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자유의 길에 대한 소고

성에 지배받지 않는 마음
참된 본성 깨닫는 진일보
이분법적 사고조차 버려야

색욕의 문제, 즉 성의 문제에 대하여는 꽤 오래 전에 말씀드렸던 적이 있지요? 출가자와 재가자는 기(機), 즉 조건이 다르다는 이야기부터 했었지요? 부처님의 설법은 대기설(對機說), 즉 어떤 상황과 조건에 따라 주어진 방편이니까, 출가자란 조건과 재가자란 매우 다른 조건에 대하여 똑같이 말해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출가 스님들은 재가자에게 모든 생활에 필요한 것을 지원받으면서 모든 힘을 수행에 쏟는 존재이기에 그분들에게는 성적인 에너지를 철저히 통제하라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 됩니다.

반면 재가자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지요. 일상생활을 영위해야하는 재가자가 성적인 것을 죄악시하게 되면 상당히 큰 문제가 됩니다. 부부생활을 하면서 성행위를 죄악으로 여기게 되면 어찌될까요? 부부간에 사랑을 나눌 때마다 “죄 한번 짓겠습니다” 참회하고 해야 되지 않겠어요? 그건 이상한 이야기지요?

이런 이야기까지 전에 했던 것 같네요. 물론 나칠계님은 전혀 처음 듣는 이야기라고 하셔서 저에게 매우 보람을 느끼게 하는 분일 것 같습니다마는…. 하하. 그러니까 성(性)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를 불교의 근본 태도라고 여겨서는 안 된다는 말씀이었지요. 그리고 출가자라는 조건에 주어진 가르침이 마치 불교 자체인 것처럼 여겨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여기서는 이에 더 보태어, 앞에서 이야기한 남녀평등에 대한 관점을 바탕으로 한 성관념을 좀 강조해야 할 것 같습니다. 오랜 동안 남성의 여성에 대한 지배를 전제로 한 성 담론이 일반화되어 있었거든요. 성애(性愛)와 성욕(性慾)의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서도 그랬지요. 이젠 이런 차등적인 관점을 벗어나야 합니다. 불교가 앞장서야 합니다. 남성과 여성의 성을 평등하게 다루면서, 성 자체를 죄악시하지 않고, 성적인 사랑이 정신적인 사랑과 서로 보완적이 될 수 있는 적극적인 방향을 제시해야 합니다.

자기만족만을 꾀하는 성적인 사랑, 상대방을 소유하려는 집착을 바탕으로 한 성적인 사랑이 아니라, 그것을 바탕으로 상대방을 배려하는 정신적인 사랑으로 나아가게 하고, 소유하려는 집착이 아니라 상대방을 성숙시키고 자유롭게 하는 사랑이 되도록 하는 길을 제시해야 합니다. 이런 모색이 이루어지는 첫 번째 고리는 역시 성에 대한 부정적 관념의 극복입니다. 성을 죄악시하는 것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전에 한번 다룬 주제니까 이만큼 이야기하고 서유기 줄거리로 가 볼까요? 물론 서유기에서는 삼쾌선생이 말하는 것과 같은 진보적인(!) 성에 관한 이야기는 없습니다. 그저 색욕에 불타는 전갈 요괴와 수행의 길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고자하는 현장법사의 대립구도가 있지요. 다른 한편으로는 현장법사의 양기를 빼앗아 자기의 음기를 북돋우려는 전갈요괴와 “어찌 분바른 해골에게 나의 귀한 양기(眞陽)를 뺏길 것인가?”하는 도교수행자의 대립으로 묘사되기도 합니다. 요괴는 온갖 방법으로 현장법사 유혹하여 운우지정을 누리고자 하는데 현장법사는 정말 일편단심으로 불법의 길에 서서 스님의 계행을 지키는 대목! 서유기의 멋있는 표현을 직접 볼까요?

이런 묘사는 현장법사의 굳은 불심을 묘사한 것이겠지요? 그런데 다음과 같은 이야기는 도교적인 관점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요괴가 말한다. “꽃 아래서 죽으면 죽더라도 풍류귀신이 된다는 말도 못 들으셨어요?”

당나라 스님은 말한다. “나의 진양(眞陽)은 지극한 보배요. 어찌 그대와 같은 분바른 해골에게 넘겨주겠소?”
아무튼, 불교적이건 도교적이건, 현장법사는 전혀 흔들림이 없습니다. 서유기의 처음부터 끝까지 현장법사의 가장 뛰어난 점은 바로 이 흔들림 없는 마음입니다. 불법 수행의 바탕이 되는 다섯 가지 힘(五力) 가운데 현장법사는 바로 믿음(信)을 상징하는 존재이거든요. 이렇게 흔들림 없는 현장법사와 요괴가 부딪쳤으니 결과가 어찌 될지 뻔 하지요? 결국 심통이 난 요괴가 현장법사를 내쳐서 감금하고, 손오공 삼총사는 현장법사 구하려 요괴와 싸우게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 요괴가 또 정말 비보통 요괴네요. 허긴 서유기에 나오는 요괴치고 보통 요괴가 있겠어요? 손오공을 힘들게 하는 요괴라면 다 비보통이지요. 그저 그런 요괴라면 이야기 거리가 안 되니 서유기에 등장하지도 않았을 거구요. 아무튼 이 요괴가 어떤 점에서 비보통이냐 하면, 처음 손오공과 드잡이질을 할 때 갑자기 도마독장(倒馬毒)이라는 무기로 손오공 머리를 찌르는데, 이 한 방에 손오공이 견디지 못하고 달아날 정도입니다. 손오공 머리가 보통 머리예요? 원래 돌원숭이인데다, 온갖 수행을 해서 쇳덩이보다 더 단단해졌다 하고, 태상노군의 단로(丹爐)에서도 버텨냈던 슈퍼 돌머리지요.

그런데 그런 손오공이 “아이구 아파라! 못 견디겠다!”하고 달아날 정도로 아프게 하는 이상한 무기입니다. 무기 이름 자체가 ‘말도 거꾸러뜨리는 독을 가진 몽둥이’라는 뜻인데, 정말 엄청난 몽둥이네요. 다음 싸움에서는 저팔계가 주둥이를 얻어맞고는 줄행랑을 칠 수 밖에 없었지요. 그냥 팍 죽을 정도의 부상을 주는 것은 아닌데 도저히 견딜 수 없는 통증을 주는 몽둥이, 이상하게 피할 수도 없이 얻어맞게 되는 몽둥이네요. 그러니 싸움이 힘들어지는 거죠.

그런 힘든 상황에서 역시 구원투수, 관세음보살님 등장하십니다. 그런데 관세음보살님 말씀이 좀 이상해요. 웬만하면 직접 해결해주실 만도 한데 당신께서도 힘들다네요. 아니 부처님도 그 요괴의 이상한 독에 쏘여서 고생을 하셨다네요. 원래 그 요괴는 전갈의 요정인데 수행을 해서 큰 힘을 지니게 되었다나요? 인도 뇌음사 부처님 회상에서 경을 듣기도 했대요. 그때 부처님께서 가볍게 밀치셨는데 그 꼬리로 부처님 엄지손가락을 쏘는 바람에 부처님도 아픔을 참지 못하셨대요. 그래서 금강역사에게 잡으라 하였는데 도망쳐서 여기 숨어있는, 정말 비보통 요괴라네요. 그러면서 이 천상의 묘일성관(昴日星官)만이 이 요괴를 쉽게 잡을 수 있다고 귀띔! 그래서 당장 손오공이 천상세계 올라가서 묘일성관을 청해옵니다. 그런데 재미있네요. 이 묘일성관의 본신(本身)은 바로 엄청난 비보통 수탉입니다. 손오공이 요괴를 유인해 오고, 그 앞에 묘일성관 수탉이 나타나 “꼬끼요!” 한번 울어제끼니 요괴의 정체가 드러나고, 전혀 맥을 못 춥니다. 흐물흐물~. 그리고 까무룩! 죽어버립니다. 그 힘들었던 비보통 요괴가 허무하게 죽어 나자빠집니다. 저팔계가 분에 못 이겨 그 시체를 난도질하지요.

이 줄거리에는 몇 가지 숨겨진 뜻이 있을 것 같습니다. 우선 욕정으로 현장법사를 타락시키려 한 요괴의 정체를 전갈로 설정한 것이 매우 비유적이지요. 수행과정에서 성적인 유혹이 얼마나 치명적인 것인가를 비유한 것이겠지요. 보통 독을 가진 동물을 든다면 가장 대표적인 것이 뱀과 전갈입니다. 그래도 뱀은 독 없는 뱀도 있지만 전갈은 없는 것 같군요. 그리고 그 독이 말도 거꾸러뜨린다 하여, 색욕의 무서움을 극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금병매라는 소설의 첫머리에는 이런 말도 있지요. 예쁜 여자들이 허리 아래 보이지 않는 칼을 차고, 어리석은 사내들의 목을 벤다고…. 여색의 관문을 쉽게 넘는 남자들이 별로 없다는 이야기지요. 물론 남성중심사회의 표현입니다마는, 남녀를 불문하고 성욕의 관문을 넘기는 정말 어려운 것 같습니다. 손오공의 돌 머리도 그 독에 쏘이면 견디지 못한다고 한 것이 바로 그 어려움을 말한 것이겠지요.

그런데 그 뒷이야기가 너무 싱겁다구요? 그거 닭과 전갈이 천적관계라는 것을 슬쩍 이용하여 너무 쉽게 마무리를 한 것 아니냐구요? 우리나라에는 전갈이 없어 보통 지네와 닭이 천적이라 하지만 같은 이야기 아니냐구요? 맞습니다. 바로 그런 구도가 있습니다. 독한 전갈 요정과 수탉의 신, 이 구도 속에서 전갈 요정을 무찌르는 것이지요. 그렇지만 또 그 밑바닥에는 간단치 않은 설정이 또 깔려 있지요. 수탉에 대한 중국인들의 관념은 좀 특별하다는 것이지요. 수탉은 어떤 존재인가요? 새벽을 깨뜨리는 “꼬끼요!”로 어둠을 몰아내고 밝음을 이 세계에 들여오는 존재입니다. 같은 닭이라고 해도 암탉은 제외입니다. “암탉이 울면 집안 망한다!” 아닙니까? 새벽에 “꼬끼요!”로 어둠을 몰아내는 것은 수탉이지요. 음기가 가득하던 세계에 양기를 불러일으키는 존재지요.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삿된 기운을 깨뜨리고 바름을 드러내는 상징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자, 지금 전갈요괴는 삿된 존재이며, 암컷으로서, 음에 해당하며, 현장법사의 참된 양기를 갈취하여 자신의 음기를 북돋우려는 존재입니다. 전문적(?) 용어로 말하자면 채양보음(採陽補陰) 하려는 삿된 존재지요. 그런 존재를 물리치는 수탉의 신, 그것이 바로 묘일성관입니다. 새벽의 어둠을 깨뜨리는 “꼬끼요!”로 삿된 음욕의 관문을 무너뜨리는 상징적인 존재지요. 그렇게 서유기를 읽으면 이 대목이 매우 싱싱한 의미로 다가옵니다. 이제 현장법사는 색욕의 관문을 벗어나게 된 것이지요. 참된 본성을 회복하는데 한걸음 더 가까이 간 것이지요. 서유기에서도 이 대목의 마무리를 현장법사가 세속의 번뇌와 색욕을 극복하고 선심(禪心)을 깨우친 것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 수행의 힘든 여정에 밝은 빛을 들여놓는 “꼬끼요!”가 울린 것이지요.

아! 우리의 번뇌 가득한 고달픈 삶에는 언제 새벽을 여는 “꼬끼요!”가 들려올까요? 그 날이 올 때까지 현장법사처럼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정진해야 하겠지요? 그런데 나칠계님, 무언가 불만이 있으신 듯? 음…. 처음에는 성적인 것을 부정적으로 보면 안 된다고 하더니, 마무리는 삿된 것으로 몰아가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것 아니냐구요? 우와, 모처럼 날카로운 질문! 잘 물으셨습니다. 자칫하면 오해가 있을 수 있는 대목이거든요. 성적인 것을 부정적으로 보는 것은 아니지만, 불교의 궁극적인 목표인 온전한 대자유, 즉 해탈에 이르기 위해선 결국 그것으로부터도 자유로워야 한다는 것 또한 틀림없거든요. 부정적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과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자유로워져야 그것을 옳게 쓸 수도 있으니까요. 성에 지배받지 않고 그것을 옳게 쓰려면 벗어남의 과정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옳게 쓴다고 말하는 이상 부정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 되지요? 이 두 가지 사이에서 잘 생각해 봐야 할 것 같네요. 좀 어려운 이야기니까 다음에 다시 하기로 하고 오늘은 슬그머니…. 결코 나칠계님의 질문에 답을 못해서는 아닙니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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