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母列傳- 영철(靈哲) 스님

▲ 서울 화계사 목조지장보살좌상 얼굴 측면 사진제공=동북아불교미술연구소
17세기 중반은 전국적으로 사찰의 중창과 중수가 이루어지면서 여러 명의 조각승들이 집단을 이루며 불상을 제작한 시기이다. 이 시기에 활동한 조각승들은 300여명으로, 17세기 전반에 스승을 따라 불상 제작에 참여한 스님들이 불상 제작에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이 시기를 대표하는 조각승들은 여러 계보에 속하거나 단독 또는 공동으로 불상을 제작하게 된다.

조각승 수연의 계보 이은 제자
서해안 지역 사찰에 불상 조성
서울 화계사 지장전 불상 유일
순천 송광사 밀접했을 것 추정


17세기 전반 대표적인 조각승 수연(守衍) 스님의 계보를 잇는 작가는 영철(靈哲, 靈澈) 스님이다. 영철 스님은 수연 스님을 따라 작업을 하다가 보조화승에서 다시 부화승이 된 조각승이다. 수화승으로서도 여러 작품을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아직까지 영철 스님이 수화승으로 참여한 불상은 1건 20여 점이 조사되었을 뿐이다.

현재 서울 화계사 지장전에 봉안된 불상은 원래 황해도 배천 강서사에서 조성한 목조지장보살삼존상과 시왕상 등이다. 영철 스님은 스승인 수연 스님과 마찬가지로 서해안을 따라 위치한 사찰에 불상을 제작한 특징이 있다. 특히, 영철 스님은 1678년에 건립된 조계산송광사사적비(曹溪山松廣寺事蹟碑)의 후면에 운혜(雲惠) 스님과 같이 시주자로 적혀 있어 송광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송광사는 임진왜란 이후 부휴문도가 중창을 한 사찰로 영철 스님도 부휴문도에 속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조각승 영철 스님의 생애와 승려 장인이 된 배경에 대하여 알려진 바가 없지만 불상에서 발견된 문헌과 사찰의 연혁을 적은 사적비(寺蹟碑)를 통해 스님의 활동 시기와 내용, 조각승 계보 등을 추정할 수 있다. 영철 스님은 1623년에 수연 스님이 수화승으로 제작한 강화 전등사 대웅보전 불상 제작에 동원된 6명 가운데 3번째로 적혀 있어 이 집단의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을 것이라고 추측해본다. 또한 스님은 1634년에 수화승 수연 스님과 전북 옥구 보천사 목조지장보살좌상과 시왕상(익산 숭림사 봉안), 1636년에 전등사 목조지장보살좌상과 시왕상을, 1639년에 남원 풍국사 목조삼세불좌상(예산 수덕사 봉안)을 조성하였다. 이 불상 조성에 참여한 조각승 가운데 영철 스님이 대체로 2, 3번째 언급된 것을 보면, 불상제작과정에서도, 또 조각승 연륜에서도 중심 역할을 했던 연배일 것이다.

그 후 십년 동안 영철 스님의 흔적은 남아 있지 않고, 1649년에 수화승이 되어 인명(印明) 스님, 상운(尙云) 스님, 운혜(云惠) 스님, 옥순(玉淳) 스님 등과 같이 황해도 배천 강서사에서 지장보살삼존상과 시왕상 등을 제작하여 해주 광조사로 이운하여 봉안하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해주 광조사는 <범우고(梵宇攷)>에 “재황해도해주군수미산(在黃海道海州郡須彌山)”으로, <조선금석총람 상(朝鮮金石總覽 上)>에 “재해주군금산면냉정리(在海州郡錦山面冷井里)”로 언급되어 있다. 그 후 1877년에 목조지장보살삼존상과 시왕상이 강서사에서 서울 화계사로 옮겼다는 기록이 있어 강서사 → 광조사 → 강서사 → 화계사로 이운되었음을 알 수 있다. 불상 내에서 발견된 조성발원문에 나오는 많은 시주자들은 17세기 중반에 황해도에서 활동한 스님과 불자들로 추정된다.

마지막에 언급된 제산지식(諸山知識) 41명 가운데 소요태능(逍遙 泰能, 1562~1649), 벽암각성(碧巖覺性, 1575~1660), 허백명조(虛白明照, 1593~1661), 취미수초(翠微守楚1590~1668), 춘파쌍언(春坡彦, 1591~1658), 풍담의심(楓潭儀諶, 1592~1665) 등은 임진왜란 기간에 의승군으로 활동한 17세기 초중반의 고승대덕이다.

특히, 소요태능은 1649년에 입적하였는데, 불상이 만들어진 9월 초까지 생존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와 같이 17세기 전·중반을 대표하는 고승대덕이 불상 조성발원문에 언급된 것으로 보면, 당시 강서사가 불교계에서 차지하던 비중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불상 제작에 후원자로 참여한 이응립(李應立), 장응춘(張應春), 천묵(天默), 강대추(姜大秋) 등은 1665년에 건립된 강서사사적기 후면에 음각된 「사향초혼위전답기(四饗招魂位田畓記)」에 많은 전답을 사찰에 기부한 불제자들로 기록됐다.

따라서 지금까지 알려진 문헌기록을 바탕으로 영철 스님의 생애를 살펴보면, 스님은 임진왜란 이전에 태어나 1610년대 수연의 밑에서 불상 제작의 수련기를 거치고, 1620년대 불상 조성에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다가 1630년대에는 부화승으로서 불상을 제작하였다. 영철 스님은 스승인 수연 스님과 같이 인천 강화, 전북 옥구와 남원, 황남 배천 등의 사찰에 불상을 제작한 것을 보면, 수로를 통하여 이동이 가능한 지역에 거주하였을 것이다.

특히 1649년에 배천 강서사 명부전 불상을 제작한 조각승들이 1650년에 수화승 운혜와 전남 해남 서동사 목조삼세불좌상 제작에 참여하였는데, 영철이 빠진 것을 보면 그가 남부 지역보다 중부 지역에서 활동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현재까지 밝혀진 영철 스님의 활동 시기는 1623년부터 1649년까지이다. 영철 스님의 조각승 계보는 태전(太顚, -1600-1615-) → 수연(守衍, -1615-1639-)→ 성옥(性玉, -1619-1625-), 영철(靈哲, -1623-1649-), 성민(省敏, -1634-1639-) → 운혜(雲惠, -1649-1680-), 경림(敬琳, -1665-1680-)→인성(印性, -1660-1753-), 삼안(三眼, -1678-1740-) 등으로 이어진다. 수연과 그 계보에 속하는 조각승들은 17세기 불교 조각계를 주도하던 작가들이다.

영철 스님이 만든 대표적인 불상은 서울 화계사 지장전에 봉안된 지장보살좌상이다. 화계사 지장전에는 지장보살좌상을 중심으로 도명존자와 무독귀왕 및 시왕상 등이 벽면을 따라 배치되어 있다.

목조지장보살좌상은 높이가 101㎝로, 민머리의 성문비구형이다. 전체적으로 지장보살은 당당한 신체에 상반신을 곧게 세우고, 얼굴을 앞으로 내밀어 구부정하다. 얼굴과 신체가 대략 1:3.2의 비례를 이루며, 계란형의 얼굴에 턱이 약간 뾰족하고, 이목구비가 전형적인 조선후기 불상을 따르고 있다. 또한 코가 짧고 높으며, 인중이 좁은 것이 특징이며, 목 밑에 삼도(三道)가 완만하게 새겨져 있다. 따로 제작된 오른손은 어깨 높이까지 올려 엄지와 중지를, 왼손은 가지런히 무릎 위에 올려놓고 엄지와 중지를 맞댄 수인(手印)을 취하고 있다.

바깥에 걸친 두꺼운 대의는 오른쪽 어깨에서 대의 끝자락이 U자형으로 가슴까지 내려오고, 그 뒤로 두 겹 접힌 후 팔꿈치와 복부를 지나 왼쪽 어깨로 넘어가며, 반대쪽 대의자락은 두 겹으로 접혀 수직으로 내려와 결가부좌한 다리 위에 펼쳐져 있다. 대의 안쪽에 입은 편삼은 왼쪽 어깨에서 수직으로 내려온 대의 자락 끝부분과 겹쳐 있다.

하반신을 덮은 대의 끝자락이 S자형을 이루고, 세 번째 자락이 중앙으로 길게 늘어져 끝부분이 납작하게 접혀 있으며, 그 옆으로 파도가 일렁이듯 동일한 형태의 끝자락이 펼쳐져 있다. 왼쪽 측면은 대의자락 한 가닥이 길게 늘어져 Y자형으로 접혀 있다. 소매 자락은 오른쪽 무릎을 완전히 덮을 정도로 넓게 펼쳐지고, 안쪽에 몇 가닥의 주름이 새겨져 있다. 대의 안쪽에 입은 승각기 상단은 넓은 연판문을 중심으로 단정하게 접힌 주름이 좌우 대칭을 이룬다. 이와 동일한 형태를 가진 불상으로는 제작연대가 밝혀지지 않은 북한 지역의 배천 강서사 대웅전 수미단에 봉안된 목조여래좌상과 목조보살좌상이다.

이 목조불상은 손과 손목이 갈라져 있어서 나무로 제작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목조여래좌상은 머리에 뾰족한 나발과 경계가 불분명한 육계로 표현되고, 육계 밑에는 반원형의 긴 중간계주가 있다. 머리와 나발은 청색으로, 중앙계주의 테두리는 진한 청색으로 칠해져 있다. 계란형의 얼굴에 턱이 약간 뾰족하고, 좁고 오똑한 코와 얇은 입술이 다른 조각승이 만든 불상의 표현과 차이가 난다. 얼굴에 비해 귀가 크고, 목은 원통형으로 긴 편이며, 완만한 형태의 삼도(三道)가 새겨져 있다.

착의법은 석가불로 편삼을 걸치지 않아 오른쪽 손목이 노출되어 있다. 바깥에 걸친 두꺼운 대의는 오른쪽 어깨에서 대의자락 끝단이 가슴까지 U자형으로 늘어지고 그 뒤로 두 겹 접힌 후에 팔꿈치와 복부를 지나 왼쪽 어깨로 넘어간다. 그리고 왼쪽 어깨에서 두 겹으로 접힌 대의자락이 수직으로 흘러내리고, 왼쪽 어깨에 U자형으로 접힌 옷자락이 끝부분에서 뒤쪽으로 삐쳐있다. 조선후기에 제작된 불상의 대부분은 대의자락이 접힌 부분이 측면에 늘어져 있는데, 배천 강서사 목조불상은 앞쪽에 늘어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 17세기 중반 영철 스님이 만든 대표작인 1649년 서울 화계사 목조지장보살좌상(사진 왼쪽)과 황해 배천 강서사 목조여래좌상(사진 오른쪽) 사진제공=동북아불교미술연구소·조계종 민족공동체추진본부
하반신을 덮은 대의 끝자락이 짧게 늘어지고, 두 번째 자락이 넓게 펼쳐져 있으며, 세 번째 자락이 복부에서 밑으로 완만하게 흘러내리고 있다. 왼쪽 무릎에 늘어진 소매 자락의 양 옆이 둥글게 접혀 있으며 밑으로 넓게 펼쳐져 있다. 가슴을 덮은 승각기는 상단을 한 번 말아 도톰한 앙련형(仰蓮形)으로 표현되었다.

목조보살좌상은 화염문(火焰文)이나 운문(雲文) 등의 장식이 없어진 뾰족한 형태의 커다란 보관을 쓰고 있다. 얼굴형과 이목구비(耳目口鼻)에서 풍기는 인상은 본존과 거의 유사하다. 그러나 보살상은 조선후기에 제작된 보살상이 대의와 편삼을 걸친 것에 비하여 양 어깨에 천의를 두르고 있다. 이와 같은 조선후기 천의식 보살상 중 제작연대를 알 수 있는 작품은 2-3점밖에 남아 있지 않다. 그리고 하반신에 걸친 치마의 상단이 레이스 같이 촘촘하게 접혀 있고, 팔목과 팔뚝의 팔찌는 조선전기 보살상에서 볼 수 있는 요소이다.

배천 강서사 봉안 목조여래좌상은 조선후기 전형적인 불상의 각진 방형 얼굴이 아니라 계란형으로 턱이 약간 뾰족하다. 특히, 가늘고 뾰족한 콧날과 좁은 인중 등의 표현은 조각승 사인이 1649년에 전북 순창 회문산 만일사에서 제작한 목조여래좌상(포천 동화사 봉안)과 가장 유사하다. 그런데 이 포천 동화사 불상을 만든 조각승 사인 스님은 1639년에 조각승 수연과 영철 등과 남원 풍국사 목조삼세불좌상(예산 수덕사 봉안)을 제작하였다.

따라서 강서사 대웅전 목조여래좌상의 상반신에 걸친 대의(大衣)가 오른쪽 어깨에 걸쳐 짧게 늘어져 있는 옷자락 표현은 사인 스님, 영철 스님, 운혜 스님이 1650년 전후하여 제작한 불상에서 볼 수 있는 요소이다.
그러나 같은 시기에 활동한 무염 스님, 도우 스님, 승일 스님 등이 제작한 불상의 오른쪽 어깨에 걸친 대의자락 형태와 차이가 많다.

또한 하반신에 걸친 옷자락의 가장 안쪽 대의자락 끝부분이 곡선으로 처리된 표현도 1649년에 사인이 만든 순창 만일사 목조여래좌상(포천 동화사 봉안)이나 1650년에 제작된 해남 서동사 목조삼세불좌상에서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왼쪽 무릎에 늘어진 소매 자락은 양 옆이 둥글게 접혀 있으며 밑으로 넓게 펼쳐져 있는데, 이러한 소매자락의 처리도 조각승 사인 스님이나 운혜 스님이 제작한 불상에서만 볼 수 있는 요소이다.

따라서 현재 북한의 강서사에 봉안된 목조여래좌상과 목조보살좌상은 수연의 계보에 속하는 조각승 영철 스님이 1650년대 제작한 불상이라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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