됨의 구분이 없을 수 없으니, 바름으로써 삿됨을 극복해야 하지요. 그리고 그 바름과 삿됨을 구별하는 궁극적인 눈은 바로 부처님의 지혜일 뿐이지요. 서유기에서 미후를 때려죽인 것으로 나왔지만, 부처님 지혜가 작용했는데 그렇게 잔인하게 때려 죽였을 리가 있겠어요? 올바른 지혜의 눈이 뜨이니 삿된 마음은 스르르 자취를 감추고, 뚜렷한 바른 마음이 올곧게 드러났을 뿐이로다! 삼쾌선생은 이렇게 해석하고 싶답니다. 번뇌가 곧 보리일지니, 꼭 무찌르고 죽이려는 적대심으로 번뇌를 대하지 말지어다! 이렇게 고상한 표현을 좋아하는 삼쾌선생! 이크, 갑자기 싸늘한 반응이 나오는 것 같아서… 오늘 여기서 줄입니다.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