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르릉~.” 정적을 흔드는 전화벨소리에 나른한 오후의 단잠에서 깨어났다. “내일모레 일본군 위안부 문제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법회가 있는데, 그때 법고(法鼓)를 울려줄 수 있으신가요?”

법고를 야외에서 울리기에는 여러 가지 여건상 쉽진 않지만 이런 현장에 법고가 빠질 수 없다는 생각에 해보기로 결정했다.

길 위로 옮겨진 법고를 법고대에 올리니 어른 키만큼이나 솟은 모양이 참 늠름하다. 주한 일본대사관 앞 평화로에 위치한 위안부 동상 옆에 나란히 놓으니 가냘픈 소녀상 머리 위를 법고 그늘이 살짝 덮는다. 아는지 모르는지 따가운 햇살을 온몸으로 막아주겠다는 법고의 따뜻한 마음 아닐까?

법고를 울리기 전 개인적으로 항상 하는 의식(?)이 있다. 일명 문성의식(聞性儀式)’이다. 바로 법고 울리는 곳의 뒷면을 쓰다듬거나 물끄러미 바라보는 의식이다. 그것은 앞쪽 면만으로는 소리가 날 수 없는 근본을 사유하는 것이고, 거침없고 힘차게 법고를 울리는 동안에도 근본을 잊지 않겠다는 스스로의 다짐이다.

▲ 그림 박구원.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법고를 야외로 옮겨 설치하는 것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던 것이다. 이 법회를 하는 목적과 어떤 마음으로 법연을 맺어야 하는지에 대한 이해가 부족함을 통감했다. 그제야 위안부 할머님들의 가슴속 응어리 맺힌 마음들이 북 표면에 덕지덕지 묻어 있는 게 느껴졌다. 얼마나 가슴에 깊이 담아 숨기고 싶었을까? 하지만 여성으로서의 상처와 수치심을 뒤로한 채, 지난날 그들의 어리석었던 행동과 만행에 대한 참회와 반성을 촉구하며 잘못을 되풀이하지 말아달라는 간곡한 외침은 얼마나 당당한가? 벌써 1200여회가 넘도록 우리들은 그 목소리에 얼마나 귀 기울였고 얼마나 더 큰소리로 외쳐야 그들의 가슴속까지 울릴 수 있는지는 모르지만, 진정 할머님들의 마음을 보듬어 줄 수는 있을까? 그 아픔과 고통을 어렵게 세상에 드러냈지만, 졸속으로 맺은 합의로 인해 이제는 그만하자고 위로 아닌 강요를 하는 이 형국에 또 얼마나 상처가 더해졌을까?

행사 시작과 동시에 천지를 울리는 기세로 법고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10여분을 북에 붙은 마음을 풀어내려 있는 힘껏 울렸다. 법고 소리는 구슬펐지만 땅속 깊숙한 곳에 묻혀있는 작은 평화를 일깨우기에는 충분히 힘찼다. 하지만 울리면 울릴수록 더욱 진하게 우러나오는 슬픔의 덩어리는 그칠 줄을 몰랐다. 그 짧은 시간에 깊이 묻어둔 응어리들을 풀어내겠다는 생각은 사실 오만이었다. 일본 본토까지 닿을 기세였던 북소리는 이내 도시의 소음, 자동차 경적소리와 기자들의 사진기 셔터소리, 군중들의 울부짖는 소리들로 다시 묻혀버렸다.

그래도 북의 앞면은 소리를 멈췄지만 뒷면은 여전히 울리고 있었다. 법고를 혼자서만 울린다고 생각했던 착각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그렇다. 법고시연은 끝났지만 인사말을 하셨던 스님들께서, 노래를 했던 친구들, 발언 및 성명서를 낭독하며 모인 이들, 그리고 이 할머님들의 외침을 듣고 마음을 모아준 우리 모두의 소리들이 법고를 울리고 있었던 것이다.

길게 느껴졌던 몇 시간의 행사가 아픔이 아닌 희망으로 채워질 수 있었던 건 우리들의 작은 기억과 따뜻한 손길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기의 울림이 꽁꽁 얼어붙은 가슴들을 녹여 함께 공명할 때까지 우리들은 그치지 않을 것이고 많은 이들의 관심은 계속될 것이다. 절망의 슬픔을 흔들어 깨우는 동시에 희망의 불씨가 꺼지지 않도록 함께 귀 기울여 들어보자. 꽃다운 소녀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소리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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