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서량여국에서의 일화

서량여국서 임신하는 현장
남성우월주의에 대한 비판
〈유마경〉서 불교적 해답 나와

매일 매일 걷는 구도의 길,
그러나 나날이 새로운 길.
그 앞에 나타나는 맑고 큰 강.
어찌 건널까 걱정하는 일행 앞에
나룻배 나타난다.
그런데 나룻배를 젓는 사공이
여자다! 그런데 조금 늙은…….
여자 뱃사공이 있을 수야 있지만
좀 희귀한 일이다.
건너고 보니 맑은 물에 목마른 생각이 들어
한 바릿대 퍼서 현장 법사 반쯤 마시고
저팔계가 나머지 훌쩍 마셨는데,
현장 법사와 저팔계 뱃속이 이상하다.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아프고
임신한 것처럼 배가 불러온다.
급히 가까이 있는 농가를 찾아드니
농가의 노파가 배를 잡고 웃는다.
이곳은 서량여국(西梁女國)이라는 여인들만 사는 나라.
현장 법사와 저팔계가 마신 물은 자모하(子母河)의 물.
여인들만 사는 나라에서 애를 낳는 방법은?
바로 자모하의 물을 마시면 애가 생긴단다.
현장 법사와 저팔계가 임신을 한 것이로다.
참으로 큰 일 일세.
스님들이 임신한 것도 말이 안 되지만
산도(産道)가 없으니 어디로 낳는다냐?
혹시 부처님처럼 옆구리 출생?
그래도 살 길이 있다 한다.
조금 가면 해양산(解陽山)에 파아동(破兒洞)이 있고 거기 낙태천(落胎泉)이라는 샘이 있어 그 물을 마시면 낙태가 된다나?
거참! 현대보다 훨씬 더 쉬운 낙태술이 있었구나. 그런데 문제가 또 있다.
언제부터인가 여의진선(如意眞仙)이라는 도사가 파아동을 점거하고선 큰 선물을 줘야 낙태천 물을 준단다.
무조건 돌파왕 손오공,
무조건 파아동으로 달려가
무조건 물을 떠오려하다
결국 여의진선과 데꺼덕 부딪힌다.
알고 보니 여의진선은 우마왕의 아우요
홍해아의 삼촌이라,
자기 조카를 해쳤다 하여 앙심을 품고
절대로 물을 못주겠단다.
그러니 한바탕 진검승부…….
여의진선도 한 수 한다 하지만
손오공을 당할 수 있나.
사오정까지 동원하여 낙태천 물 뜨기 성공!
현장 법사와 저팔계 임신 출산 저지 작전 성공!
어찌 어찌 출산은 면했는데
이곳이 무슨 나라?
여인국이로다!
여인국에 옥골선풍(玉骨仙風) 현장 법사가 등장하였으니 그 풍파가 작을 리 없다.
풍파도 왕 풍파!
여왕의 연심이 작렬!
현장 법사님! 저의 지아비가 되어주소서.
왕이 되어주소서!
그냥 뿌리치고 가면 되는 거 아니냐구?
통행증을 받지 못하면 통과가 안 된다는 사실!
결국 손오공 꾀를 낸다.
현장 법사는 결혼하여 남고
제자들은 떠난다는 조건으로 통행증 받고
떠나는 제자들 배웅한다 나온 현장 법사
그대로 제자들과 함께 떠나버린다.
여인들의 애절한 만류는
세 제자의 흉악한 협박으로 뿌리친다.
그런데 현장 법사의 여난은 끝나지 않았구나.
웬 여자가 길가에서 불쑥 나온다.
“현장 법사님, 저랑 놀다가요!”
사오정이 발끈하여
“어디서 요망한 것이!”
항요장을 휘두르지만
이 여자 요괴로다, 비보통 요괴로다.
휘익 바람을 일으켜 현장 법사를 채가버린다.
알고 보니 이 요괴, 전갈의 정령이로다.
욕정에 불타 온갖 수단으로 현장 법사 유혹하지만 까딱없는 현장 법사!
매력남? 비매력남?
손오공 형제들 백방으로 스승 구하러 싸우지만
꼬리 독침에 쏘이면 너무 아파
이겨낼 도리가 없다.
관세음보살이 현신하여 요괴 정체를 알려준다.
석가여래까지 그 독에 당했던 일이 있는
독한 요괴이니 천적을 찾아야 된다네.
천상의 닭의 화신인 묘일성관만이 그 천적!
지네나 전갈에는 닭이 천적이라!
그리하야 묘일성관 모셔오니
새벽을 여는 “꼬끼요!” 한 울음에!
전갈 요괴 정체 드러나고 흐물흐물 녹았네!
현장 법사의 빛나는 부동심
여색의 관문을 넘었구나!
범속한 태를 없애고
자연의 몸을 되찾았구나!

이번 이야기는 남자와 여자의 이야기, 음욕에 관한 이야기네요. 이궁, 나칠계님! 지금까지 꾸벅 꾸벅 조시더니, 남자 여자 이야기라 하니 눈빛이 반짝반짝해지시네요. 그렇게 밝히시면 안 됩니다. 앞의 글 잘 읽어 보세요. 현장 법사 얼마나 의연한지. 여인의 유혹을 물리치는 그 꿋꿋한 마음을 보세요. 미녀들의 유혹에 대하여 “해골에 분바른 것에 어찌 마음을 기울일 것인가!”하며 물리치는 그 기상을, 10분의 일, 아니 백분의 일이라도 좀 본받으세요. 뭐라구요? 그건 다 옛날 고리타분한 이야기라구요? 요즘엔 적당히 밝히는 남자와 여자가 인기가 있다구요? 어흑! 그러고 보니 요즘은 좀 그렇군요. “섹시하다”라는 말이 엄청난 칭찬의 말이 되는 세상이군요. 옛날 같으면 뺨맞을 소리가 칭찬이 되는 세상이군요.

그렇지만, 여기의 얘기는 좀 차원이 다른 이야기니까 현실의 풍조를 잣대로 들이대는 것은 좀 삼가 주세요. 성적인 것을 무조건 금기로 여기자는 것은 아닙니다마는, 그것을 절대적 가치로 추구하는 것도 문제가 있지 않겠어요? 성적인 것이 우리의 행복에 기여하는 것이 되려면, 그것에 얽매여서는 안 되겠지요? 그것으로부터 어느 정도의 자유를 확보하고, 그것을 자기가 잘 굴리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 또한 분명하지 않을까요? 그런 문제는 좀 여러 측면에서 살펴봐야 하니 좀 뒤로 미룰게요. 그때 나칠계님의 건전한(?) 성에 대한 가치관을 듣기로 하지요.

성의 문제를 말하려면 우선 남성과 여성, 양성간의 문제를 살필 필요가 있겠군요. 우리 사람 사는 세상은 남자와 여자의 만남이 그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으니까요. 동양 최고의 고전이라 할 수 있는 〈주역〉에도 그러한 관점이 나타나고 있지요. 〈주역〉은 상경과 하경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상경은 천도(天道), 즉 우주 자연을 말하고, 하경은 인도(人道), 즉 사람의 도를 말한다 합니다. 그래서 상경은 하늘을 상징하는 괘와 땅을 상징하는 괘가 그 첫머리에 나옵니다. 그리고 하경은 택산함(澤山咸)괘로 시작하는데, 이 괘는 젊은 남자와 젊은 여자의 감응을 상징하는 괘이지요. 사람 일의 출발점은 남녀의 만남, 그것도 성적인 에너지가 가장 왕성한 젊은 남녀의 만남으로부터 시작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지요. 그러니까 남녀의 성적 감응이야말로 사람 일의 출발점이요 가장 중요한 일이라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런 만큼 그 남녀의 만남과 감응이 제대로 되는 것이 또한 중요한 일이겠지요. 그리고 그것이 제대로 되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은 양성의 평등한 관계라 할 수 있겠습니다. 즉 남녀평등이 전제로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오랜 기간 동안 남성우월주의라고 할까요? 남성에 의한 여성의 지배가 계속되어 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람직한 일이라고 말할 수 없겠지요?

문제는 불교 안에서도 남성과 여성의 불평등이 심각하다는 점입니다. 우선 비구와 비구니의 위계가 엄격하게 규정되어 있지요. 이 불평등한 관계가 계율로 엄격하게 규정되어 있습니다. 계율이라는 것이 종교에서 엄청난 권위를 지닌 것이고, 또 그것에 대하여 함부로 말하는 것은 종교의 근본을 뒤흔들 위험이 있기에, 이 불평등한 관계에 대해 근본적인 문제제기는 참으로 힘든 점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언제까지나 그 불평등을 그대로 두고 있을 수만은 없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불교는 남녀 불평등을 기본으로 한다. 적어도 수행 사제에 있어서는 남녀 불평등이다!”라고 선언을 하던지…. 그게 아니라면 계율에 대한 근본적인 고찰을 통해 현대적인 가치관과 조화를 이루는 새로운 해석의 가능성을 모색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시도의 실마리를 삼쾌선생은 유마경에서 발견합니다. 아니 실마리 정도가 아니라 핵폭탄 급의 혁명적 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한번 볼까요?

유마 거사의 방에 천녀(天女), 즉 하늘 여인이 있습니다. 지혜와 변재가 너무도 뛰어납니다. 그런 천녀에 대해 사리불이 이렇게 묻습니다.

“그대는 (그렇게 뛰어난 지혜를 갖추고 있으면서) 어찌하여 여인의 몸을(남자의 몸으로) 바꾸지 않는가?”
이런 사리불의 물음은 남성 우월주의를 바탕으로 한 것이지요. 남자만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사상 말입니다. 그에 대해 천녀가 뭐라 대답하는지 들어볼까요? 천녀의 대답 속에 남녀 문제에 대한 핵폭탄 급의 혁명적 관점이 잠복되어 있습니다. 그 핵폭탄 다음 시간에 터뜨려 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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