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례 화엄사 구층암 모과나무 기둥

모과나무 원형 그대로를 요사채 건물의 기둥으로 썼다. 맨 오른쪽은 동쪽 요사채 모과나무 기둥이고, 나머지 두 기둥은 서쪽 편의 것이다.
백련결사, 수행선원의 청정도량
나무에 피는 연꽃이 목련(木蓮)이고, 나무에 열린 참외가 목과(木瓜)다. 그 목과가 모과다. 노랗게 익은 모과는 영락없이 참외를 닮았다. 그런데 울퉁불퉁한 것이 못났다. 못나서 모개라 부르기도 한다. 어물전 망신은 꼴뚜기가 시키고 과일 망신은 모과가 시킨다고 한다. 못난 모양에 비해 모과향은 대단히 향기롭다. 맛은 오만 인상을 찌푸릴 정도로 시큼하고 떫다. 모양과 색, 향, 맛, 효능에 두루 놀라는 열매가 모과다.

자연과 구층암이 유기적으로 일체화
개심사 심검당, 청룡사 대웅전과 상통
나무 골과 옹이까지 수용한 자연주의
자연이 완성한 구조를 건축체계에 포용

모과나무는 중국 원산이다. 학명은 Chaenomeles sinensis이다. Chaenomeles는 명자나무속의 속명이다. 속명(Chaenomeles)은 라틴어 갈라지다(chaino)와 사과(melon)의 합성어다. 열매가 사과 같고 가지가 잘 갈라진다는 뜻이다. sinensis는 ‘중국의’ 뜻을 지닌 라틴어로 원산지를 밝힌 종명이다. 나무의 학명은 라틴어로 통용한다. 라틴어는 생활언어로 사용하지 않으므로 시대에 변함없이 항구적으로 명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개 속명은 대문자로 시작하고, 종명은 소문자로 시작한다. 모과나무는 생물분류학적으로 분류하면 식물계-속씨식물문-쌍떡잎식물강-장미목-장미과-명자나무속-모과나무종의 계통에 따른다. 흥부전에 나오는 ‘화초장(花草欌)’도 바로 이 모과나무로 만든 장롱이다. 그런데 모과나무는 중심 줄기가 외길로 높이 자라지 않는 경향이 뚜렷하다. 속명에서 그 특성이 보이듯이 가지가 잘 갈라져 자라기 때문이다. 모과나무에서 하나의 사각형 판재를 얻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모과나무로 화초장 장롱을 만들었다면 필시 귀한 물건임에 분명하다. 모과나무로 건축목재로 사용하였다면 더구나 희한한 사례가 아닐 수 없다. 구례 화엄사 구층암에 그 진귀한 장면이 있다.

지리산 화엄사 대웅전 뒤로 난 조릿대 터널 오솔길을 지나면 구층암(九層庵)에 닿는다. 〈화엄사 사적〉(1924) 등의 기록에 화엄사는 큰 절 여덟에 암자 81암, 즉 화엄사는 ‘8원 81암’의 사격으로 전해진다. 구층암은 81개소 산중암자 중의 하나로 이어져 내려왔다. 요사채에 걸린 현판(광무원년: 1897년)에는 ‘구층연사(九層蓮社)’라고 기록하고, 〈중수구층암기〉(1899년) 현판에는 ‘구층난야’라고도 기록하고 있다. 또 1901년에 승려 등 60인이 구층암에서 염불수행의 백련사결사(白蓮社結社)를 가졌다고 하는 바, ‘구층연사’는 구층암의 백련사 성격을 환기시켜 준다. 특히 ‘구층난야’의 기록은 구층암이 수행자들의 청정선원이었음을 조명해준다. 1937년 상량문에서는 ‘구층대’로 기록하고 있어 그 다양한 위상을 가늠하게 한다. 즉 구층암은 시대에 따라 구층연사, 구층난야, 구층대 등으로 불리며 백련결사, 선원, 강원 등의 도량으로 수행을 이어왔음을 파악할 수 있다. 결사도량, 수행선원이었던 만큼 도량의 청정한 기풍과 담백한 분위기는 어쩌면 당연한 유전적 생태환경이 아닐 수 없다. 구층암에서 받는 첫인상은 그에 조금도 어긋나지 않는 소박함, 고요함, 청정함이다.

다실이 있는 서쪽 요사채의 모과나무 기둥.
나무 그대로 처마 밑에 옮겨 심은 듯
10여 년 동안 구층암을 지키고 계신 덕제스님은 구층암이 지닌 특성으로 자연스러움을 첫손에 꼽았는데 수긍이 가는 대목이었다. 구층암 가람이 주변의 지리산 자연환경과 얼마나 천연성과 조화로움으로 경영하였는지를 보려면 천불보전 뒤 언덕에 올라보면 된다. 구층암을 구품연화대의 정토로 능히 해석할 수 있는 탁월한 가람배치여서 놀랍다. 청정한 숲 속 자연에 가부좌를 틀고 앉은 형국이다. 마치 그 공간을 구성하는 하나의 풍경처럼 자연과 건축이 유기적으로 일체화 한 것이 깊은 인상을 남긴다. 구층암 건축에서 자연스러움의 요소를 발견한다는 것은 그리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선원의 요사에서 기름기와 습기를 제거한 자연 그대로의 분위기를 구현하는 것은 형상을 따르는 그림자만큼이나 당연해 보인다.

구층암은 천불전의 흙으로 만든 천불과 야생차로 유명하지만, 아무래도 구층암의 상징은 오래된 모과나무 기둥이다. 나무의 생김 그대로 기둥으로 쓰거나 들보, 창방으로 쓰는 경우는 왕왕 있다. 서산 개심사 심검당, 범종각 건물이나 안성 청룡사 대웅전, 아산 봉곡사 요사, 합천 호연정 건물 등에서 무위(無爲)의 소박한 심정들을 만나곤 한다. 서양의 그리스 건축에서는 사람의 인체를 건축기둥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그런데 모과나무는 의외다. 모과나무는 소나무, 전나무처럼 외줄기로 자라서 통나무 목재로 쓰일 수 있는 재목이 아니다. 중간 키의 관목에다 가지 분화가 활발해서 통나무를 얻기 어렵고 등걸 표면이 혹처럼 울퉁불퉁하고 옹이가 많아 목재로서의 기본 자질과는 거리가 멀다. 그런데 구층암 좌우 요사 두 채에는 모과나무를 기둥으로 삼아서 일찍이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고 있다.

천불전 뜨락엔 다섯 그루의 모과나무가 있다. 천불보전 계단 양 옆으로 살아있는 두 그루가 있고, 좌우 요사채에 기둥으로 쓰이고 있는 것이 세 그루다. 모과나무 기둥은 생김 그대로다. 모과나무 원형을 그대로 살려 야성적인 힘을 보존하고 있어 경이롭다. 잔가지만 툭툭 쳐내고 골격 그대로 기둥으로 활용했다. 툇마루와 창방의 기능적 결구를 위해 최소한의 홈을 파냈을 뿐이다. 그냥 서있는 나무 그대로를 처마 밑에 옮겨 심어 둔 형국이다. 건축이 숲의 정서를 담고 있다. 건축과 자연의 경계가 모호해졌다.

서양의 고딕건축은 유럽의 떡갈나무 숲의 재현이다. 활엽수의 숲과 나무들의 왕성한 생명력을 건축적으로 구현한 것이 고딕양식이다. 기둥은 나무이고, 아칸서스 잎은 활엽수의 풍성한 잎으로 재현했다. 자연은 끊임없이 부활하고 생산하며 재탄생한다. 숲과 나무로 해석한 건축적 형상을 통해 근원적인 분위기와 무한한 생명력을 담아냈던 것이다. 구층암 모과나무 기둥은 고딕건축이 담고 있는 정신의 전위에 가깝다. 보다 직접적이며 대범하다. 그리고 자연의 상징으로 재현한 것이 아니라, 자연 그 자체로 구현하고, 역사적 층위를 갖는 인문적 자연으로 재탄생시켰다. 모과나무 삶의 드라마틱한 반전이고 성스러운 회향(回向)이다.

천불보전 뒤 언덕에서 바라본 구층암.
존재에 대한 깊은 존엄성의 통찰
평범한 요사채 건물에 살아있는 모과나무 기둥이 들어서자 건축공간이 엮어내는 정신적인 장(場)이 아라한과를 얻은 듯하다. 강한 중력으로 공간이 휘는 것과 같은 놀라운 변화다. 어디에도 걸림이 없는 자유로움의 경지를 고양하고 있다. 고승대덕들이 남기고 간 지팡이처럼 삼엄하기도 하다. 관대함, 무소유, 무애자재, 용맹전진, 해탈 등 깊은 수행력의 정서가 공간에 흐르고 청정 도량의 결계(結界)도 보이지 않는 힘으로 작용한다. 나무가 아니라 나무 형태를 빌린 일깨움의 선지식 같다.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을 건축을 누구나 돌아보는 건축으로 전환시킨 경이로운 안목이다. 존재에 대한 존엄성의 통찰이 깊고도 숭고하다. 특히 비정규직 일회성 소모품으로 사회구조를 조정하는 시대에 존재의 존엄성을 이보다 더 깊이 일깨울 수 있을까?

하나의 건축에 구조적 안정성과 경제성, 심미적 아름다움의 요소는 언제나 숙고대상이 될 수 밖에 없다. 그 셋을 동시에 충족시키는 일은 전문 건축가에게도 쉬운 일이 아니다. 서로는 서로의 효과를 상쇄시키는 까닭이다. 구층암 모과나무 기둥은 그 셋을 동시에 구현하고 있어 깊은 인상을 남긴다. 모과나무 기둥은 수피가 벗겨진 뼈대의 구조다. 그런데 줄기는 인위로 다듬지 않은 원형 그대로다. 나무의 원형은 수백 년간 외부환경과의 투쟁 속에서 역학적으로 가장 안정화 되고 최적화 된 물리구조다. 다듬지 않고 단청을 입히지 않았으니 경제성은 논하고 따질 필요가 없다. 심미적이며 독창적인 아름다움은 어떠한가?

“우리가 독창적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자연의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한 건축가 가우디의 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힘줄 같은 나무 골과 옹이까지 자연주의로 수용했다. 심지어는 나무와 일체가 된 돌덩어리도 그대로 내버려 뒀다. 자연 스스로가 형성하고 완성한 구조 그대로를 건축 체계로 포용했다. 나무 형태나 굴곡에 대한 차별적 분별을 여읜 차원이다. 건축에 표현된 비유클리드적이며 비선형적 구조역학의 경이로운 형태다. 자연에 대한 강력한 믿음이 그 바탕임에 분명하다. 군더더기 없는 뼈대가 가지는 구조미학과 윤리적 아름다움이 빛난다. 모과나무 세 그루 구층암 처마 밑에 기둥으로 심어져 있다. 휜 것은 휜 그대로, 굽고 파인 결은 파인대로, 옹이는 옹이대로 나무 스스로가 형성해온 모양 그대로로 집을 지었다. 건축이 살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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