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임당 정유길
28. 임당 정유길
  • 윤호섭 기자
  • 승인 2016.08.19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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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에 불교 공사상 담아낸 청빈한 선비

어려서 두각 나타낸 文才
이황과 성학 진흥에 노력
음식·의복 등 사치하지 않고
승려들과 격의 없이 교유해

조선 중기 문인이자 관료였던 임당 정유길(林塘 鄭惟吉, 1515~1588)은 차를 즐겼던 선비로 70여 명이 넘는 승려들과 교유하며 이들의 시축에 제발을 썼던 인물이다. 조부가 영의정 광필(光弼)이고 아버지는 강화부사 복겸(福謙)이었으며 어머니 또한 이수영(李壽永)의 딸이었으니 내외가문(內外家門)의 규모를 짐작하게 한다. 특히 비상한 기억력을 지녔던 그는 책을 읽을 때에 여러 줄을 한 번에 읽었으나 읽은 내용은 끝내 잊어버리지 않았다고 하니 범인(凡人)과 다른 비범함을 타고났던 인물이었음이 분명하다.

김상헌(金尙憲, 1570~1652)이 쓴 묘지명(墓誌銘)’에는 그의 천재적인 면모를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17세에 사마시(司馬試)를 보아 제 6등으로 합격하였다. 그러나 여러 고관(考官)들이 그 글을 기특하게 여겨 앞을 다투어 1등을 시키려고 하니 평소에 사람을 잘 알아보는 데 이름이 났던 김극성(金克成)이 사람은 후일 나라의 그릇이 될 것이니 일찍부터 이름이 누설되지 않게 해야 한다고 하였다.

예로부터 소년등과(少年登科)나 어린 나이에 세상에 이름이 나는 것을 극히 꺼렸던 선인들의 생각은 오랜 세월 터득한 속리(俗理)일 것이다. 따라서 나라의 동량임을 한눈에 알아본 김극성(1474~1540)은 어린 정유길의 재주가 세상에 드러나는 것을 우려했던 셈이니 사려 깊은 그의 배려는 당색(黨色)이 또렷하지 않던 시절의 미덕이었다.

▲ <국조인물고> 김상헌이 쓴 '묘지명'.

하지만 조선 중기 이후 당색의 폐단은 컸다. 처음으로 당색이 촉발된 것은 이조전랑의 자천제(自薦制)에서 시작되었다. 선조 7(1574) 이조전랑 오건(吳健)이 이임하면서 김효원(金孝元)을 천거하였는데 심의겸(沈義謙)의 반대로 논란이 일었다. 후일 전랑 김효원의 후임으로 심의겸의 아우 심충겸(沈忠謙)이 물망에 오르자 김효원이 반대하면서 이들을 지지하던 사림이 동인과 서인으로 양분되었다. 당시 정유길은 퇴계의 문인 김효원을 지지했다고 전해진다.

역사적으로 당색의 촉발은 미미하게 시작되었지만 그 폐해는 조선 중기 이후 사림의 정론을 좀 먹는 결과를 가져왔다. 정유길 또한 시대 흐름을 주도했던 관료로서 비교적 순탄한 환로(宦路)를 거쳤지만 당색의 폐해를 짐작하지는 못했을 것이라 여겨진다. 아무튼 시대의 흐름을 주도하는 것은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몫이다.

정유길의 삶의 여정을 대략 살펴보면 1531년 사마시에 합격한 후, 1538년 별시문과에 장원하여 사간원정원에 오른 것을 시작으로 공조, 이조좌랑을 거쳐 세자시강원문학을 역임하였다. 1552년 도승지에 오른 후에는 이황과 함께 성학을 진흥시키기 위해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으니 성리학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그의 노력은 이처럼 소명의식이 있었던 셈이다.

여러 관직을 거쳐 대사헌에 오른 후 예조 판서로 승진, 1581년에는 이조 판서에서 우의정에 올랐다. 하지만 윤원형(尹元衡)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던 그를 상신할 수 없다는 사헌부의 극렬한 반대로 인해 사직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다시 관직에 나아간 것은 1583년이다. 예조 판서에서 우의정에 오른 그는 1585년에 좌의정에도 올랐으니 그의 환로는 약간의 고비가 있긴 했어도 비교적 순탄했다고 하겠다.

국조인물고에 담대했던 그의 장부다운 모습을 요동(遼東)에 도착하였을 때 수레가 진흙탕에 빠졌는데 역관(譯官)과 역부(役夫)들은 모두 뒤에 있었다. 갑자기 달로(撻虜) 기병 수십 명이 어느새 이르러 포위하는 것처럼 에워쌌지만 수레에 단정히 앉아 동요하지 않은 정유길의 모습을 본 오랑캐들은 대인이다고 하여 큰 길로 수레를 끌어내주고 떠났다는 사실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한편 그는 높은 지위에 올랐지만 늘 충후(忠厚)와 근신(謹愼)을 근본으로 삼았다. 외조부의 선비다운 삶의 궤적을 자랑스럽게 여긴 김상헌은 국조인물고묘지명의 말미에 여기에 남은 공렬(功烈)을 선양하여 소상하게 비석에 기록했도다. 후손이 여기에 오거든 경건히 이 글을 볼지어다. 그 누가 글을 지었는가. 외손(外孫)의 말이도다고 하였다. 이는 외조부에 대한 그의 신뢰와 믿음이 얼마나 컸는지를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 정유길 <임당유고> 일부. 사진=한국학중앙연구원
정유길에 대한 또 다른 평가는 사람들이 더불어 견줄 수 없는데도 문예(文藝)를 가지고 스스로 고상한 체하지 않았고, 지위가 날로 융성해져도 다른 사람에게 위세를 부리지 않았으며, 계책을 세우고 경영하여 국정을 보필한 공로가 많은데도 사람에게 지혜를 보이지 않았으니, 이것으로 거의 공에 대한 이름을 지을 수 있을 것이다고 한 것에서 그가 어떤 인물이었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늘 검소하고 꾸밈이 없었던 그는 음식과 거처, 의복을 사치하지 않았다. 이뿐 아니라 그가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는 늘 온화하여 마치 봄빛과 같았다고 한다. 한편 풍부한 문장력을 바탕으로, 시에 능했던 그는 당시 시인 묵객이나 승려 등 방외지사(方外之士)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다. 만약 그가 이들의 정자의 문미(門楣)나 객사의 벽에 시를 써주면 영광으로 여겼다고 하니 이는 시뿐 아니라 글씨에 능했던 그의 재주를 아끼는 이들이 많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무튼 그의 임당유고(林塘遺稿)하권에는 방외록(方外錄)장을 별도로 두어 78여 수에 이르는 시들을 수록해 두었는데 대부분 승려들의 시축에 쓴 시를 모아둔 것이다. 먼저 그의 다른 사람의 시를 차운하여 웅 스님의 시축에 쓰다(次人韻 題雄上人軸)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대나무 집, 구름 안석에 기대어(竹屋憑雲)
송창의 눈썹 흰 이와 짝 했네(松窓伴雪眉)
맑은 마음, 원래 법도가 있으니(淸心元有法)
차를 다려 무엇을 하리오
(茗欲何爲)
매장각을 지어(觀卜梅粧閣)
물 가득한 연못에서 시초를 찾으리(尋詩草滿池)
거듭 만나는 건 응당 바탕이 있어서니(重逢應有地)
가을날, 흰 수염을 비비리(
秋日撚霜) 

대나무는 맑고 굳센 기상을 상징한다. 따라서 선비의 사랑채나 수행자의 작은 암자에는 대나무를 심었다. 이는 선비나 수행자의 풍류나 아취를 드러낸 것이며 다른 한편으론 그들이 지향했던 이상향을 담고자 했다. 그러므로 죽옥(竹屋)에서 구름안석에 기대어 송창의 눈썹 흰 이와 짝 했네라고 한 뜻은 바로 웅 스님의 수행자다운 풍모를 나타낸 것이라 하겠다. 더구나 차는 수행자의 몸과 정신을 정화해 주는 용품이었기에 맑은 마음을 지닌 웅 스님에게는 차가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웅 스님이 차를 다리는 연유가 어디에 있는지를 물은 것이다. 결국 웅 스님의 깊은 수행력을 에둘러 표현한 것이리라.

또 다른 시 감 승려의 시권에 쓰다(題鑑上人卷)는 그가 불교의 공사상을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나타낸 시인데 그 내용은 이렇다.

느긋하게 밥을 먹고 격자창에 기대어(委蛇退食倚窓眼)
활수로 햇 용봉차를 다리네(龍鳳新茶活水煎)
스님들 오고감이 한바탕 꿈인데(僧到僧歸一場夢)
학이 노니는 곳 봄 하늘에 노을이 비치네(鶴邊斜日下春天)

느긋함은 게으름이 아니다. 욕망에 휘둘리지 않는 마음의 상태를 말한다. 수행자와 선비는 대상을 정확하게 보기 위해 언제나 고요한 마음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더구나 암자의 향기로운 차를 마셨으니 이것은 그가 지향했던 이상, 곧 맑음의 극치를 이룬 상태임을 드러낸 것이었다. 특히 그의 시삼매(詩三昧)는 바로 학이 노니는 곳 봄 하늘에 노을이 비치네라는 대목에서 드러나고 불교의 공사상은 스님들 오고감이 한바탕 꿈이라는 대목에 또렷하다.

실제 정유길이 어느 때부터 승려들과 교유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그의 문집 방외록에 수록된 시문에는 승려들과 격의 없는 교유를 이어나갔던 정황이나 승려들의 암자에서 차를 즐긴 상황뿐 아니라 서로 담소하며 시를 짓던 일상들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한편 당시 승려들 중에는 그림과 시에 능했던 수행자들이 많았던 듯하다. 이러한 사실은 그의 현중 승려의 시권에 쓰다(題山人玄宗卷)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대의 붓 끝에서 살아난 화삼매(君復筆端三昧)
오호의 가을은 현종의 소매 속에 있네(玄宗袖裡五湖秋)
(시를)보자 홀연히 강 동쪽이 생각나니(看來忽起江東念)
마음은 망망한 바다 일엽편주에 있네(興在蒼茫一葉舟)

현중 스님은 붓끝에서 화삼매(畵三昧)를 드러낼 수 있었던 수행자였다. 이뿐 아니라 그의 옷소매에 오호의 서늘한 기운 서렸다 하니 그는 분명 눈 푸른 납자였을 것이다. 또한 정유길이 승려들과 오래도록 격의 없는 교유를 이어갔던 모습은 스님의 시축에 강극성의 운을 차운하여 쓰다(山人軸 次姜克誠韻)에서 드러나는데 그 내용은 이렇다.

가장 이름이 알려진 청천거사는(菁川居士最知名)
칠보 만에 시를 완성해 사람을 놀라게 하네(詩語驚人七步成)
늙은 그대와 나는 승가와 세속에서 만났으니(老我逢僧
臼裡)
어찌 늙은 서생에 잘못이 없으랴(白頭無柰誤書生)

청천거사(菁川居士)는 강극성(姜克誠)인 듯하다. 그는 위나라 조자건(曺子建)처럼 일곱 걸음을 띌 때마다 시 한수(七步詩)를 지을 수 있었던 천재였으니 스님 또한 시에 능한 인물임을 나타낸 것이다. 이들의 교유의 매개물은 시와 차였다. 억불시대에도 이들의 유불 교유는 이어졌으니 이는 늙은 그대와 나는 승가와 세속에서 만났으니라는 대목에서도 알 수 있다.

그는 늘 책과 꽃, 대나무를 심은 검박한 집에서 정심(靜心)을 함양하며 마음껏 소요를 하고자 했으니 유독 승려들과 넓은 교유를 이어갔던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셈이라 하겠다.

정유길의 자는 길원(吉元), 호는 임당(林塘), 상덕재(尙德齋)를 썼다. 임당유고(林塘遺稿)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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