士禍 피해 낙향 후 은둔하며 시 교유

성균관 합격 후 이황과 인연
정미사화로 고향에 내려가
학문연구와 인재양성 주력
석존·공사상 담은 시 지어

호남시단을 이끌었던 하서 김인후(河西 金麟厚, 1510~1560)는 수많은 승려들의 시축 말미에 제발(題跋)을 썼던 인물이다. 그의 자는 후지(厚之)이며 하서(河西), 담재(湛齋)라는 호를 썼다.

어린 시절 김안국(金安國)에게 소학을 배웠고, 1531년 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한 후 이황(李滉)과 깊이 교유하였다고 한다. 1540년 별시 문과에 급제, 권지승문원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에 임용된 그는 이듬해 호당에 들어가 독서에 전념할 수 있는 사가독서(賜暇讀書)의 기회를 얻었다. 그가 세자를 보필하고 가르치는 홍문관박사 겸 세자시강원설서, 홍문관부수찬으로 임명된 것은 1543년이다. 하지만 그가 살았던 시기는 정치적으로 혼란하여 을사사화(乙巳士禍) 이후 모든 관직을 사양하고 장성으로 돌아가 성리학 연구와 후진 양성에 전념하였다.

대립과 알력으로 얼룩진 정치적 정쟁은 문정왕후의 형제인 윤원로(尹元老), 윤원형(尹元衡)이 경원대군을 세자로 책봉하려 꾀하자 세자의 외숙인 윤임과의 대립에서 시작되었다. 결국 대윤(윤임 일파)과 소윤(윤원형 일파)으로 양분된 조정은 조신과 사림으로 갈라지고 외척을 중심으로 궁, 정내부의 갈등이 촉발된 것이다.

이후 정미사화가 일어나 수많은 대윤파가 희생되었다. 실로 정미사화는 문정왕후의 수렴정치와 이기 등의 정치적 농간을 비난하는 양재역(良才驛) 벽서사건(1547)에서 촉발된 것이지만 소윤파가 정치적 입장을 달리하는 대윤파를 제거하기 위한 것인데 이로 인해 희생된 사람만도 100여 명이 넘었다. 윤원형의 세도정치와 수렴청정의 폐단은 극에 달했다. 명종의 친정(親政)이후에도 그 폐단은 수그러들지 않았으며, 신진사류가 정치에 복귀한 것은 문정왕후가 죽고 윤원형이 정치적으로 몰락한 1565년 이후이다. 당시 노수신, 유희춘, 백인걸 등이 요직에 복권되고 재야의 신진사류들이 등용되면서 정계는 사림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결국 사화를 피해 고향에 내려가 은둔했던 유학자들은 학문연구와 인재양성에 전념했으니 이런 시대적 상황은 성리학이 발전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다. 특히 사림의 학문적 도장이었던 서원(書院)은 정론(政論)을 자유롭게 토론하는 토론장이었다. 후세에 서원은 당론의 진원지가 되었을 뿐 아니라 붕당정치의 온상이 되기도 하였다. 결과적으로 서원의 발달은 정치, 문화적 특성뿐 아니라 정치 투쟁의 새로운 양상을 만든 요인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정치적 상황에 처했던 김인후가 모든 관직에서 물러나 장성으로 낙향,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던 것은 기묘사화 때 억울하게 죽은 선비들의 신원을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일과 을사사화 때문일 것이라 여겨진다. 그렇다면 그는 그가 처한 시절이 난세였음을 예견이라도 한 것일까. 후일 그가 필암서원에 배향된 인물 중 유일한 호남인이었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 필암서원은 김인후의 높은 절의와 학문을 숭앙하기 위해 그의 문인들이 1590년(선조 23) 전라남도 장성군 황룡면 기산리에 세운 서원이다. '필암'이라는 이름은 김인후 고향인 맥동에 붓처럼 예리한 형상의 바위가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전해진다.

한편 김인후는 기대승(奇大升)과 이항(李恒) 사이에서 논란되었던 태극음양설(太極陰陽說)에 대해 기대승의 입장에 동조하였다. 태극음양에 이기(理氣)가 혼합되어있기에 태극은 음양을 떠나 존재할 수는 없다. 하지만 도()와 기()의 구분이 분명하므로 태극과 음양이 일물(一物)이라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당시 기대승은 이항의 태극음양일물설(太極陰陽一物說)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 이뿐 아니라 김인후의 수양론은 성경(誠敬)을 주된 목표로 삼았으니 이는 후일 기대승의 주경설(主敬說)에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특히 시문에 밝았던 그는 당풍적(唐風的) 표현에 능해 대상에 대한 관조와 함축적 표현으로 흥취를 돋워 말의 여운을 살려내는 특징을 지녔다. 그의 도학적 기질과 맑고 빼어난 인품은 그의 시에 내재된 품격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시에 밝았던 승려들은 자신의 시축에 김인후의 제발(題跋)이 실리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했던 듯하다. 그가 교유했던 어떤 운수승(雲水僧)에게 준 운수 승려에게 주다(贈雲水僧)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구름도 비고 물 또한 텅 빈 것이니(雲虛水亦虛)
물성 또한 이와 같아라(物性亦如此)
하나는 형기에 구속되고(一爲形氣拘)
하나는 사욕에 묶임이라(一爲私欲累)
흘러가 돌아올 줄을 모르는 건(去去不知返)
망연히 탐함에서 본래 시작됨이라(茫然昧本始)
마음의 굳셈이 절로 이와 같으니(方寸固自如)
밝고 지긋한 이치 포용함이라(昭昭涵至理)
좋은 실마리가 발현되니(善端有發見)
미루어 그 그침을 아네(推之止其止)
용신을 따라 변화하니(從龍神變化)
가도 때에 그침이 없네(逝者無時已)
행함에 사심이 없기에(動之以無私)
잠시 구름과 물을 바라보누나(試看雲與水)

김인후의 노련한 시어 배치가 돋보이는 시다. 바로 증운수승(贈雲水僧)에서 주제어로 운수(雲水)를 뽑아내 구름과 물, 그리고 물과 구름처럼 한곳에 머물지 않는 승려의 의미를 부각하였다. 더구나 구름과 물은 실체가 없는 것, 그러므로 빈 것이라 하였으니 이는 불교의 공도리(空道理)를 표현한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흘러가 돌아올 줄을 모르는 건/ 망연히 탐함에서 본래 시작됨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좋은 실마리가 발현되니/ 미루어 그 그침을 아네라고 한 것이니 행함에 사심이 없기에 차별이나 분별없이 운수승을 볼 수 있다는 그의 포용력을 드러낸 것이라 하겠다. 바로 그가 도학에 밝은 인물로 보는 연유는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가 쓴 여러 편의 시 중에 수안 스님이 찾아 와 시축에 글을 써달라는 요청이 있어 쓴 시의 내력도 재미를 더 한다. 당시 그를 찾아 온 수안 스님의 시축에는 자신의 벗인 귤정, 영천, 송강, 몽와, 이계진의 시가 있었다는데 이런 내력은 이 시의 모두(冒頭)승려 수안이 신길원, 희남의 편지를 가지고 찾아왔다. 시축 중에는 귤정, 영천, 송강, 몽와, 이 상사 계진의 시가 있었는데 송강의 시 두 편 중에 하나는 스스로에게 말한 것이고 하나는 승려에게 말한 것이다. 이에 본받아 쓰다. (山人守安 以愼吉遠喜男之書來謁 軸中有橘亭 靈川 松江 夢窩及李上舍季眞之詩 松江二詩 一自道 一道僧 仍效之)”라고 한 것에서 확인된다. 수안 스님에게 준 시는 다음과 같다.

병들어 산촌에 옮겨 온 후론 사람을 보지 않았더니(病落山村不見人)
무슨 방법으로 고승에게 나아가 서로 친하리(何方白足就相親)
송강과 귤정 노인, 영천의 시구(松江橘老靈川句)
시권을 읊조리니 이보다 진기한 건 없으리(把卷行吟莫此珍)

그가 병들어 산촌으로 옮겨 왔다고 한 것은 아마 장성으로 낙향하여 은둔했던 정황을 말하는 듯하다. 그러므로 고승인 수안 스님과 무슨 방법으로 친할 수 있겠느냐는 말이다. 그러므로 고승이 가져온 시축 속에 수록된 벗들의 시를 읊조리는 일이 세상에서 가장 진솔한 일상이라고 강조하였다. 소박한 삶을 즐긴 그는 특별히 차를 즐긴 선비였다. 이는 석헌선생의 시운을 차운하여 신도승려에게 주다(次石軒先生韻 贈信道上人)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 내용은 이렇다.

산중에 적막 하나를 실어 와서(山中輸一寂)
골짜기 밖 온갖 번잡함을 물리쳤네(谷外謝千譁)
순경봉 아래(唇慶靑峯下)
강천의 푸른 물가에서(剛泉綠水涯)
바람을 타던 열자를 사모하고(御風閒慕列)
해를 쫓던 과보를 가엾게 여기네(逐日苦憐
)
나 또한 세상의 근심을 씻고자 하니(世慮吾要滌)
몇 잔 차를 나누어 주게나(分渠數椀茶)

()은 고요한 마음 상태를 말한다. 과보()는 해와 경주를 하다가 지치고 목이 말라 죽었다는 신화 속의 인물이다. 바로 신도 스님이 난마처럼 얽힌 세상일에 분주한 속인을 가엾게 여긴 수행자라는 말이다. 신도 스님이 산중에서 적막을 실어와 골짜기 밖 온갖 번잡함을 물리쳤다는 것이니 유불(儒佛) 교유의 상보(相補)란 이처럼 또렷했다. 따라서 그는 속진을 씻기 위해 걸명(乞茗)한 것이니 차는 예나 지금이나 세상의 근심을 풀어주는 매개물임이 분명하다.

이뿐만이 아니다. 그는 석존 탄신일에 짓다(釋奠日作)에서 고인의 실덕을 존경하여(古人尊實德)/ 지금에도 중한 이름, 널리 퍼졌네(今世重浮名)/ 공손히 제육과 술을 받으니(拜受兼酒)/ 오래도록 성령의 은혜를 입었네(春秋荷聖靈)”라고 하였다. 석가의 탄신일에 제육과 술을 받고 석가의 은혜를 입었다고 한 점에서 그의 불교에 대한 시각을 어느 정도 점칠 수 있다. 또 그의 다른 시 석견 승려에게 주다(贈釋堅上人)에는 당시 승려들이 그의 글을 구하고자 했던 정황을 자주 속진에 사는 나를 찾아 와(頻尋塵裏榻)/ 시축에 글을 요구했네(要就軸中篇)”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공무에 분주했던 상황에서도 시를 지어 주어야하는 현실을 내 행차 다급히 한양으로 향하고(吾行急)/ 그대 자취 호수 그림자에 편향되었지(湖陰爾跡偏)/ 허겁지겁 지은 시 팔구로(詩八句)/ 다른 곳에 있던 날을 서로 기억하리(相憶在他年)”라고 한 대목에서 드러난다. 아무튼 그가 많은 승려들의 시축에 남긴 시문은 오래도록 세상에 회자될 것이다. 이뿐 아니라 그와 승려들의 교유에 중요한 매개는 시와 차였다는 사실도 이를 통해 알 수 있다. 또한 천문, 지리, 율력(律曆), 의학에도 정통했던 그는 정철(鄭澈), 변성온(卞成溫), 기효간(奇孝諫), 조희문(趙希文), 오건(吳健) 같은 제자들을 길렀다. 저서로는 하서집, 주역관상편(周易觀象篇), 서명사천도(西銘事天圖), 백련초해(百聯抄解)등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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