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된다 못된다 개의치 말고 용광로에 넣는 작업만 하라

내가 이렇게 놓는다고 해서
잘될까, 못될까 이런 건 걱정하지 말아야
이게 진짜 정통으로 놔지는 거죠.

왜 체계를 잡아서 이끌어 주지 않는지
질문 수년 동안 선원을 다니면서 공부를 해 나가고 있는데, 제가 어떤 단계에 있는지, 그리고 제가 어떻게 수행해 나가야 빨리 공부를 성취할 수 있는지 하는 것이 항상 의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유투브를 통해서 다른 스님이나 공부하시는 분들의 동영상을 보다 보니 수행의 단계를 구분해서 증표 같은 것을 주기도 하고, 어떤 단계에는 어떻게 공부해야 한다 하기도 하던데 선원에서는 왜 그렇게 체계를 잡아서 이끌어 주지 않는지요.

답변 내가 말을 하면 여러분이 먹을 것이요, 여러분이 질문을 해도 내가 먹고 없는 것입니다. 함이 없이 하는 도리가 바로 이 도린가 싶습니다.

여러분 중에도 지금 이러한 도리를 공부하는 데 대해서 갈등이 있거나 방황하는 분들도 많을 거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러고도 또 이건 대승(大乘)이니 소승(小乘)이니 하면서, 여기는 체계가 잡혔느니 잡히지 않았느니 하고 생각들을 하고 갈등을 가지고 있는 분들이 많으리라고도 생각합니다. 아주 없다고는 생각 안 합니다. 하나 우리가 지금 여기서 배우는 것은 생활이 참선이요, 생활이 바로 진리요, 자기 마음을 탐구하는 데 대해서는 앉는 것도 서는 것도, 눕는 것도 모두가 참선이 되고 좌선(坐禪), 와선(臥禪), 입선(立禪)이 따로 없다고 생각하는 이러한 도리를 지금 배우는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체계가 잡히지 않은 듯하지만 일체 만법의 체계가 잡혀 있는 것이 뭐냐 하면 바로 여러분이 지금 행하고 나가는 거, 질서를 지키고 도의를 알고 의리를 알고 사랑을 알고, 이러한 전체 모든 것을 아는 것이 바로 참선이며, 진리를 그대로 탐구하고 나가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대승이니 소승이니 하고 잘못됐느니 잘됐느니, 체계가 섰느니 안 섰느니 하고 그거 논의하다가는 여러분이 죽으러 가는데, 지금 관에 들어가야 할 텐데 어떻게 이것이 체계가 잡혔느니 안 잡혔느니, 대승이니 소승이니 하고 그런 거 생각하겠습니까? 지금 죽은 세상 50%를 탐구해야 사는 세상 50%를 같이 귀합을 시켜서 내가 자유롭게 살 수 있고 세세생생에 끄달림이 없이 윤회에 끄달리지 않게 될 텐데 말입니다. 그러니 인간의 참된 모습을 탐구하는 데에 지침이 될 거를 생각하면서, 지혜를 얻을 것을 약속하면서 이렇게 나가는 사람들이, 이것저것 따지다 보면 어떻게 죽은 세상에 가겠습니까? 자기 마음이 죽지 않은 이상에는 죽은 세상에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인공(主人空)” 하는 것을 예전에 육조(六祖) 스님은 이렇게 말씀을 하셨죠. “성품이 스스로 청정함을 내 어찌 알았으리까?” 그 마음을 말하는 거죠. “마음이 스스로 갖추어 가지고 있음을 어찌 알았으리까?” “스스로 물러나지 않는 마음을 어찌 알았으리까?” 즉, 물러서지 않는다 하는 것은 구족함을 말하는 거죠. “스스로 내 마음이 내고 들이는 것을 어찌 알았으리까?” 하는 겁니다. 일체 만법을 말입니다. 이것은 우주 천지가 인간의 마음에 직결돼 있어서 돌아가는 뜻을, 대천세계, 중천세계, 소천세계가 한꺼번에 돌아가는 이치를 다 종합한 뜻이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마음이 스스로서 직결된 거를 알고, 직결된 거를 알았으면 스스로서 자유롭게 굴릴 수 있다는 얘기죠. 지난번에도 얘기했지만 팔 법륜 마크가 그렇게 생기지 않았습니까? 사유 사무(四有四無), 사무 사유라고 해도 되고 말입니다. 바로 일체가 인간의 마음에 직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걸 깨달으면 스스로 그렇게 청정함을 알고, 스스로 갖추어 있는 거를 알고, 스스로 그렇게 구족함을 알고, 스스로 참, 일체 만법을 들이고 내는 그 자유자재함을 자기가 알고, 스스로 그렇게 하는 거지 누가 그것을 갖다 주고 뺏어 가고 이러는 것도 아니거든요.

그런 공부 하는 데 대해서 그것이 다 포함된 것을 ‘주인공’이라고 한단 말입니다. 한마음이라는 이 부처, 부처가 없는 게 부처다 했죠. 한마음이라는 뜻은, 이것은 어떠한 대(對)가 없는 게 한마음이야. 어떠한 그 뭐가 붙지 않는 것을 한마음이라고 그러거든. 그러니 그 한마음의 도리는 돌아(원을 그려 보이시며). 한마음으로 돌아가니까 육체도 모두가 같이 돌아가는 거야, 상대로 인해서. 내가 아니라면 상대가 살 수 없고 상대가 아니라면 내가 살 수 없듯이, 모두가 이렇게 해서 한꺼번에 돌아가니까 그 돌아가는 찰나 생활이 한꺼번에 계합이 된 그 뜻을 주인공이라고 한 거라. 그러니 그 주인공은, 즉 말하자면 전체가 한데 합쳐진, 어떻게 말로 다 할 수 없으니까 전체가 합쳐진 그것을 용광로라고도 하고 자가발전소라고도 하고 여러 가지로 표현을 했습니다.

그래서 잘되고 못되는 거, 나중에 잘된다 못된다 이거는 개의치 말고 용광로에 넣기만 하는 작업을 하라 하는 것입니다. 용광로에 넣기만 하는 작업을 한다면 재생돼서 나오는 쇠는 자동적으로 스스로 나오니까. 내가 이렇게 놓는다고 해서 잘될까 못될까 이런 건 걱정하지 말아야 이게 진짜 정통으로 놔지는 거죠. 내가 이렇게 주인공에게 모든 것을 다 일임해서 놓고 난 뒤에 재차 ‘아이고, 이렇게 놓는다고 저 일이 될까?’ 이러한 생각을 한다면 그건 용광로에 정통으로 들어간 게 아닙니다. 그래서 나중에 재생돼서 나오는 거는 생각지 말고 여기 (가슴을 짚어 보이시며) 넣는 작업만 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렇게도 표현을 했습니다. 그 아주 높은 산꼭대기, 제일 높은 데를 올라가는데 무엇을 자꾸 짊어지고 갈 바가 뭐 있습니까? 자꾸 놓고 가야지. 사람 몸뚱이 하나 올라가는 것도 무거운데 어떻게 자꾸 생기는 대로 짊어지고 가겠습니까? 그러니 올라갈 때는 다 놓고 올라가시라 이겁니다. 조금만 뭐가 보이는 게 있고 들리는 게 있고 이러면은 그냥 자만하고, 또 나쁜 게 보이고 좋은 게 보이고, 미운 게 보이고 이쁜 게 보이고, 이걸 일일이 욕심내고, 그 아집을 가지고 나라는 조건에서 영 한 발짝도 떼 놓지 못한다면 거기, 자기가 갈 수 있는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합니다. 내 짐도 무거우니까, 이 몸도 공(空)해서 이것도 놓고 지금 터벅터벅 가는 바 없이 가고 있는데 자꾸 짊어질 게 뭐 있느냐는 얘깁니다.

다 놓고 가다 보면 맨 상봉 꼭대기에 올라갔을 때 비로소 모두 그 위에서 내려다보이더라 이거야. 전체를 볼 때하고 조그만 개별적인 거 볼 때하고는 전혀 다르게 보이더라 이거야. 전체가 보이는 걸 보니까 ‘아이고, 저기서 일어나는 것이 여기로 인해서 일어나고, 저기로 인해서 여기서 일어나고 이렇게 되니깐, 이쪽을 누르면 저쪽이 눌러지고 이쪽이 이렇게 자꾸 일어나니까 어떤 거를 손을 댈 게 없더라.’ 이렇게 되죠. 그래서 잘못하고 잘하고 그것이 없더라는 얘기죠. 남녀노소도 따로 없고. 무(無)의 세계, 유(有)의 세계를 다 합쳐서 보니까 그렇더라는 얘기죠. 또 동서가 둘이 아니고 남자 여자가 둘이 아니고, 대승 소승이 둘이 아니요, 어려운 사람 부자 사람 이것이 둘이 아니요, 권세 없는 사람과 권세 있는 사람과 둘이 아니요, 항상 뒤바꿔지더라 이거야. 돌아가더라 이거야. 그래서 거기서 내려올 때는, 내려올 때는 다 주워 모아서 담아도 담긴 사이가 없더라. 담긴 사이가 없으니 내려와서는 내놔도 내놓은 사이가 없이 내놔지더라.

그래서 무조건 여러분이 이 도리를 배우는 데는 천금 만금을 주고도 배우기 어려우니 지금 인연에 따라서 이렇게 배우는 것을 고맙게 생각하고 열심히 스스로 익히고 자기 것을 만들어서, 스스로 자기가 응용할 수 있는 그러한 방법과 그러한 지혜와 그러한 자비를 가지고 해 나갈 수 있는 능력을 얻으시라는 얘기죠.

우리가 아무리 남의 책을 보고 남의 말을 듣고 지식적으로 머리에 넣어서 그거를 때에 따라선 얘길 하고 쓴다 해도 그거는 헛거야. 그래서 우리가 경(經)을 본다 하더라도 백지를 볼 줄 알아야 글을 볼 수가 있고, 글을 볼 수 있어야 만법의 근원이 지혜롭게 그 한 글자에서도 나올 수 있다 이런 말이죠. 여북하면 ‘백’은 전체를 말하고 ‘지’는 지혜를 말한다고 하겠습니까. 글은…, 우리가 지금 ‘용’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이렇다, 좋다’ 하는 거를 모른다면 어떻게 부처를 이루겠습니까?

하여튼 망상이라는 것도 놓고, 우정 내가 공부를 열심히 하겠다고 하는 마음도 놓고 꾸준히 물러서지 않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대로 여여하게 갖추어 가지고 있으니까, 그대로 믿으면 되는데 사생결단을 하고 ‘이놈의 게 왜 안 되나?’ 하고, 모질음을 쓰고 ‘이게 이렇게 놓으면 된다는데 왜 안 되나?’ 이러면은…, 지네가 가다가 “아이고, 다리가 저렇게 많은데 어떻게 저렇게 가나?” 하니까, 딱 서서 못 가는 거와 마찬가지로 그렇게 못 갑니다. 그러니 누구한테 탈을 합니까? 그렇게 성실하게 일러 드려도 놓지 못하고, 놨다 하더라도 또다시 ‘아이고, 이거 또….’ 하고 방방방방 뛰고, 그렇게 뛸 때에 또 놓으라고 하니까 ‘아이고, 이렇게 놓고 이렇게 놨는데도 안 된다.’ 이겁니다. 그 안 된다는 생각까지도 놔야 될 텐데 왜 그걸 놓지 못하고 애쓰십니까.

도반들끼리 공부하다 보면…
질문 마음공부 하는 도반들끼리 이 공부를 하다 보면 상대방의 마음을 읽을 수도 있고 또 그 경계를 파악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때 그러한 내용들을 확인하려고 하는 충동이 일어납니다. 그러한 것을 확인하는 것이 과연 올바른 공부 방법인지요.

답변 그것은 확인을 하되 확인이 없이 확인을 해야 하는 도리입니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은 공부를 했다고 자기 주인공에서 말을 하란다고, 하고 싶다고 해서 마구 내뱉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거는 잘못되는 공부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속에서 보이기도 하고 또 들리기도 하고, 어떤 걸 알려 주기도 하고, 남의 마음을 읽을 수도 있고 그렇게 된다면 내 마음속으로 한번 실험을 해 보는 겁니다. 그래서 내 마음속에서 실험해 보겠다는 느낌이 일어나서 이제 실험을 해 보는 거고 체험을 하는 거지, 바깥으로 발설을 하라는 게 아닙니다. 누구한테 물어보고 하는 것도 아니고요. 그렇게 해 나가라는 뜻이지 이거를 그냥 묵인하고 이거는 “실험해 보지도 마라. 그냥 놔 버려라.” 이러는 게 아닙니다. 그러면 발전이 없죠. 마음의 발전이 없어서 자기 능력을 자기가 계발할 수도 없고 얼마만큼 됐는지도 모르죠. 이건 남이 알아주는 게 아니라 내가 먼저 나를 알게끔 되는 거죠.

그래서 그랬잖습니까? “나를 발견하기 위해서 한 번 죽어야 하고, 둘 아닌 도리를 알기 위해서 또 죽어야 하고, 또 둘 아닌 나툼을, 일체 만물만생의 나툼을 알기 위해서 또 죽어야 한다.” 하고요. 그러니까 모든 것을 실험해 보려면 아무도 알지 못하게 그냥 실험해 보는 거지, 어떻게 말을 바깥으로 하고 실험을 합니까?
그리고 이제 도반들끼리 모였을 때도 이렇게 이제 얘기를 하고 돌아갈 때 그렇게 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건 그렇게 하는 게 아닙니다. 이렇게 하면은 첫째, 당신에게 누가 되고 둘째는, 스님들에게 누가 되고 셋째는, 온 부처님의 그 뜻에 누가 되지 않습니까?” 하는 것을 제시해 주고 속으로 자기가 실험하고 체험하게끔 일러 주고 하는 것이 도반의 도립니다.

인공 임신중절에 대해서
질문 저는 의학을 전공한 자로서 인공 임신중절에 대해서 스님께 여쭙고자 합니다. 육도 윤회(六道輪廻) 중 인간으로 태어나는 과정인 태아의 단계에서 행해지는 임신중절은 법적으로 허용된 인공 임신중절 다섯 가지와 사회, 경제적 사유로 인한 자율적 인공 임신중절이 있는데, 경전에 의하면 인공 임신중절을 하는 것은 큰 죄라고 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현시대에서의 이에 대한 스님의 고귀하신 말씀을 듣고자 합니다.

답변 사람이 좁게 생각하면 한없이 죄가 되고요, 넓게 생각하면 죄가 하나도 없어요. 왜냐하면 모습을 가지고 태어났는데, 예를 들어서 그 태어난 사람을 이미 떼려고 했다면 거기에 태어나도 그렇게 큰 사랑을 받지 못할 겁니다. 한번 생각해 보셨어요? 욕을 할지는 모르지만 어차피 그럴 바에는 얼른 옷을 벗고선 좋은 데로 천가가 됐으면 하는 거죠.

그래서 중절하는 사람에 한해서 이 공부를 배워야 그냥 그 고생할 사람은 고생 덜하게 해 주고, 또 태아가 잘못돼서 병신으로 나온다 이럴 때는 빨리 천도해서 다시 좋은 결과를 보게 하는 것이 무명을 다시 씻고 나오게끔 하는 것이고 또 대단히 좋은 일입니다. 그래서 이 공부를 한 사람에게는 죄가 붙을 것도 아무것도 없지만, 또 살려 준 자체도 없고 죄 될 자체도 없고 이렇지마는 그런 도리를 모르는 사람에 한해서는, 즉 무의 세계인 정신세계의 50%를 모르는 사람에 한해서는 죄가 되죠. 그러니까 이 마음의 도리를 충분히 알아야 하겠다는 얘기죠.

머릿속에 남은 것이 없는데
질문 큰스님께서는 여러 불쌍한 중생들의 아픔을 어루만져 주시고 자상하게 공부하는 방법을 일러 주셨는데, 제가 공부를 하다 보니까 과연 공부를 이렇게 해야 되는 건지, 그 공부에 대한 것이 머릿속에 남은 것이 없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큰스님 가르침 이외에 저희들이 지침이 될 만한 경전이나 서적을 본다든지 하는 노력을 해도 되는지요.

답변 진짜로만 믿으신다면, 자기가 지금 말하고 듣고 보고 행하고 가는 그 자체를 잘 뒤집어서 자기를 보실 수 있다면, 진짜로 지혜로워야만 자비도 나오고, 자비할 수가 있어야만 내가 둘이 아닌 줄 알게 되고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루만지는 것도 자기요, 어루만지는 걸 받는 자도 자기요, 둘이 아닌 것입니다. 그건 무슨 까닭이냐 하면, 내가 항상 얘기해 드리죠. 전깃줄 하나만 가지고는 도저히 불이 들어올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를 마저 쥐고 행하는 자, 즉 말하자면 어루만져 주는 자와 만져지는 자의 마음과 마음이 둘이 아닙니다, 서로 믿고 말을 할 때는 말입니다. 믿지 않든 믿든 이렇게 같이 대화를 하게 되면 이게 하나가 돼 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전깃줄과 줄이 한데 합쳐지면 그냥 불이 들어올 뿐이지 합쳤다 안 합쳤다 할 필요가 없는 것이죠.

그러니까 ‘어루만지는 자비로서만 베풀고 지혜는 가르치지 않는구나. 또 경전도 보지 못하게 하는구나.’ 이러지 마시고요, 경전을 보되 경전이 나를 보지 않게 하고 내가 경전을 보지 않게 볼 수 있다면, 그거는 올바로 경전을 보는 것입니다. 경전을 보지 말라는 게 아닙니다. 보되 보지 말라 이 소리죠. 내가 경전을 보고 또 경전이 나를 본다면, 글자 풀이만 해 나가는 거지 내면세계의 그 백지에 들어 있는 천차만별의 뜻은 하나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누가 이 책을 보는가. 네가 보고 있잖아. 그러니 나는 그냥 봐주는 겉 눈과 겉 손 이런 걸로만 심부름해 줄 뿐이지, 보는 건 주인공 네가 봐!’ 하고 볼 수 있는 그런 것을 지금 가르치기 위해서 이런 말을 합니다. 그것은 말을 안 해도 자기가 보는 거죠. 그런데 껍데기 자기가 본다고 생각하고 그 글자 풀이로만 나가니까 이거는 경을 자기가 보고 자기가 경을 보는 게 되죠. 그러니까 자기 없는 자기가 경 아닌 경을 볼 수 있어야 된다 이 소립니다.

관하는 것을 놓치지 않고 가고 있는데
질문 저는 언제 어느 때나 항상, 앉으나 서나 길을 가거나 일을 하거나 껌을 하나 씹더라도, 커피를 한잔 마시더라도 항상 관하고, 그렇게 관하는 것을 놓치지 않고 가고 있습니다. 근데 그게 맞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저는 오래 전부터 항상 스스로 제 마음자리를 계속 지켜보면서 가는데 이게 의식적일 때도 있지만 거의 대부분은 자동으로 그냥 그렇게 항상 스스로 지켜보고 가거든요. 그러면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고 평온합니다. 그런데 제가 일을 할 때나 길을 걷거나 집에 앉아 있거나, 큰스님 생각을 한다든지 우리 도반들 생각을 한다든지 지원의 스님들 생각을 한다든지, 하여간 마음공부에 관해서만은 자동으로 항상 연결돼 돌아가는 것 같은데 그게 바른 건지 모르겠습니다. 일을 할 때는 일에 전념해야 될 거 같은데 그게 안 되고 그냥 한다는 의식 없이 자동으로 그냥 연결되어 돌아가거든요.

답변 24시간을 일을 하는데요, 주인공 생각을 한 번도 안 했다고 생각을 합시다. 그런데 24시간이 지나서 주인공 생각이 났단 말입니다. 그랬으면 그게 24시간을 공간을 두고서 띄어졌나요? 그냥 무시(無時)거든, 무시. 무심(無心). 우리가 살아나가는 데에 24시간이 있는 거지, 24시간이 어디 있어요? 그러니까 그것도 초월해서 그냥, 그 시간에 생각났으면 그 시간에 난 거지 24시간이 왜 거기 붙느냐 이거예요. 그리고 24시간이 붙기 이전에, 또 관하는 게 생각이 났든 안 났든 그대로 뿌리와 싹이 같이 붙어 있는데 무슨 찾고 안 찾고가 있어요?

그러니 일을 하는 데 그 일에 몰두를 하는 것도 바로 주인공을 믿고 찾는 거예요, 그게. 일에 몰두를 했다 해서 주인공을 생각지 않는 게 아니라 주인공이 그렇게 몰두하게 만들었으니까 주인공이 한 거예요. 주인공의 시자일 뿐이지, 움죽거리게 했을 뿐이지 뭐가 주인공이 아니란 말입니까. 여러분이 다 하고 움죽거리는 일거수일투족이 거기서 움죽거리게 하니까 움죽거리는 거지, 만약에 그 영원한 자기의 근본이 빠진다면 자기는 송장이 되는데 뭐 움죽거릴 게 있어요? 안 그래요? 자기 지금 눈 뜨고 이렇게 눈짓, 고갯짓하는 것도 자기 영원한 근본이 살아 있으니깐 그게 있는 거지, 그게 빠지면 송장이 돼서 그냥 눈 감고 있을 걸요, 아마. 그러니 얼마나 감사해요.

눈 하나 뜨고 보는 것도 감사하고, 보게 된 것도 감사하고 얼마나 감사한데요.
그래서 자기를 형성시킨 자기한테 감사할 줄 모르고, 물에도 감사할 줄 모르고 불에도 감사할 줄 모르고, 바람에도 감사할 줄 모르고 모두 감사할 줄 모르는 거예요. 자기 주인공이 자기를, 이 몸을 이렇게 내놓기 위해서, 형성시키기 위해서 지수화풍으로 된 정자 난자를 빌려서, 또 지수화풍에서 낳게 하고 지수화풍을 또 형성케 해서 이렇게 삶의 보람을 가지려고 자기를 형성시켰는데, 주인이 그렇게 생각을 하고 생산을 했는데, 주인이라는 자체도 모르고 감사한 줄도 모르고 주인이 하고자 하는 그 뜻도 모르고, 그냥 자기 껍데기가 자기라고 외치면서 그냥 돌아치니깐 이 속의 주인공, 참자기는 어이가 없을 겁니다, 아마. 자기가 그렇게 한번 움죽거리고 살아 볼 양으로 형성시켰는데 핀트가 자꾸 다르게 가니까 말입니다.

그러니까 자기 이외에 있는 게 아니라 자기 종자이며 뿌리다. 불성이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그대로, 그대로 내가 생각이 났든 안 났든 그대로 믿는 것이죠. 그대로 있는 것이죠. 있으니까 믿는 거고. 그대로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돼요. 뿌리로 인해서 싹이 산다. 가지와 잎새가 푸르르게 되는 것도 바로 내 뿌리로 인해서 이렇게 살고 있으니 감사하구나. 봄이 오면 꽃도 피고 또 열매도 맺고 하니 참 감사하구나. 앞으로도 그렇게 이끌어 갈 거고, 과거에도 그렇게 이끌어 왔을 테니 참 고맙구나. 이건 그냥 자연적이지 없는 거를 끌어다가 찾으려고 하고 없는 거를 끌어다가 알려고 하는 게 아닙니다. 그러니 “그냥 그대로 믿어라. 무조건 믿어라. 이 세상에 났으니까 있는 거다. 그러니 그대로 무조건 믿어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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