禪과 현대미술- 조셉 코수스 (Joseph Kosuth)

코수스의 작품 ‘Nothing의 사전적 정의(1966)’는 선사상 관련 서적에 읽던 작가가 ‘무’의 개념에 충격을 받고 만든 것이다. 대상의 접근에 대한 그의 사유를 알 수 있다.
현상적으로 보이는 것들에서 새로운 개념을 부여하는 것은 어떠한 의미가 있는 것일까? 일상에서 접하는 다양한 자연환경이나 사물들에게 이름을 붙여 부르고 있다. 소통을 위한 하나의 방법이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고착화된 이름으로 변화해 가고 있으며 이는 다시 관념적 사고를 유발시키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조셉 코수스(Joseph Kosuth, 1945~, 미국)는 이러한 고착화된 이름들과 관념화된 개념들에 의문을 제기하며 다양한 인식의 확산을 모색하였다. 누군가에 의해 명명된 이름은 그 사물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이며 단지 그 사물을 인지하기 위한 하나의 기호에 불과한 것이다.

예를 들면 밖에 보이는 나무를 보고 나무라고 누군가가 이름을 붙여줘 나무라고 부르고 있다. 하지만 원래의 나무는 그 나무라는 이름과는 관계가 없다. 그러면 어떠한 것이 진짜 나무인가?

조셉 코수스는 이러한 언어의 구조와 선사상에 대한 깊은 성찰로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 가며 관념적인 생각과 관습에서 벗어나는 길을 제시하고 있다. 선사들이 선문답을 하며 제시되는 대상들이 질문과 무슨 관계성이 있는가에 깊은 생각에 이른 코수스는 대상의 이름에 그것의 의미와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선사에게 깨달음을 물으니 선사는 ‘뜰 앞의 잣나무’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잣나무는 깨달음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만약 선사의 앞에 작은 꽃이 있었으면 선사는 뜰 앞의 꽃이라고 하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말하는 사람의 마음을 인지하는 방법으로 제시된 대상이나 이름에 집착하여 그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면 언어는 아무런 기능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조셉 코수스의 대표적인 작품 중의 하나가 바로 이러한 관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는 3개의 의자를 제시한다. 첫 번째는 의자를 찍은 사진이다. 두 번째는 실제 앉을 수 있는 의자이다. 세 번째는 의자의 사전적 의미를 글로 제시한 것이다. 처음 이 작품이 제시되었을 때 많은 사람들은 혼돈에 빠지게 된다. 자신들이 일상에서 무심하게 사용하던 의자가 진정한 의자였는지 생각하게 되었으며 나아가서 언어의 구조에 의한 생각이 지배되고 있음을 이해하게 되었다. 독자 여러분들께서는 어떠한 의자가 진정한 의자라고 생각하시는지 궁금해진다.

세상을 보는 관점에 따라서 또는 사용하는 언어나 문자, 기호, 색채에 따라서 다양하게 대상을 인지하고 활용하는 일상의 삶의 과정에서 그러한 것들이 모두 허상이라는 것을 인지하는 것은 쉽지가 않다. 오히려 자신이 경험하거나 인지하는 것이 정당하고 합리적이라는 자기 최면에 걸려 다른 사람들의 관점을 부정하고 모순되었다고 생각하는 경우를 우리는 흔히 볼 수 있다.

필자 역시 오랜 시간 자신이 축적한 지적능력을 자신만의 최고의 가치인 듯 학생들에게 가르치며 자부심을 가진 적이 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 모든 것이 허상이었다는 것을 알아차린 지금은 나의 지적인 부분을 모두 없애는 시간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렇게 되니 학생들의 생각이 깊이 있게 느껴지기 시작하였으며 왜 그러한 생각과 표현을 하는지를 알아볼 수 있는 힘이 생겼다. ‘나’ 라는 존재를 내세우지 않으니 타인의 마음의 움직임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Nothing의 사전적 정의>는 1966년 작품으로 그의 작품에 대한 생각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당시 선사상에 심취하여 많은 관련 서적들을 탐독하던 그에게 가장 크게 다가오는 단어는 ‘Nothing’, 바로 ‘무(無)’였다. 현실은 무수히 많은 것들이 현상적으로 존재하는데 아무것도 없다는 것은 그에게는 충격적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없다는 것을 알아가는 과정에서 ‘Nothing’을 사전적으로 검토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사전적 의미를 아무리 찾아보아도 무에 대한 것은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시각적으로 보이는 것인데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시간이 흐르면서 그는 점차적으로 보이는 현상은 본질과는 관계가 없거나 작은 표상일 뿐이라는 것을 인지하기 시작하였다. 표상에 그 어떠한 이름이나, 기호, 색채를 부여하여도 본래의 의미와는 관계가 없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대상을 인지하고 분석하기 위하여 우리가 취하는 방법은 그 대상의 이름과 사전적, 철학적, 종교적 의미를 통섭하게 되는데 이것 또한 본질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대상은 본래 그 자체의 모습과 의미와 가치를 가지고 존재하고 있다. 이를 보는 사람들에 의하여 다양한 방법으로 포장되거나 해석되고 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소통에 많은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스위스의 언어학자 소쉬르(1857~1913)의 언어구조학에서도 언어는 언어외적인 요소와 관계성이 적음을 이야기 하고 있다. 즉, 언어는 대상의 기호이며, 소통을 위한 방법이지 대상의 본질을 밝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면 대상의 본질은 어떻게 접근할 수 있으며 이해할 수 있는 것일까?

조주 선사께서 스승이신 남전선사의 깨달음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깨달음을 얻은 것은 그 언어의 구조나 이해가 아닌 마음의 소통이 이뤄졌기 때문이다. 코수스 역시 이러한 선사들의 문답처럼 일상의 삶의 과정에서 마음으로 소통해야 한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없다는 것은 없는 것이 아니라 있다는 것의 상대적으로 없다는 것이다. 원래 없는 것은 없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 작품을 통하여 그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작품 ‘3 Neonlicht(1966)’는 세 가지 색채의 동일 문장을 보여줌으로써 현상의 시각적 변화를 나타내고 있다.

<3 Neonlicht, 1966>는 존재의 또 다른 현상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NEON ELECTRICAL LIGHT ENGLISH GLASS LETTERS BLUE EIGHT’를 네온처럼 글씨에 색채를 넣어 세 가지 색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동일한 문장에 색채(GREEN, BLUE, RED)에 대한 글씨만 다르게 하여 그 글씨에 맞는 색채의 네온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색채이다. 앞의 작품에서는 언어, 문자 등을 통하여 본래의 본질을 찾아가는 방법들을 사용하고 있다면 이 작품에서는 색채를 통하여 본래의 의미를 찾아가고자 하는 것이다. 동일한 문장에 색채를 다르게 함으로 해서 시각적으로 보이는 현상의 변화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현상은 시시각각 변화한다. 현상이 변화한다고 하여 본래의 본질이 변화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다양하게 변화하는 현상을 통하여 본질을 찾아간다는 것이다. 이처럼 다양한 현상이 없이 단순한 현상만 있다면 오히려 관념적사고가 깊어질 것으로 생각되는 부분이다.

조셉 코수스는 예술의 개념을 새롭게 정립하는 과정을 만들어 가며 ‘개념미술’의 선구자가 되었다. 예술의 영역에 선사상 개념들을 도입하여 화두를 던지는 방식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이제 예술은 대상을 재현하거나 왜곡·변형하는 것에서 벗어나서 마음의 본래자리를 찾아가는 방법으로서의 예술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에게 예술을 하는 행위는 수행자가 화두를 들고 수행하는 과정과 흡사하다 할 수 있다. 화두를 스스로 연마하여 새로운 현상을 만들어 내는 과정을 통하여 그는 본질(깨달음)에 접근하고자 하는 것이다.

일부의 비평가들은 그의 이러한 예술에 대하여 예술이 너무 철학적이라고 비판하는 경우도 있다. 많은 예술가들이 자신의 예술을 통하여 사회와 소통하고 새로운 현상을 보여주며 다양한 사고력을 향상시키는 역할을 하여 왔다면 코수스는 “예술가는 예술의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 가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예술의 영역에서 표현되고 있는 다양한 사상이나 철학, 문화, 종교 등이 이제는 새로운 방법들을 찾아나서는 시대가 되었음을 그는 대담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조셉 코수스는 물거품처럼 일어나는 현상을 인지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하고 있다. 물거품은 파도에 의하여 일어나며 시간이 지나면 사라진다. 하지만 또다시 파도에 의하여 생겨난다. 이처럼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동안에 무엇이 변화하는가’에 그는 많은 관심을 가지며 본질에 접근하는 방법들을 다양하게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혹자는 물거품은 본질이 아니기 때문에 본질에 다다를 수 없다고 하는 경우도 있지만 필자의 짧은 소견으로는 물거품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본질에 대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즉, 물거품은 생각에 변화를 주는 자극제인 것이다. 그것에 집착하여 허상에 잡히지만 않는다면 물거품은 훌륭한 스승이 될 수 도 있다는 것이다.

코수스가 추구하는 개념미술은 이처럼 현상에 집착하지 않으며 현상을 현상으로 활용하는 방법들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에게 예술행위는 자신의 존재가치와 현재의 삶을 일치시켜 나아가는 과정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그가 제시하는 표현방식은 기존의 예술적 기준에서 벗어난 것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 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현상에만 집착하지 않는다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라는 것을 코수스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수행의 과정에서도 중요한 것은 자신만의 방식을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이라 생각한다.

기존의 가치들을 존중하지만 그것이 현재의 자신을 변화시키지 못한다면 새로운 개념으로 수행방식을 정립하는 과정이 필요해 보인다. 현실에서 일어나는 물거품이 스스로를 단련시켜주는 것처럼 그 현상을 어떻게 활용하는가가 중요한 관점이 되는 것이라는 생각이 그의 작품 속에서 암묵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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