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발점의 미생물이 지금 종점에 가서도 또 미생물입니다

내가 이 세상에 났으니까 상대와 내가 부딪치지
그렇지 않으면 부딪칠 리가 있나?
내가 나왔으니까 이렇게 부닥침이 있으니 내 탓이지.

비가 오는데도 불구하고 여러분께서 이렇게 한자리를 해 주시는 것을 보니 한 번 더 깊이 생각해 보게 됩니다. 비가 오거나 그러면 여러분이 안 오실 줄 알았더니 ‘가죽 속에 물이 들어갈 리가 있느냐.’ 하고, 하하하, 이렇게 오신 것을 생각하면 감개무량합니다. 정말 여러분의 마음은 산천초목과 더불어 우주 전체를 한마음으로 둥글릴 수 있는 그런 능력들을 다 가지신 것 같습니다. 참 감개무량합니다.

옛날에 이런 얘기가 있었죠. 비하고는 관계없는 말이지마는, 어떤 집에 초상이 났는데 그 집에 사람이 많이 드나들면 “저 집 사람은 틀림없이 천당에 갔어.” 하고요, 사람이 드나들지 않는 집은 “뭐, 보나마나 지옥 갔어.” “잘 죽었어.” 하고 쑤군대거든요. 그게 무슨 까닭일까요? 그러니 우리가 한 철 살면서 부드러운 마음과 부드러운 행, 정직한 마음, 포괄적인 마음, 사랑할 수 있는 마음, 조건 없이 남을 도와줄 수 있는 마음이 있어야 하는 겁니다.

또 모든 것을 내 탓으로 돌리고 ‘내가 이 세상에 났으니까 상대와 내가 부딪치지 그렇지 않으면 부딪칠 리가 있나? 내가 나왔으니까 이렇게 부닥침이 있으니 내 탓이지.’ 하고 돌릴 수 있는 마음, 이 마음이 우주 법계에 마음과 마음으로 통해서 두루 하기 때문에 조건 없이 사랑을 줄 수도 있는가 하면 조건 없이 일체제불의 마음의 능력이 각자 여러분 앞에 같이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 마음이므로 이 세상의 모습을 버리고 떠났다 하더라도 영원히 세세생생 여래의 집에 뜻을 같이하고 우주 전체와 같이 돌아갈 수 있는 불바퀴의 생산처가 될 것입니다. 하여튼 이 한마음 도리를 배우는 여러분은 정신계와 물질계를 한데 합쳐서 중용으로써 그렇게 잘 하시길 바랍니다.

일체 생활 속에서 우리가 도를 구하는 거지 내가 아니고 생활이 아니라면 도가 어딨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옛날에 무술 하는 사람들이 신검을 만들려면, 그리고 기술을 배우는 사람도 기술자가 되려면 거기에 포괄적인 마음으로써 정성을 다해서 내 혼을 다 집어넣어야만이 기술자가 되고 신검을 조성할 수 있었다 이 소립니다. 그 신검은 모든 사람을 건지고 살리는 데 쓰이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의 마음 중심을 이 세상을 밝힐 수 있고 우주 전체를 받칠 수 있고 또는 우주 전체를 굴릴 수 있는 그 대의적인, 지혜로운 자비의 마음으로 쓴다면 그 자비의 마음이 즉 신검, 자비의 칼인 것입니다.

그러니 첫째는, 나의 무명 악에서 벗어나기 위함이고 두 번째는, 세상만사가 모두 같이 돌아가는 둘 아닌 법을 알기 위함이요 셋째는, 마음과 마음이 전달돼서 같이 사랑하면서 우주 전체가 같이 돌아가는 그 이치를, 그 섭류를 모두 터득하고 알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모두 이 세상에 사람으로 태어났는데 그냥 갈 수는 없지 않습니까? 남처럼 다 눈 달리고 코 달리고 입 달리고 귀 달리고 몸뚱이를 가지고 이 세상에 나왔으면 그 몸뚱이 자체가 영원하다는 걸 아셔야 합니다. 몸뚱이가 사대로 흩어져서 없어진다고 해서 없어지는 게 아닙니다. 다시 생산이 돼서 나오기 위한 방편입니다.

우리의 마음들이 모두 한데 합쳐져서 서로서로 통하면서 같이 돌아가는 그 자체가 바로 불바퀴입니다. 혼자는 할 수 없듯이, 모두 한데 합쳐져서 둘이 아니듯이, 즉 빗방울이 바다에 들어가면 바다의 물이지 어찌 개개의 빗방울이겠습니까? 그래서 개개의 물방울이 한데 합쳐져서 돌아가는 그 소용돌이가 바로 불바퀴이며, 외국에서는 블랙홀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블랙홀이라는 자체는 바로 우리가 생산이 될 수 있는, 우리가 다시 또 태어나고 또 진화돼서 다시 태어나고, 모습을 갈아서 다시 태어나고 발전이 돼서 다시 재현이 되고 생산이 되고 이러는 그 자체로서 바로 생산처라고도 합니다. 자동적인 생산처. 우리의 마음의 소용돌이가 바로 불바퀴의 소용돌이라고 합니다. 마음을 한번 울렸다 하면 생산이 되곤 합니다. 우리도 그렇게 영원히 살고 있습니다. 자꾸자꾸 바뀌어 재현이 돼서 자꾸 생산이 돼서 영원히 그칠 바가 없이, 즉 멸함도 없고 태어남도 없이 영원하게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영원하게 돌아가는 그 섭류를 우리는 내 몸속에서 모두 알아보도록 하십시다.

여러분! 모두 여러분이 한다고 하고 여러분이 산다고 하고 여러분이 주었다고 하고 여러분이 망했다 하고, 또는 여러분이 돈을 많이 벌었다 하고 여러분이 잘했다 못했다, 죄를 지었다, 죄를 해결했다 이렇게 생각을 하시죠? 근데 본래부터 말입니다, 우주의 크나크고 광대한 섭류를 알려면, 모든 일체 생명들이 두루두루 공생하는 그 자체를 알려면 내 몸부터 먼저 알아봐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내가 했다, 내가 산다, 나다 이러지만 그게 아니고 공동체입니다, 공동체. 여러분을 공동체라고 하는 것은 몸속에 여러분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시발점이 종점이요 종점이 시발점이라고 한 뜻을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수억겁 전에 미생물로부터 진화됐다고 합시다. 그래서 수없는 진화를 거듭거듭 해서 인간까지 왔다고 합시다. 그러면 진화된 이 모습이 자기를 진화시켜서 온 것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자기 속에 어떠한 자기가 있기 때문에 진화시켜서 온 것입니까? 이것을 가만히 생각해 보신다면 내가 어디서 오고 어디로 가는 것을 잘 아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것과 더불어 미생물에서부터 진화돼서 내가 됐다는 걸, 미생물 하나가 수없는 알을 낳아서, 즉 마음의 씨를 낳아서 내 몸뚱이를 진화시키고 크게 만들어서 집합소에 함께 있다는 것을, 그 마음의 씨 여러 개가 바로 여러분 몸뚱이 속에 있다는 걸 아셔야 합니다. 그렇다면 시발점에서는 미생물이었는데 종점에 가서는 어떻게 됐습니까? 종점을 지금 여러분 몸속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그 몸속이 또 종점이 아닙니다. 불덩이가 한번 탁 날아서 툭 터지고 또 스러지고, 또 툭 터지고 스러지고 하는 이것이 우주 섭류의 작용입니다. 태양도 그렇지만 모든 자체가 상대와 상대가 작용하는 겁니다.

그런데 사대가 턱 터지면 그 마음의 씨가 얼마나 많은지 아십니까? 원소 자체의 씨 하나에서, 마음의 씨 하나에서 마음의 씨가 얼마나 많이 나가는지, 지난번에도 얘기했지만 입자로 된다든가 분자로 된다든가 이렇게 해서 그것이 또 원자로 분리가 돼서 나가면서 우리가 애가 어른이 되고 그러듯이, 또 분자에서 원자가 되고 이렇게 해서 분리돼서 그 마음의 씨가 우주 전체를 싸고 돌고 있습니다.

시발점에서는 쪼끄마한 마음의 씨였는데 지금 몸뚱이 속에 마음의 씨가 얼마나 많습니까? 석류 안에 씨앗이 많이 들어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근데 그 많은 씨가 든 석류를 그냥 석류라고 하지요. 그렇죠? 석류라고 하죠. 우리 사람도 그냥 사람이라고 하지 자생중생 개개의 모습과 의식 또는 생명을 따로따로 이름 부르는 일이 없죠. 빗방울이 다 모여서 바다로 들어가면 바다라고 하듯이 말입니다. 우리 몸뚱이 속에 그렇게 자기가 많은 것입니다. 그 의식이 마음의 씨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뭐를 먹어도, 하다못해 사과를 하나 먹어도 혼자 먹는 게 없습니다. 수십억의 생명들이 먹고 있습니다. 생명이 있으면 그 생명 속에 또 생명이 있고…. 그래서 우리가 죽는다 하면 사대가 흩어져서 그냥 원점으로 돌아갑니다. 원점으로 돌아가는데, 우리의 마음의 씨를 많이 해 놓고 원점으로 또 돌아가는 겁니다.

우리가 이익이 없고 생산할 수가 없다면 아마 우리의 생명들을, 모습들을 이렇게 형성시켜 놓진 않을 겁니다. 하나 우주의 섭류에서 모든 생산을 해서 우리가 점점점점 불어 나가게끔 한 자체가 바로 마음의 씨입니다. 씨 하나에 의해 석류가 열리면 그 석류 하나 안에 씨가 얼마나 많이 들어 있습니까? 그렇듯이 볼래야 볼 수도 없고 쥘래야 쥘 수도 없는 우리의 마음의 씨 하나가 그렇게 많은 악업 선업의 씨를 내 몸뚱이 속에 가지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먹었다고 하는데 내가 먹은 게 어딨습니까? 수십억의 생명들, 모습들, 의식들이 그냥 하나가 들어가면 서로 먹고 사는데, 여러분은 입을 빌리고 손을 빌리고 눈을 빌리고 귀를 빌리고 코를 빌리고 몸뚱이 전체를 다 빌려서 그 생명들의 집 노릇을 하고 집합소 노릇을 하고 심부름꾼이 되고 관리인이 되고, 이렇게 하면서 그걸 기릅니다. 그러니까 기른다기보다도 그것이 바로 즉 자기입니다.

그러니 이거를 가만히 생각해 보시라고 하는 겁니다. 시발점의 미생물이 지금 종점에 가서도 또 미생물입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인간을 고등 동물이라고 하죠? 인간은 위대하다고 보지요. 만물의 영장이라고도 할 수 있죠. 그러나 깨달아서 내 자생중생들이 모두 진화되고 창조가 되고 바로 화신이 되고 응신이 돼야, 천백억화신으로 바뀌어서 천도가 돼야만, 무명의 굴레에서 벗어나야만 바로 미생물을 벗어나고 부처도 되고 법신도 되고 일체가 다 되는 법입니다. 그래야만이 그거는 사람도 아니고 짐승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고 중생도 아니고 전체 모두가 부처인 것입니다. 그리고 아팠다 하면 약사가 되고 의사가 되는데, 한마음 안에서 모두가 출현을 해서 응신으로 응해서 나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마음의 발전을 못해서 미생물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그렇게 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미생물에서 왔다는 것을 각자 자기의 몸속을 보면 증명할 수 있다 이겁니다. 수억겁이 지났다 하더라도 그 몸속을 보면 자기가 바로 미생물에서 왔다는 증명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물에서 왔다는 것도 말입니다, 여러분이 임신을 해서 애를 낳으면 물주머니 속에서 나오게 돼 있죠? 그것이 그 증명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여러분이 또 물주머니에서, 어항 속에서 살고 있거든요. 어때요? 여러분이 무슨 산하대지의 턱 틔어진 허공에서 살고 있는 것 같습니까? 여러분도 지금 어항 속에서 살고 계십니다. 여러분 몸속에서 마음대로 행하지 못하고 사는 여러분이나, 또 몸뚱이가 어항 속에 갇혀서 살고 있는 여러분이나 뭐가 다릅니까? 여러분이 내 자유껏 누린다고 생각을 하십니까? 여러분이 그렇게 자유스럽게 어항 속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바로 마음도 자유를 누릴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지금 내 자생중생들 틀에서 내 마음이 벗어나지 못한다면 어항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거와 뭣이 또 다릅니까? 거기서 마음이 벗어나야 내 몸, 어항 속에서 사는 몸뚱이, 수레바퀴에서도 벗어나서 자유스럽게 마음을 쓸 수 있다 이 소립니다. 어항 속이라 함은 공기주머니를 말한다는 것을 여러분은 잘 아시겠죠. 공기주머니를 벗어나서는 한 치도 살 수 없다는 사실도 아시겠죠.

그런데 우리가 기복으로 돌아친다면 항상 창살 없는 감옥에서 날 좀 살려 달라고 비는 거와 같아서 더더욱 자기 마음은 자기 업식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어항 속에서도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것뿐이 아닙니다. 바로 마음도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첫째, 내 업식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둘째, 물 소용돌이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셋째, 허공, 즉 불 소용돌이 속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 소립니다. 알아듣기 쉽게 얘기하느라고 그런 겁니다. 그건 과학적으로도 증명이 될 수 있는 사실이지마는 우리가 과학적으로도 증명 못하는 것이 한두 건이 아닙니다. 무(無)의 세계, 바로 정신세계이기 때문입니다. 물에서도 소용돌이가 있고 허공 바람 속에서도 소용돌이가 있고 마음의 불 속에서도 소용돌이가 있는 것입니다. 이 소용돌이를 한 계단, 두 계단, 세 계단을 넘어서야만이 우리의 마음을 자유스럽게 쓸 수 있는 능력을 얻는 것입니다.

그게 어렵다고 하시지마는 우리 생활 속에 다 있는 것입니다. 우리 생활을 떠나서는 도도 없고 부처도 없고 중생도 없고 벌레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다 없어야, 개개인들이 다 ‘내가 없다’ 이런 도리를 알아야 자유인이 될 겁니다. 내가 없다는 사실을 먼저 아십시오. 여러분은 ‘내가 먹었다’ 할 수도 없습니다. 힌트를 드린다면 바로 내 몸속에 있는 생명들이, 모습들이, 의식들이 너무 많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과 하나를 먹어도 내가 혼자 먹는 게 아니라는 거를 아시면 전체가 다 그렇다는 걸 아실 것입니다. 내 한 몸 속에 있으니까 한마음이죠. 그러니까 망하게 하는 놈도 그놈들이요 돈을 많이 벌게 하는 놈도 그놈들이요 먹는 것도 그놈들이 같이 먹는 것이요, 하나도 혼자 하는 게 없어요. 공동체로서 공동 작업을 하면서 공생·공용·공체·공식화 하고 돌아가고 있어요.

그러니 여러분이 누구에게 뭐를 줬다고 하더라도 아예 조건 없이 줄 수 있는 그런 마음이 여기에서 나오는 겁니다. ‘내가 줬다’ 이러는데 내가 줬다는 게 어디 있습니까? 수십억의 내가 있는데 말입니다. 어떤 거를 줬는데 내가 혼자 줬습니까? 그러니까 내가 줬다 하지도 말고 내가 안 줬다 하지도 말고, 내가 먹었다 하지도 말고 내가 안 먹었다 하지도 마십시오. 그 가운데, 바로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가운데에 내가 다스릴 수 있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다스릴 수 있는 마음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모든 거를 보고선 나쁜 거 좋은 거를 너무나 잘 압니다. 안 되고 되는 것도 알고요. 이렇게 하면 누가 된다는 것도 알고 이렇게 하면 참 자랑스럽게 잘한 거다 하는 것도 알고 있는 마음이 있습니다.

또 내 마음이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그 마음이 고정됨이 없기 때문에, 마음은 체가 없어서 찰나찰나 내가 되는 거죠. 아버지 노릇 할 때도 내가 한 거고 남편 노릇 할 때도 내가 한 겁니다. ‘내가, 내가, 내가’ 하다 보니까 내가 너무 많아서 무심이에요. 나는 무심이에요. 행도 이걸로 됐다 저걸로 됐다 이렇게 행을 하니까 ‘내가 어떤 거 할 때 내가 했다고 할 수 있을까?’ 이런 거를 캐치해서 알아내야 되는 것입니다. 내가 어떤 거 할 때, 남편 노릇 할 때 내가 했다고요? 나라고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금방 “아버지!” 하고 들어오면 아버지가 되는데요? 금방 “아무개야!” 부르면 아들이 되는데요? 이렇게 광대한 천차만별의 묘법은 아마도 마음 떠나서는 없을 겁니다. 이 마음의 도리를 여러분이 잘 아신다면 ‘너도 없고 나도 없고, 없는 것도 아니고 있는 것도 아니구나. 너무 여러 가지 이름을 가지고 자동적으로 행하기 때문에 이것이 묘법인가.’ 하지 않겠습니까? 옛날에 시를 읊는 사람은 “묘법인가 하노라.” 이러고 했는데, 하하하….

하여튼 여러분, 비 오는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오셨는데, 마음공부를 해서 마음을 뛰어넘는다면 이 자리에 앉아서도 여러분이 어디든 갔다 올 수 있습니다. 항상 내가 여러분한테 얘기하지만, “여기 앉아서 가고 옴이 없이 가고 올 수 있다면” 하는데, 이건 모습 없는 마음입니다. 그러면 지금 여러분이 신족통을 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앉은 자리에서 말입니다, 여러분 집에 가 보십시오. 지금 여러분이 다 가 보세요. 여러분 안방에는 뭐가 있고, 마루 올라가는 데는 뭐가 있고, 신발장은 어디 있고, 냉장고에 뭐를 해 놓고 왔고 이런 걸 다 아시죠? 마음은 이렇게 신기한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아는 것이나 그렇게 볼 수 있지만, 이 마음공부를 한다면 마음과 마음이 전달되기 때문에 항시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어디서 왔는지를 알고, 내가 가고 옴이 없이 가고 올 수 있는 겁니다.

저런 산천초목들도 서로서로가 마음과 마음을 통해서 서로 사랑을 하고 서로 열매를 맺고, 가을이 오면 서로 주고받는 마음끼리 모여서 임을 기다리듯이 내년 봄을 기다리면서 그렇게 속삭이고 사랑합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말을 하게끔 했기 때문에 말로다가 서로 통합니다. 그런데 신경이 날카로워서 말이 조금만 잘못되면 엇각이 나서 오밀조밀하던 사랑이 그만 변해서 돌아가죠. 증오로 돌아가고. 이러지만 마음과 마음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마음이 그렇게 중요한 것을 아셔야 합니다.
가정이나 이웃에 어떠한 문제나 괴로움이 있다고 할 때, 내가 도와주려는 마음을 먹었다면 내가 보고 들을 때에 벌써 가설이 된다는 걸 아셔야 합니다. 내가 볼 때, 내가 들었을 때, 내가 생각했을 때 바로 그 이웃집하고도 가설이 되는 겁니다. 이건 마음의 가설이에요. 보이는 데 물질적인 가설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데 가설. 그러니까 ‘아, 저 사람은 어떡하든지 일어서야 되겠지.’ 한다면 일어서게 되는 겁니다. 거기까지 가설이 돼 있어서 불이 들어오니까 말입니다.

한 가정에서도 그렇습니다. 전에도 항상 여러분한테 말했지만 남편이나 자식이나 아내나 부모자식지간이나 그 마음이 돌아서서 도저히 고칠 수 없는 일이라 할지라도 ‘둘이 아닌 까닭에 너만이 할 수 있어.’ 하고 맡겨 놓으면 바로 스위치를 올려놓은 거와 같아요. 그래서 그쪽에도 불이 들어오고 이쪽에도 불이 들어오니까 서로가 밝게 살 수 있다 이 소립니다. 불 들어오는 전력은 똑같아요. 그렇기 때문에 불 들어오는 건 다 마찬가지로 불이 들어오게 되는 거죠.

이거를 잘 알아들으시고 그냥 실험하시고 체험하시는 것이 바로 관법입니다. 내가 스위치를 탁 올려놓고서 지켜보는데 그 지켜보는 동안이 실험이요, 내가 그것을 ‘알았다! 아, 저런 것이로구나!’ 할 때에 체험입니다. 부처님이 49년 설해서 가르쳐 주신 길은 바로 이러한 것입니다. “너부터 믿고 너부터 알아야 내 골수의 내 마음까지도 알 수 있노라. 그리고 일체 만물만생의 마음을 다 알 수 있느니라. 마음을 알 수 있는 까닭에 그 마음을 통해서 서로가 서로를 위하는 공덕의 이치를 알 수 있느니라.”

복이라는 것은 남이 농사지어 놓은 데 가서 “한 됫박 주시오.” 하고 얻어먹는 것이고, 공덕이라는 것은 아까도 얘기했듯이, 전체가 서로 마음과 마음이 통해서 같이 서로서로 빈 데를 도와주는 그 자체입니다. 그러니 두 손가락으로 집는 거하고 열 손가락이 다 한데 합쳐서 드는 거하고 차이가 얼마만큼 나는지 모릅니다. 이 마음의 도리, 마음의 섭류는 우주 삼천대천세계, 즉 과거 현재 미래를 같이, 전체가 돌아가는 법계를 한 손으로 들 수가 있어서 이게 공덕입니다.

그러나 이 섭류를 하나도 모르고 내가 목마르면 급박하게 ‘물 한 그릇 주시오’, ‘옷 한 벌 주시오’ 하고 비는 것이 기복입니다. 빌어서 될 일이 아니거든요. “내가 목마르면 물 마시고, 배고프면 밥 먹고, 똥마려우면 똥을 누고, 잠자고 싶으면 잠자고 자유스러운 사람으로서 살아라.” 하고 사람으로서 진화돼서 이렇게 형성이 됐는데, 고등 동물이라고 했지만 고등 동물의 그 한계 내에서도 벗어나야 자유인이 되는데…. 만물의 영장이라고 말하지만 이름만 그렇게 해 놓은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이 벗어나야 만물의 영장이죠.

부처님이 가르쳐 주신 49년의 그 뜻은, 그 길은, 그 진리는 바로 자기가 혼자만의 국한된 부처라는 것을 말한 게 아닙니다. 아까도 얘기했듯이 아버지가 됐다가 아들이 되고 아들이 됐다가 남편이 되고, 형님이 되고 아우가 되고 친구가 되고, 이렇게 스스로 자동적으로 아주 걸림이 없습니다. 아주 행복하게 “아버지!” 하면 아버지가 되고 “여보!” 하면 남편이 되고, 그렇게 어디에 걸림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걸리는 게 하나도 없죠? 그렇게 걸림이 없듯이 그렇게 자유스럽게 살라고 했는데…. 그래서 만물의 영장이라고 이름을 해 놓고 부처님이라고도 이름을 해 놓고 여래라고도 이름을 해 놓고 그런 겁니다. 모두가, 부처님, 문수, 보현 또는 지장이나 관세음, 칠성, 용신, 지신, 산신, 독성, 신중 이 모두가 한마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 노릇을 안 하고 사십니까?

때로는 어떤 사람들이 딴 사람을 해치는 걸 보면 그냥 덤벼서 해치는 사람들을 헤쳐 놓고 모두 말리지 않습니까? 그게 신장입니다. 금방 자기가 신장이 돼요. 그랬다가 또 잘못하는 사람을 보면 ‘아유, 저건 너무 잘못해. 저건 아유, 얄미워 죽겠어. 저거 저렇게 할 수가 있어?’ 하고 생각을 내는 법신이 됩니다. 몸뚱이로 움죽거려서 그거를 확연하게 해결하는 것이 바로 화신입니다. 보신이며 화신이죠. 보현이면서도 화신 말입니다. 화신은 바로 바뀌는 그 시점을 말하고 다 바뀐 것을 보현이라고 그럽니다. 화하는 것은 바뀌는 것을 말하고요. 즉 말하자면 생각할 때는 우습지만 우리가 항상 “컵을 들었다.” 물을 뜨는 과정이다. 물을 먹는 과정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지금 생활하고 있는 과정입니다.
(다음 호에 계속)

※위 법문은 1993년 8월 15일 광명선원 법회에서 설법하신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한마음선원 홈페이지(www.hanmaum.org)에서도 같은 내용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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